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모색하는 곳 더키앙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657)
블로거의 시선 (96)
네모난 세상 (4446)
SPECIEL (19)
문화 코드 (1)
생활의 발견 (23)
술술 풀리는 이야기 (4)
스토리로 떠나는 여행 (10)
책으로 세상보기 (8)
문화 깊게 읽기 (4)
스토리스토리 (24)
사진 한 장의 이야기 (4)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7)
대중문화와 마케팅 (9)
Total13,186,896
Today183
Yesterday311

<펀치>, 흰 옷이든 검은 옷이든 속은 똑같다?

 

청와대에 들어온 검찰총장 이태준(조재현)과 법무부장관 윤지숙의 옷은 마치 이들의 대립된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검은 옷을 입은 이태준과 하얀 옷을 입은 윤지숙. 이태준은 옷에 빗대 자신들의 상황을 얘기한다. 까만 옷은 뭐가 묻어도 잘 안보이지만 흰 옷은 조금만 묻어도 확 드러난다는 것. 이것은 윤지숙 아들의 병역비리 카드를 쥐고 있는 이태준이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그에 대한 수사를 멈추라는 압력이다.

 

'펀치(사진출처:SBS)'

그러면서 이태준은 윤지숙에게 은근한 손을 내민다.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다. 충격적인 건 윤지숙이 그 손을 잡는다는 점이다. 흰 옷을 입었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윤지숙이나 이태준이나 마찬가지의 인간이라는 걸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독한 <펀치>의 현실인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퀀스다.

 

<개그콘서트>도찐개찐이라는 코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만일 윤지숙과 이태준이라고 화두를 던지면 도찐개찐!”이라는 답변이 나올만한. 나쁜 놈과 덜 나쁜 놈. 그 놈이나 그 놈이나 다 마찬가지인 세상이다. 세상에 선과 악으로 선명히 나눌 수 있는 경계란 게 있겠냐마는 <펀치>가 그려내는 세상은 악으로만 가득한 암울한 현실을 담고 있다.

 

검찰총장이 되어 권력을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치우는 이태준(조재현) 검찰총장이 나쁜 놈이라면, ‘청렴한 검찰을 내세우며 그와 대적하는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 역시 그저 덜 나쁜 놈에 불과할 뿐 은 아니라는 것. 결국 그들은 거래를 하고 박정환(김래원)을 희생양으로 삼아 꼬리자르기를 하려 한다.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의 거래. 그래서 생겨나는 희생양. 이것은 어쩌면 <펀치>가 우리네 정치와 사법의 현실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일 것이다. 머리는 늘 살아남는 꼬리 자르기는 무수한 의혹 속에서도 늘 반복되어 나오는 우리네 아픈 현실이 아닌가.

 

윤지숙의 이중성은 늘 그럴 듯한 명분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7년 전 병역비리를 수사 중이던 박정환을 갑자기 구속한 건 과정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윤지숙 자신의 아들이 그 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7년 후, 이태준과 김상민 회장의 유착에 대해 진술을 받아내고도 박정환만을 희생양으로 삼은 그녀는 또 경제가 어렵다는 식의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즉 윤지숙의 이중성을 통해 권력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란 사실은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걸 <펀치>는 아프게도 보여준다.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왔던 정치인들의 이야기들, 비전과 포부는 사실 어쩌면 개인적인 야망을 채우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펀치>의 인물들은 그 욕망의 동기가 진정한 선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와 연결되어 있다.

 

윤지숙의 이중성은 아들의 병역비리와 연결되어 있고, 이태준의 야망과 복수심은 살인자였지만 자신의 형인 이태섭(이기영)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시한부 삶을 판정받고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박정환의 행보는 그 모든 것이 가족들과 연결되어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건 정의니 사법 현실이니 하는 거창한 것들이지만 사실은 모두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그들은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한다.

 

사람은 결국 다 죽어.” 시한부 삶을 판정받은 박정환의 허무는 <펀치>가 바라보는 세상의 이전투구가 덧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좌우로 나뉘고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 서로 좀 더 나은 세상을 외치지만 그 이면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야망들이 번뜩이는 현실. 그 살풍경한 현실을 <펀치>는 죽음이라는 극단의 설정을 통해 폭로하고 있다. 결국은 도찐개찐인 현실을.

 

Posted by 더키앙

<펀치>, 죽다 살아난 김래원의 욕망과 본질

 

아마도 거의 모든 콘텐츠에서 죽음은 사태의 본질을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아닐까. SBS 월화드라마 <펀치>에서 박정환(김래원)과 신하경(김아중) 검사가 맞닥뜨리게 되는 죽음의 사태가 그렇다. 이태준(조재현)의 심복으로서 그를 검찰총장까지 만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들까지 해온 박정환은 그러나 정작 그 권력의 눈앞에서 사망선고를 받는다.

 

'펀치(사진출처:SBS)'

하지만 수술 중 코마 상태가 되어버린 박정환을 두고 사태의 본질이 드러난다. 즉 이태준은 혼수상태인 그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애도의 눈물이 아니라 배신의 눈물이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박정환의 전처인 신하경을 살인자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한편 신하경은 박정환을 살리기 위해, 또 그를 예전의 그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 앞에서 아군과 적군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셈이다.

 

<펀치>가 흥미로운 건 욕망의 끝에서 발견되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겪고 난 자가 발견하는 새삼스러운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드라마들을 통해 박정환 같은 야망의 인물들을 봐왔다. 이미 7,80년대의 시대극들이 대부분 그린 것이 그것이 아닌가. 이 야망의 인물들은 성공시대를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개발시대의 끝자락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다.

 

90년대 IMF가 터지면서 성공신화는 거품으로 판명 나 버렸고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았던 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성공신화의 죽음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통해 발견된 것들이 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며 살아왔다고 믿었던 삶이 사실은 다른 것들을 소외시키고 파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은 이처럼 본질을 드러내는 속성이 있다.

 

<펀치>는 마치 권투 경기를 벌이듯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드라마다. 박정환은 죽음의 끝에서 회생했고 그 과정을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형제처럼 이어질 것 같던 이태준과의 의리는 사실 같은 욕망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면 이혼한 전처와는 완전히 식은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남아있다는 걸 발견한다. 죽음의 경험은 그에게 본질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데 왜 하필 다른 것도 아닌 죽음일까. 여기에는 박경수 작가가 갖고 있는 현실인식의 단면이 들어가 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 현실은 그 정도, 즉 죽음을 맞이할 정도가 되어야 겨우 폭주기관차 같던 욕망을 멈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권력과 욕망이 폭주하는 현실에서 그만큼 우리의 삶은 피폐해졌다. 심지어 자신을 위협하는 적과 늘 자신을 생각해주는 아군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죽다 살아난 박정환이 자신의 욕망을 벗어나 삶의 본질로 들어가는 과정은 그래서 한번 보면 <펀치>의 한 방에 눈을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 과정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살짝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앞으로만 달려가는가. 모두가 달려가니 따라 달리던 우리네 관성에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드라마. 그게 바로 <펀치>.

 

Posted by 더키앙

소소함에 기뻐할 줄 아는 칠해빙, 이유 있었네

 

어쩌면 이렇게 짠하고 착할 수 있을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하루를 더 머물게 된 라오스 방비엥의 밤, <꽃보다 청춘> 삼인방 칠해빙이 인터뷰를 통해 건넨 말들 속에는 그들이 왜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소소함에도 한없이 기뻐하며, 자신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가가 들어 있었다.

 

'꽃보다 청춘(사진출처:tvN)'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고 심지어 비행기도 처음 타봤다는 손호준이 여행의 목표로 폐나 끼치지 말자고 마음먹고 친구와 동생의 속옷을 빨아주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것이 그의 진짜 성향이기 때문이다. 유연석은 그런 그의 겸손한 성품 자체가 너무 좋다며 그가 항상 자기를 낮추는 성향이라고 말했다.

 

야심을 묻는 이우정 작가의 질문에 그는 엉뚱하게도 유노윤호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일화를 꺼냈다. 자기가 너무 가난해서 굶으며 살아가던 시절, 유노윤호가 일본을 3개월 정도 가게 됐을 때 라면 몇 박스, 즉석밥 몇 박스를 다 사주고 갔다는 것.

 

유노윤호에 대한 고마움도 고마움이지만 유노윤호 없었으면 굶어죽었다고 말하며 그걸 잊지 않고 있는 손호준의 그 마음이 더 짠하게 느껴졌다. 그는 항상 받으면 돌려줘야 된다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걸 다 돌려주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성공해야 된다는 것으로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대신했다. 한류 같은 건 애초에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손호준이 왜 <꽃보다 청춘>에서 연예인인 척 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친구인 유연석을 좋아하고 따르며 친동생처럼 바로를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자신을 낮추고 타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겪어온 청춘의 삶을 통해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바로는 인생의 첫 번째 목표가 가족의 집을 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젊은 가장은 자신이 번 돈을 전부 부모님께 드렸을 때 부모님이 우시는 걸 보고굉장히 감동을 했다고 했다. 왜 청춘의 나이에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는 청춘 이전에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부모님이 고생 하시는 거 알고 하니까 무조건 내가 지켜드려야겠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이 묻어났다.

 

유연석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건넸던 신용카드 이야기로 눈시울을 붉혔다. “어디 같이 밥 먹으러 가서 칠천 원짜리 밥집이 찍혔어요. 그런데 자기가 처음으로 먹고 싶은 걸 연석이 니가 준 카드로 시켜먹어 봤다. 항상 주부고 엄마고 하다 보니까. 그 천원 이천 원이 아까워서 칠천 원짜리가 먹고 싶은데 항상 오천 원짜리를 드신 거죠. 그러다가 처음으로 돈 생각을 안 하고 아들내미가 준 카드로 칠천 원 짜리를 시켜 먹어봤다고 하는 거예요. 아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느껴지니까 참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들이 방비엥의 블루라군에서 자전거를 제작진의 오토바이로 바꿔 타고 돌아온 후, 그게 뭐 그리 큰 일이라고 그토록 제작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 새삼 이해되는 부분이다. 얼마나 이 청춘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폐가 되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왔을까.

 

손호준과 바로, 그리고 유연석의 이야기 속에는 한없이 즐거운 일만 있을 것 같은청춘에 대한 막연한 우리의 편견을 깨는 구석이 있다. 밝게 웃는 그들의 이면에 놓여진 남다른 청춘의 신산함과 고단함. 어쩌면 이건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각박한 현실을 대변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청춘들의 또 다른 면. 그것을 <꽃보다 청춘>은 보여주었다.

 

Posted by 더키앙

<황금의 제국>, 이 지옥에서 살고 싶은가

 

또 다른 <추적자>를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수 있다. <황금의 제국>에는 <추적자>에서 보여졌던 서민 대 재벌의 대결구도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과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고수)는 같은 서민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 변해가는 모습이 다르다. 백홍석이 가진 자들의 편에 선 잘못된 사법정의와 맞선다면, 장태주는 “당신 아버지 최동성 회장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데 난 왜 안돼죠?”하고 되묻는 인물이다.

 

'황금의 제국(사진출처:SBS)

장태주가 살아보겠다는 그 최동성(박근형) 회장은 “수십 번의 고소를 당했고 몇 번이나 검찰 조사를 받았고 시멘트 공장으로 시작해서 불량 시멘트로 큰 돈을 벌고 멀쩡한 회사를 자금압박해서 인수하고 마흔 두 군데의 계열사를 만든” 인물이다. 장태주가 최동성 회장처럼 살겠다 마음먹는 근거는 아버지가 남긴 말 때문이다. “아버지가 한 번도 못 이겨본 이 세상에서 태주 니는 꼭 한번 이겨봐라.”

 

즉 <황금의 제국>에 가난한 자의 선함과 부자인 자의 악함 같은 단순히 빈부 차이로 나눠지는 선악대립구도 따위는 없다. 다만 황금의 법칙으로 굴러가는 돈이라는 감정 없는 괴물이 있을 뿐, 선함으로 호소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이겨야 한다. 착하게 살았다며 자기 위안에 빠지는 일은 이 ‘황금의 제국’에서는 패자의 넋두리가 될 뿐이다.

 

<황금의 제국>에는 이처럼 정의의 수호자나 서민의 대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추적자>가 정의를 수호하려는 서민의 주인공을 내세워 만들어낸 ‘공분’이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카타르시스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황금의 제국>은 이러한 단순 해소의 카타르시스보다 더 중요한 대결의식을 보여준다.

 

재벌가 하나가 무너진다고 해서 이 ‘황금의 제국’이 사람 냄새 나는 곳이 될 것인가. 시스템이 건재한 이상 또 다른 제국의 지배자가 그 자리에 생겨날 것이다. <황금의 제국>이 겨냥하는 것은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내는 그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제목이 말해주듯 ‘돈’의 흐름이 지배한다.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의 악역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이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악역은 ‘돈’이 만들어내는 자본의 시스템 그 자체이니까.

 

최동성 회장의 집안은 ‘황금의 제국’의 축소판이다. 가족이 모여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말 한 마디로 회사의 사장이 바뀌고 수만 명 노동자들의 운명이 바뀌며 수백 억 원의 손실을 입혔어도 용서가 되는 곳. 최동성 회장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형제와 자식들 간에 회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전투구는 이 곳이 과연 한 가족의 보금자리가 맞는가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동생이 형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하고, 그 형은 동생의 자식을 교도소로 보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들며 그 동생의 아들은 큰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가는 곳. 또 지주회사 쟁탈전을 벌이면서 형제들 간에 자기 지분과 회사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 그 곳이 바로 황금의 제국의 축소판인 최동성 회장의 집안 풍경이다. 혈육이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이곳을 최동성 회장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태주는 그 최동성 회장처럼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는 성진그룹의 새로운 회장이 된 최서윤(이요원)에게 ‘해님 달님’ 동화를 얘기하면서 자신은 동아줄을 잡기보다는 쫓아오는 호랑이와 싸우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야망’ 같은 것이겠지만 그 야망이 불러올 비극적인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꿈꾸는 최동성 회장의 삶은 결국 그 지옥 같은 황금의 제국 속에서 초라한 죽음으로 끝을 맺을테니 말이다.

 

본래 돈은 모두를 평등하게 구분 짓는 힘을 가졌다. 즉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진 만큼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태생으로 신분이 결정되던 시대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돈이 상징하는 평등한 사회는 이뤄졌는가.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러자 없는 자는 더 적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다면 많이 가진 자는 진정 ‘황금의 제국’의 제왕이 되었을까. 이것은 환상일 수밖에 없다. ‘황금의 제국’의 주인은 오로지 하나, ‘황금’일뿐이니까. <황금의 제국>이 최동성 회장의 몰락과 장태주의 끝없이 타오르는 야망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은 그래서 <추적자>의 다소 낭만적인 카타르시스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황금의 제국>이 <추적자>보다 더 도발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Posted by 더키앙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