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남궁민의 님과 이학주의 님 사이

연인

“이제라도 임금님 구하는 일은 그만두고 은애 낭자를 지키러 가는 게 어떻겠소?” MBC 금토드라마 <연인>에서 이장현(남궁민)은 남연준(이학주)에게 그렇게 말한다. 병자호란이 터지고 임금이 오랑캐들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연준은 임금을 구하겠다며 의병이 되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무력한 자신을 느끼고, 수차례 이장현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게 된 연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 배운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할 줄 모릅니다. 평생 나라에 화급한 일이 있으면 나가 싸우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 배웠소. 여인이 사내를 따르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신하가 임금에 충성하는 질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섬김을 받았으니 사내와 부모는 여인과 자식을 보호하고 임금과 사대부는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나는 임금님을 구하다 죽을 것입니다. 내가 임금을 위해 죽으면 임금께선 백성들을 지켜주실 것이요. 내가 믿는 것은 그 뿐입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연준 같은 생각을 했을 게다. 그것이 당연한 도리라 여겼을 테고. 하지만 장현은 다르다. 그는 애초부터 백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친 임금을 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오랑캐들에 의해 피난을 가다 위험에 처한 길채(안은진)나 은애(이다인), 종종이(박정연), 방두네(권소현) 같은 백성들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어 오랑캐들과 싸우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 

 

<연인>이라는 드라마는 어찌 보면 병자호란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만, 장현과 길채의 지극히 사적인 사랑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에서 어딘가 한가로운 서사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긴박한 상황들이 펼쳐지지만, 그 속에서도 장현과 길채의 주고받는 ‘썸’에 가까운 설레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관계가 그려진다. 

 

그런데 이건 드라마가 한가로운 서사를 그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적인 사랑 이야기가 저 연준이 도리이자 대의로 이야기하는 비현실적인 임금을 향한 충성과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들고 있어서다. 과연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장현처럼 가까운 님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할까 아니면 연준처럼 임금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할까. 이 지점은 <연인>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물론 실제 조선시대였다면 연준의 선택이 선비의 도리라 여겨졌을 테지만,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어 그려진 <연인>이라는 세계에서는 정반대로 장현의 선택이 더 당연하고 현실적이라고 여겨진다. 임금이 먼저가 아니라 백성이 먼저이고, 국가도 국민들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이 지금 현 시대에 대중들이 갖는 국가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친 임금이 아닌가. 

 

길채를 향한 장현의 사랑은 그래서 연준의 임금에 대한 충성과 대비되면서 더 의미를 갖는다.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제목을 <연인>이라 붙인 것에서도, 저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토록 ‘님’을 찾으며 임금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곤 하던 일들이 오히려 더 한가로운 거라는 걸 꼬집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도대체 사랑하는 사람 하나를 구하지 못하는데 무슨 나라를 구한단 말인가. 

 

“이제 그대가 어디에 있든 반드시 그대를 만나러 가리다.” 장현이 길채에게 하는 이 말은 그래서 더더욱 무게감을 갖는다. 그건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는 맹세지만, 모두가 임금을 바라보던 시절에 하는 말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연인>은 그래서 지극히 사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무게감을 갖는다. 전쟁이 깊어질수록 시청자들이 이들의 사랑에 더 몰입하게 되는 이유다. (사진:MBC)

‘환혼’의 멜로가 특별한 건 사제, 주종 케미를 가장해서다

환혼

“제가 무덕이를 많이 좋아합니다.” “지가 도련님을 진짜로 좋아해유.” tvN 토일드라마 <환혼>에서 장욱(이재욱)과 무덕이(정소민)는 그렇게 각각 송림의 총수 박진(유준상)에게 말한다. 둘 사이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각각 물어보며 만일 답변이 틀릴 시 무덕이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박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자 갖고 있던 음양옥을 꺼내 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박진은 실소를 터트리며 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은 <환혼>이 장욱과 무덕이의 멜로를 그리는 특별한 방식이 들어있다. <환혼>은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을 절묘한 위기 상황과 엮어 드러낸다. 환혼인을 추적하며 장욱과 무덕이의 비밀을 캐묻는 박진 앞에서 두 사람은 피해나갈 묘수로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털어 놓는다. 그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처럼 보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아닌 척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죽도록 좋아한다는 말을 죽지 못해 자백”한 것처럼 꾸미지만, 실제로 무덕이 역시 장욱을 좋아하는 마음을 여러 차례 들킨 바 있어서다. 

 

무덕이 얼버무리며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 하자 장욱은 진지하게 속내를 꺼내놓는다. “스승님 죽어도 좋으면 버리지 않고 하던 거 계속 해도 됩니까? 제자가 죽을 결심을 할 땐 스승님도 함께 해야 된다고 했지? 난 죽어도 계속 할 거야. 그러니 우리 무덕이도 어렵게 자백한대로 계속해서 도련님을 죽도록 좋아해봐.” 그런데 그 말투가 존대와 하대를 넘나든다. 스승에게 하던 말투에서 하인에게 하는 말투로 넘어가는 것. 그건 사제 관계이기도 하고 주종 관계이기도 한 두 사람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면서, 그것이 그저 가장하는 것일 뿐이라는 걸 말해준다. 실상은 연인 관계라는 것. 

 

<환혼>에는 이처럼 장욱과 무덕이가 어떤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그간 사제이자 주종을 가장했던 관계를 뚫고 드러나는 실제 연인 관계의 스토리가 자주 등장한다. 천부관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한 무덕이가 어찌된 일인지 수기를 빼내려는 환관으로부터 거꾸로 수기를 흡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러자 자신이 폭주한 줄 알고 다가오는 장욱을 무덕이가 막으려했을 때도 이런 멜로의 한 장면이 연출된다. “안돼. 만지지마 내가 폭주한 거면, 네가 나를 만지면 너는 수기를 빼앗겨 죽을 거야.” 하지만 그 말에도 불구하고 장욱은 무덕이를 꼭 껴안아준다. 그건 장욱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무덕이가 폭주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장욱이 송림의 정진각 술사로 들어가고, 자격이 없는 무덕이는 송림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이른바 ‘송림하인선발대회’에 나가겠다며 장욱에게 던졌던 고지문에 대한 에피소드도 이들의 애틋한 관계를 에둘러 드러낸다. 결국 무덕이가 대회에 나가 하인으로 선발되고 송림에 들어오게 됐을 때 장욱은 무덕이가 던졌던 그 고지문을 꺼내 보이며 거기 담긴 의미를 자신이 읽었다고 말한다. “내가 이 짓을 해서라도 너를 꼭 보러 가겠다. 너만 볼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라는 것. 

 

그러자 무덕이는 애써 이를 부인하며 그 종이를 태워버린다. 하지만 장욱은 “이미 주고받은 게 태운다고 없어지겠냐”며 이렇게 말한다. “근데 스승님. 제자가 최근에 안 보이느 걸 읽는 걸 읽는 술법을 익혔습니다. 심서를 읽었다고 했잖아. 한번 보실래요? 보이지 않는 걸 읽을 땐 이렇게 집중해서 들여다 봐야 돼. 그리고 받을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거야. 무덕아.” 결국 장욱의 그 말에 무덕이는 속내를 들켜버린다. 그러자 장욱이 말한다. “읽혔다.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냐. 그저 숨기고 있는 거지.”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다. 그저 숨기고 있는 것일 뿐. 아마도 <환혼>에서 장욱과 무덕이의 사랑이 이토록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 점 때문일 게다. 사제와 주종을 가장해 숨기고 있지만 특정한 상황 속에서 저도 모르게 불쑥 불쑥 나오는 마음들과, 거부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이 서로를 향해 가는 것. 마치 음양옥이 서로 반응하듯 불이 켜지고 부인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게 되는 그 마음을 읽게 되는 것. <환혼>의 멜로는 그렇게 무심한 척 시청자들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 (사진:tvN)

‘쌈’, 욕먹을 캐릭터조차 공감하게 만드는 안재홍 연기력

타고난 배려심일까 아니면 쓸데없는 오지랖일까. KBS 월화드라마 <쌈마이웨이>의 김주만(안재홍) 대리가 장예진(표예진) 인턴을 대하는 태도는 한편으로는 공감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난다. 6년 간을 거의 사실혼 관계로 지낸 조강지처 백설희(송하윤)가 있지만 끝없이 대시하는 장예진에게 철벽을 치지 못한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접촉사고를 당한 장예진이 도움을 요청하자 김주만은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물론 사고를 낸 상대 남자들에게 당할 위기에 처한 여성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김주만의 입장은 어찌 보면 ‘회사 동료’로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움을 주고 굳이 집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고 다리를 저는 그녀를 부축해 문 앞까지 데려다주다가, 문 앞에 가득 쌓인 택배박스를 힘들게 옮기려는 그녀를 그냥 보지 못하고 도와주는 모습은 너무 과하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김주만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다. 사실 6년 전 그가 백설희와 가까워지게 된 이유도 바로 그런 타인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배려심 때문이었다. 같은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백설희를 도와주다가 결국 연인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됐던 것. 

그래서 김주만은 자신에게 대시하는 장예진의 모습에서 당황스럽게도 자꾸만 6년 전 백설희의 모습이 겹쳐지는 걸 발견한다. 그는 백설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추신수가 출전한 메이저리그 경기를 본다. 그런 그에게 백설희가 서운함을 드러내자 그는 말한다. “6년을 만났는데 어떻게 눈만 보고 있어. 무뎌지는 거지.”

김주만과 백설희의 관계는 <쌈마이웨이>의 이제 막 1일을 선언한 고동만(박서준)과 최애라(김지원)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서로 눈만 쳐다봐도 꿀 떨어지는 고동만과 최애라의 관계가 보는 이들마저 가슴 설레게 만든다면, 김주만과 백설희의 관계는 그 달달했던 시간들이 지나간 쓸쓸함을 담는다. 어쩌면 고동만과 최애라의 그 죽고 못사는 관계도 6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김주만과 백설희처럼 데면데면해질 지도 모른다. 

그래서 <쌈마이웨이>가 담아내려 하는 건 지금 막 스파크가 터지는 사랑의 시작점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아가 그 사랑이 어떻게 시련을 맞게 되고 그럴 때 우리들은 어떤 노력과 결정들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들까지다. 김주만과 백설희의 관계는 그래서 이 달달한 청춘 로맨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들은 과연 이 고비를 잘 넘어갈 것인가. 

주목할 건 이 김주만이라는 현실 남친 캐릭터를 소화해내고 있는 안재홍이라는 배우의 발견이다. 물론 <응답하라 1988>에서 ‘봉블리’라 불리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주목받은 배우였지만 확실히 이번 <쌈마이웨이>는 그가 가진 연기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어찌 보면 ‘욕먹을 캐릭터’지만 그것조차 어느 정도는 공감하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쌈마이웨이>는 현실이 부여한 어떤 틀에 박힌 길에서 소외되어 ‘쌈마이’ 취급을 받아도 ‘마이웨이’를 걷는 건강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 김주만이라는 캐릭터에게서도 <청춘의 덫> 식의 틀에 박힌 변심이 아닌 무언가 이들만의 해결책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하고 묻던 <봄날은 간다>의 대사가 아닌 <쌈마이웨이>만의 길을 걷길.

‘쌈마이웨이’, 이 짠한 청춘들에게 기꺼이 빠져드는 까닭

이건 우정일까 사랑일까. 저건 쌈일까 썸일까. KBS 월화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고동만(박서준)과 최애라(김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사이.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남녀로서의 연애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보인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기 일쑤고, 쏘아붙이는 건 일상이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그런데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듯 보이지만 상대방에 곤경에 처하거나 무시를 당하는 걸 보면 그들은 마치 자기 일인 양 나선다.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고 절망할 때도,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가 그녀의 실체가 발각되어 남자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도 최애라는 고동만을 찾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고동만은 귀찮아하면서도 최애라에게 달려간다. 그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주는 우정처럼 보이지만, 슬쩍 슬쩍 선을 넘어 사랑 같은 감정이 뒤섞인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 둘 다 꿈에서 멀어진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고, 그래서 상대방이 현실 앞에서 무시당할 때 마치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처럼 화를 낸다.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상대방에게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처럼도 들린다. 

<쌈, 마이웨이>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현실이 ‘쌈마이’라도 ‘마이웨이’를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슨 일인지 과거에 저지른 한 번의 실수로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에서 멀어져 버린 고동만은 근근이 살아가지만 여전히 태권도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코치의 도장 주변을 뱅뱅 돈다. 태권도에서 격투기로의 전향을 생각하며. 

한 때는 백지연 같은 아나운서를 꿈꿨던 최애라는 어쩌다 보니 백화점에서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안내 일을 하고 있다.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이크를 잡고 싶지만 이 청춘에게 현실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고동만의 돌려차기와 최애라의 마이크. 그들이 꿈꿨지만 주어지지 않은 이 두 가지는 <쌈, 마이웨이>가 깔아놓고 있는 청춘들의 현실을 담아낸다. 

짠한 현실 앞에서 이 청춘들은 서로를 지지해준다. 눈물 흘리는 친구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히 우정이라 생각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결코 우정의 차원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쌈, 마이웨이>가 갖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덧붙여진 멜로가 피어나는 곳이다. 

<쌈, 마이웨이>는 특별한 소재나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범해 보이는 이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건 아마도 이 청춘들을 지지하고픈 마음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는 저마다 큰 꿈을 꾸고 있었지만 어쩌다 현실에 날개가 꺾인 청춘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지지의 마음은 마치 고동만과 최애라가 서로를 지지하는 마음으로 빙의하게 해준다. 이것이 짠하지만 설레는 이 청춘멜로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