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비' 시청률 5%가 전부는 아니다

'사랑비'의 시청률은 5%에 머물러 있다. 배용준을 잇는 차세대 한류스타라는 장근석과 K팝의 중심에 서 있는 소녀시대의 윤아, 그리고 1세대 한류의 선봉장 역할을 한 '겨울연가'의 윤석호PD와 오수연 작가, 게다가 방영 전 이미 일본에 80여억 원의 외화를 벌어들였다는 성과까지. 이렇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성공요소로 지목되는 것들이 많은 드라마로서 5%라는 시청률은 가혹할 정도다.

 

'사랑비'(사진출처:KBS)

그러나 더 가혹한 건, 5%라는 시청률이 아니다. 그 5%라는 수치 정도의 작품성으로 이 작품이 치부되는 현실이다. 시청률 추산이 대중적인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은 맞지만, 이미 TV시청률이 중장년층들에게 편향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이고, 또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작품성이 좋다는 등식은 이미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사랑비'에 대한 비판 여론을 보면, 5%라는 시청률에 지나치게 경도된 느낌이 있다. 이것은 거꾸로 '해를 품은 달'이 실제 작품의 완성도는 한참 떨어졌지만 40% 시청률을 넘어선 것만으로 마치 작품성이 좋았다는 착각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실제 작품은 어떨까. '사랑비'의 드라마 전개는 느리다. 그래서 마치 한참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이야기가 폭주하게 된 드라마들(언제부턴가 이런 자극이 우리 드라마의 시청률을 견인해왔다)을 보던 눈에 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완행열차를 탄 풍경 같은 드라마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전개가 빠르다고 작품의 완성도가 높은 건 아니다. 그건 자극의 문제다.

'사랑비'는 그런 점에서 자극이 별로 없는 드라마다.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보면 여타의 폭주하는 드라마들이 다이내믹한 서사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사랑비'는 서사가 아닌 서정에 더 집중하는 드라마다. 멜로드라마로서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이런 전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사랑비'는 그래서 서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 얘기가 없는 것 같다(혹은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다). 하지만 서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르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의 고저와 강약을 섬세하게 느낄 때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마치 서사 중심의 소설과 서정적인 시의 차이라고나 할까.

70년대식 첫사랑이 주는 느낌도 답답하게 다가올 수 있다. 왜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을까. 왜 당장 전화해서 마음을 전하지 못할까. 하지만 이것은 2012년 현재적 관점에서의 생각이다. 휴대폰으로 언제든 전화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시대의 정서와 아직도 편지를 쓰던 시대의 정서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왜 그 답답한 70년대식 첫사랑을 보여줄까. 그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멜로'라는 장르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즉각적으로 '연결'되는 미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 가진 우연성과 운명적인 느낌들은 미디어들에 의해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인스턴트식 사랑의 시대에 '멜로' 같은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는 장르는 어딘지 잘 맞지 않아 보인다. 멜로가 사극 같은 이야기(운명적 사랑이 가능하다) 속으로 자꾸만 도망치거나, 로맨틱 코미디처럼 유머로 바뀐 것(운명적 사랑이 유머처럼 그려진다)은 다분히 이런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사랑비'는 이 사라진 시대의 멜로를 마치 서랍 속에 구겨 넣었던 편지처럼 꺼내 읽는다. 시청률 5%와, 그 시청률 수치만큼으로만 곡해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 대한 혹평들은 그래서 이 시대가 얼마나 사랑을 달리 읽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언젠가부터 사랑은 소리치고 대놓고 말하고 주장하고 쟁취하는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아닐까. 4회까지 다뤄진 이 아련한 70년대식 구식 첫사랑은 그래서 2012년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유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비'가 단순히 그 70년대식 구식 사랑에 대해 추억만을 담은 드라마는 아니다. 5회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2012년식의 사랑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70년대 식 구식 사랑과 2012년식의 신식 사랑 사이에 표현은 달라졌어도 그 바탕에 깔린 비슷한 정조를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미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디지털 환경 속에 내던져져 있지만(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아날로그를 희망하기도 한다. 빈껍데기 같은 허무한 즉석 사랑의 연속 속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추억하기도 한다. 마치 시대는 달라졌어도 여전히 내리고 있는 '사랑비'처럼.

'사랑비'는 느리지만 바로 그 느림의 미학이 지금 2012년 우리네 속도에 경도된 드라마들에 오히려 의미를 던져주는 드라마다. '사랑비'의 사랑은 구식이지만, 바로 그 구식이기 때문에 작금의 인스턴트식 사랑 속에서 하나의 판타지이자 희망이 되기도 한다. '사랑비'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내뱉는 대사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그 말은 비트로 쪼개지는 이 시대의 삶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사랑비'에 내려진 5%라는 시청률은 제작자들 입장에서는 차분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작품성 이외의 문제들이 뒤엉켜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같은 시적인 영상의 드라마는 그 매체적인 차이 때문에 오히려 집중이 안 될 수가 있다. 영화라면 집중해서 보겠지만 드라마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달라진 매체 환경과 멜로의 관계에서 전술했듯이, 어쩌면 정통 멜로라는 장르 자체가 우리에게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렸을 수 있다. 또 한류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거꾸로 반감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한류가 거의 일본의 소비자들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현실은 드라마가 그들만을 겨냥하고 있다는(그래서 국내 팬들은 소외되었다는) 곡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5%라는 시청률로 '사랑비'라는 드라마를 전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70년대가 초반 4회를 차지하고 또 그 정조가 후에도 이어질 것이지만, 그렇다고 70년대에 주저앉아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이제 2012년의 시점에서 이어질 드라마는 그 70년대를 추억하면서도 그 시절이 주는 아날로그가 지금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길 것이다. 그 질문이 혹시 우리 중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든다면, 자극과 속도에 경도된 우리들에게 조금은 담담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사랑비'를 뿌려줄 지도.

오디션이 깨운 아날로그, 아날로그가 일으키는 인디씬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cm

수수한 옷차림의 장재인이 '슈퍼스타K2' 오디션 현장에서 맨 바닥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기획사 가수들의 화려한 옷차림에 눈멀고, 기계음으로 잔뜩 포장된 사운드에 귀 먼 우리들의 감각을 깨운 그것은? 꾸미지 않은 장재인의 스타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난해 보여도 모든 음악적 감성을 한껏 품고 있는 기타라는 악기가 가진 힘이었을까. 그 순간 우리가 느낀 건 디지털로 무장된 세상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아날로그의 힘이 아니었을까.

바야흐로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다. '슈퍼스타K2'의 성공 이후 이 형식은 이른바 '되는 포맷'으로 자리 잡았다. '슈퍼스타K2'의 따라 하기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위대한 탄생'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 형식 자체가 가진 힘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대중들을 열광시키는 경쟁 시스템이 있고, 그 위에 '공정함'이나 '멘토링' 같은 판타지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음악이다. 실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우리는 이토록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경쟁자들은 무반주로, 혹은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와 오로지 노래로 승부한다. 물론 춤을 추는 경쟁자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심사위원들이 결국 주문하는 건 "노래를 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심사위원들은 발성의 문제나 스타일, 음색 등을 조목조목 잡아내며 경쟁자들이 갖고 있는 노래를 친절하게 분석해준다. 그러니 음악에 대한 감성을 깨우는 프로그램으로 오디션 프로그램만한 게 있을까. 우리는 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어떤 훈련을 받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획사 가수들의 화려한 춤과 사운드에 묻혀 있던 가사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이 훈련이 우리가 잊고 있던 감성을 깨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날로그 감성이다. 물론 이 아날로그 감성은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를 부를 때 우리의 가슴을 탁 치고 들어왔던 것. 각종 라이브 무대 혹은 그런 무대를 방송화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늘 그것을 봐왔다. 하지만 최근처럼 이 아날로그 감성의 음악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게 된 건, 분명 저 오디션 프로그램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작년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이 대중들의 가슴에 쏟아 부은 것도 다름 아닌 이 아날로그 감성이다. 처음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어색하게 목소리를 맞춰가고(그것도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하모니를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알 수 없는 뭉클함을 준 건 그 과정과 음악이 주는 아날로그의 힘 덕분이다. 그 대회에 나가는 과정이 오디션 프로그램과 거의 형식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노래와 하모니에 대한 일종의 학습을 받았다. 그래서 하모니를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시봉'은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이라는 음악적 거장들을 세워두고 창조적인 음악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었다. 윤형주가 즉석에서 만난 여자들을 위해 '라라라'의 가사를 단 40분 만에 담아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 놀라운 시적 가사들과 어우러지면서 진짜 음악의 단면을 끄집어냈다. 음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힘으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걸 그 이야기는 들려주었다. 그리고 누군가 악기를 퉁 퉁기며 노래를 하기 시작하면 즉흥적으로 하모니를 맞춰 가며 부르는 노래는 아날로그적인 감동을 안겨주었다. 악동 이하늘이 눈물을 흘린 건 바로 그 알 수 없는(사실은 잊고 있던) 감성을 거기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재인이 주목받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인디 레이블에 대중들이 눈을 돌리는 것이 이런 아날로그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제2의 장기하'라는 얘기를 들으며 주목받고 있는 인디밴드 10cm의 성공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디지털 음원 사이트 100위권 내에 앨범 전곡이 랭크되고, 음반도 초도물량 1만장이 이미 다 팔려나가 추가 생산에 들어간 10cm의 성공에는 현재 국내 대중문화계에 쓰나미처럼 불어 닥친 아날로그 감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때의 유행이 아니다. 이미 깨워놓은 아날로그 정서에 대한 욕망은 복제된 가짜 디지털 정서가 채워주기 힘든 면이 있다. 이미 진짜 향기 나는 꽃을 보게 된 대중들이 조화에 눈을 돌릴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홈레코딩 기술에 있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내부적으로 실력을 쌓아온 인디씬들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건 바로 이 대중들에게 깨어난 아날로그 감성 덕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인디씬들의 음악이 유튜브 같은 지극히 디지털적인 매체를 타고 대중들에게 번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에 올려진 10cm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라는 곡의 라이브 영상을 보다보면 우리가 각종 쇼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그룹의 무대를 통해 발견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노래를 하다가 악기를 떨어뜨리자 잠시 멈췄다 악기를 집어 다시 연주하는 그런 실수조차 하나의 감성으로 전해지는 상황.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부터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이 아날로그 감성은 어쩌면 대중가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맹아로 자라나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울린 소박한 아날로그 감성

'놀러와'의 골방 브라더스, 이하늘과 길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진지한 모습이었다. 깨방정에 게스트들을 몰아세우기까지 하던 이들은 다소곳이 출연한 세시봉 전설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들려주는 추억어린 이야기와 아름다운 포크 선율에 빠져들었다. 이야기 중간 중간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이들의 음악은 '놀러와'를 과거 라디오 공개방송 같은 아날로그 감성으로 적셔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 감성 속에 빠져있던 악동 김하늘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혹자는 김하늘의 눈물이 지나친 감수성이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아날로그 음악의 끝단을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이 세시봉 전설들이 환기해낸 정서들이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제는 디지털에 화려한 무대와 댄스 속에 잊혀진 것처럼 여겨지던, 소박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아날로그 정서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기타 한 대와 이미 스스로 하나의 악기가 되어버린 그들이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서로의 눈빛만으로 척척 하모니를 이루는 장면은 작금의 음악세태로 보면 기적과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40년 가까운 교감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음악이라는 본연의 세계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 단지 음의 고저와 말장난에 가까운 가사들 그리고 자극적인 박자의 조합이 노래로 여겨지는 지금, 그들의 소박한 음악 속에는 아름다운 음과 시가 되어버린 가사가 어우러져 우리네 가슴을 파고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조영남이나 송창식이 가수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인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들의 입지전적인 삶과 거기서 만들어낸 음악들이 작금의 자본에 의해 생산되는 음악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웨딩케이크'나 '두 개의 작은 별'에 얽힌 포복절도의 에피소드를 전해준 윤형주는 놀라운 예능감으로 시청자들을 웃게 했지만, 그 아름다운 가사들은 그의 시적 감성을 잘 드러내주었다. 즉석에서 만난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라라라' 같은 곡이 단 40분 만에 그런 가사를 담아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들의 자리를 감동적으로 만든 것은 이 나이든 아저씨들이 여전히 개구쟁이들처럼 옥신각신하면서도 보여주는 선후배를 넘어서는 진한 형제애다. 조영남이 즉석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타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하모니를 넣는 모습은 백 마디 말보다 그 깊은 마음의 교감을 전해주었다. 누군가는 그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삶 전체를 살맛나게 할 그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

악동 김하늘의 눈물은 아마도 이들을 바라보다가 시청자들이 문득 느끼게 된 가슴 먹먹함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전자음과 디지털과 자극과 현란함에 어지러운 우리의 눈과 귀를 정화시키는 진짜 음악의 세계가 주는 날 것의 감동이다. 세월이 묻어난 그 음악은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청춘과 아날로그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어쩜 저리도 풋풋할까. 나이 들어가면서 정반대로 생겨나는 청춘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기 마련인 욕망일까. 올 한 해 걸 그룹 열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존재하는 이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세대의 열광은 물론이고, 중장년층의 시선까지 잡아 끈, 걸 그룹들의 약진에는 불황에 지치고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의 복고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청춘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다. '청춘불패'는 바로 그 아날로그적 감성이 주는 매력을 걸 그룹의 시골 마을 정착기라는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걸 그룹 아이돌들이 유치리라는 시골 마을에 정착해가는 과정을 담은 '청춘불패'의 엔딩은 인상적이다. 맥 플라이의 'All about you'를 배경음악을 깔고 하루 동안 아이돌들이 해왔던 일들을 포착한 스틸 컷이 정지화면으로 하나하나 보여지며 그 위로 인상적인 자막이 깔린다. 이 짧은 엔딩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은 시간에 대한 아련한 향수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시간을 멈춰 세워둔 그 스틸 컷들은 마치 추억처럼 우리의 기억 언저리에 들어와 그 날 있었던 아이돌들과 유치리 주민들과의 따뜻했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다시 끄집어낸다.

이 엔딩이 하루의 추억을 반추하듯이, 이 프로그램은 한 세대를 살아온 우리들의 젊은 날들을 되짚어가는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아이돌들은 도시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현대인들을 대변하면서도 아련한 젊음의 청춘을 간직한 존재로서 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욕망하는 도시인들을 매료시킨다. 그들과 함께 떠나는 유치리 마을에서의 하루란, 따끈따끈한 온돌 위에 앉아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시절이고, 마당 한 가운데서 연중행사처럼 벌어졌던 김장 담그기에 대한 기억이며, 메주를 정성스레 만들어 장을 준비하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걸 그룹 아이돌들은 그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의 안내자들이다. 그들이 유치리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재롱을 피우고, 혼자 살아가는 할머니의 집을 방문해 따뜻한 정을 나누고, 함께 따뜻한 한 끼를 준비하는 그 장면들은, 엄청난 속도감으로 앞으로만 달려온 자들을 뒤돌아보게 만들고 마치 부채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정이 묻어난다. 청춘이라는 아날로그적 시간을 가진 아이돌과, 유치리라는 아날로그의 시간에 멈춰있는 공간의 만남은 이토록 절묘하다.

특별히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보는 이들이 기꺼이 이 풋풋한 아이돌들의 좌충우돌 시골 정착기에 웃어주게 되는 것은 이 깊은 아날로그적 감성에 대한 공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존재였던 아이돌들이 유치리 주민들과 마치 친척처럼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은 이 독특한 예능 프로그램만이 갖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아이돌들의 시골 적응이라는 키워드 속에는 웃음이 묻어나지만,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당위처럼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아이돌과 시골주민들 간의 정이다.

여행자와 정착자의 시선이 다른 것처럼, '청춘불패'는 '1박2일'과도 다르고 '패밀리가 떴다'와도 다르다. 노마드적 감성이 여행 버라이어티가 가진 떠도는 이들의 왁자한 해프닝들을 담아낸다면, 한 곳에 정착해 그간 잊고 지내왔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을 하나씩 연결해가는 '청춘불패'의 감성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그리고 그 아날로그의 매력은 그 감성을 연결해주는 청춘들(아이돌들)을 통해 고정된 순간의 스틸 컷처럼 기억 속에 각인된다. 청춘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패하지 않는 승리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청춘불패'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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