‘동이’, 그 깨방정 숙종이 가진 의미

"여깁니다. 게중 가장 낮은 곳입니다. 냉큼 넘으세요." 동이(한효주)는 범인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숙종(지진희)에게 담을 넘으라고 한다. 하지만 "난 담을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숙종. 그런 숙종에게 변복을 한 그가 왕인 줄 모르는 동이는 "아니 다른 나으리께서는 글공부도 하기 싫어 담을 넘고 다니시는데, 나린 대체 뭘 하십니까?“하고 채근한다. 그러자 숙종은 ”내가 있는 곳은 담을 넘기엔 너무 높았다“고 말한다. 결국 ”담은 제가 넘을 테니 잠시 엎드려 주십시오“하고 청하고, 동이는 왕의 등을 밟고 담을 넘는다.

‘동이’에 등장한 이 짧은 에피소드는 이 사극의 초반 부진을 털어내며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왕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던 근엄한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이와 함께 도망치다가 이내 “달려본 적이 없다”고 주저앉고, 칼을 들고는 “배우긴 배웠으되 실전은 처음이다”고 말하는 왕. 그 모습에 ‘허당’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항간에는 이 깨방정(?) 왕의 모습이 지나치게 희화화되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

하지만 이 동이가 감히 왕의 등을 밟고 담을 넘는 이 장면은 우스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낮게 웅크린 왕의 모습과 ‘담을 넘는다’는 그 행위가 마치 ‘왕과 낮은 자들과의 소통’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이 덕분에 사건을 해결한 왕은 그녀가 일하는 장악원에 어식(御食)을 내리고 동이에게 상을 내린다. 왕과 노비가 함께 일을 해결하고 왕이 내린 상에 장악원 사람들이 함께 포상 받는 이 장면을 통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슴 한 구석에 바로 이런 ‘소통의 욕구’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숙종은 훗날 장희빈이 될 장옥정(이소연)을 부를 때, “옥정!”하고 이름을 부른다. 이것 역시 여타의 사극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왕은 옥정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말하면서 “이건 절대 풍(거짓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전날 동이에게서 배운 서민들이 쓰는 ‘풍’이란 말을 옥정에게 써먹은 것이다. 그러자 옥정은 방긋 웃으며 저잣거리에서 쓰는 말을 어떻게 왕이 아시냐고 반색한다. 왕의 낮은 자들과 소통하려는 욕구를 ‘풍’이라는 말 하나로 보여준 것이다.

사실 왕의 깨방정은 파격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바로 이러한 소통의 몸짓이라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한껏 낮아지고 한껏 소탈해진 왕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동이와 왕의 로맨스가 단지 사랑놀음이 아니라 이러한 통(通)에 대한 사극의 메시지로 확장해낼 수 있다. 이것은 ‘동이’가 단순한 사극판 신데렐라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가능성이다.

여기에 이병훈 사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명랑한 분위기’는 이러한 통(通)하는 세상에 대한 판타지마저 꿈꾸게 만든다. 왕이 서민과 함께 고개를 맞대고 똑같은 눈높이로 얘기하는 것. 그것은 때론 우스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숙종의 등을 밟고 동이가 담을 넘는 그 순간, 우리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쉬 찾기 힘든 그 통(通)하는 세상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구동백, 서민적 삶이 가진 가치를 긍정하다

도대체 '그바보'의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이토록 잡아끌었을까. 평범한 우체국 직원과 스타의 만남. 이 낯익은 이야기 구조는 누구라도 쉽게, 멀게는 '로마의 휴일'에서, 가깝게는 '노팅힐', 또 최근에는 드라마화된 '스타의 연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과연 '그바보'가 그린 세계가 이 통상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주에 머물렀을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그 관심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그바보'의 이야기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 데서 그 묘미를 찾을 수 있다. 톱스타인 한지수(김아중)와 우체국 직원인 구동백(황정민)이 만들어가는 러브스토리는 물론 그 신데렐라(남성이 신데렐라인)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모든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이 드라마는 한지수가 구동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동백이 한지수를 구원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한지수는 왜 구원받아야 할까. 그녀가 사는 세계가 그녀에게 부과한 삶이 그녀를 불행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불행은 한 마디로 '상품화된 인간'으로서의 삶이 갖게 되는 불행이다. 한지수가 가진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자본에 둘러싸여 상품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그대로 표상함으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세계 속에서는 김강모(주상욱) 같은 자본을 쥔 자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다. 그가 한지수에게 그러한 것처럼 그 대상은 인간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러한 관계를 내면화하면서 살아온 한지수로서는 자신의 불행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왜 점점 슬플 때 울지 못하고 웃길 때 마음껏 웃지 못하는 표정 없는 인간이 되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바보'는 바로 그 한지수의 세계 속에 구동백이라는 전혀 다른 별에서 온 듯한 바보 같은 남자를 집어넣는다. 그는 인간 간의 관계가 거래로 취급되는 이 세계의 법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본다.

위장결혼을 하는 조건으로 그 대가를 물어보지만, 구동백은 엉뚱하게도 동화 속에서나 나올 세 가지 소원을 제시하는 인물이다. 거래와 관계, 대가와 소원만큼의 거리는 한지수와 구동백 사이에 놓여진 거리만큼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차츰 한지수는 구동백을 통해 자신의 거짓된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 진실된 삶(즉 구동백의 삶을 향해서)으로 다가간다. 물론 이것은 일방적인 변화가 아니다. 구동백 역시 스스로 평가절하해온 삶의 진정한 가치를 한지수를 통해 찾고 있기 때문이다.

 “난 진짜가 아니잖아...난 가짜잖아”라고 오열했던 구동백에게 “내 옆에 있어줄래요?”라고 한지수가 수줍게 말하는 그 순간은 이 두 사람의 변화가 서로 교차하는 순간이다. 구동백은 가짜가 아닌 진짜임이 드러나는 것이고, 한지수는 비로소 자신의 진실된 삶을 찾게 되는 것. 구동백과 한지수가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따라서 멜로의 과정으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맥락을 갖게 된다. 이 이야기가 진심은 내팽개쳐지고 대신 돈이 오고가고, 갖은 모략과 술수가 판치는 예의 없는 세상에 대한 구동백의 선전포고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서 구동백이 예의 없는 세상과 대결하기 위해 꺼내드는 일련의 카드들이 흥미롭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정으로 불행을 겪어본 자들만이 아는 ‘바닥의 정서’에서부터 길어 올려진 것들이다. 실의에 빠진 한지수에게 구동백이 처방한 “진짜 슬픈 인생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는 대사나, 행복하고 싶다면 “웃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대사는 그 바닥의 정서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구동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망 끝의 희망을 얘기한다.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렇게 마음먹으면 그 곳이 절벽 끝이 아니라 다이빙대 일수도 있구요. 그리고 그 아래는 시원한 바다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떨어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는, 때론 온통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어 늘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진 자들의 불안을 오히려 치유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소유하는 사랑만 해온 자들에게는 그 사랑을 손에서 놓는 것이 참으로 불안하고 힘겨운 것이지만, '그저 바라보는 사랑'을 해온 자들에게 그것은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

‘그바보’는 제목처럼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아 ‘그저 바라보다가’, 그 높은 곳이 힘겨워 뛰어내리고 싶어도 뛰어내리지 못하는 그녀를 알게 되고는 함께 그 위에서 낮은 곳으로 뛰어내려주는 구동백이라는 착한 서민의 자화상을 그려낸 드라마다. 이로써 우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삶의 실체에 더 가까운 서민들의 삶을 구동백을 통해 긍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잡아끌었던 '그바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한지수는 구동백을 통해 이제 '네모난 하늘' 아래 두 사람으로서 족한 행복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제목이 구동백을 바보로 지칭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동백의 승리를 통해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리더십 부재의 시대, 강마에 신드롬이 말해주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다. 클래식이라는 마니아적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이 드라마는 어쩌면 ‘시청률을 잡은 유일한 마니아 드라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바이러스를 우리 사회 깊숙이 퍼뜨리고 있는 걸까. 그 중심에는 절대 카리스마, 신드롬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강마에(김명민)가 있다. 그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열광을 얻어내는 바로 그 지점을 보다보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 살짝 드러나는 걸 목도할 수 있다.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
강마에가 오케스트라를 하기 위해 모여든 단원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실력도 없는데 노력도 안 하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는 그들에게 그는 거침없이 “똥 덩어리”라는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그 충격은 단원들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보던 이 땅의 잠재적 똥 덩어리들(?)에게도 고스란히 미쳤다. TV를 켜면 어디서나 흘러나오는 이 “생각대로 하면 되는” 긍정의 사회에 그는 강한 부정을 했다. TV가 전파하던 거짓의 희망은 그의 말 한 마디로 깨지고 우리는 거기서 진짜 냉정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대선 때면 반짝 나타나는 리더십들은 대부분 허황된 수치를 내세우면서 장밋빛 사회를 얘기하지만 사실상 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얘기하기보다는 먼 미래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혹은 일어나기 어려운) 꿈만을 이야기했다. 까칠하고 째째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현실을 솔직히 말하는 그는 이 사회의 ‘부드럽고 한없이 너그러운 얼굴’로 거짓된 ‘핑크빛 미래’를 말하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며, 이 사회에 부재한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대리충족 시키게 만들었다.

소수집단이 지배한 꿈이 없는 사회
이 드라마가 강마에식으로 표현하면 ‘귀족을 위한 것으로 천민들은 꿈에도 꿀 수 없는’ 클래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사회에서 누락된 서민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반어법이다. 주부로서 꿈을 접고 살아온 정희연(송옥숙)은 가정이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고, 앞서나간 후배에게 굴욕을 당하면서도 회사에서 꿈을 갉아먹고 사는 박혁권(정석용) 역시 회사와 가정에 발목이 묶여 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클래식을 하려면 으레 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되는 개인레슨 같은 투자(?)를 받지 못해 거리를 전전하는 하이든(쥬니)은 이 사회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들의 상황은 현실 그대로이다. 이 사회에서는 누구든 현실이라는 걸림돌에서 생존하기 위해 꿈을 버린다. 아니 어쩌면 도전조차 하지 못하게 사회는 일찌감치 그들에게 꿈을 버리는 연습을 시켜온 지도 모른다. 강마에가 말한 귀족과 천민을 나누는 클래식은 이 사회의 상류층이 가진 특권의식과 서민들이 가지도록 강요받는 천민의식을 단번에 드러내준다. 몇 프로 되지 않는 소수 집단이 사회 전체 집단을 굴러가게 하는 구조 속에서 저네들은 클래식 같은 문화를 누릴 때, 다수의 서민들은 꿈을 버리도록 강요받는 사회. 강마에의 까칠한 말 한 마디 속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다.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도록
하지만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꿈을 이루라는 게 아니라 한번 꿔보기나 하라는 것이다. 꿔보지도 않으면서 꿈이라고 하면 그건 꿈이 아니라 그냥 별이다.” 강마에의 이 말처럼 현실을 보지 못했던 서민들에게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 후, 꿈꾸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을 꿈꾸게 만든다. 이 드라마가 강력한 환타지를 갖추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다. 드라마 속 단원들이 강마에라는 지휘자를 통해 오케스트라를 하는 그 꿈을 향해 매진할 때, 그걸 바라는 시청자들은 자신 속에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꿈 한 자락을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꿈을 다시 꾸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꿈을 꾸게 만드는 리더십이다. 강마에 같은 리더십은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리더십은 대중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혹독할지라도 현실을 보게 만들고 또 그것을 꿈으로 연결시키는 리더십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건, 그것이 이 사회가 가면 뒤에 숨겨왔던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극, 재벌가보다는 서민을 보다

요즘 주말극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재벌가와의 로망이라는 오래된 코드를 들고 나오고 있다. ‘엄마가 뿔났다’의 대기업 회장 김진규네 아들 김정현(기태영)과 서민적인 나일석네 딸 나영미(이유리)간의 사랑이 그렇고, ‘행복합니다’의 재벌집 딸 박서윤(김효진)과 이준수(이훈)의 사랑이 그렇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나 부의 차이를 가진 남녀의 만남은 이미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던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소재. 그것이 오랜 고전이 되고 지금까지도 자주 소재로서 활용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신분상승 욕구나 변신욕구를 자극하는 강력한 환타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이 설정은 툭하면 신데렐라의 변주 정도에 그치면서 식상해져버린 트렌디 드라마를 근본적으로 비판받게 만든 혐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들 주말극들은 이러한 구도를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과거와는 다르게 20%대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무슨 차이가 이것을 만들었을까.

주목해야할 것은 재벌가의 남녀들이 보이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엄마가 뿔났다’의 김정현은 대기업 회장 아들이면서도 늘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인물이고, ‘행복합니다’의 박서윤은 허례허식에 가득한 상류층 문화에 반발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은 부유하면서도 서민적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시어머니가 될 재벌가의 엄마들은 허영과 특권의식에 가득한 악역이지만, 최소한 아버지들은 이런 차이를 뛰어넘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인물로서 그려진다. 이러한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부부의 조합은 상당부분 재벌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지워준다.

이들이 이렇게 그려지는 이유는 이들 주말극이 보여주는 재벌가와 서민층의 관계가 과거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드라마가 주로 선망 받는 재벌가의 남자 혹은 여자가 서민인 상대방의 신분을 ‘끌어올리는’ 관계를 보여줬다면, 작금의 주말극들은 거꾸로 재벌가의 남자 혹은 여자가 서민 쪽으로 내려와 눈높이를 맞추는 관계를 그려낸다. 부유하면서도 서민적인 재벌가의 남녀라는 캐릭터는 이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주제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엄마가 뿔났다’는 기본적으로 신분상승 욕망을 그리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서민적인 엄마의 일상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시선은 늘 엄마에게 맞춰져 있다. ‘행복합니다’ 역시 그 주제의식은 ‘엄마가 뿔났다’와 마찬가지다. 서민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이철곤(이계인)네 집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으며, 그것은 박승재(길용우) 회장집 사람들의 이야기와 비교되면서 진짜 행복을 묻게 될 것이다.

재벌가가 등장하지만 이들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서민적인 일상들의 행복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극과 극의 만남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돈을 좇는 사회에 진짜 행복은 이런 보통의 일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탐탁하지 않아 하는 김정현의 엄마, 고은아(장미희)앞에서도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나영미나, “니들이 그렇게 잘났냐”며 절망하지만, 헤어지는 조건으로 돈을 줄 수도 있다는 박상욱의 말에 분노하는 이준수는 진정한 행복 앞에서 현재 우리네 서민들이 당당할 것을 요구하는 인물들이다.

김수현 작가나 김정수 작가 같은 거장들이 주말극으로 가져온 것은 소재로서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장인의 손길을 거친 드라마들은 일상의 디테일들을 잘 포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져 왔던 구도의 식상함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무엇보다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서민들의 일상에 대한 존경과 따뜻한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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