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드라마 보며 펑펑, 무엇이 눈물 버튼을 눌렀나

폭싹 속았수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땐 연애편지 쓰듯 했다. 한 자 한 자 배려하고 공들였다. 남은 한 번만 잘해 줘도 세상에 없는 은인이 된다. 그런데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겐 낙서장 대하듯 했다. 말도 마음도 고르지 않고 튀어 나왔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대학생이 된 금명(아이유)이 엄마 애순(문소리)에게 전화통화하며 유학 문제로 괜스레 화를 내는 대목에는 이 같은 내레이션이 흐른다. 

 

유학 장학생으로 뽑혔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못가게 되자 담당 교수가 사비를 털어서 보내주겠다 한다. 거절했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운 금명은 교수에게 마음만도 너무 감사하다며 “일본 갔다 온 거 같다”고 예쁘게 말한다. 금명의 내레이션이 말하듯, 그 표현은 마치 ‘연애편지’처럼 배려하고 공들인 티가 난다. 그것도 진심으로. 

 

하지만 그 교수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엄마한테 전화해 귤이라도 한 상자 보내달라 하던 금명은, 뭐가 그렇게 고마우냐는 엄마의 궁금증에 저도 모르게 “돈까지 빌려주려 한다”는 말을 꺼내놓는다. 그것이 엄마에게는 가시가 되는 건 줄도 모르고. 그래서 말다툼을 벌이고 “엄마랑 통화하면 짜증만 난다”는 말까지 꺼내놓는다. 낙서장에 아무렇게나 찌끄리듯이. 

 

이 짦은 장면에는 금명과 애순의 전화 말다툼을 회고하는 금명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그 내레이션은 아마도 시간이 흘러 어쩌면 금명 또한 애순처럼 딸을 낳고 엄마가 됐던 시점에 돌아본 소회처럼 들린다. 이것은 엄마나 아빠 혹은 가족 같은 너무나 가까워 늘 하는 일들이 고마운 일이 되지 않고 당연한 일이 되곤 하는 관계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이다. 그건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인물을 통해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렇게 들려온 말들은 시청자들 각자의 기억을 헤짚는다. ‘연애편지’와 ‘낙서장’이라는 비교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남’과 ‘은인’이라는 말 역시. 

 

<폭싹 속았수다>는 간만에 눈물 버튼을 눌렀다. 시청자들의 후기를 보면 대부분 드라마보다 펑펑 울었다는 간증이 쏟아진다. 내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첫 회에 물질하고 나온 애순의 엄마 광례(염혜란)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그 버튼이 눌렸다. 쫄닥 젖은 채 지옥을 갔다 온 사람마냥 절절해보이지만 두 눈만은 생존의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그 버튼이었다. 그건 6,70년대 어떻게든 살아내려 애쓰던 우리 모두의 엄마들이 가졌던 그 눈빛이 아니던가. 

 

광례가 죽는 순간도 그랬지만, 그 어린 딸 애순(김태연)이 유일하게 엄마를 챙기려 애쓰는 모습도 그랬다. 그렇게 그 애순(아이유)은 또 자라나 광례 같은 엄마(문소리)가 되고, 자신 같은 딸 금명(아이유)을 낳는다. 아이유가 애순의 젊은 시절과 그 딸인 금명을 1인2역으로 소화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삶은 그렇게 마치 분신의 삶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어진다. 엄마가 살아남기 위해 포기했던 학업의 꿈을 딸이 이어받아 대신 이뤄내고, 그 딸의 꿈을 위해 엄마는 오래도록 추억과 상처가 가득한 집까지 팔고서도 기꺼워한다. 

 

애순의 옆을 무쇠처럼 지켜온 관식(박보검, 박해준) 또한 그 시대의 아빠들의 자화상이 어른거린다. 어떻게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밖에서는 모질게 일하면서도 집에서는 아프다 소리 한 번 안하고 살아온 아빠들. 딸 얼굴 한 번 보기 위해 천안에서 서울까지 일부러 찾아오고는 지나다 들렀다고 둘러대고, 떠나는 버스 안에서 쑥스럽게 손을 흔들다 딸이 손을 흔들어주자 너무 기뻐 양손을 흔드는 바보 아빠들이 그들이다. 무쇠가 닳도록 일하고도 “아빠 아직 살아있어”라고 자식 앞에서는 허세부리는 그런 아빠들. 

 

<폭싹 속았수다>는 이 윗세대와 그 아래세대들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그려나가면서도, 중간 중간 시간을 넘나들며 엄마의 이야기와 딸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그 딸이 엄마가 되어 자신의 딸과 엮어내는 이야기가 또 겹쳐진다. 젊어서 무쇠 같던 관식이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절뚝거리며 아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교차된다. 바로 이 시간을 넘나들며 보여주는 교차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깨닫게 된다. 왜 그 때는 몰랐었을까. 그 때의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니 알겠는 그 마음들이,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그 장면들의 교차 속에서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게 낙서장 쓰듯 했던 우리 각자의 후회와 미안함이 피어오른다. 순간 순간을 살다보니 놓치고 있던 것들이 인생 전체를 통해 내려다보니 드디어 가슴 저미게 보이는 것들이 생겨난다. 드라마 속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저절로 시청자들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드라마를 보며 불쑥 불쑥 무심했던 마음들이 새삼 떠오른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하고픈 마음이 <폭싹 속았수다>의 눈물 버튼을 누르고 우리는 여지없이 울 수밖에 없다. (사진:넷플릭스)

‘조립식 가족’으로 새로운 가족상, 아빠상 보여준 최원영

조립식 가족

“어떤 부모가 자식을 키워 줘? 키우는 거지. 잘 먹고, 잘 자고, 재밌게 살고 그러라고 키우는 거지. 돈 내놓으라고 키우는 거야? 갚으라고 키우는 거냐고?”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서 윤정재(최원영)는 강해준(배현성)에게 그렇게 말한다. 윤정재와 강해준. 벌써 성이 다르다. 그런데 이 윤정재는 자신이 강해준의 아빠라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윤정재는 우연히 선을 보게 된 강서현(백은혜)의 아들 강해준을 집으로 데려왔다. 해준의 엄마는 서울로 돈 벌러 간다고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이모 강이현(민지아)의 집에 맡겨진 해준은 이 아빠는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어린 해준이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아빠하면 좋겠어요.‘라고 하자, 정재는 아이를 받아들인다. ”그래. 그럼 여기 있을 동안은 아빠 해.“ 

 

그렇게 윤정재의 아들로 10년 간이나 살아왔지만 강해준에게는 이 아빠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게 있다. 자신을 아들로 키워준 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갚고 싶어한다. 친아빠가 나타나 미국 농구 유학을 떠났지만 발목을 다쳐 돌아온 강해준은 그간 패션 모델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 8억이 든 통장을 윤정재에게 내민다. 하지만 기뻐할 줄 알았던 이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낸다. “누가 그래 갚으라고? 너 아빠가 그런 거 하라고 미국 보냈어?”

 

이 아빠에게는 친딸인 윤주원(정채원)도 있지만 또 한 명의 아들도 있다. 이웃집 김대욱(최무성)의 아들 김산하(황인엽)다. 딸 윤주원이 어려서 오빠 오빠 하며 잘 따랐던 김산하는 그 나이에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윤주원은 그것도 눈에 밟혔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지내다 보니 김대욱도 김산하도 가족이 됐다. 김산하 역시 친 아빠가 있지만 윤주원에게도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이상한 아빠 윤주원은 사실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 판타지를 현실감 있게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배우 최원영이다. 역시 배우인 심이영과 결혼해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이 아빠는 ’조립식 가족‘을 통해 부성애와 모성애가 결합된 이 판타지적 인물을 현실로 끄집어낸다. 칼국수집을 하는 이 인물은 그래서 요리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정성껏 요리를 만들어내고 그걸 맛나게 먹는 가족들(성도 다르고 피도 다르지만)을 보며 흐뭇해한다. 세상 엄마들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동시에 자상한 아빠로서의 따뜻함도 보여준다. 성도 다른 아이들이 한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게다가 아빠 둘이 한 집에 있는 걸 이상하게 바라보는 동네의 시선에도 단호하게 맞선다. 김산하의 아빠 김대욱과는 오래된 친구처럼 저녁에 술 한 잔 나누는 사이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의견다툼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도 보인다. 최원영은 이 부성애와 모성애를 모두 가진 새로운 아빠상을 그려냈다. 만만찮은 연기의 내공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원영은 2002년 영화 ’색즉시공‘으로 데뷔해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무수한 작품들을 소화했다. 워낙 선한 외모를 갖고 있어 드라마 ’선덕여왕‘의 계백이나 ’상속자들‘의 윤재호 같은 평범한 훈남 역할이 많았지만, ’매드독‘에서 메인 빌런인 주현기 역할로 연기 변신에 성공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후 ’닥터 프리즈너‘에서도 악역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도 ’반짝이는 워터멜론‘ 같은 작품에서 더할 나위 없는 훈훈한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면모를 보여줬던 건데, 그의 연기 폭이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과정들을 거쳐 ’조립식 가족‘으로 돌아온 최원영은 이 기막힌 가족의 서사가 근거를 갖게 해주는 작품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낸다. 엄마는 없고 아빠만 둘인데다 성도 다른 말 그대로의 ’조립식‘ 같은 가족을 진짜 가족처럼 만들어내는 끈끈한 정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이 작품이 특이한 건, 보통 우리네 드라마에서의 고정되어 오기도 했던 성 역할이 뒤집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아빠들이 아이들을 버리고 가고 엄마가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드라마 속 고정된 성 역할이었지만, ’조립식 가족‘은 정반대다. 이 작품에는 엄마들이 모두 아이를 버리고 떠나가고 그 버려진 아이를 챙기는 건 이 이상한 아빠다. 이건 이 드라마의 원작이 중국드라마 ’이가인지명‘이기 때문에 생긴 판타지다. 중국은 우리와 달리 아빠들이 가족들의 식사를 챙기는 일이 일상적이다. 그건 아빠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달라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조립식 가족‘이 새롭게 보여주는 이 아빠상은 현재 우리의 달라지고 있는 가족형태 속에서 의미 있어 보인다. 가부장적 가족관과 그 속에 자리한 보수적인 아빠상은 이제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됐다. 그보다도 자상하고 집안일도 함께 챙기는 새로운 아빠상이 요구되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혈연과 핏줄을 강조하던 옛 가족관은 그것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안적 가족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내 핏줄만 소중하다 여기는 그런 구시대적 가족관으로는, 지금처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다 살 수 있는 공존의 시대를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윤정재라는 아빠의 존재는 ’조립식 가족‘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조립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준다. 핏줄이 아니어도 함께 밥 먹고 지내온 그들을 가족으로 보듬고 그렇게 실제로 새로운 가족이 되게 만드는 인물. 가족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해진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빠라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요즘 같은 가족 해체 시대에 대안적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그다.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연기를 해내며 스펙트럼을 넓혀온 배우 최원영이 이 이상한 아빠 역할을 통해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로 떠오르는 건 그 인물이 가진 대안적 성격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이지만, 이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아빠상을 그는 기막힌 연기로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조립식 가족’, 이 얼기설기 가족을 단단히 조립시킨 이 아빠

조립식 가족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따뜻하게 밥을 해줄 수 있나? 그래서 제가 염치없는 짓을 너무 많이 했죠?” JTBC 수요드라마 ‘조립식 가족’에서 20년만을 돌고 돌아 아들 강해준(배현성)에게 돌아온 강서현(백은혜)은 아들을 그동안 돌봐주고 키워준 윤정재(최원영)에게 그렇게 말한다. 고마운 마음의 표현이지만 윤정재라는 인물은 이런 말조차 서운해한다. “자꾸 그런 말씀 하시면 제가 서운해 합니다.”

 

윤정재는 그런 사람이다. 김산하(황인엽)도 강해준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아들처럼 키웠고 실제로 아들이라 생각한다. 윗층에 이사온 이웃이었고 그래서 아버지 김대욱(최무성)이 있지만 엄마 권정희(김혜은)가 버리고 간 김산하의 빈 자리를 채워준 건 바로 윤정재였다. 또 돈 벌러 서울 간다고 떠났다 돌아오지 않은 엄마로 인해 강해준이 느낄 빈 자리 역시 윤정재가 채워줬다. 

 

그는 강서현의 말대로 요즘 시대에는 보기 드문 ‘이상한 사람’이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따뜻한 밥을 해주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들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으며 식구이자 가족이라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김대욱과 김산하, 강해준 그리고 친 딸인 윤주원(정채연)을 한 가족처럼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다. 그에게 주변 사람들을 가족으로 대하고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이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가 또 아이들에게서 듣기 싫어하는 말은 ‘갚는다’는 말이다. “아빠한테 갚을라고 진짜 열심히 했는데...” 친아빠를 따라 미국 농구 유학을 갔다가 발목 부상으로 돌아온 강해준은 그간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8억이 든 통장을 이 아빠 앞에 꺼내놓는다. 아빠를 챙기고픈 해준의 마음이지만, 윤정재는 서운함을 느끼며 불같이 화를 낸다. 

 

“누가 그래 갚으라고? 너 아빠가 그런 거 하라고 미국 보냈어? 너 가기 전에 아빠가 뭐랬어? 딱 너 재미있는 만큼만 하고 오랬지? 설거지에 서빙? 네가 왜 손이 야무져. 아빠가 가게에서 그런 거 하라고 시킨 적 있었어?” 그러자 강해준이 울먹이며 말한다. “아니 그런게 아니고 아빠가 그래도 내를 10년 동안 키아주고...” 

 

하지만 그런 말도 이 아빠는 싫어한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키워 줘? 키우는 거지. 잘 먹고, 잘 자고, 재밌게 살고 그러라고 키우는 거지. 돈 내놓으라고 키우는 거야? 갚으라고 키우는 거냐고?” 그러면서 8억이 든 통장을 돌려주며 가져가라고 하고는 “자꾸 뭐 갚는다” 그런 소리 하지 말란다.  

 

윤정재라는 아빠의 이런 모습은 해준을 돌봐주는 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 괜스레 해준에게 “잘하라”고 하는 해준의 이모 강이현(민지아)에게 서운하다고 했던 말 속에도 담겨있다. “자식 가진 사람이 왜 몰라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그거 다 내 행복이지 얘네 행복이야? 나 좋자고 하는 일에 왜 해준이가 눈치를 봐야 돼?” 그러면서 “잘해라”, “은혜를 꼭 갚아라”고 하는 강이현의 말을 탐착찮아 한다. 

 

사실상 윤정재라는 아빠는 ‘조립식 가족’이라는 색다른 가족이 조립될 수 있는 근간이 되는 인물이다. 핏줄이 아니어도 함께 밥 먹고 지내온 그들을 가족으로 보듬고 그렇게 실제로 새로운 가족이 되게 만드는 인물. 가족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해진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빠라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요즘 같은 가족 해체 시대에 대안적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조립식 가족’은 조금 구식의 신파적 요소도 적지 않다. 또한 권정희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엄마의 극적 서사 같은 요소들은 다소 과하게 여겨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약점들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건 다름 아닌 이 ‘이상한 아빠’ 때문이다. 너무 따뜻해서 미치겠는 이 아빠를 보다보면 모든 것들이 다 용서된다. 그리고 저런 가족이 우리 사회에도 대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제 우리 사회도 가족의 재조립이 필요하다. 개인의 행복이 중요해진 시대인 건 크게 잘못된 일이 없다. 다만 그래서 더 이상 가족은 필요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게다. 우리 시대에 맞는 대안적 가족의 재조립. 각자의 행복이 우선되면서도 서로를 보듬을 수 있고, 그러면서도 지나친 혈육 지상주의로 빠지지 않는 가족의 가능성을 이 ‘이상한 아빠’가 너무나 따뜻하게 보여주고 있다.(사진:JTBC)

‘무빙’, 자식 가진 부모들을 초능력자로 그린 건

무빙

“아 아 아빠 어 엄마 데리러 그 금방 갔, 갔다 올게. 강훈이 자, 자기 전에 올 게. 아빠 야 약속 꼭 지켜. 지, 진, 진짜 강훈이 자기 전에 올게. 저지지 진짜 약속 꼭 지킬게.”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에서 재만(김성균)은 아들 강훈에게 재차 약속한다. 꼭 자기 전에 돌아온다고. 

 

재만은 바보다. 정신 지체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또 아들 밖에 모른다는 의미에서도. 밤이 늦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내가 걱정된 재만은 그토록 아끼는 아들을 혼자 집에 두고 아내를 찾으러 나간다. 자기 전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연거푸 하면서.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노점상 강제철거 반대 시위에 나섰던 아내가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재만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 

 

그는 초능력의 소유자다. 전경 1개 소대를 혼자서 때려 부술 정도로. 결국 이 사안이 보고되고 국정원의 민용준(문성근) 차장은 재생 능력을 가진 장주원(류승룡)을 부른다. 아내가 사망한 후 홀로 딸 희수를 키우고 있는 싱글 대디 장주원은 딸을 두고 작전에 나가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잠든 딸이 혹여나 깰까 어둠 속에서 군화끈을 맬 때 틱 하고 현관 불이 켜진다. 잠에서 깬 딸이 아빠를 위해 현관문 불을 켜준 것. 그리고 “잘 다녀와”라고 말한다. 그런 딸을 아빠는 꼭 껴안는다.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무빙>이 14회 ‘바보’라는 부제로 그리고 있는 건 아빠들의 이야기다. 아빠들이 출퇴근길에 느끼는 감정들이 이 회차에서는 반복적으로 담겨진다. 아들 바보 재만도 딸 바보 주원도 현관 앞에서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홀로 자식을 두고 일을 나가는 그 발길에 우리네 샐리러맨 아빠들의 소회가 묻어난다. 

 

일찍 돌아올게. 금방 갔다 올게. 아빠들이 그렇게 다짐하듯 자식들에게 남기는 말들은 번번이 지켜지지 못한다.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에 야근에도 또 일의 연장으로 벌어지는 회식자리도 빠지지 못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 갖게 되는 그 미안함과 쓸쓸함이 이 초능력을 가졌지만 바보 아빠들인 재만과 주원의 얼굴에 교차된다. 

 

아이러니한 건 가족을 위해 야밤에도 불러내면 일을 하러 나가야 되는 아빠들을 세상은 맞붙여 싸우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붙잡혀 가는 아내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폭주하게 된 재만도 그를 체포하기 위해 투입된 주원도 그 일에 서로에 대한 사적 감정 따위는 없다. 그저 가족을 위해 그 생계를 위해 싸우고 있을 뿐이다. <무빙>이 이 회차에서 포착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현실이다. 저마다의 생계를 볼모삼아 사회의 전장에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서로 싸워야 하는 현실. 

 

하지만 이 싸움은 한 아이로 인해 그 양상이 바뀐다. 맨홀에 빠져 살려 달라 애원하는 아이를 발견한 주원과 재만은 서로 싸우기 위해 날렸던 주먹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날리기 시작한다. 벽을 부수고 아이를 구해낸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누군가의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는 걸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아이를 구해내고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약속보다 늦게 귀가했지만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아이들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기막힌 한국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자식 가진 부모는 모두 초능력자가 된다는 서사가 이 ‘바보’라는 부제를 가진 14회에 담겨있다. 그들은 자식만 보이는 바보가 되고, 세상에 나가서는 ‘괴물’이 되기도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이가 안아주는 것만으로 모든 걸 위로받는 아이 같은 존재가 된다. 지금껏 그 어떤 작품이 이만큼 짠한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적이 있을까. <무빙>이라는 한국적 슈퍼히어로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다.(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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