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연기자 교체, 그 녹록치 않은 후유증에 대하여

SBS 수목드라마 <리턴>에 고현정 대신 박진희가 본격 출연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방영 도중 주연배우가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은 후 과연 박진희로의 교체가 효과를 발휘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효과는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분량은 대폭 늘었지만, 어쩐지 다른 캐릭터가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고현정이 초반에 연기했던 최자혜 변호사는 좀 더 복합적인 캐릭터였다. 겉보기에는 털털한 성격에 농담도 곧잘 던지며 사건의 가해자들이 듣기에 섬뜩할 수 있는 팩트를 슬쩍 슬쩍 던져 놀라움을 주기도 하는 그런 캐릭터였던 것. 무엇보다 그 때의 최자혜 변호사는 분명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동시에 밝은 이미지 또한 가진 인물로 그려진 바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박진희로 교체된 후 등장한 최자혜 변호사는 이름만 같을 뿐, 고현정이 했던 캐릭터와는 너무 달라진 느낌이다. 우선 캐릭터가 너무 어둡다. 그건 연기자 교체라는 큰 변화를 무마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에 박진희를 조금씩 노출시켜 기존 고현정이 입었던 최자혜 변호사의 바통을 이어받으려는 연출적 의도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스토리의 변화와 인물에 대한 해석의 변화가 원인으로 보인다. 

<리턴>은 초반부터 이른바 ‘악벤져스’라고 불리는 악당들이 마치 장난처럼 저지르는 범죄행각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자극적인 전개에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상대적으로 최자혜 변호사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롭게 박진희가 투입되면서 의도적으로 최자혜 변호사 캐릭터의 비중을 높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방향성이 시청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즉 악벤져스의 범죄행각을 파헤쳐가며 그 진실에 접근하는 변호사의 캐릭터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숨겨진 최자혜 변호사의 ‘실체’를 보이는 쪽으로 그 분량이 늘었던 것. 최자혜 변호사는 악벤져스와 대립하는 인물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변호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법으로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범죄자들이 하는 것 같은 ‘사건 설계’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었다. 

당연히 캐릭터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어둠에 빛을 던져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 아니라, 과거에 겪은 어떤 사건에 의해 은밀히 복수를 계획하고 하나하나 실천해가는 인물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어서다. 물론 이건 애초부터 계획된 대본대로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급변화하는 캐릭터는 그래서 그 과정을 설득시켜주는 ‘연기의 일관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만일 고현정이 계속 이 배역을 연기하며 이런 변화된 캐릭터의 면면을 드러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만큼의 이질감을 주지는 않았을 게다. 하지만 캐릭터도 급변하고 동시에 연기자까지 교체되어 버리자 심지어 이들이 동일인물이 맞는가 싶은 이질감이 생겨났다. 몰입이 되지 않는 건 시청자들로서는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분량은 늘었지만 고현정이 연기하던 최자혜 변호사가 어째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그 깨진 몰입감 때문이 아닐까.(사진:SBS)

‘대선주자 국민면접’, 기대 못 미쳤어도 의미 있는 까닭

대선주자들의 대통령 취업을 국민들이 면접한다? SBS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그 발상이 발칙(?)하다. 대통령을 하나의 직업으로 설정하고 그 직업의 사용자는 다름 아닌 국민이라는 걸 명확히 내놓고 있다. 물론 우리는 모두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런 명확한 관계설정으로 국민이 대통령을 대하는 지는 의문이다. 

'대선주자국민면접(사진출처:SBS)'

대통령을 국민을 위한 일꾼으로 바라보기는커녕 여전히 받들어야 할 왕으로 보고, 그 왕에 대한 충성이 사사롭게는 집안에서의 효도와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그 제목이나 기획에서부터 아예 대놓고 대통령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업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국민의 말을 듣고 그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일이라는 것. 

그 첫 번째 면접에 응한 대선주자는 여러 리서치에서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문재인이다. 마치 회사에서 치러지는 면접처럼 국민을 대변하는 면접관들 앞에서 문재인은 그간의 이력과 국정운영 관련한 여러 사안들에 대한 생각과 소신 등을 밝혔다. 직업인으로서의 대통령을 뽑는 과정이기 때문에 회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검증절차’를 갖는 것. 문재인은 그래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잘못된 이미지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도 했고, 일종의 압박면접으로 부여된 특정 상황에서 어떤 대처를 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생각만큼 신랄한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어떻게 보면 대선주자로 나온 이들을 위한 ‘홍보와 해명의 시간’처럼 보여지기까지 했다. 질문들은 너무 의도가 있어 보였고 거기에 따른 답변도 마치 해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평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분명히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후보라면 그게 대통령이라도 반드시 제대로 된 검증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누구나 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SBS는 최근 선거에 관련된 아이템들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그것이 국민적인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SBS가 그 아이템들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는 제대로 된 ‘선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5일 방송된 [SBS스페셜] ‘대통령의 탄생’ 편에서는 대선캠프에서 실제로 뛰었던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대통령이 어떻게 탄생해왔는가를 들여다보면서 실체가 아닌 만들어진 이미지가 선거를 갈랐다는 뼈아픈 진실을 드러내줬다. 그리고 미국의 사례를 들어 우리의 선거방송들이 얼마나 안이한 후보검증을 하고 있는가를 에둘러 말해줬다. 

지난 11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 ‘디도스 사건의 비밀’에서는 선거장소가 이해할 수 없이 엉뚱한 곳으로 바뀌기도 하고, 마침 선관위가 디도스 공격을 받아 접속 자체가 되지 않아 선거당일 투표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들이 있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또한 선거 과정에 당락을 바꾸기 위해 동원되는 갖가지 불법적인 행태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SBS의 일련의 행보는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물론 방송사로서 국민들이 가진 최대의 관심사가 이번 대선이라는 걸 읽어낸 기획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 얹어진 메시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거’를 치르자는 목소리다. 사전에 충분히 후보 검증 과정을 갖고 또 선거 당일에도 어떤 의혹이 생기지 않는 공명정대한 선거를 치를 수 있게 국민 모두가 그 과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물론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내용들로 채워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얻은 것이 있다면 말의 내용들이 아니라 그런 내용들이 나오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후보의 생각과 태도 같은 것들이 아닐까.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요즘은 공약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미래의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판단해내는 일이다. 지난 선거 같은 뼈아픈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신년토론' 전원책 후폭풍 왜 생겨난 걸까

 

시청률 11.8%. 이 수치만 봐도 신년을 맞아 JTBC가 마련한 신년특집 대토론 2017년 한국 어디로 가나는 분명 성공적인 기획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 토론 자리에 이재명 성남시장과 유승민 개혁보수신당 의원을 앉힌 행보는 여러모로 대선을 앞두고 있는 올해 의미 있는 포석이었다고 보인다. 떠오르는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그들의 JTBC 토론 프로그램 출연은 다른 대선 주자들의 출연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신년특집 대토론(사진출처:JTBC)'

하지만 시청률면에서도 또 향후 대선 정국을 앞두고 내놓은 좋은 포석의 기획면에서도 괜찮다 여겨졌던 이 특집 프로그램은 또한 방송 이후 꽤 큰 후폭풍을 낳았다. 그것은 전원책 변호사의 막무가내식 토론 태도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답답한 대중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사이다 예능으로 급부상한 <썰전>의 주역인 전원책 변호사와 유시민 작가가 토론에 함께 참여한다는 소식은 그것만으로도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지만 어째 방송에서 보여주는 전원책 변호사의 모습은 <썰전>의 그것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거침없는 언변이야 <썰전> 그대로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방의 말을 막거나 끊고 자기 할 말은 누가 뭐래도 끝까지 하는 모습은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진행을 맡은 손석희 앵커조차 전 변호사님!”을 여러 차례 외치다 듣지도 않는 모습에 실소를 터트렸고, 유시민 작가는 역시 여러 번 <썰전>을 통해 전 변호사의 그런 모습에 익숙하다는 듯 능숙하게 진짜 보수는 잘 안 듣는구나, 그런 오해를 유발하게 돼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신년토론에서 전 변호사가 한 이야기들은 그 내용만으로는 문제될 것이 별로 없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날카롭게 이른바 대선 후보들의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질문들이 던져지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은 이런 내용들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말에 담겨진 매너와 태도다. 시청자들은 전원책 변호사의 일방통행식 토론 태도를 보고는 비난을 쏟아냈다. 심지어 <썰전>의 시청자게시판에는 하차 요구가 빗발쳤다.

 

이렇게 된 건 물론 전원책 변호사가 이번 신년토론에서 무언가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신년토론<썰전>이 방송 형식 자체가 다른데다, 생방송과 편집의 차이가 극명하게 다른 느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썰전>은 시사를 다루지만 그렇다고 형식 자체가 시사 프로그램은 아니다. 예능이라는 형식으로 시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다소 과한 표현들이나 유머들도 모두 수용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썰전>의 편집이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이슈들이 쏟아져 나와 추가촬영이 계속 이어지자 전원책 변호사는 생방송을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때 김구라는 일언지하에 그건 불가하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편집이 되어야 방송이 그나마 어떤 균형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김구라는 베테랑 방송인답게 알아차리고 있었을 것이다.

 

편집은 다소 부적절한 말들이나 너무 오래 한쪽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모양새들을 잘라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막과 CG까지 사용해서 거기 앉아 있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단두대같은 발언으로 전원책 변호사는 <썰전>에서 시청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주었지만 그런 발언이 아무런 편집과정 없이 그냥 내보내지면 그 느낌은 사뭇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썰전>은 이렇게 예능이라는 틀과 편집이라는 마법을 부릴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신년토론은 그런 장치를 걷어내 버림으로써 그 민낯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전원책 변호사는 예전 MBC <100분토론>에 나왔을 때도 여전히 일방통행식의 토론 태도를 보였었다는 시청자들의 새삼스런 반응들이 나왔다.

 

신년토론은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썰전>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준 면이 있다. <썰전>이라는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예능적인 편집이 얼마나 토론자들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드러내줬다는 것이다(이러한 이미지 세탁 논란은 예전 강용석 변호사가 나왔을 때도 그런 지적들이 있었다). 항간에서는 그래도 전원책 변호사와 합을 맞춰가는 유시민 작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더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신년토론의 후폭풍을 경험한 시청자들로서는 <썰전>이 다시 보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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