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뻔한 범죄스릴러와 다른 건, 복잡한 심리가 들어 있어서다

 

드디어 JTBC 금토드라마 <괴물>의 범인이 드러났다. 그 범인은 놀랍게도 잘려진 손가락 열 개를 남긴 채 실종되어버린 강민정(강민아)의 아버지 강진묵(이규회)이었다. 왜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직 밝혀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치 자신이 범인이라는 걸 누군가 찾는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루하루 만나는 사람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오늘은 스물일곱. 스물일곱 명이나 마주쳤는데... 머저리 같은 새끼들. 이래서 강민정이를 찾겠어? 어떡하니 민정아. 아버지랑 영원히 살아야겠다."

 

강진묵이 범인이라는 걸 밝히는 대목의 시퀀스에서, 그가 김장을 해 땅을 파 묻어놓은 항아리에 넣는 장면은 <괴물>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여러 측면을 드러낸다. 마치 피처럼 붉은 김치를 항아리에 넣는 모습은 강진묵이 어딘가에 자신이 범행한 사체를 그렇게 했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 강진묵이 그렇게 담근 김장김치를 들고 문주 경찰서 강력계 오지화 팀장(김신록)을 찾아 건네주고, 또 만양파출소를 찾아 남상배 파출소장(천호진)과 대원들에게 김치를 건네며 강민정을 찾느라 수고한다고 말하자, 오지훈 순경(남윤수)이 눈물을 보이는 모습은 소름끼친다.

 

그건 강진묵이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가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그 범행을 어떻게 숨겨 왔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는 범인이지만, 강력계 팀장 오지화나 파출소 사람들의 이웃이었다. 그래서 강민정이 실종되던 날에도 만양정육점에 모여 함께 술을 마셨고, 그 때 강진묵은 그들을 위해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 강진묵은 강민정에게 범행을 저질렀을 게다. 저들 앞에서는 형 동생 하는 가족 같은 이웃처럼 행세해왔지만,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괴물>의 수사 과정이 어째서 이렇게 오리무중이었던가를 잘 드러낸다.

 

이 조그마한 마을 사람들은 20년 전 벌어진 실종 및 신체 훼손 사건들로 저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이동식(신하균)은 사라진 여동생을 20년 간이나 찾고 있었고, 만양정육점을 운영하는 유재이(최성은)는 교통 사망 사고를 저지르고 식물인간이 됐다가 결국 사망한 아버지의 49재 때 어머니가 사라졌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도 모두 이동식, 유재이와 친분이 남다르다. 문주경찰서 수사지원팀의 박정제(최대훈)는 이동식의 둘도 없는 절친이고, 만양파출소장 남상배는 사라진 유재이 모친의 첫사랑으로 지금도 노총각이다.

 

JL건설대표로 마을을 재개발해 큰 돈을 벌려는 야심을 가진 이창진(허성태)의 꼬드김에 의해 결혼했다 1년 만에 이혼한 오지화 팀장은 그 후 자신과 술잔을 기울여주는 만양 파출소 사람들에 남다른 관계가 됐다. 그리고 만양 파출소의 막내 오지훈 순경은 자신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렇게 서로가 끈끈하게 얽혀 있는 이웃인데다, 저마다의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술자리에서 나눴을 이들은 그래서 서로를 보호하려 한다. 20년 만에 또 다시 비슷한 사건이 터지지만 그 와중에도 이웃들이 의심받을 증언들은 아예 내놓지 않는다. 이동식이 자주 하는 말,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라는 그 말은 형사로서는 의심받을 만하지만 이웃이고 친구이자 동료기 때문에 범인일 리 없다며 직접 물어 해결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들은 수사가 아니라 이웃이자 친구로서 서로에게 묻는다. "너는 아니지?"

 

이러니 <괴물>의 초반 이야기가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기는커녕 계속 더 많은 이들이 용의선상에 서게 되고, 그들을 의심하게 만들게 된다. 외지에서 온 한주원 경위(여진구)는 이런 이들의 말과 행동들이 납득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단단한 관계 바깥에 서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객관적으로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어서다.

 

<괴물>에 '심리 추적 스릴러'라는 지칭이 붙은 건 바로 이 독특한 상황 설정 때문이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결국 한 때 이웃으로 지냈던 누군가가 끔찍한 범인일 수 있다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닐 거야" 하고 믿고 싶지만 그러는 순간 "머저리 같은 새끼들"하고 누군가는 뒤통수를 친다. 그 아닐 거야라는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가려주면서도 의심하는 상황. 이만큼 지옥이 있을까.

 

오지훈 순경은 사라진 강민정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으로 몰려 용의자로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되지만, 선뜻 진짜 마지막에 함께 있었던 인물이 박정제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형 동생하던 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밝히기 위해 그 이름을 대고, 그 순간 술자리에서 동생이 잡혀간 사실로 혼란스러운 오지화 팀장은 동식에게 이렇게 말한다.

 

"웃기지? 3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 못 믿는 내가 나도 웃겨. 그런데 더 끔찍한 건 뭔지 알아? 지훈이가 거짓말 한 거면 어떡해? 거짓말 한 걸 수도 있잖아. 걔가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다. "나도 걔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닐 거라고 믿어. 나 진짜 내 동생 아니라 정제였으면 좋겠어. 박정제가 한 짓이면 좋겠어. 박정제가 범인이면 좋겠어. 나 너무 괴물 같지?"

 

괴물은 믿었던 사람이 믿을 수 없게 되는 상황 속에서 탄생한다. <괴물>이 여타의 범죄스릴러들과 차원이 다른 건, 그저 벌어지는 범죄와 그 범인을 잡는 형사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과정을 겪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웃과 범인을 동일선상에 봐야 하는 사람들은 고통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 많은 범죄스릴러들이 그려내듯 세상에 단순 명쾌한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괴물>은 우리에게 범죄스릴러들이 그저 스쳐지나갔던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의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사진:JTBC)

소소해 보여도 흥미진진한 '봄밤'의 멜로

 

MBC 수목드라마 <봄밤>의 멜로는 보는 맛이 있다. 물론 처음에는 너무 일상적인 멜로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또 전작이었던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잔상이 눈을 가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꾸만 들여다보자 이 멜로 어딘가 다르다. 보통의 멜로에서 늘상 벌어지는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인물의 심리와 감정변화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정인(한지민)이 동생과 함께 기석(김준한)의 농구시합을 보러갔다가, 거기서 경기를 벌이는 지호(정해인)를 보게 되고, 그들이 다 같이 뒷풀이를 하게 되는 에피소드가 그렇다. 그건 어떤 멜로에서도 자주 등장하던 시퀀스지만, 이 장면에서 가게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온 정인이 마침 거기서 아들과 전화통화를 하는 지호를 보게 되는 상황이 들어가면서 둘 사이에 묘한 관계가 생겨나는 지점이 그렇다.

 

두 사람은 이미 아는 사이고, 정인이 지호에게 친구가 되자고까지 얘기했던 사이다. 그래서 정인의 남자친구인 기석 모르게 둘이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둘 사이에 내밀한 관계를 구성한다. 게다가 아들과 전화통화를 하며 술 안마셨다 거짓말을 하는 지호의 이야기를 슬쩍 엿 듣고는 “거짓말이 싫다”고 농담 반 섞어 말한 정인이 막상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는 대목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거짓말의 공유’라는 그 상황 하나만으로 정인과 지호의 내밀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술을 마시고 몇몇이 함께 간 노래방에서 정인의 감정 변화는 더 흥미롭다. 어쩌다 지호와 같은 노래를 신청하게 된 정인은 내심 기쁜 마음을 드러내지만, 갑자기 아들이 아파 전화를 받고 나가버리자 혼자 노래 부르다 중간에 끊어버리는 정인에게서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정인에게 동생 재인(주민경)이 마치 화가 난 듯 말이 없어진 것에 대해 “안 좋은 일 있냐”고 묻는 대목도 상당히 의도적이다. 그것으로 정인의 지호를 생각하는 마음을 은근슬쩍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인이 지호에게 친구가 되자고 하고, 지호는 “그럴 수 없다”고 하다가 결국 “친구하자”고 하는 장면도 표면적으로는 별거 아닌 대화처럼 보이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담아내는 대목이다. 즉 정인은 지호에게 “친구가 별거냐”고 말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 재인이 정인의 친구와 길거리에서 만나고 있는 걸 보고는 의외로 보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집으로 돌아와 재인에게 그 친구를 만난 걸 따져 묻는 것. 하지만 “친군데 어떠냐”고 오히려 말하는 재인을 통해 드라마는 정인이 말과는 달리 남녀 사이의 ‘친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밖에도 <봄밤>은 그저 스쳐 지나치지 않고 그 말과 행동의 의미들을 곱씹어보면 새록새록 그 숨겨진 감정들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섬세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인이 자신이 일하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한 아빠와 같이 온 아이를 바라보는 장면도 그냥 허투루 들어간 게 아니다. 그건 스토리상 없어도 되는 장면이지만, 그 아이를 통해 정인이 아이가 있는 지호를 떠올리는 것으로 그 끌리는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지호의 차 안에서 공룡스티커가 붙어있는 걸 본 정인이 아이와 함께 온다는 소식에 공룡책을 찾는 대목도 그렇다.

 

사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겪는 사랑이란 굉장히 특별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아주 평범한 일상들이 지나치고 있었지만, 그것들에 투영되는 우리의 감정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빠져 그 일상적 상황들을 특별하게 느끼게 되는 것일 게다. <봄밤>은 그런 점에서 액면의 드러나 있는 사건보다 그 사건이 야기하는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너무나 일상적인 사건들만 담고 있어 심지어 평이해 보이는 드라마를 보며 우리가 의외로 설레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섬세함을 담아내는 디테일들 때문이다.(사진:MBC)

드라마보다 더 설렌다, ‘하트시그널2’의 특별한 관찰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보고 다음 회를 안 본 사람은 없을 듯싶다. 방송이 나가고 나면 스튜디오 분량에 등장하는 연예인들보다 관찰카메라가 담아낸 일반 청춘들의 이름들이 더 회자되고, 심지어 애청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누구와 연결될 것인가를 예측하고, 자신이라면 누굴 선택할 것이라는 ‘타입’에 대한 일종의 커밍아웃이 이어지기도 한다. 도대체 이 프로그램의 무엇이 이런 화제를 낳는 것일까.

채널A 예능 <하트시그널2> 이야기다. 이게 과연 종편 채널 프로그램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 프로그램은 지상파, 케이블을 통틀어 가장 진일보한 연애 소재 프로그램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관찰카메라라는 지금의 예능 트렌드 형식을 가장 적확하게 가져와 스튜디오 촬영과 분담해냄으로써, 지금껏 ‘짝짓기 프로그램’이라 비하되던 연애 소재 프로그램을 진화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트시그널2>에는 모두 8명의 청춘남녀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무뚝뚝해 보였지만 차츰 상냥한 면모가 드러나며 여성들의 호감을 산 한의사 김도균, 앳된 외모에 뇌색미가 더해진 훈남 예비사무관 막내 이규빈, 멍뭉이 스타일로 설득에 능한 스타트업 대표 정재호, 그리고 뒤늦게 합류해 마성의 매력으로 연애 기류의 판도를 바꿔버린 김현우가 남자 출연자들이고, 도회적인 외모에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케터 오영주, 대학생으로서 호응과 리액션이 좋은 풋풋한 미소의 소유자 임현주, 배우지망생으로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송다은에 마지막에 출연한 털털한 성격이 매력인 김장미가 여자 출연자들이다.

저마다의 개성이 확실하고 따라서 매력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 드러나던 서로의 마음은 조금씩 회가 진행되면서 변화된다. <하트시그널2>가 흥미로운 지점은 ‘시그널 하우스’에서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인물들이 보이는 작은 행동이나 표정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변화하는 과정을 포착해낸다는 점에 있다. 

이를 테면 초반부에 ‘비밀의 방’ 주인공으로 갑자기 등장한 ‘거침없는 카리스마의 매력’을 가진 김현우가 애초에 존재하던 기류를 변화시키자, 오히려 차분하고 따뜻함이 느껴지던 김도균에게 여성들의 마음이 온통 기울어버리는 그런 감정 변화를 프로그램이 제대로 잡아내는 그런 부분들이다. 끌리지만 위험하게 느껴지는 김현우라는 존재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이는 김도균에 여성들이 이끌리는 과정을 <하트시그널2>는 미세한 표정과 여성들끼리의 대화를 통해 끄집어낸다. 

<하트시그널2>가 진화된 형태의 연애 프로그램이라는 걸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은, 이런 디테일한 감정들을 포착해내면서도 동시에 이들의 일상이 인위적인 설정이 최소화된 채 지극히 자연스럽게 담겨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건 관찰카메라라는 형식을 통해 ‘시그널 하우스’의 남녀들의 일상을 큰 설정 없이 담아내고, 대신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그 영상을 보며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설명하고 맞춰나가는 스튜디오 분량으로 이원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트시그널2>는 마치 실제로 벌어지는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 상황이 전개되지만, 그걸 바라보는 스튜디오의 이른바 연애심리 전문가들(?)이 더해주는 이야기가 일종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 출연하고 있는 인물 중 이 역할을 가장 잘 하는 인물은 그래서 연예인들보다는 작사가인 김이나와 정신과 의사인 양재웅이다. 이들의 예리한 행동분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출연자들의 행동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이들이 시그널을 읽어주는 코멘트들은 일종의 ‘연애 코칭’의 정보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프로그램에 중요한 관전 포인트를 만들어준다.

보통 멜로나 로맨스를 얘기하면 떠올리게 되는 건 주로 멜로드라마다. 하지만 <하트시그널2>를 보게 되면 그 어떤 멜로드라마보다 진짜 리얼리티로 벌어지는 남녀 관계의 세밀한 포착을 통해 그려지는 심리의 드라마가 훨씬 드라마틱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한때는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라는 말이 실전 연애에 약한 이들을 비아냥하는 표현으로 나온 적이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면 이제 이런 말이 가능해질 것 같다. ‘연애를 예능프로그램으로 배웠어요.’(사진:채널A)

서두르지 않아 좋다, <공항 가는 길>의 감성멜로

 

오랜만에 보는 정통 감성멜로다. 아주 천천히 전개되는 것 같지만 감성이 켜켜이 쌓여가면서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어찌할 도리 없이 넘쳐 흘러내리는 그런 감정의 경험. KBS 새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멜로는 지금껏 드라마들이 첫 회에 폭풍전개를 쏟아 붓는 그런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터트리는 게 아니라 조금씩 젖어간다고 할까.

 

'공항 가는 길(사진출처:KBS)'

첫 회 최수아(김하늘)와 말레이시아에 딸 효은(김환희)을 유학 보내며 딸의 룸메이트인 애니의 아빠인 서도우(이상윤)와 얽히는 과정은 그래서 조금은 느슨한 느낌마저 주었다. 하지만 딸들을 해외에 두게 된 부모로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최수아와 서도우가 인연을 갖게 된다는 점은 신선했다.

 

최수아가 노트북으로 화상통화를 할 때, 효은의 노트북에 비춰진 반대편 책상 애니의 노트북을 통해 서도우가 고국을 그리워하는 딸을 위해 한국의 갖가지 풍경들을 담아주는 장면을 보는 장면은 흥미로웠다. 각각 다른 공간에 놓여 있지만 부모에서 딸들로 또 그 딸들을 위하는 부모들끼리의 마음이 오가는 것이 그 장면에 한꺼번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제맥주집을 찾았다가 해외에 딸을 보내고 자신이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최수아에게 서도우가 전화를 걸어 딸들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위로해주는 장면도 두 사람의 관계가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조금씩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사실 최근 드라마들을 보면 마치 조급증에나 걸린 것처럼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첫 회의 기세가 드라마의 향방을 좌우한다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맥락 없이 남녀가 우연히 만나 그 해프닝이 첫 회에 일찌감치 사랑으로 발전하는 드라마들은 너무 성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마치 이미 정해진 짝짓기 놀이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공항 가는 길>은 그런 점에서 보면 차근차근 진행되어 무리함이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이 이 드라마가 밋밋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첫 회 중반 이후를 지나면서 고국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은 애니가 절망하고 그러다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서도우와 그가 애니의 아빠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스튜어디스 최수아는 그래서 드디어 미묘한 관계의 선을 넘기 시작한다.

 

해외에 딸을 보낸 부모의 공감대가 딸을 잃은 아빠, 그것도 그 딸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던 아빠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 물론 서도우도 최수아도 모두 결혼한 기혼남녀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서도우는 딸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자신이 견디기 힘들다며 딸을 거기 묻어달라고 말하는 아내 김혜원(장희진)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워한다. 최수아는 기장인 남편 박진석(신성록)과 사내 연애로 결혼했지만 직업적 특성상 같이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 회사에서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아예 모른 척 지나치기 일쑤. 서도우와 최수아의 평탄치 않은 결혼생활은 두 사람의 관계를 촉발시킬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이는 멜로의 틀을 보이는 것 같지만 <공항 가는 길>은 그 접근 방식이나 인물의 심리 묘사가 디테일해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미 결혼한 사이에서 갖게 되는 상대방에 대한 마음들이 그저 불륜의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일상에 던져진 파문이나 삶에서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운명적인 경험처럼 다가오는 면이 있다.

 

가을에, 무엇보다 김하늘이라는 배우와 정말 잘 어울리는 감성 멜로다. 물론 그 감성이 어느 정도의 선까지 나갈 것인가에 따라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 밑으로 격정적으로 흘러가는 조류들이 뒤엉키듯 그 감정들이 점점이 묻어나는 <공항 가는 길>의 감성 멜로는 의외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그것이 어떻게 치유되는가에 대한 과정으로 이 감성 멜로가 그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