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버리자 여성이 된 문근영, 그리고 신윤복

문근영은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를 얻는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귀엽고 순수함이 묻어나는 미소, 특유의 선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은 그녀를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려놓았지만, 그것은 또한 족쇄이기도 했다. ‘어린 신부(2004)’, ‘댄서의 순정(2005)’으로 구축된 여동생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의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는 한편, 모 이동통신사의 CF를 통해 섹시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그녀를 여동생 이미지로 두고 싶어했다.

2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문근영에게 다가온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남장여자란 그녀가 강요받아온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와, 또 변신해야할 성인연기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난 제3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우리네 연예계에서 여성연기자들에게 강요되는 두 이미지, 즉 귀엽거나 섹시한 그 이미지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녀가 여성의 이미지를 버리자 오히려 여성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화동(畵童)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문근영이라는 국민여동생이라 불리던 연기자에게 가장 편안한 옷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남성으로 살아가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은 신윤복의 겉모습인 화동의 이미지를 깨고 바깥으로 슬쩍슬쩍 빠져나온다. 스승인 김홍도(박신양)의 등에 업혀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그림을 가르쳐주기 위해 잡은 김홍도의 손길에 마음이 떨리기도 한다.

이러한 ‘강요된 남성성, 드러내고 싶은 여성성’은 문근영이라는 연기자가 꿈꾸던 것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이미지보다는 아이의 이미지로서 보여지길 원하는 대중들의 욕망과 그 속에서 본인 스스로 보여주고픈 여성의 이미지는 정확하게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상황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이 그림 속에서 여성성에 끌리는 것(여성을 주로 그리고 화풍 또한 여성성을 따른다)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과도 연결된다. 신윤복은 그려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당대의 틀을 깼던 화원이다.

극중 신윤복이 정향(문채원)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남성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여성성을 더 강조한다. 신윤복은 금기된 것, 즉 여성성에 대한 희구를 여성의 아름다움에서 찾으려 한다. 신윤복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림에 담으려 하는 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다. 그녀는 정향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음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채워 넣으려 하는 것이다. 그녀가 ‘단오풍정’의 그림을 펼쳐놓고 정향에게 “이 그림 속에 들어와 주시요”하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보면 문근영이란 연기자와 신윤복이라는 캐릭터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문근영은 연기자로서 강요된 이미지와 드러내고픈 이미지를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러내고 있고,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문근영이라는 연기자의 훌륭한 옷이 되어주고 있다. 신윤복을 통해 보여준 문근영의 이미지 변신은 또한 우리네 여성 연기자들이 가진 딜레마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 연기자로서 강요되는 이미지를 넘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연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문근영은 신윤복을 통해 그걸 보여주었다.

님의 질문이 님에게 다시 되돌아간 이유

[한 장면으로 읽기] 순이(수애)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남편을 꼬박꼬박 면회 갑니다. 달거리에 맞춰 보내는 시어머니의 마음은 아마도 삼대독자의 대를 이어보자는 심산이겠죠. 여인숙에 어색하게 앉은 순이는 상관조차 하지 않고, 남편 상길(엄태웅)은 소주를 마십니다. 상길은 사실 따로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죠. 가만히 앉아있는 순이에게 넌 모를 거라는 식으로 묻습니다. “니 사랑이 뭔지 아나?” 그리고 혼자 돌아 누워버리죠.

사실 이렇게 사랑 받지 못했던 순이가 이역만리 전쟁통인 베트남까지 남편을 찾아 나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남편이기 때문에? 혹은 남편은 사랑을 주지 않았지만 자신은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시켜서? 시집에서도 쫓겨나고 그렇다고 받아주지 않는 집 때문에 갈 데가 없어서?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순이는 아무런 속시원한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본래 순이는 그런 사람인가 봅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뭔가를 말해주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반면 행동은 별로 영양가가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입니다. 정만(정진영)은 베트남만 가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 밴드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얘기했지만, 그것이 깨지는 건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 전쟁통에 젊은 장병들을 내보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남자들’은 모두 호언장담하며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껴안는 건 오히려 순이입니다. 순이는 기꺼이 청소도 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속살도 내보입니다.

전쟁으로 상징되는 남성성과 베트남의 자연으로 상징되는 여성성도 영화와 마찬가지의 구도가 아닐까요. 잘 알다시피 베트남 전쟁은 자연(여성성)과 인간(남성성)의 싸움의 성격이 강하죠. 미국이 전쟁에서 진 것은 자연에게 진 것입니다. 온몸을 잡아끄는 촘촘하게 자란 나무들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날씨와 지형들은 화력이 우세한 미국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죠. 정글에 불을 지르고, 고엽제를 뿌리고, 융단폭격을 해대면서 미국은 결국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자연이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한편 자연은 베트남 사람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그들의 지하땅굴 생활 속에서의 평온함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일 저지르는 남성성(전쟁, 남자)과 그것을 통째로 끌어안는 여성성(자연, 여성)은 이 영화를 통해 대비적으로 그려집니다. 수많은 전투로 피폐해진 정신의 남성들 속으로 뛰어든 한 여자의 육탄공세로 한 때의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위문공연 장면들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그 본질은 남성성을 끌어안으며 장악해버리는 여성성의 힘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 남편이 질문했던 “니 사랑이 뭔지 아나?”하는 그 질문이 이역땅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순이에 의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다시 남편에게 질문되어지는 그 장면입니다. 남편의 말만 번지르르한 사랑과, 순이의 행동으로 보여준 사랑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것이 여성성의 시선으로 그리겠다면서 정작 남성적 시각을 가끔씩 드러내는 이 영화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입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영화관을 나오는 많은 관객들에게도 되돌려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섹시한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순이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던 분들까지도 말이죠.


‘놈놈놈’의 남성성 vs ‘님은 먼곳에’의 여성성

여름시장에 등장한 ‘놈’과 ‘님’은 그간의 부진을 씻고 한국영화의 부활을 알릴 것인가. 지금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놈놈놈’은 개봉 첫 주에만 219만의 관객을 올리면서 벌써부터 올 최고 기록인 550만의 ‘추격자’를 따돌리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이어 개봉한 ‘님은 먼곳에’ 역시 여름 극장가의 최대 관심작으로 떠오르며 매년 반복되어왔던 여름시장 쌍끌이 흥행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 두 작품이 모두 대작이지만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가진 영화들이란 점이다.

남성적인 ‘놈놈놈’, 스토리보다는 볼거리
마카로니 웨스턴과 우리나라에서 60년대 유행처럼 등장했던 만주 웨스턴을 오마주한 ‘놈놈놈’은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그러하듯이 그 정서가 지극히 남성적이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와 그 열차를 가로막고 벌어지는 총격전 그리고 모래바람 속을 달리는 추격전이 압권인 ‘놈놈놈’은 철저히 남성적인 스타일을 구사한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 세 캐릭터들이 나누는 대화는 최소화되고 대신 살과 살이 부딪치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액션은 김지운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쉬한 카메라에 거칠면서도 강력하게 표현된다.

이 남성적인 영상 속에서 늘어지는 대사나 감정의 머뭇거림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 라인을 바탕으로 삼아 끌어가는 스토리의 묘미는 이 영화 속에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시종일관 달리고 쏘고 칼을 던지는 화려한 볼거리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을 가질 것이다. 유난히 스토리에 매료되는 우리네 관객들을 배려한 좀더 아기자기한 드라마가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식의 호쾌한 활극을 우리 영화에서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본다면 여기서 우리 영화의 새로운 길 하나를 발견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여성적인 ‘님은 먼곳에’, 볼거리만큼 섬세한 감성
반면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는 월남전이라는 전쟁을 다루지만 지극히 시선은 여성적인 영화다. 월남에 파병된 남편을 찾아 베트남에 와서 밴드활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순이(수애)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전투 장면과 공연 장면 같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그것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처리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 영화의 스토리가 가진 비약은 그다지 단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외부적인 사건에 머물기보다는 그 사건을 맞이하는 인물의 감정에 몰입함으로써 감독이 말하려는 남성성(전쟁)과 여성성(모성)의 대결을 여성의 시점으로 극대화한다.

영화 속 대부분 남성들은 일을 저지르는 존재들이며, 순이로 대변되는 여성성은 늘 그 저지른 일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커먼 남자들이 떼로 모여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장면은 따라서 이 순이의 시선으로 보면 때론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듬듯 끌어안는 순이의 모습은 마치 총을 쏘고 불을 지르는 인간들을 그대로 품에 안는 베트남의 대자연과 오버랩 된다. 게다가 미군이든, 베트공이든, 또 한국군이든 순이의 노래에 순간 전쟁을 잊어버리는 장면들은 이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여성의 시선을 감지하게 한다. 스토리의 인과관계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인물의 감성에 맞춘다면 영화 내내 깊은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가 부딪치는 이 여름 시장 속에서 이처럼 기대작 두 편이 서로 상반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실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놈’이 그 말처럼 남성적이듯, ‘님’ 역시 그 어감처럼 여성적이다. ‘놈’은 시종일관 부딪치고 싸우며, ‘님’은 아련한 그리움을 가슴속에 먹먹하게 흩뿌려놓는다. 뜨거운 여름, 호쾌한 액션과 깊은 감동이 있는 이 두 편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는 건 어떨지.

‘히트’에 보이는 여성성 경향

MBC 드라마 ‘히트’가 그려내는 강력계의 풍경은 욕설이 난무하고 폭력이 행사되던 여타의 우리네 형사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먼저 강력계 팀장이 차수경(고현정)이란 여성이란 점이 다르다. 김영현 작가가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히트 팀에 여성을 내세운 것은 이 드라마가 전작인 ‘대장금’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김영현 작가는 여성들의 성장 드라마 혹은 사회적 성공에 대한 환타지를 제대로 포착해내는 작가이다. ‘대장금’의 장금이가 조선시대 수라간 이야기를 통해 현대적 여성상의 전형을 에둘러 보여주었듯이, ‘히트’의 차수경 역시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강력계 이야기 속에 보란 듯이 팀장 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강력계 팀장을 여성으로 세우는 순간부터,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형사물들이 다루었던 범죄와 수사라는 재미에, 직장(?)여성의 성공담 혹은 성장담이라는 새로운 재미가 덧붙여지게 된다. 그 두 재미 중 무게중심이 기우는 것은 당연히 후자이다. 이유는? 전자는 이미 다른 드라마, 영화에서 수없이 다루어진 닳고닳은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즉 히트라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팀을 이끄는 차수경이란 여성 리더십이 진짜 볼거리란 이야기다.

다른 형사물과 다른 차수경의 리더십
차수경의 리더십을 보면 확실히 다른 형사물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지시를 내릴 때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장형사(최일화)가 가출한 딸을 찾아 근무지를 이탈해 홍콩으로 갔을 때도 질책하기보다는 그를 도우려고 애쓴다. 물론 극화된 것이지만 그녀는 심지어 홍콩까지 그를 찾아간다. 심종금(김정태)이 비리를 저지르고 다녀도, 김일주(정동진)가 같은 팀원 뒤를 캐고 다녀도 그녀는 인상을 쓰면서 한숨을 푹 내쉴 뿐, 주먹질을 한다거나 욕을 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대신 팀원들을 가족같이 끌어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속을 지글지글 끓이면서도 챙길 건 다 챙겨주는 우리네 어머니들을 닮았다. 모성으로 느껴지는 이 리더십을 보면서 팀원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명령이 아닌 대화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은 요즘 회사 내에서 불고 있는 ‘펀(fun) 경영’이나 ‘위미니지먼트(womanagement, 매니지먼트 개념에 우먼이 합쳐져 만들어진 신조어)’를 연상시킨다. ‘히트’팀의 다른 풍경은 상명하복, 위계질서 등 과거의 남성성으로 대변되던 기업문화가 지금 상호존중과 조화 등 여성성을 내포한 문화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포착해낸 결과로 보여진다.

김재윤은 왜 애교만점 캐릭터가 되었나
그런데 그것이 단지 차수경이란 여성 강력계 팀장 때문 만일까. 이 드라마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은 그녀에서 머물지 않는다. 차수경과 멜로 라인을 만들어가는 김재윤(하정우)이란 캐릭터를 보면 그것은 단박에 드러난다. 그 역시 검사라는 설정이 있지만 과거의 명령체계와는 전혀 다른 리더십을 구사한다. 그의 리더십은 지켜봐 주고 도와주는 것이지 억지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멜로 라인에서 보여주는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김재윤은 고압적인 인물이 아니다. 스스로 무너져 애교를 부리면서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캐릭터다. 그가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것은 외모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아니다. 그것은 배려하고 도와주는 그 캐릭터 속에 숨겨져 있는 여성성 때문이다. 그가 차수경에게 자꾸 잊고 있던 서랍장 속의 하이힐을 끄집어내 신겨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녀가 잃어가는 여성성을 되살려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남성식은 어떻게 미키성식이 됐을까
이런 캐릭터의 여성성 경향은 다른 팀원들에게서도 드러난다. 가장 남성적으로 보이는 남성식(마동석, 이름조차 남성식이다)은 겉으로 보기엔 남성성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그렇게 여성적일 수가 없다. 무기 같은 근육질에 우락부락한 얼굴로 배신한 차수경에게 전화를 해 소리를 질러대지만 그 눈에 눈물이 흐르는 면모를 보여준다.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가 수줍게 자그마한 꽃 한 송이를 들고 있는 듯한 분위기 탓일까. 유독 남성식은 미키성식이라 불리며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히트’는 팀원들 간의 관계 역시 명령과 복종이 아닌 대화하고 고민하는 어찌 보면 가족 같은 수평적 관계를 그려낸다. 장형사(최일화)는 직급은 가장 낮지만 팀내에서는 맞형으로 대우를 받는다. 반대로 김일주(정동진)는 팀내에서 직급이 가장 높지만 막내 취급을 받는다. ‘히트’팀의 이런 관계는 거의 대부분의 권한을 위임받은 팀장이지만 팀원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급 호칭을 파괴해버린 어느 회사를 연상케 한다.

‘히트’의 의미 있는, 위험한(?) 시도
‘히트’에서 드러나는 여성성 경향은 작금의 변화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미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톰킨스는 “기업 경영자들이 마르스(화성)형에서 비너스(금성)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로 변화되는 조직을 표현했는데, 여기서 마르스는 전생의 신인 반면, 비너스는 미의 여신이다. 즉 정보화, 감성 마케팅 같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여성성을 극대화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남성들조차 남성성으로 요구되는 마초이즘의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대. 그런데 이렇게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히트’는 왜 히트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술했듯이 이 드라마가 갖는 두 가지 재미, 즉 범죄와 수사라는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재미와 직장여성의 성공담이라는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재미 사이에 균형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본격 수사물과 멜로 드라마, 아르레날린과 감성,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화시키려던 ‘히트’의 의도는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성이 너무 강조되면 현실의 리얼함이 취약해지기 마련이고 남성성이 너무 강해지면 과거 여타의 형사물과의 차별점을 잃게 된다. 이것이 마초이즘을 버린 형사물, ‘히트’가 지금 처한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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