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재난공화국에 날리는 마동석들의 일침

 

대규모 폭력사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군대병력을 충원하여 국민여러분들을 안전하게 지켜드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부는 절대로 여러분들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대사는 재난영화의 공식적인 클리셰에 가깝다. 재난영화 속에서 늘 정부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국민을 안심시키고는 저들 살 궁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사진출처:영화<부산행>

하지만 똑같은 클리셰에 해당하는 대사인데도 <부산행>의 이 대사는 영 달리 들린다. ‘폭력사태라는 표현이나 군대병력같은 단어들이 우리네 불행한 현대사에서 특정한 사건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정부측의 브리핑과 상반되게 군대병력이 좀비로 돌변해 국민을 공격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우리는 상상이 아닌 실제 이런 현실을 맞닥뜨린 적이 있지 않은가.

 

그저 지나칠 수 있는 클리셰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대사가 된다는 것. 이건 <부산행>이라는 좀비 장르의 영화가 1천만 관객을 넘어서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본래 B급 장르로서 결코 대중적이라고 할 수 없는 좀비 장르가 신드롬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1천만 관객 돌파라니!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가를 이 영화는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건 우연이 아니다. <부산행>은 그 영화 곳곳에 우리네 재난 공화국의 트라우마를 툭툭 건드리게 의도된 장면과 설정들이 들어가 있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하게 느낀 장면은 KTX 열차 안에서 창밖으로 바글바글 얼굴을 가득 달라 붙인 채 고통스러워하는 좀비들의 모습이 여러 차례 스치듯 보이는 장면들이다. 마치 바닷물이라도 그 안으로 들어온 듯 물밀 듯 차오르는 좀비들의 이미지는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세월호가 그러했듯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KTX 역시 우리네 재난공화국을 표징한다는 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시속 3백 킬로로 달려가는 그 속도 위에서 좀비들과 사람이, 또 사람과 사람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설정은 그래서 더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이 영화의 제목에 담겨진 부산행이 과연 살아남은 자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 끝을 낙관할 수 없다. 다만 좀비들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세기말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안심해도 된다고 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당국자들의 거짓말이 있을 뿐이다.

 

좀비 장르이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성을 우리 앞에 내미는 <부산행>에서 마동석은 서민들의 영웅이면서도 가장 슬픈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애초부터 주인공도 아니고 불쑥 이 KTX 행에 올라탄 후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 목숨을 건 사투에 뛰어든다. 재난의 한 가운데서 그나마 온 몸을 던져 사람들을 구하고 심지어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다시 그 재난 속으로 들어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우리 시대의 마동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그 마동석이 이렇게 말한다. “아빠들은 원래 욕먹고 인정 못 받고 무시당하고 그래도 희생하면서 사는 거야.” 좀비 장르를 보며 심지어 관객들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건 <부산행>이 애초에 추구하는 것이 좀비물이 아니라 사회물이었다는 걸 잘 말해준다. 천만 관객은 우리네 재난공화국의 참상을 거기서 다시 봤고, 그 안에서 혼자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음으로 내던지는 이기심을 봤으며, 이런 재난 상황에 무능한 당국을 봤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숭고하게 희생하며 사라져간 이름 모를 서민들을 보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넘긴 건 바로 그 재난공화국의 현실과 숭고한 서민들을 표징하고 기꺼이 재난에 몸을 던진 마동석 같은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행>이 좀비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우리 현실

 

영화 <부산행>의 주인공은 좀비들이다라는 말은 그저 하는 빈 말이 아니다. 이 영화는 확실히 그 어떤 좀비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역동적인 좀비들을 보여준다. 만일 약간의 유머 코드를 통해 읽어내는 관객이라면 이 좀비들을 보면서 다이내믹 코리아를 연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부산행>의 좀비들은 엄청나게 다이내믹하다.

 

사진출처:영화<부산행>

물론 느릿느릿 걷던 좀비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한 건 이미 다른 좀비 영화들에서부터였다. 최근 좀비 영화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던 <월드워Z>의 좀비들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부산행>이 좀비들은, <월드워Z>의 좀비들이 더 스케일도 크고 숫자도 천문학적으로 많지만, 훨씬 무시무시하고 생생하다.

 

그건 아마도 CG에 너무 의지하기보다는 100여 명의 연기자들이 연습을 통해 직접 뛰어다니며 만든 좀비 연기의 결과일 것이다. <월드워Z>CG로 만들어진 좀비들이 어딘지 게임적인 느낌을 줘 오히려 공포감을 상당부분 덜어내 준다면, <부산행>의 좀비들은 직접 몸으로 뛰는 노동에 의해 만들어져서 어딘지 인간적인 느낌이 묻어나 더욱 공포스럽다.

 

우리나라에서 시도된 좀비물이라는 점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노동으로 만들어진 좀비들은 그 자체로 <부산행>이라는 영화에 우리 식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재미있거나 의미를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는 많은 여지들을 담고 있다. 일단 부산까지 시속 3백킬로로 달려가는 KTX라는 이 영화의 공간이 그렇다. 그건 다름 아닌 속도로 대변되는 우리네 사회를 고스란히 표징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 발병자가 열차에 타고 그 후 물고 물리는 아비규환이 순식간에 벌어지면서 도저히 그 열차의 좁은 공간을 견뎌내기 힘들 정도라는 듯 앞으로 치고 나오는 좀비들의 양적 증가는 누가 봐도 이른바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불리는 우리 사회의 속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어떤 집중이 생겨나면 군중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몰려들고 소비하는 그 모습을 <부산행>의 좀비들로부터 연상하는 건 그래서 어렵지 않다.

 

중간에 유머 코드로 들어가 있는 오 필승 코리아같은 월드컵 송과 그 노래에 맞춰 달려드는 좀비들의 장면에 관객이 웃음을 터트리는 건 그래서다. 또한 남자 주인공인 석우(공유)가 펀드매니저이고 그의 입으로 개미들을 언급하는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도 <부산생>이 좀비물이라는 장르적 틀을 가져와 전반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네 사회라는 걸 부지불식간에 관객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비들은 공포감을 주는 존재들이기는 하지만 영화에 점점 몰입하기 시작하면 그들에 대한 공포감은 조금씩 사라진다. 대신 어떤 연민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공포를 만드는 존재들은 좀비가 아니라 혼자만 살아남겠다고 이기적으로 돌변하는 사람들이다. 즉 속도와 엄청나게 불어나 한쪽으로 쏠리는 군중을 닮아있는 좀비들이 우리네 사회의 근원적인 불안감을 그려내지만 진짜 공포는 그 불안감 위에서 좀비보다 더 이기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에서 생겨난다.

 

여기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건 세월호 참사 같은 것들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두려움에 떨 동안 혼자 살아남은 어른들이 주는 섬뜩한 공포. <부산행>의 석우가 오로지 가족만을 챙기고 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물이라는 건 이 영화가 세우고 있는 문제의식을 제대로 드러낸다. 그는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부산행>의 주인공은 공유지만 영화에서 관객들이 마동석을 지지하고 그가 마치 진짜 숨겨진 주인공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펀드 매니저라는 그럴싸해 보이는 직업을 가진 석우보다 더 사람들을 챙기고 구하려 온몸을 던지는 상화(마동석)가 서민들의 영웅으로 다가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괜히 머리 쓰지 않고 몸과 몸으로 부딪치는 그 모습은 관객들을 웃고 울고 통쾌하며 비통하게 만든다.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징일 수 있지만 <부산행>은 유독 우리네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적인 면면들이 많이 투영된 작품이다. 영화는 좀비물의 장르적 재미(그것도 우리식의 해석이 주는 재미들)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이런 영화 곳곳에 숨겨진 풍자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이토록 빛날 수 있었던 것도 그 안에 숨겨진 풍자와 그의 캐릭터가 기막히게 조우하는 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 막장 버리고 <육룡> 선택하나

 

SBS <육룡이 나르샤>는 지난 311.6%로 주춤했다가 4회에 13%로 반등하더니 5회에서는 13.7%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반면 다크호스로 떠올랐던 MBC <화려한 유혹>은 꾸준히 상승해 410.1%로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이러다 <육룡이 나르샤>마저 제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섣부른 기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5회에서 <화려한 유혹>9.2%로 다시 한 자릿수 시청률로 주저앉았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정신없이 사건에 반전을 섞어 쏟아내던 <화려한 유혹>이 갑자기 시청률 하락을 겪게 된 건 그 피로감 때문이다. 사실 속도감 있는 전개란 초반 힘을 잡아주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이 속도의 지속은 시청자들도 지치게 만든다. 비밀스런 사건과 관계들의 의문을 던지고 풀어내는 것도 어느 정도 반복되다보면 그 자극이 덜해지기 마련이다. 결국 막장이 가진 한계란 자극을 자극으로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무리한 전개만이 시청률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이다.

 

반면 <육룡이 나르샤>는 한 명의 주인공도 아닌 여섯 명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워야 하는 만큼 결코 쉽지 않은 전개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육룡이 나르샤>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여섯 명의 인물을 한 명씩 세우는 방식으로 드라마를 이끌어나갔다. 이성계(천호진)가 그 첫 번째 인물로 나와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이어 정도전(김명민)이 여말의 혁명에 대한 당위성에 불을 붙여 놓은 후, 그 위에 사실상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이방원(유아인)을 세웠다.

 

그리고 이방원 주변으로 이방지(변요한)라는 매력적인 무술의 절대 고수와 민초들을 이끄는 여걸 분이(신세경), 그리고 우직하지만 무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무휼(윤균상)을 소개시켰다. 즉 이런 전개는 속도는 조금 느릴 수 있어도 차근차근 캐릭터의 매력을 세우고 그 인물들의 관계를 중첩시켜 나가면서 점점 힘이 받을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막장과 명품이 단순하게 시청률로서 비교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 역시 보는 눈은 정확하다는 게 시청률 표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매번 똑같은 설정과 캐릭터들, 반복되는 자극적인 전개들. 이제 시청자들도 지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육룡이 나르샤>는 예측 불가의 다채로운 스토리들을 장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무수히 사극에 나왔던 시절의 역사적 이야기가 더욱 뻔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을 가상의 인물들과 섞으면서 의외의 이야기 전개들이 시선을 잡아끌고 있는 것.

 

그래서 <육룡이 나르샤>를 보다보면 당대 여말 선초가 가진 역사적 이야기의 재미를 담보하면서도 그 위에 마치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영웅담이 이어진다. 상상력이 부여한 허구적 재미와 역사라는 뿌리가 주는 든든한 이야기의 신뢰감이 이처럼 균형 있게 잡힌 사극도 흔치 않을 것이다.

 

물론 시청률이야 언제든 그 흐름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전체적인 드라마의 성패를 얘기할 때 우리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보면 시청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 인물의 매력과 탄탄한 스토리의 그리고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진 드라마가 어떤 것이라는 걸.



'무도' 스피드레이서 특집, 왜 힘겨운 도전일까

 

MBC <무한도전>스피드레이서특집은 여러모로 힘겨운 도전이 되었다. 우선 카 레이싱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렇다. 자동차 운전이 뭐가 그리 어렵겠냐 싶겠지만 좁은 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며 상대방의 견제를 피해 앞지르기를 해야 하는 건 웬만한 기술이 없으면 시도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우선 속도감과 가드 레일이 주는 압박을 이겨내야 하고 스틱이 익숙하지 않은 운전자라면 이 또한 넘어서야 할 벽이 된다. 노홍철의 경우, 익숙하지 않은 스틱 운전을 하기 위해 평소에도 꾸준히 연습한 결과 의외로 발군의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스타트에서 기어가 빠지는 실수를 연발하기도 하지만.

 

하지만 <무한도전>의 스피드레이서 특집이 특히 어려운 도전이 되는 건, 이 특집이 방송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재미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스피드레이서 특집의 영상은 자동차 안에서 운전을 하는 출연자들의 모습에 거의 집중될 수밖에 없다. 물론 가끔이 질주하는 차량과 앞지르기를 성공하는 장면이 쾌감을 주기는 하지만 영상이 단조롭기는 마찬가지다.

 

또 예능으로서 스피드레이서라는 소재는 웃음을 주기가 쉽지 않다. 가끔씩 만담하는 듯한 <무도> 특유의 찧고 까는 얘기들이 웃음을 주긴 하지만 막상 훈련에 들어가게 되면 웃음기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출연자들의 표정은 잔뜩 굳은 채 오로지 레이싱에만 집중하게 된다.

 

자동차 레이싱에 평소 관심이 많은 시청자라면 물론 이 경기 자체가 주는 묘미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싱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별로 없는 시청자들에게는 <무한도전>에 대해 거는 웃음에 대한 기대가 상당 부분 사라진 것에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물론 과거 장기 프로젝트로 했던 댄스스포츠나 봅슬레이, 프로 레슬링, 조정 경기 같은 종목들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 종목들은 그래도 예능적인 포인트들이 많이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레이싱처럼 출연자들이 독립적으로 떨어져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은 프로젝트에서 관계가 만들어내는 <무한도전>만의 독특한 웃음은 만들어지기 어렵다.

 

게다가 이 특집은 몇 가지 프로그램 외적인 상황으로 난항을 겪기도 했다. 그 첫 번째는 갑자기 터진 세월호 참사로 인해 경기 자체가 미뤄진 것이고, 그 두 번째는 함께 도전을 준비해왔던 길이 음주운전으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됐다는 점이다. 함께 찍은 상당 부분의 방송분량이 길의 하차로 날아간 셈이 됐다.

 

게다가 브라질 월드컵 특집으로 스피드 레이싱을 준비하는 과정이 늦게 방영됨으로써 이미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KSF)의 경기결과는 나온 상태다. 물론 결과가 나왔다고 <무한도전>이 그간 해온 장기 프로젝트가 어떤 영향을 받은 적은 별로 없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늘 <무한도전>의 진짜 핵심 볼거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스피드 레이싱의 경우 줄어든 예능분량과 낯선 경기로 인해 결과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주요 볼거리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이 많은 난점들을 그나마 채워 넣은 것은 이른바 역발상 스폰서. 자동차 레이싱에서 으레 차량을 통해 진행되는 스폰서를 뒤집어 <무한도전>이 도움을 주고 싶은 스폰서를 무료로 대중들에게 알리겠다는 것. <무한도전>다운 역발상은 이 도전에 사회적인 의미를 덧붙임으로써 자동차 레이싱이 갖는 상업적인 느낌을 상쇄시켜주었다. 게다가 이 부분은 레이싱을 잘 모르는 시청자들까지 이들을 응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여러모로 이번 스피드레이서 특집은 <무한도전>에게 힘겨운 도전이다. 방송으로서의 소재가 가진 한계가 있는데다 방송 외적인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힘겨운 도전이 아름답게 마무리 될 수 있었던 건 <무한도전> 특유의 사회 참여적인 자세 덕분이었다. 물론 많은 팬들은 스피드레이서 특집으로 <무한도전> 본래의 웃음과 재미에 대한 더 큰 갈증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힘겨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 이것이 <무한도전>이 지금껏 걸어온 길이었다는 걸 스피드레이서 특집 역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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