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

“아저씨.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심은하)은 정원(한석규)에게 묻는다. 주차단속요원으로 단속차량 사진을 현상하러 자주 초원사진관을 찾아오면서 다림은 그 곳을 운영하는 정원에게 각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정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난다. 무표정했던 삶에 피어난 웃음.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괴로워진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림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원은 그 시한부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어려서 모두가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혼자 남아있을 때 느꼈던 감정 같은 거라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거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삶 속으로 불쑥 들어온 다림에 대한 감정이 생겨나면서 정원은 흔들린다. 술에 취해 친구에게 농담처럼 자신이 곧 죽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경찰서에서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왜 자신이 조용히 있어야 하냐고 절규한다. 삶에 대한 기대감은 희망고문처럼 그를 짓누른다. 

 

죽음 앞의 삶. 우리는 모두 시한부다. 그러니 사라져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일이 힘겨워지는 건 사랑하게 된 존재들과의 이별 때문이 아닐까. 정원은 끝내 그 이별을 받아들인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다림에게 고마움을 갖고 조용히 혼자 떠난다. 삶이 아름다운 건 언젠가 사라져가기 때문일 게다. 웃을 일 없던 정원이 다림을 보며 자꾸만 웃었던 것도. 또 하나 둘 떨어져 수북히 쌓여갈 낙엽들이 벌써부터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아름답도록 슬픈 멜로 영화 한편이 그리워지는 가을의 문턱이다. 9월의 끝자락에서도 푹푹 찌던 여름이 어느새 지나고 있다.(글:동아일보, 사진: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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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감우성·김선아의 사랑은 묘하게도 병을 닮았다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사랑, 어딘가 병을 닮았다. 그 병은 거부하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전염된다. 손무한(감우성)은 안순진(김선아)에게 이끌리면서도 그 마음을 거부하려 했다. 자신이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안순진을 사랑하게 됐다. 마치 원하지 않아도 병이 찾아오는 것처럼.

안순진은 손무한을 ‘숙주’로, 자신을 ‘기생충’으로 불렀다. 그건 물론 농담 섞인 이야기였지만, 자신의 속내 깊은 곳에 사랑보다 더 절실한 게 삶이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내일은 기대하지도 않는 ‘오늘만 사는 삶’. 그래서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부정하고 자신은 그저 손무한에 붙어먹는 병 같은 존재라 치부했다. 하지만 손무한이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안순진은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키스 먼저 할까요?>는 삶과 사랑에 대한 문학적 상징이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굳이 ‘어른 멜로’라는 수식어를 쓴 건 그저 19금의 성적인 의미가 아니다. <키스 먼저 할까요?>라는 다소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제목은 그래서 스킨십을 대놓고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스킨십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진짜 삶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도발이다. 

손무한이라는 인물의 시한부 판정도 마찬가지다. 그건 우리가 늘상 봐왔던 멜로의 시한부 설정이 갖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꺼내놓기 위함이 아니다. 병이 들었을 때 비로소 삶이 보이듯, 언제까지고 이어질 듯한 삶이 문득 끊어질 거라는 걸 감지하는 순간, 진짜 사랑이 보인다. 내일도 필요 없고 당장 지금 눈앞에 있는 그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그 순간순간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시한부 삶을 알게 된 손무한의 사랑은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처음 그가 안순진에게 불쑥 결혼하자고 했던 건, 자신은 안순진을 사랑하지만 안순진은 사랑이 아닌 결혼이 필요한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저 숙주일 뿐이라고. 한 달이면 곧 죽을 몸, 손무한은 그렇게 해서라도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어떤 잘못을 사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죄로 시작한 그 마음은 어느새 사랑이 되었고 안순진 역시 단지 ‘손무한에 붙어먹는 병 같은 존재’로 치부했던 마음이 사랑으로 변했다. 그러자 이제 손무한은 빨리 혼인 신고를 하고 안순진에게서 멀어지려 한다. 그것이 자신이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한부 삶은 그래서 이들의 사랑도 시한부로 만들어버리지만, 그래서 그 사랑은 더 진실해진다.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건 단지 육체적인 끌림이나 종족을 이어가고픈 본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길건 짧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유한한 삶을 짊어진 시한부가 우리네 존재의 숙명이라는 걸 공감하기 때문일 게다. 결국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느끼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혹자는 삶이 한 평생으로 이어진 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삶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뜻이다. <키스 먼저 할까요?>의 손무한과 안순진의 삶과 사랑은 그래서 더 진실하고 절실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숙주’의 모든 걸 내주는 사랑이란 ‘무한’일 수도 있으니.(사진:SBS)

갑갑한 현실마저 무화시킨 <판타스틱>의 판타지

 

나는 암환자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음으로 두려운 것도 없다. 후회? 그런 거 할 틈이 어딨어? 흑역사? 만들면 좀 어때? 오늘의 선물꾸러미는 오늘 다 풀어서 누리는 찬란한 지금을 살겠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저지르며... 가장 젊고 아름다운 오늘을 충분히 만끽해야지!’ JTBC 금토드라마 <판타스틱>의 이소혜(김현주)는 마치 다짐하듯 그런 글을 적는다. 글 제목은 ‘Fantastic’이라 쓰려다 고쳐 쓴 ‘FantastiCancer’.

 

'판타스틱(사진출처:JTBC)'

그녀는 왜 ‘Fantastic’‘cancer’를 붙여 ‘FantastiCancer’라 제목을 붙였을까. 글 내용 속에 들어가 있듯 ‘cancer’가 그녀의 현실이라면 그걸 받아들이는 그녀의 자세는 ‘Fantastic’이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도 없고 후회할 틈도 없는 삶. 그래서 온전히 지금의 현재를 만끽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삶. 그녀가 암환자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몰랐을 찬란한 지금의 소중함. 그래서 삶의 판타스틱과 죽음은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 그런 의미들이 그 제목에는 담겨있다.

 

<판타스틱>이라는 드라마가 말하려는 건 그래서 그 많은 불치병 소재의 콘텐츠들이 하려던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다. 지금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가 다르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 그것은 비극적 정조를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판타스틱한 삶의 즐거움쪽에 훨씬 더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처럼 발랄하고 유쾌한불치병 소재의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됐다.

 

이소혜는 자신이 암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삶이 훨씬 더 풍부해졌다. 마음 속에 두고는 있었지만 과거의 오해 속에 멀리 했던 남자 류해성(주상욱)과 다시 가까워졌고 그 진심을 알게 됐다. 학창시절 둘도 없는 사이였지만 살다보니 소원해진 친구들도 다시 만났고, 암 동지 홍준기(김태훈)를 통해 어차피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똑같은 사람으로서의 공감과 삶의 긍정 같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녀가 비로소 자신의 삶을 판타스틱이라고 적을 수 있게 된 건 실로 그 암환자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나서다.

 

류해성 역시 이소혜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사랑을 더 굳건하게 확인하게 됐다. 그에게 암환자라는 현실보다 중요한 건 사랑하는 그녀가 앞에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녀의 행복을 위해 채워나가려 노력하게 됐고, 그러면서 우주대스타에 발연기로 살아가던 삶이 비로소 진정성을 갖게 됐다. 삶의 무거움을 비로소 알게 되면서 그의 가벼움은 진짜 가벼움이 아니라 그 무거운 현실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으로 바뀌었다. 힘들어도 긍정하며 살아가려는 경쾌함 같은.

 

두 사람의 죽음을 옆 자리에 둔 사랑은 그래서 현실의 복잡다단한 문젯거리들을 오히려 무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류해성의 과거를 공개해 모든 걸 망치려는 전 소속사 대표 최진숙(김정난)이나, 그로 인해 공들여 만든 드라마가 조기 종영될 위기에 처하게 된 현실 같은 것들이 물론 그들을 곤욕스럽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문제가 이제 그리 큰 일이 아닌 것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난다. 이소혜가 말하듯 후회할 시간도 없고 흑역사 따위 만들면 좀 어떠냐는 그런 태도. 그들 앞을 가로막는 막장의 갑질 현실은 물론 힘겹게 넘어서야 할 산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 앞에 그리 중대한 사태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판타스틱>의 이런 시각은 막장의 현실들에 대해 오히려 질문을 던지는 효과를 준다. 어차피 다 똑같이 떠날 삶에 왜 그토록 막장의 삶을 살아가는가 하고 말이다. 물론 죽음 같은 이별이 아프지 않을 리 없다. 다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이소혜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다.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다. 좋은 이별도 없다. 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따뜻한 이별은 있다.’ 

<판타스틱>, 시한부에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JTBC 금토드라마 <판타스틱>에서 이소혜(김현주)는 말기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물이다. 시한부라는 설정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입견을 불러일으킨다. 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시한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상대방을 밀어내는 주인공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버킷리스트를 적고 실현해가는 이야기다.

 

'판타스틱(사진출처:JTBC)'

사실 무수히 많은 시한부 설정의 이야기들을 봐온 시청자들에게 이처럼 두 가지의 선입견이 먼저 떠오른다는 건 이런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반복됐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이 두 이야기 설정에 극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반복된 이야기는 식상하다. 제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계속 내놓으면 물리기 마련이다.

 

<판타스틱>이 초반 일찌감치 이소혜의 시한부 판정을 드러내면서도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미디에 가까운 긍정적이고 유쾌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간간히 이소혜에게 엄습하는 암의 징후들이 불안감을 형성했지만 예전에 좋아했지만 헤어졌다 다시 만나게 된 류해성(주상욱)과의 밀고 당기는 관계는 웃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오랜만에 다시 결합한 학창시절의 3인방 이야기는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소혜에게 급성 폐렴이 오고 혹 같은 걸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됐다고 하자 그녀는 돌연 류해성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에게 자신이 홍준기(김태훈)와 사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그가 영 마음에 걸려 홀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건 전형적인 시한부 설정의 멜로 구도다. 사실 요즘의 시청자들은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숨기고 눈물 흘리는 시한부 설정의 고구마 멜로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어찌 보면 이야기의 위기 상황에서 <판타스틱>을 구원해낸 건 다름 아닌 주상욱이다. 우주대스타 류해성을 연기하는 그는 이소혜의 절친인 미선(김재화)네 부부를 찾아와 상심을 술주정으로 풀어낸다. 그의 조금은 과장된 연기는 침잠하던 드라마를 그나마 다시 발랄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만들었다.

 

물론 이야기의 구성상 이소혜가 류해성에게 자신의 시한부 사실을 알리게 되는 계기는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너무 질질 끌면서 숨기고 아파하고 상대방도 힘들게 만드는 전개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빨리 모든 걸 드러내고 힘겨워도 유쾌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을 펼쳐나가야 훨씬 흥미로워질 수 있다.

 

주상욱의 존재감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만일 그런 캐릭터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일 주상욱이 과장된 연기로 만들어낸 류해성이란 캐릭터가 없었다면 <판타스틱>은 그저 그런 드라마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시한부 멜로에 시댁에 구박받는 며느리의 복수극 같은 이야기의 반복.

 

하지만 우주대스타 류해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한부 멜로가 어떤 양상으로 달리 보일지 기대하게 되고 또 이소혜와 그녀의 친구인 백설(박시연) 그리고 그 자신도 얽혀 있는 절대 갑질녀 최진숙(김정난)에게 어떻게 판타스틱한 응징을 할 것인가가 기대된다. <판타스틱>이 시한부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긍정적인 우주대스타 주상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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