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가 꿈꾸는 세상, 무릇 어버이는 어떠해야 하나

 

백성들이 세운 자만이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건 아니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어찌 그들을 개, 돼지라 폄하할 수 있겠소?” KBS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세자 이영(박보검)은 홍경래(정해균)에게 그렇게 말한다. “양반과 백정, 계집과 사내, 역당의 자식과 군왕의 후손 이들이 동등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그가 허용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하는 홍경래에 대한 답변이다.

 

<구르미 그린 달빛>이 지금껏 그려온 것이 달달한 멜로였다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러 이 드라마가 그 이면에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지도자는 백성의 손으로 직접 세우는 것이라는 홍경래의 등장으로부터 비롯된다. 만일 이영과 홍라온(김유정)이 사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홍경래와 이영은 이러한 정치 담론에 대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을 게다. 왕세자와 역도는 대척관계일 수밖에 없을 테니.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홍라온을 사이에 두고 왕세자와 홍경래는 연인과 아버지로 엮어진다. 즉 어찌 보면 <구르미 그린 달빛>의 그 전편을 관통하는 멜로의 이야기들은 이 후반부 왕세자와 홍경래의 대화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건 가상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이런 설정을 통해 굳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거기에서 정치적 담론을 펼치는 건 과거의 역사를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정치를 평가하기 위함이다.

 

드라마는 무릇 어버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 어버이는 백성의 어버이로서 지도자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 자식의 어버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홍경래는 백성을 위한 지도자는 하늘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손으로 직접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이영은 묻는다. “백성이 세운 지도자라 함은 백성의 말을 잘 듣는 또 다른 허수아비 왕을 뜻하는 것인가.”라고. 그건 아마도 조정대신들의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아버지 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게다.

 

그래서 이영은 자신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원하지만 어찌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을 그들이 선택할 수 있냐고 묻자 홍경래가 답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오. 백성에 의한 정치지. 당신처럼 하늘이 내린 왕은 스스로를 태양이라고 생각하겠지. 절대적으로 빛나는 존재. 하지만 백성이 내린 왕은 다르오. 자신과 백성을 똑같이 여기지. 사람이라고. 사람이 사람이 되길 꿈꾼다. 참 우습지 않소?” 백성의 어버이로서 지도자라면 백성과 똑같은 위치에 서야하지 군림하려 하면 안 된다는 걸 태양에 빗대 말한 것.

 

홍경래는 또한 홍라온에게 하는 말을 통해 한 자식의 어버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건넨다. 왜 그저 평탄한 삶을 살아가지 않았느냐고 홍라온이 묻자 그는 문제 많은 세상 자식새끼 던져놓고 넌 왜 그렇게밖에 못했느냐 다그치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하여 바꾸고 싶었는데 네가 살아갈 조금은 나아진 세상을.”이라고 말한다. 그 비뚤어진 세상이란 백성들에게는 과한 세금을 걷고 그 열에 아홉을 빼돌려 자기들만의 뱃속을 채운 세도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잘못된 세상에서 자식이 힘겹게 살아가지 않게 조금 나아진 세상을 위해 싸웠다는 것.

 

이것은 <구르미 그린 달빛>이 사극을 빌어 와 또 그 안에 달달한 멜로라는 장르를 동원해 궁극적으로 하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심지어 어버이를 자처하는 이들이 대중들을 , 돼지로 폄하하기도 하는 세상이 아닌가. 하지만 그 대중들이 있어 이른바 지도자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영이라는 왕세자와 홍라온이라는 남장여자 내시의 신분을 훌쩍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위계 없이 동등한 관계, 그래서 사람이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계를 담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달리 보인다. 달빛은 그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다름 아닌 이름 모를 구름이 있어 그려지고 빛나는 것이다. 왕과 백성,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도 그러해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김정은, 만인의 연인에서 전설로 돌아오다

"더 이상 속이고 살기 싫어. 그럴 자신 없어." "난 노래하고 기타 칠 때가 제일 즐거워." "나 이제 다시 사내놈 뒤에 숨어사는 비겁한 짓거리는 안할라구. 나 그냥 전설희로 살려구."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에서 김정은이 전설희라는 캐릭터로 분해 하는 일련의 대사들을 듣다보면 그것이 연기자로서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녀가 지금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은 지금껏 숨겨진 그녀의 진면목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파티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일 때 그녀는 우아하다. 하지만 그 화려함이 그녀의 진짜 얼굴은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오히려 그 자리를 벗어나 노래방에서 맘껏 소리 질러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들고 무대 위에 올라 전에는 몰랐던 카리스마를 뿜어낼 때 더 진짜 같은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우아함과 털털함 사이에서 도도함과 반항기어린 모습 사이에서 그녀는 어느 쪽으로 흘러도 편안해지는 연기자의 얼굴을 얻었다.

김정은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은 '파리의 연인'에서 태영이라는 역할로 우리의 '만인의 연인'이 되면서부터이다. 물론 그 때 태영이라는 캐릭터도 전설희 못지 않게 괄괄하고 명랑했지만 우리의 기억에 남은 김정은의 이미지는 발랄하기 이를 데 없는 연인이었다. 그 후로 그녀는 우리에게 무슨 역할을 해도 계속해서 연인으로 자리해왔다. 김은숙 작가의 '연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연인'이라는 작품은 그녀가 가진 연인이라는 이미지를 끝까지 소비시키는 작품으로 남았다.

물론 '김정은의 초콜릿'은 그녀가 가진 연인의 이미지를 계속 이어간 방송 프로그램이지만 그녀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이미지를 넘어서 좀더 확장된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꿈꾸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혜경이라는 역할로 그녀가 보여준 강인한 면모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 후 '종합병원2'에서 환자의 입장을 더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영화 '식객-종합병원2'에서 성찬과 대결구도를 갖는 세계적인 요리사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작품들이 그녀의 변신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전설이다'는 그 연기자로서의 변신이 담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에게는 중요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김정은은 상류층의 우아함에서부터 록 밴드의 털털함까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혼을 해주지 않으려는 남편 지욱(김승수)과 법정 대결을 벌이면서 동시에 마돈나 밴드의 리더로서 멤버들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현실의 갑갑함은 법정 대결이라는 극단적인 공간 속에서 그려지고, 그 갑갑함을 털어내는 무대라는 공간이 병치됨으로써 이 양극단의 세계는 작품 하나로 오롯이 담겨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양극단을 오가게 해주는 인물은 다름 아닌 김정은이다.

김정은은 이제 '만인의 연인'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연기자로 우리에게 돌아오려 한다. '나는 전설이다'는 그 변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쾌활한 얼굴 속에서 언뜻 우울함이 엿보이고, 그 우울함 속에 그것을 깨쳐버리는 강인함이, 또 그 강인함 옆에 자리한 부드러운 이미지가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감지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작품은 훗날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전설'로 남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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