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메이커', 김희애와 문소리의 연대가 그리고 있는 것

퀸메이커

김희애에 문소리다. 작품 하나하나 허투루 선택하는 일이 없는 이 두 배우가 한 작품으로 뭉쳤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메이커>. 제목부터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여성 서사다. 

 

김희애와 문소리가 각각 연기하는 황도희와 오경숙은 서로 대척점에서 만난다. 황도희는 은성그룹 재벌가 사람들이 저지르는 갖가지 더러운 비리들을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처리하는 해결사다. 그는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로 그 악마의 재능을 재벌가의 더러운 짓거리에 쏠린 대중들의 공분을 분산시키고 덮어버리는 데 쓴다. 

 

반면 ‘코뿔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오경숙은 인권변호사로 부당하게 해고된 여직원들을 위해 은성백화점 옥상에서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황도희와 오경숙은 정반대의 위치에서 부딪친다. 오경숙을 끌어내리려는 은성그룹 오너들의 편에서 황도희가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은성그룹의 충성스런 개로 살아가던 황도희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은성그룹 재벌가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세상에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더할 나위 없는 사위로 알려진 백재민(류수영)의 추악한 실체를 확인하게 되면서 황도희는 심경에 변화를 겪는다. 결국 은성그룹을 퇴사한 황도희는 한 때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었던 황도희에게 손을 내민다. “오경숙, 시장하자.”

 

드라마에서 그토록 많이 등장했던 구도가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프레임이었다면, <퀸메이커>는 그런 구도로 시작하지만 그들이 함께 손을 잡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그렇게 오경숙을 시장으로 만들려는 황도희는 은성그룹이 시장을 만들려는 백재민과 맞서게 된다. 재벌가 사위와 인권변호사의 대결.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보이지만, 오래도록 은성그룹 재벌가를 위해 일했던 황도희는 그들의 약점 또한 정확히 알고 있다. 일방적인 게임이 아닌 치고받는 치열한 공방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황도희라는 인물은 한때 재벌가에서 일했지만 어떤 각성을 한 후 그 경험들을 통해 그들과 맞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과거 김희애가 연기했던 <밀회>의 오혜원이라는 인물과 겹쳐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건 이기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다. 정치판에 뛰어든 만큼 어떻게든 오경숙을 시장으로 세우기 위해 갖가지 지략들을 짜낸다. 

 

여기에 오경숙 또한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황도희가 “타고 났다”고 말할 정도로 순발력 있게 던지는 말에 힘이 있고, 그렇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시선을 집중시키게 만드는 인물이다. 정치인으로서 나선 적은 없지만, 황도희의 말처럼 이미 그 자질을 갖고 있는 인물. 그래서 오경숙의 지략이 있다면 황도희는 ‘코뿔소’라는 별명처럼 밀어붙이는 뚝심과 결단력을 갖고 있다. 

 

실전 정치는 이미지 메이킹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좋은 이미지를 더 부각시키고 안 좋은 이미지를 가리거나 좋게 포장하는 건 대중들의 표심을 얻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도희가 재벌가를 위해 해오며 능력을 갖게 된 이미지 메이킹은 이제 오경숙을 시장으로 세우는 정치판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진짜 대중들을 움직이는 건 진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오경숙이 갖고 있는 서민들을 위한 마음은, 황도희의 이미지 메이킹으로는 할 수 없는 빈 구석을 채운다. 그래서 이 둘이 힘을 합칠 때 시청자들은 그 연대의식에서 비롯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갖게 된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틀을 벗어나 두 여성이 연대하면서 생겨나는 시너지를 작품을 통해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작품은 결국 이 황도희와 오경숙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들 역할을 연기한 김희애와 문소리의 섬세한 연기는 시청자들이 <퀸메이커>에 몰입하게 해주기에 충분한다. 이름만으로도 갖게 되는 기대감만큼 충분히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배우들의 면면을 이 작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때 대척점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한 편으로 서 있는 광경만 봐도 가슴이 웅장해질 정도로. (사진:넷플릭스)

‘더 글로리’, 통쾌하고 먹먹하고... 이토록 완벽한 인과응보가 있을까

더 글로리

“아우 얘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물이 너무 차다. 그치. 춥다. 우리 봄에 죽자 응? 봄에.” 절망 끝에 어린 문동은(정지소)이 죽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저 편에 또 다른 사람이 죽으려 한다. 그걸 보고는 문동은 그 사람을 구한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진 사람이 자신을 구한 이가 어린 소녀라는 걸 알고는 그렇게 맨발에 니트를 입고 물에 들어온 걸 걱정하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서 너무 추우니 봄에 죽자고 한다. 지금 말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웃프다. 절망의 끝을 보여주지만 그 곳에서 희망을 전한다. 결국 그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이 이 고통을 해결해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마음은 못내 아리고 아프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을 구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구하고픈 마음이라는 걸 이 시퀀스는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웃게 만든다. 유머가 들어 있는 이야기지만, 그건 우리 삶의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삶이지만 그걸 공감함으로써 웃음으로 넘어서고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것. 

 

<더 글로리> 파트2가 드디어 공개됐다. 파트1이 끝나고 너무나 기다리던 시청자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나머지 내용들이 전개됐다. 과연 문동은은 이 지난한 복수극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그 끝은 제목처럼 ‘영광스러운’ 빛으로 가득할까. 시청자들은 기대감과 더불어 어떤 마무리가 될 것인가에 대해 파트2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목 놓아 기다렸다. 그리고 공개된 파트2는 이러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통쾌한 인과응보에 먹먹한 생존자들의 온기가 더해지며 더할 나위 없는 엔딩을 통해 진짜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어서다.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이렇게 말했던 박연진(임지연)이고, 그건 안타깝게도 가진 자들이 죄를 지어도 벌 받지 않는 우리네 현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지만, 문동은은 그런 말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지옥 끝까지 몰아붙인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자세한 그 과정을 말하긴 어렵지만, 놀랍게도 문동은이 짠 계획은 공고하게만 보였던 저들의 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 그들끼리 치고받는 파멸로 그들을 이끌어간다. 

 

그 복수의 과정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그 뜻 그대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가진 자들의 개가 되어 저들이 시키는 대로 폭력을 일삼다가 이제는 주인을 물려했던 손명오(김건우)가 결국 저들에 의해 자신이 했던 것 같은 폭력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식이다. 약에 취한 이는 약으로 끝을 마주하고, 입을 잘못 놀린 이는 말을 못하는 형벌에 취하며, 부모 잘 만나면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 여겼던 이는 바로 그 부모로부터 배신당해 벌을 받는다. 

 

그 복수는 단순하지 않고 결코 쉽게 전개되지도 않는다. 문동은의 평생에 걸친 치밀한 계획이 있고 그를 돕는 주여정(이도현)과 강현남(염혜란) 같은 이들이 있는데다, 죄를 지은 자들이 가진 저마다의 엇나간 욕망들이 결합되어 파멸의 불꽃이 타오른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어째서 저들의 엇나간 욕망이 자신들을 나락으로 이끄는가 하는 그 사필귀정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게다가 복수만이 이러한 끔찍한 폭력 앞에 무너졌던 피해자들에게 끝이 아니라는 것 역시 드라마는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복수로 저들의 파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되찾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걸 주여정의 목소리를 통해 전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더 글로리>는 그래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피해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의지하고 그래서 “봄에 죽자”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는가를 그 단단한 연대를 통해 그려낸다. 실로 김은숙 작가는 기꺼이 이 땅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해 칼춤을 추는 망나니가 되기를 자처한 듯 대사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였다. 멜로에서 그토록 달달했던 김은숙 작가의 대사들이 이토록 살풍경한 저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가 피해자들의 망나니를 자처했다면 배우들은 그 대본 위에서 기꺼이 김은숙 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극의 중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잡아낸 송혜교의 연기 변신은 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향후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박성훈, 정성일,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 정지소, 신예은 등등 모든 연기자들이 마치 작두를 탄 듯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임지연과 김히어라의 미친 악역 연기와 이 복수극에 따뜻함과 간절함을 더해준 염혜란 그리고 배우로서의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낸 정성일, 박성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더 글로리>의 훌륭한 망나니들이었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 또한 구하는 일이 아닐까. <더 글로리>는 피해자 문동은이 어떻게 생존해내는가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한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크진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어느 봄에는 활짝 피어날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렇게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는 문동은의 목소리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을 건네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놀면 뭐하니'의 메시지, 먼저 나를 세우고 연대하라

 

MBC 예능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은 "놀면 뭐하니?"하고 툭 던진 말에서 시작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갈수록 이 제목에 담긴 '논다'는 의미는 우리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묵직한 울림이 더해지고 있다. 똑같은 단어 하나도 어떤 말과 행동이 이어지고 겹쳐지면서 그 의미가 깊어지는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유재석과 김태호 PD가 던진 작은 '놀이'에서 시작됐다.

 

카메라 하나 툭 던져놓고 '놀아보라' 했던 김태호 PD의 제안이 엉뚱하게도 유재석의 '부캐 놀이'로 이어졌고, 유고스타(드럼), 유산슬(트로트), 라섹(라면집), 유르페우스(하프), 유DJ뽕디스파뤼(라디오DJ), 닭터유(치킨집)를 거치며 성장, 확장됐다. 다양한 부캐 놀이가 가능하다는 건 그간 유재석이라는 하나의 아이덴티티 안에 머물던 더 많은 가능성들이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게 됐다는 뜻이다. 그것은 '나의 확장'이었고, 그 확장은 지금껏 '일 중심 사회'에서 하나의 명함으로만 존재가 증명되길 강요받던 시대에 틈입을 만들었다. '놀이'는 그 틈을 찢고 더 많은 나를 꺼내놓는 새로운 시대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의 확장'은 이제 비슷한 뜻을 가진 이들과의 연대를 통한 다른 이들의 확장으로도 이어졌다. '싹쓰리 프로젝트'가 그것이었다. 여름 시장을 겨냥한 1990년대 혼성그룹에 대한 꿈은 유두래곤과 더불어 린다G(이효리) 그리고 비룡(비)을 이 세계관 속으로 끌어들였다. 일 바깥의 놀이를 통한 유재석의 확장으로 이제 워라밸을 꿈꾸게 된 수많은 대중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지지해주었던 그 힘은 이제 같은 꿈을 가진 이들과의 연대로 나가게 됐다.

 

싹쓰리 프로젝트에서 제주도 소길댁으로 불리던 이효리가 린다G라는 새로운 캐릭터로 자신을 확장시켜 많은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로망을 대리충족시켰고, 그는 또 그 자리에서 '센 언니'들을 모아 걸 그룹 활동을 하겠다는 이른바 '환불원정대'의 욕망을 잉태시켰다. 엄정화, 제시 그리고 화사가 더해진 '환불원정대'는 '센 언니'라는 일관된 캐릭터들의 집합으로 시작됐지만 그 이면에 담긴 건 여성과 나이에 대한 현실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는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엄정화다. 이효리의 부름에 선뜻 참여한 엄정화는 이효리 스스로도 말했듯 모든 여성 아티스트들의 롤 모델 같은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왕성히 활동하고 그것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호흡하려 늘 도전하는 모습이 그 이유다. 이효리는 엄정화를 보면서 그가 간 길을 따라가려 했다고 했고, 아마도 이런 선배들의 길 뒤로 제시가 그리고 화사가 걸어갈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환불원정대'는 그 자체로 나이에 의해 특히 배척받던 여성 아티스트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함께 활동하는 모습으로 이 편견과 차별의 틀을 깨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엄정화에 대한 '리스펙트'를 가지면서도 그렇다고 박제된 신화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업 아티스트로서 그를 대하는 '환불원정대' 멤버들의 모습은 그래서 시청자들에게도 기분 좋은 위로를 전해준다. 리더가 된 이효리와 티격태격하고, 또 엄정화의 옛 영상 때문에 피식 웃게 된 제시에게 "제시 지금 웃은 거야?"라고 묻자 "네"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런 관계,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전혀 긴장한 티 없이 습관성 하품을 해서 웃음을 주는 화사의 모습 등등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런 관계 속에서 환하게 웃음 짓는 엄정화에게서는 나이 들어 대접 받기보다는 나이와 상관없이 같은 웃고 떠들고 호흡하고픈 욕망을 건드리는 면이 있어서다.

 

<놀면 뭐하니?>는 누군가의 작은 변화 하나가 얼마나 큰 변화로도 이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다. 유재석 개인의 확장을 통해 그 누구나 갇혀진 하나의 정체성을 깨고 또 다른 가능성의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했다면, 이제 그는 비슷한 꿈과 뜻을 가진 이들과 연대하고, 거기서 탄생한 또 다른 인물이 꿈꾸는 또 다른 연대로 끊임없이 펼쳐져 가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들은 시청자들 역시 그 변화의 물결에 동참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보고 위로받은 만큼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사진:MBC)

'모범형사', 손현주가 절치부심할수록 화력은 점점 세진다

 

"인생이 아주 그지 같아서 그런다 왜. 아주 그지 같아서. 잠이 안와. 염병." JTBC 월화드라마 <모범형사>에서 새벽 4시가 다 됐지만 강도창(손현주)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에게 이대철(조재윤)의 사형집행은 엄청난 충격과 허탈감으로 돌아왔을 게다. 이대철의 무죄를 알고도 막지 못한 그였다. 그것도 5년 전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한 수사 때문에 사형수가 된 이대철이 아닌가. 내부고발에 배신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재심재판에 나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증언까지 했지만 권력은 더욱 공고했다.

 

살인범인 오종태(오정세)는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 모든 걸 덮어버린 채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그의 후원(?)으로 법무부장관 자리까지 올라간 유정렬(조승연)은 사건을 덮기 위해 이대철의 사형집행을 서두르고 결국 집행하게 만든다. 유정렬의 동생 정한일보 사회부 부장 유정석(지승현)은 언론을 통해 이대철의 사형집행을 마치 정의 실현처럼 꾸며내고, 검경은 이런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말판 그 이상의 역할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러니 이 공고한 권력을 강도창 같은 일개 형사의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강도창은 잠을 못 잔다. 너무 억울하고 분한데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져서다. 그런데 이대철 사형집행을 두고 벌어진 줄다리기에서 무너진 이는 강도창만이 아니다. 그의 파트너인 오지혁(장승조)도 자신의 사촌형인 오종태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증명해내지 못했다. 또 강도창에 대한 의리로 5년 전 사건을 함께 추적해준 강력2팀 사람들도 모두 내부고발자 취급을 당하며 조직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철의 딸 이은혜(이하은)는 아버지의 사형 집행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깊은 상처를 갖게 됐다.

 

그런데 바로 이 강도창을 위시한 약자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연대하는 그 모습들은 <모범형사>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을 높인다. 강도창의 집을 찾아와 형사 일을 한 지 6428일이 됐다는 이유로 케이크에 불을 켜 축하는 강력2팀 사람들과,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오지혁이 그렇고, 아버지가 사형집행 당한 후 찜질방을 전전하던 은혜에게 다가가, 접근 금지 명령 때문에 아들에게 접근하지도 못하는 속사정을 드러내며 그에게 같이 지내자고 손을 내미는 강도창의 여동생 강은희(백은혜)가 그렇다. 이들 상처받은 약자들은 그렇게 다시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으쌰으쌰 힘을 낸다.

 

그리고 강도창의 집으로 들어온 은혜의 한 마디는 실의에 빠져 있던 강도창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근데 분해요. 그 사람 윤지선 선생님 죽인 그 사람. 그 사람은 편하게 잘 살고 있을 거 아녜요. 죄를 졌으면 벌을 받아야죠. 그 사람 때문에 우리 아빠가 대신 죽었는데. 아저씨가 잡아 줄 거죠?" 그 말 앞에서 강도창은 마음을 다잡는다. 반드시 잡겠다고.

 

본래 드라마의 극성은 주인공들이 곤경에 처할 때 더 올라가기 마련이다. 강도창의 절치부심과 그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약자들의 연대가 시청자들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건 그래서다. 물론 이들의 연대에도 오지혁을 청소년 성매매로 엮어 경찰복을 벗게 하려는 오종태의 만만찮은 계략이 펼쳐지지만, 그럴수록 이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이겨내고 저 권력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은 커진다. 개개인으로서는 힘없어 보이는 약자들이지만 모이면 다르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이렇게 바르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결코 '거지 같은 삶'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를 바라게 된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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