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카터의 ‘원더우먼’과 갤 가돗의 ‘원더우먼’

사실 슈퍼히어로물의 세계에서 여성 히어로의 지분은 낮았다. 마블이 탄생시킨 블랙위도우(스칼렛 요한슨) 정도가 두드러진 여성 히어로의 존재감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DC가 탄생시킨 영화 <원더우먼>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리고 개봉된 <원더우먼>에 대한 국내외 반응들은 물론 호불호가 나뉘는 부분이 있지만 대체로 호의적인 편이다. 

사진출처:영화<원더우먼>

갤 가돗 주연의 <원더우먼>이 그 시대적 배경을 1차 세계 대전으로 삼은 건 실로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싶다. 전쟁의 신 아레스와 대적할 수 있게 탄생된 여성영웅이라는 설정과 1차 세계 대전의 그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이 여성 히어로의 모습은 상징과 실감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장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남성으로 그려져 있고, 그 남성성과 대항하는 여성성으로서 원더우먼 다이애나 프린스가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을 위해 전장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장면은 마치 신화를 담은 그림처럼 선명하다. 다이애나는 그래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파괴와 폭력에 맞서는 슈퍼히어로로 세워진다. 

게다가 1차 세계 대전의 전장 속에서 싸우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처음부터 초인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날아오는 총알을 손목의 팔찌와 방패로 막아내고 놀랄만한 점프력과 괴력을 발휘하는 장면으로 그 힘을 인지시키고, 차츰 후반부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레스와의 대결로까지 이어놓는다. 황당할 수 있는 장면을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조금씩 그 힘을 납득시키면서 차츰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건 다분히 전략적이다. 

여성 관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이애나 같은 여성 히어로가 전장에 뛰어들어 전쟁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그 액션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하다. 갤 가돗은 다이애나가 가진 그 강인함과 순수함을 연기로 잘 표현해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만들어낸 멜로 상황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을 폭력과 맞서게 하는 힘으로 그려내기 위한 설정으로서 담아낸 것도 이 영화가 꽤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해준다. 

하지만 <원더우먼>의 발목은 잡은 건 의외로 갤 가돗이라는 배우에게 갑자기 터진 시오니스트 논란이다. 이스라엘 출신으로서 군 복무 경험이 있는 갤 가돗은 2014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의 민간인 대피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했을 때, SNS에 이스라엘 군을 독려하는 글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됐다. 이런 전적을 가진 그녀가 전쟁과 맞서 싸우는 원더우먼을 연기한다는 것이 맞지 않다는 논란이 생겨난 것. 그래서 영화와 배우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원더우먼>의 갤 가돗 논란이 생겨나면서 갑자기 부각된 인물은 과거 동명의 TV 시리즈로 우리에게 영원한 원더우먼으로 남아있는 린다 카터에 대한 관심이다. 물론 당시의 TV 시리즈는 원더우먼을 다소 성 상품화하는 방식으로 소비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를 연기했던 린다 카터는 현재 재즈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페미니스트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과거 TV시리즈가 그려냈던 원더우먼 캐릭터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은 바 있다. 그녀는 원더우먼의 본질이 ‘슈퍼파워’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지성, 선의’라고 밝히며, 작가들이 “남자 슈퍼히어로에 여자 옷만 입혀놓았을 뿐 다른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현재 영화화된 <원더우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과거 TV 시리즈에 대한 불만의 토로다. 그 린다 카터가 꿈꾸던 여성 히어로의 모습을 현재 영화 <원더우먼>은 잘 그려냈다고 보인다. 물론 갤 가돗 논란이 그림자를 드리우곤 있지만.

<디마프>, 여성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그러진 우리 사회

 

꼰대들의 드라마? 애초에 이런 기치를 내걸었다지만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거기서 머무는 드라마는 아니다. 단지 어르신들의 이야기만이 아니게 된 것은, 그들의 삶에 묻어난 많은 것들이 우리 사회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눈물 없이는 보기 어려운 드라마는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종합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디어 마이 프렌즈(사진출처tvN)'

물론 이야기는 어르신들의 삶에서부터 시작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삶. 그래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혼자 살 수 있다고 되뇌는 희자(김혜자), 한 평생 구두쇠에 꼰대 남편 밑에서 살아오며 차라리 <델마와 루이스> 같은 자유롭게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 삶을 꿈꾸는 정아(나문희) 같은 어르신들의 삶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에게서 묻어나는 건 우리 사회 현실의 많은 문제들이다. 폭압적인 남편을 그저 참으며 살아온 정아는 알고 보면 상습적인 아버지의 폭력을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에서 영향 받은 것이고, 그것은 또 폭력을 당하는 딸의 삶으로 대물림된다. 이것은 우리네 근대사에 점철된 가부장제로부터 지금껏 흘러온 폭력의 역사를 고스란히 그려낸다.

 

그 폭력 속에는 바람 피는 남편 같은 불륜의 문제가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결과들까지 들어 있다. 남편과 자기 집 침대에서 뒤엉켜 있는 다른 여자를 본 난희(고두심)는 그 충격에 자살을 결심한다. 딸을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어 딸에게도 약을 먹인 일을 저지른 난희는 훗날 딸 완이(고현정)에게 그 때 일로 인해 자신이 갖게 된 선택들에 대한 처절한 원망을 듣게 된다. 난희는 그 일로 유부남과 장애인(동생이 장애를 가져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 때문)은 안된다고 완이에게 버릇처럼 말하고, 완이는 그 때 그 일 이후 자신은 엄마 거라는 걸 확인했다며 엄마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아픈 트라우마로 남아 그들의 삶 역시 굴절시킨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난희에게 완이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하(조인성)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자 버렸다며 그것이 엄마 탓이라고 절규한다. 그런 딸의 아픔을 뒤늦게 알게 된 난희는 완이를 끌어안고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가 어르신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결국 비뚤어진 남성성의 폭력의 역사가 드러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여성들의 우정같은 연대로서 화해되고 해결되는 모습을 그리게 됐다는 건 주목해볼 일이다. 난희는 불륜 상대녀의 친구였던 영원(박원숙)과 결국 화해하고, 또 어린 시절 그런 고통을 겪게 만든 딸과도 화해한다. 정아는 남편에 대한 복수의 칼로서 이혼을 결심하고 친구들은 그녀를 돕는다. 성재(주현)를 두고 희자와 충남(윤여정)이 모두 관심을 갖지만 충남은 희자에게 남자를 양보한다. 그리고 확인하는 건 다시 그들의 우정이다.

 

남성성의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수직적 관계들을 <디어 마이 프렌즈>는 여성성의 우정으로 대변되는 수평적 관계로 그 해결점을 보여준다. 이 어르신들의 삶 속에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주름을 발견하는 건 그래서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연대에 심정적인 지지를 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실로 어르신들을 이토록 깊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 담겨진 삶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건 이 드라마가 가진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역시 노희경이다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육룡이 나르샤>의 놀라운 캐릭터 활용법

 

<육룡이 나르샤>에 박혁권이란 배우가 없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 이 사극이 박혁권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육룡이 나르샤>의 초반부의 힘은 다름 아닌 백성들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없이 개인적인 권력과 치부에만 몰두하는 도당 3인방,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라는 인물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공적을 세워두자 육룡들(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무휼, 분이)’이 행동하는 대의명분이 생겨났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속에서 길태미는 삼한제일검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강렬한 캐릭터를 보여줬다. 자못 여성적인 느낌이 드는 짙은 화장과 행동거지는 칼을 집어 들면 돌변하는 그 잔혹함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반전을 이루며 시청자들에게 긴장감을 유발했던 것. 한 평생 이룰 건 다 이뤘다는 말로 자신의 최후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에서는 무술의 고수다운 풍모가 묻어났지만, 피칠갑을 한 채 저잣거리에서 관군들을 도륙하는 장면은 마치 괴물 같은 살벌함을 그려냈다.

 

하지만 길태미가 이방지(변요한)에 의해 최후를 맞는 그 순간, 이를 구경하는 저 뒤편 백성들 틈에는 또 다른 존재인 길선미(박혁권)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길태미의 최후로 박혁권이란 배우는 이제 하차하는가 싶었는데 길선미의 등장으로 계속 이어졌던 것. 길선미는 자못 길태미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로 읽혀졌다. 이방지가 어렸던 시절에 그를 구해 중국으로부터 온 무술 고수에게 넘겨줘 그가 무술을 배울 수 있게 한 인물이다. 또 무명이라는 조직에 의해 사라져버린 이방지의 어머니의 소식을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길선미는 그 이름(가운데 선이 들어가 있어)에서도 언뜻 묻어나듯 악행을 일삼은 길태미와는 사뭇 다른 존재라고 여겨졌던 게 사실이다. 캐릭터도 길태미와는 전혀 다른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래서 어딘지 육룡들과 함께 신조선을 도모하려는 인물처럼 보였지만 그것 역시 겉모습에 불과했다. 길선미는 갈수록 미스테리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육룡이 나르샤>무명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조직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며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어찌 보면 조선 건국의 역사를 대부분 알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역사적인 이야기를 극화해 보여주었던 초반부의 긴장감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무명이라는 가상의 조직을 극 속에 깔아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사실의 재현만이 아니라 무명이란 조직과의 밀고 당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 무명이란 조직의 한 꺼풀을 보여주는 존재가 다름 아닌 길선미다. 그는 이방지와 분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엄마 연향(전미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지금껏 이 드라마의 흐름을 놓고 보면 길태미에서 그저 선한 고수로 보였던 길선미로, 또 나아가 무명이라는 비밀스런 조직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보이는 길선미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만일 이 세 명(사실은 둘이지만 셋이라고도 볼 수 있는)의 캐릭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고 있는 박혁권이라는 배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실로 칭찬이 아깝지 않은 연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박혁권이 연기한 길태미와 길선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지는 건 이 사극이 가진 놀라운 캐릭터 활용법이다. 50부작의 긴 호흡을 끌고 가면서도 이토록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긴박감이 유지될 수 있는 건 적재적소에 궁금증을 유발하는 새로운 캐릭터들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닌 박혁권의 활용을 보면 이 사극의 매력이 바로 그 변화무쌍한 캐릭터들의 끝없는 등장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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