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스물하나’, 시대와 대결하는 이주명

스물다섯 스물하나

“내 친구가 또 맞았어. 학주가 내 친구 뺨을 때리고 머리를 때리고 결국 입술에 피가 터졌어. 구경하던 애들은 크게 놀라지도 않았어. 학주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모든 상황들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흘러갔고 나는 이 당연함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경찰을 불렀어. 근데 경찰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았어.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그럴 줄 알았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이 너무 자연스럽더라. 나는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꼭 말하고 싶어. 이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그 일이 오늘 태양고등학교에서 일어났고 그 일을 반복하는 폭력교사 이름은 서영성이야.”

 

tvN 토일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지승완(이주명)은 자신이 하는 해적방송을 통해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교사의 폭력을 폭로했다. 지승완의 절친 문지웅(최현욱)이 신창원 티셔츠를 입고 와 생긴 사단이었다. 그건 물론 문지웅의 잘못일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 교사의 상습적인 폭행이었다. 말로 타이르고 꾸짖을 수 있는 문제에 그는 당연한 듯 먼저 손을 들었다. 입술에 피가 터지는 문지웅을 보며 결국 참다못한 지승완이 “그만 두라!”고 소리쳤다.

 

전교 1등. 그리고 수능을 한 달여 남긴 고3. 폭력교사는 교칙을 내세워 지승완이 한 방송을 문제 삼는다. 그래서 방송을 금지하고, 반성문을 쓴 후 이를 공개 낭독한 후 자신에게도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시킨다. 하지만 지승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되묻는다. “지웅이한테는 사과하셨어요?” 폭력교사가 ‘징계’라고 한 표현을 ‘폭행’이라고 정정하고, ‘말조심’하라는 교사의 말 앞에 ‘손조심’ 하라고 되받는다.  

 

결국 굴복하지 않고 폭력교사와 맞선 지승완은 ‘자퇴’를 결정한다. 때론 부러지기보다는 구부러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그걸 알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엄마도 지승완의 그 뜻을 이해하고 딸을 꼭 껴안아줌으로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 해의 수능을 포기하고 대신 검정고시를 쳐야 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결코 굴복할 수 없는 뜻. 지승완의 이 행보는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그 시작점에서 내세웠던 “시대와 싸우는” 면면을 다시금 드러낸다. 

 

지금 돌아보면 당대의 체벌은 부당한 폭력이 분명했지만, 마치 당연한 교권인 양 받아들여지곤 했던 일들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멜로로서 이들이 당시 겪은 ‘시대의 문제’로서 체벌을 가져온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체벌과 싸우는 인물이 나희도(김태리)나 문지웅이 아니라 전교 1등이자, 반 아이들의 신뢰가 두터운 모범생 지승완이라는 점이다. 자퇴 같은 선택을 한다면 가장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인물. 그래서 그가 모든 걸 버리고 싸우는 모습은 이 ‘시대와의 대결’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낸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IMF라는 시대의 무게감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로 문을 연 바 있다. 나희도는 펜싱부가 사라졌고, 백이진(남주혁)은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 청춘들은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이와 맞선다. 나희도는 학교를 옮겨 다시 펜싱을 시작해 국가대표가 되고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거머쥔다. 백이진은 고졸이지만 어렵게 방송사에 취업해 적응해나간다.

 

이들이 시대와 싸워 이렇게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준 응원과 위로 덕분이다. 물론 여기에는 폭력교사 같은 잘못된 어른들과는 사뭇 다른, 양찬미(김혜은) 코치나, 딸이 똑 닮은 지승완의 엄마 같은 어른들의 지지가 있어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담아내고 있는 시대와 대결하는 청춘들과 그 속에서의 어른들의 역할이, 현재의 청춘들과 기성세대에 대한 어떤 시사점을 제시하는 건 그래서다. 

 

세상은 어떻게 나아지는가. 그건 어쩌면 부당한 것들에 굴복하기보다는 싸워 바꾸려는 젊은 세대들의 대결로 시작되는 일일 게다. 물론 거기에는 지승완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용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청춘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기성세대들이 필요하다.

 

지승완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린 건 이 역할을 찰떡 같이 소화해낸 이주명이라는 배우의 연기 덕분이다. 전면에 선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변 친구 역할로서 분명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것.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낸 지승완이라는 인물처럼 이 배우 역시 자기 색깔을 앞으로의 필모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내기를 기대한다.(사진:tvN)

'한끼줍쇼', 이 한 끼에 담겨진 시대의 변화

요즘 대세라고 하는 모델 한현민과 톱모델 장윤주는 역시 착하고 친근했다. 낯선 집을 방문해 그 가족들과 한 끼 밥을 나누는 JTBC 예능 <한끼줍쇼>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인물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물론 본래부터 <한끼줍쇼>의 진짜 주인공은 문을 기꺼이 열어주시는 일반인들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이들의 모습들이 빛을 발한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경규나 강호동 또 그 날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주는 밥동무 게스트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왕십리에서 진행된 <한끼줍쇼>에서 이들에게 문을 열어 준 두 집의 정경도 마찬가지였다. 이경규와 장윤주에게 문을 열어준 집은 인근 동대문에서 의류도매사업을 하는 부부의 집. 새벽 일을 나가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저녁을 준비하려던 중이었단다. 사실 요리는 남편이 더 잘한다는 아내의 말에서 그 집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감지됐다. 동대문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게 됐다는 부부는 그렇게 함께 일을 하고 있었고, 여성의류를 하는 통에 새벽일을 아내가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남편이 집안일이며 아이들 육아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

당연한 일처럼 보였지만, 아마도 맞벌이 부부들에게는 이들의 정경이 낯설지 않았을 게다. 과거 남편은 일하러 나가고 아내는 가정을 챙기던 그 틀에서 이제는 변화하고 있는 가정의 모습이 이들의 일상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졌다. 여기서 주목됐던 건 이 남편이자 아빠의 가정적인 모습이었다.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건 물론이고, 아이들에게 성적보다 중요한 게 ‘예의’라고 말하는 아빠.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모습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성 평등 사회의 실현이 무수한 백 마디 말보다 그런 실천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걸 드러낸 것이었다.

강호동과 한현민에게 문을 열어준 집의 아빠 역시 남다른 가정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학교 교직원으로 일한다는 이 아빠는 ‘현질’까지 하며 게임을 한다는 아들의 폭로(?)에 당황해 하면서도 허허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에서 드러나는 건 이 아빠가 아이들과 얼마나 스스럼없는 관계를 살아왔는가 하는 점이다. 아이들과 게임을 통해 소통을 하기도 한다는 이 아빠가 너무나 가정적이라고 아내는 말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걸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고.

게다가 이 아빠는 갑작스런 손님에 저녁상을 차리는 아내에게 다가가 “뭐 도와 줄 거 없어?”라고 묻는 모습을 통해 평상시 집안일에 익숙하다는 걸 보여줬다. 실제로 아내는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많이 도와준다고 말했고,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다시 결혼할 거라며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아내에게 칭찬하는 말은 천 개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남편. 그 훈훈한 가족의 정경이 <한끼줍쇼>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사실 매번 낯선 집의 문을 열고 그 가족과 한 끼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설정이지만, 그래서인지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달라지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는 포착된다. 이번 왕십리편에서도 그랬지만 지금껏 봐온 많은 가족들 속에서 특히 달라지고 있는 건 아빠들의 모습이었다. 이미 사회적 삶 자체가 변화하고 있어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이제 가부장적 삶은 아빠들에게도 바뀌어야할 구태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 성 평등한 사회는 요원하지만, 그래도 이런 아빠들이 있어 그나마 살만해진다. 그리고 진정한 사회의 변화는 어쩌면 이런 가정의 변화로부터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사진:JTBC)

민주화와 다문화, ‘한끼’에 고스란히 녹아든 시대의 풍경들

꼭꼭 닫혀 있는 문 저편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각자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그래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저녁 시간 가족들이 둘러앉아 한 끼 식사를 나누는 그 정경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허기를 채워주는 훈훈함 같은 공감의 정서가 흐른다. JTBC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가 기능하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서로 남남으로 살아가지만 저녁 시간 한 끼가 주는 그 공감의 정서 아래, 잠시 문을 열고 그 삶의 풍경을 보여주며, 그리하여 각각 다른 삶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사실은 동시대의 공감지대를 갖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 

'한끼줍쇼(사진출처:JTBC)'

수원 화서동에서 소녀시대 유리와 써니가 밥동무로 함께한 <한끼줍쇼>는 그런 점에서 왜 이 프로그램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가를 제대로 보여줬다. 강호동과 유리에게 선뜻 문을 열어준 단란한 가족은 서로 막걸리를 나누며 기분 좋은 훈훈함을 보여줬지만, 과거 아버님과 어머님의 연애시절 이야기에서는 당대 민주화 시절의 결코 쉽지 않았던 시대의 정경이 느껴졌다. 

마침 그날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왔다는 이 부부는 어딘지 모르게 느껴진 시대의 공기는 아버님이 과거 운동권 출신으로 수배됐을 때 처음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수배된 처지에 결혼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아버님에게 오히려 어머님이 결혼하자 청혼을 했다는 것. JTBC 손석희 사장의 오랜 팬임을 밝히고 <백분토론>에도 참여했다는 어머님이 손 사장에게 감사와 지지의 영상편지를 보내는 대목에서는 최근의 촛불정국의 풍경이 겹쳐졌다. 그저 한 끼를 나누는 자리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의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담겨졌던 것.

8시 마감시간에 임박해 고맙게도 이경규와 써니에게 문을 열어 준 집은 <한끼줍쇼>에서는 최초로 방문하게 된 다문화가정이었다. 필리핀계 미국인인 남편과 성격 좋은 아내 그리고 예쁜 아이가 살아가는 집. 아직은 한국어가 익숙지 않은 남편분과 서투른 영어로 나누는 대화가 조금은 낯설고, 마침 별로 준비된 게 없어 짜장라면 한 그릇씩을 나누는 저녁 한 끼였지만 그럼에도 공감대는 충분히 있었다. 특히 걸그룹을 좋아하는 남편분은 소녀시대의 노래를 잘 알고 있어 그 이야기만으로도 서먹함을 지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며 느낀 고충이 없을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들어 대꾸를 하지 않는다며 고함을 지르며 따라온 어느 사내의 이야기와 지하철에서 자신을 치고 침을 뱉고 갔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그걸 듣는 이경규나 써니에게도 화가 나는 일이었다. 써니는 “그건 한국 분들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며 “그 분이 이상한 것”이라고 그 속상함을 공감했다. 

민주화와 다문화. <한끼줍쇼>가 수원 화서동의 어느 집에서 보여준 풍경 속에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변화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 가족과 함께 나누는 한 끼 밥상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함께 이어졌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한 자락이 담겨졌고,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변화 또한 자연스럽게 얹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그런 변화들을 겪고 있는 저마다의 가족들이 문을 열고 다른 이들과 함께 밥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훈훈한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는 걸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낯을 많이 가린다는 써니에게 이경규가 한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괜찮아. 어차피 나도 그쪽도 서로 어색해. 그런데 얘기하다 보면 정이 들고 심지어 헤어질 때는 좀 아쉽게 느껴지더라.”

<동주>, 그의 부끄러움이 시대의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사실 요즘 멀티플렉스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볼라치면 그 화려한 색감과 입체적인 연출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시간과 공간을 점핑하듯 널뛰는 편집 속에서 영화를 본 것인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동주>는 정반대다. 흑백 영화이고 영화의 흐름도 유려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본래 인물을 염두에 두고 그려낸 것이겠지만 동주(강하늘)의 어딘지 어눌할 정도로 느린 말투까지도 지금의 속사포로 쏟아내는 영화 속 대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사진출처: 영화 <동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정반대로 가는 영화가 마음을 뒤흔든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청춘과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마치 윤동주 시인에게 후대로서의 예우를 보내듯 지극히 절제된 영상으로 그 얼굴에 비춰지는 정조와 생각들을 담아낸다. 영화는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담담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가슴은 이내 먹먹해진다. 영화가 앞질러가며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으로 가리지 않으니, 그 정지된 듯한 화면 속에 동주의 눈빛 하나, 물기하나 없이 마른 입술, 흑백으로 처리되어 핏기는 알 수 없으나 투명해질 정도로 창백한 얼굴의 음영은 그대로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든다.

 

강하늘의 목소리로 다시 읽혀지는 윤동주의 시는 영화를 통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너무 유명해 흔해져버린 서시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같은 구절이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 동주의 시선과 겹쳐지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삼 의미를 전해준다. 영화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두 가지 화두는 청춘부끄러움이다.

 

영화 속 윤동주는 그의 평생의 지기이자 경쟁자이자 사촌이었던 송몽규(박정민)와는 사뭇 다르다. 몽규가 당대 일제에 대항하던 행동파였다면 동주는 스스로 회고하듯 그의 그림자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시로 숨어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란 본래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진실 된 시를 쓴다는 건 그가 서시를 통해 다짐하듯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인 동주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걸어간 것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과 마주쳤을 때 첨예한 갈등과 마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동주가 살았던 일제 강점기는 그래서 일본의 제국주의라는 현실이 그에게 부끄러운 삶을 용납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청춘은 있었고, 청춘은 언제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지금의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동주>는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에도 작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땅의 무고한 청춘들은 모두가 그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현실이 그들을 바람에 스치우게 하고 있을 뿐.

 

바람에 맞서 서 있는 나무의 그 격렬한 고통은 스스로 항변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음으로 해서 바람의 존재를 알린다. 동주라는 존재가 그렇다. 그는 당대의 현실 앞에 오롯이 부끄럽지 않게 서 있었기 때문에 그 혹독했던 현실의 부조리를 우리 앞에 드러냈다. 그리고 동주는 그 한 세기를 건너 힘겨운 현실 앞에 괜찮다는 듯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버텨내고 있는 지금의 청춘들과 겹쳐진다. 비록 힘겨워졌지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현실이 부끄러운 것이니. <동주>가 지금의 청춘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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