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의 추억’, 설렘보다 체온이 더 센 이 시대의 현실

백번의 추억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 세 번의 내 인연보다 한 번의 네 만남이 더 강하고 힘이 센 운명이었던 거야. 그래서 내 행복추구권은 다시 거둘까 해. 왜냐하면 너한테도 너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 다음으로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나에겐 바로 너니까.” 

 

JTBC 토일드라마 <백번의 추억>에서 영례(김다미)는 절친 종희(신예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재필(허남준)을 만나보라며 자신이 주말에 버스안내양 일의 대타를 서주겠다고 한다. 재필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전해보지도 못한 영례는, 자신의 좋아하는 마음만큼 친구의 행복을 빌어주는 그런 친구다. 

 

영례와 종희가 일하고 있는 100번 버스의 안내양들은 단체로 숙식하며 살아간다. 제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그 누가 편안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살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 청춘의 온 시간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간다. 이른바 K장녀로서 동생들 챙기고 심지어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합숙하며 일을 한다. 

 

영례(김다미)는 바로 그 K장녀다. 하루 종일 시장통에서 뽑기 만들어 팔고 아이들 목마 태워주는 걸로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엄마를 도와 버스 안내양으로 일한다. 우리 집안의 ‘대들보’라며 대학 다니는 오빠만 챙기는 엄마가 야속하지만,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뼈 빠지게 일하는 엄마와 하루 종일 집에서 엄마 기다리는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한다. 멀미를 하면서도 버스안내양 일을 하고, 그러면서도 공부에 대한 꿈을 꾼다. 

 

그 고단한 삶에 종희가 들어와 두 사람은 절친이 된다. 종희는 껌 좀 씹어본 듯한 걸크러시를 보이지만, K장녀라기보다는 어딘가 가정폭력의 피해자 느낌을 풍긴다. 한없이 당차고 밝아 보이지만 권투시합에서 맞는 재필을 보고 그만두라고 외칠 만큼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마도 오빠의 상습적인 폭력을 피해 달아난 듯 보이는 종희는 가난이 힘들긴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례의 엄마가 비탈길에서 끌던 리어카와 함께 굴러 크게 다치고, 리어카도 망가지자 종희는 선뜻 영례에게 돈이 가득 채워진 인형을 건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 요새 일기 쓴다. 니가 선물해준 만년필로. 근데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영례랑 뭘 했다’ ‘재밌었다’ ‘너무 웃었다, 행복했다’ 난 그런 단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었거든. 근데 너 덕분에 사는 게 좀 재밌어졌어. 그러니까... 그건 쨉도 안돼. 넌 나한테 더 큰 걸 주고 있는 걸.”

 

<백번의 추억>은 절친 영례와 종희 사이에 재필이 들어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엇갈린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례는 재필을 좋아하지만, 재필은 종희를 좋아한다. 하지만 종희는 영례가 재필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 재필과는 선을 그으려고 한다. 백화점 사장 아들인 재필의 처지와 버스 안내양인 영례와 종희의 처지 역시 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보통의 멜로에서 한 남자와 두 여자가 등장하면,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경쟁하듯 다투는 구도가 많지만, <백번의 추억>은 어딘가 다르다. 재필을 두고 벌어지는 사랑의 경쟁보다는 영례와 종희의 우정이 더 세게 느껴진다. 멜로보다 센 워맨스랄까. 영례와 종희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재필을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설 정도다. 물론 마음은 아프겠지만. 

 

왜 이런 구도가 나오는 걸까. 그건 이 엄혹한 시절의 K장녀와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영례와 종희가 마주한 현실이 달달한 설렘보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더 강렬히 원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영례의 어려운 사정을 챙겨주는 종희와 동료 버스 안내양들의 따뜻함이, 재필을 두고 볼어지는 로맨스보다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백번의 추억>은 그래서 사랑보다 더 진한 우정을 기대하게 만든다. 로맨스, 브로맨스보다 더 진한 워맨스를. (사진:JTBC)

15부작의 긴 호흡에도 필요했던 이 특별한 워맨스(‘은중과 상연’)

은중과 상연

“아줌마. 자 나쁜 년인데 한 번만 안아주세요.” 은중(김고은)의 엄마를 갑자기 찾아온 상연(박지현)은 뜬금없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자 은중의 엄마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상연을 안아준다. 은중의 엄마는 상연이 스스로를 ‘나쁜 년’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딸 은중 때문이라는 걸 이해했을 게다. 하지만 스스로 나쁜 년이라고 하는 데는 또한 은중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또 그러면서 안아달라는 건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쓸쓸한가를 드러낸 거라는 걸 알았을 게다. 그래서 은중의 엄마는 말없이 상연을 안아줬고, 상연이 그렇게 떠나려 하자 “또 와”라고 말했을 터였다. 

 

넷플릭스 새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서 이 장면은 상연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은중과 어린 시절부터 나이 들어서까지 계속 얽혀 생겨난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그건 내가 갖지 못한 걸 다 갖고 있는 것 같은 은중에 대한 부러움이고, 질투이고, 자신은 왜 그렇지 못한가에 대한 아픔이자 슬픔이며, 어떤 나쁜 짓을 해서라도 자신 또한 그걸 갖고 싶다는 엇나간 욕망이면서 그럼에도 세상 단 하나 뿐인 친구 은중에게 갖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뒤얽힌 것이다. 

 

<은중과 상연>은 이 장면 속에 상연이 가진 이 복잡한 감정들에서 알 수 있듯이, 꽤 오래도록 이어져 온 두 사람의 관계와 거기서 쌓여온 감정들을 그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드라마다. 최근 본 어떤 드라마에서도 이렇게 인물의 한 생애를 전부 꿰뚫어 들여다본 작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 드라마는 두 사람의 질기게 이어져온 관계를 끝까지 따라간다. 넷플릭스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15부작이라는 긴 호흡을 가진 작품이지만, 끝까지 보고나면 왜 이렇게 긴 호흡이 필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건 우리 모두가 마주한 삶과 욕망과 끝내 마주하는 죽음까지의 여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긍정하게 되는 삶의 비의 같은 것을 담기 위함이다. 

 

작품은 흐름 상 네 개의 서사로 나뉘어 있다. 첫째가 은중과 상연이 만나 처음 친구가 되고 상연의 오빠 상학(김재원)에게 은중이 좋아하는 감정을 갖게 됐던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의 시절이라면, 둘째는 대학 시절 다시 만나 김상학(김건우)라는 선배를 둘 다 좋아하게 되면서 겪었던 사랑과 우정 사이를 오가는 애증의 시절이다. 그리고 셋째가 사회에 나와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며 또다시 얽히게 됐던 은중과 상연 그리고 상학의 이야기라면, 넷째는 끝내 생을 마감하게 된 상연과 은중이 그간의 감정들을 풀어내는 이별하는 이야기다. 

 

더할 나위 없는 친구 사이이면서 이들 사이에 끝없는 애증의 갈등이 만들어진 건, 불행한 가정사로 얼룩져 있지만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독하고 못되게라도 자존심을 지키려는 문제적 인물 상연과, 약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마음을 쓰고 배려하느라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는 은중의 교집합이 만들어내는 스파크들 때문이다. 

 

상연의 오빠 천상학이나, 대학 사진 동아리에서 알게 되어 은중과 달달하고 절절한 사랑을 하는 김상학과의 멜로가 들어있지만, 이 작품은 제목에 아예 못박혀 있는 것처럼 은중과 상연의 서로 상처주고 아파하면서도 끝내 안아주는 워맨스가 중심이다. 그 많은 사건들을 거쳐 이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게 되면 ‘너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남 탓했던 두 사람의 마음은 ‘네 덕분’으로 바뀐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는 순간, 그 힘들고 고단했던 삶이 드디어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고생했어. 잘 버텼어. 다 괜찮아.” 이런 말이 15부의 긴 호흡의 은중과 상연의 일생이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가슴에도 와닿는다. 왜 이렇게 치열하고 나만 힘든 것 같고 또 나만 못 가진 것 같아 더 아픈 그런 마음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면 이 긴 호흡에 동참해보길 바란다. 은중과 상연이 전하는 말이 우리에게도 닿아 어딘가 편안해지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 

 

그 순간에는 ‘나쁜 년’ 같아서 자신을 괴롭히던 많은 감정들을 우리는 드디어 긍정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저 은중의 엄마처럼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꼭 안아줄 수 있을 수도. 오랜만에 만나는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갈아 넣은 듯한 작품이다. 전체를 관망하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매일 갖고 겪게 되는 자잘한 감정의 편린들에도 담담하게 미소 짓게 만드는. (사진:넷플릭스)

끝내 마음에 그려진 김다미와 전소니의 우정, 아니 사랑(‘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보여.” 하은(전소니)은 미소(김다미)의 얼굴을 그리며 어떤 자신의 마음을 봤을까. 민용근 감독의 영화 <소울메이트>는 하은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미소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극사실주의로 그려진 그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필로 하나하나 그어진 선들이 만들어낸 얼굴이다. 그 선 하나하나에서 그 그림을 그린 하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울메이트>는 그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 그림으로 끝난다. 그림 속 미소의 얼굴은 학창시절 하은과 하은의 남자친구 진우(변우석)와 함께 제주의 어느 산길을 오르다 찍힌 사진이다. 돌아보는 미소를 순간 찰칵 찍어낸 하은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미소의 얼굴을 캔버스에 담았을 게다. 풋풋한 청춘의 건강함이 묻어나는 미소의 그 얼굴은 어딘가 놀란 듯 보이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난다. 

 

덥고, 지루하고 졸리고 나른하던 어느 날 전학 온 미소는 오자마자 교실을 박차고 나가 바다가 보이는 뚝방 위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는 그런 아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엄마마저 그 아이를 제주에 남겨 놓고 떠났다. 외롭게 괴로웠을 미소지만, 그는 이름처럼 늘 생글생글 웃으며 하은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성장한다. 

 

미소는 그가 ‘찐’이라고 생각하는 제니스 조플린을 닮았다. 27살의 나이에 활활 타올랐다가 저 세상으로 떠난 아티스트. 같은 나이에 요절한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과 더불어 3J로 불리며 이른바 ‘27살 클럽’의 멤버 중 하나로 불리는 히피 문화를 대표하는 싱어 송 라이터. 그는 미소에게는 자유의 존재로 읽힌다. 제니스 조플린의 명곡 ‘Me & Bobby McGee’에 나오는 가사 내용 중 ‘자유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 뿐(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 left to lose)’이라는 대목이 미소가 마주하고 있는 ‘쓸쓸한 자유’의 면면을 잘 설명해준다. 

 

제주에서 서울로 떠나 성북동 달동네 위에 있는 도시 속 섬 같은 허름한 집에서 지내며 하루하루를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미소는 하은에게 자유로운 제니스 조플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다. 바이칼 호수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그 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엽서를 가져온다. 미소는 결코 제니스 조플린처럼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런 자유를 늘 꿈꾸고 있었을 뿐이다. 엄마마저 돌아가셔 남은 가족조차 없는 미소는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었지만, 퍽퍽한 삶은 그 어디도 그를 날게 해주지 않았다. 

 

반면 단란한 가족의 품에서 자라난 하은은 미소의 그 자유를 부러워하지만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조차 타지 못해 섬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잘 그리지만 제주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 지낸다. 제주와 서울로 떨어져 지내며 하은과 미소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보듬으면서 우정 그 이상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의 다른 삶은 그들이 그리는 그림으로도 표현된다. 하은은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리는 반면, 그런 틀 자체가 싫은 미소는 입시 미술 학원에서 데생을 할 때조차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그들이 학창시절 비 맞은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그리는 장면에서도 하은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그린 반면, 미소는 추상적인 고양이의 형상에 마음까지 그려 넣는다. 

 

똑같이 그리는 건 재주일 뿐, 재능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도 있지만, 하은과 미소의 그림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지와 사랑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 서로를 채워가며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소울메이트>는 그림을 매개로 해서 서로를 완성하고 채워가는 하은과 미소의 우정,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담아낸다. 맞다. 그건 사랑이다. 그저 이성과 동성이라는 구분이 불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 

 

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폴더폰이나 싸이월드, MP3, 펌프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당대의 오브제들은 당대를 살았던 중장년층의 마음을 추억 속으로 소환시킨다. 하지만 이 그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뉴트로를 힙하게 바라보는 MZ세대들의 마음 또한 이 작품은 툭툭 건드리고 있다. 마치 ‘인생네컷’ 사진을 통해 바로 찍은 디지털 사진을 즉석으로 인화해 손에 쥐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픈 MZ세대들의 취향을 이 작품은 레트로한 영상과 색감, 정서 등으로 사로잡는다. 

 

그 위에 하은과 미소의 한 평생을 담아낸 마음들을 이를 연기한 김다미와 전소니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만든다. 특히 이미 <마녀>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등장해, <이태원 클라쓰>로 걸크러시를 보여주고는 <그해 우리는>으로 달달한 감성까지 전해줬던 김다미는 이 작품 속 미소라는 청춘의 초상을 통해 자유와 슬픔, 그리움과 행복 등이 버무려진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청춘의 초상을 상징하는 듯 그림 속에 얹어진 그의 얼굴로 시작해 그의 얼굴로 끝을 맺는 영화는 그래서 김다미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뇌리에 새겨넣어준다. 

 

“이젠 니 얼굴을 그리고 싶어. 사랑 없인 그릴 수조차 없는 그림 말야.”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마음이 보인다는 하은의 말에 화답하듯, 영화는 그런 미소의 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는 그래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그건 우정을 넘어선 사랑이야기고, 그래서 이성애의 틀을 벗어버림으로써 드디어 삶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이 쉽사리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여운은 그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만이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찬란하면서도 슬픈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은 데서 오는 먹먹함 때문이 아닐까.(사진:영화'소울메이트')

‘대행사’, 폐허가 된 이보영의 마음, 중요해진 전혜진의 역할

대행사

“아니, 사는 것도 쓴데 먹는 것도 맨날 이렇게 쓰면 무슨 힘으로 버티겠어요?” JTBC 토일드라마 <대행사>에서 조은정(전혜진)이 케이크를 챙겨다주며 하는 그 말에 고아인(이보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고아인의 쓰디쓴 삶은 그의 책상 위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쓴 커피가 늘 놓여 있고, 한쪽에는 머리를 쥐어 짤 때 습관적으로 물고 있었던 담배들이 쌓여 있다. 

 

고아인이라는 캐릭터에서 특이했던 점은 바로 이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습관처럼 물고 일을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피웠다 끊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담배를 물고 있는 행위는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 업무의 과중함이 느껴지고 건강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의 성격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느껴지는 건 ‘결핍’이다. 무언가를 습관적으로 입에 물고 있는 건 어쩌면 어려서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엄마의 부재가 만들어낸 심리적 결핍과 불안감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대행사>는 물론 고아인이라는 이 파이터가 태생과 학력, 성별로 차별하는 세상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매 번 위기 속에서도 상대들을 곤욕을 치르게 만들고 실력으로 무너뜨리는 사이다가 가장 큰 매력인 드라마다. 그래서 이렇게 전면에서 치고 나가는 고아인 같은 캐릭터의 서사에 간간이 워킹맘으로서 실력은 있지만 집에서도 은근히 회사를 그만두기를 바라는 압력 앞에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는 조은정 같은 캐릭터의 서사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6회에 드러난 조은정의 존재감은 <대행사>가 그리려는 것이 고아인이라는 인물의 전쟁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고아인이 저 차별하는 세상과 맞짱을 뜨며 보여주는 사이다가 <대행사>의 한 축이라면, 조은정이 일로 성공하고픈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이와 가족을 챙기느라 그게 쉽지만은 현실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다. 

 

어찌 보면 고아인도 조은정도 삶의 균형을 잡고 있기 보다는 극과 극으로 나가 있는 사람들이다. 고아인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이 가족 따위는 아예 없는 존재이고, 개인적인 삶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회사 동료들과 어우러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적인 연애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며 드라마에서 그 이야기 들어주는 친구도 없다. 가족도, 동료도, 친구도, 애인도 없는 말 그대로 모든 관계에서 ‘고아’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오로지 자신 스스로만 서 있으려 안간힘을 쓰는. 

 

조은정은 정반대로 자신 스스로의 삶이 잘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회사에서는 카피라이터로 괜찮은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는 워킹맘이고, 집에 돌아가면 회사 그만 두라는 철없는 아들과 은근히 애들 금방 자란다며 아이를 챙기길 바라는 시어머니, 남편 앞에서 답답하기만 한 며느리, 엄마다. 

 

하지만 이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가는 고아인과 조은정이 서로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는 일이 생긴다. 조은정이 포기하고 사직서를 내려던 순간, 고아인이 그를 CP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한 것. 조은정은 사직서를 찢어 버리고, 집에는 아이에게 사직서를 냈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집을 나와 출근하는 길이 너무나 즐거워진다. 그만큼 이 인물은 고아인과 달리 낙천적이고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인물이다. 

 

고아인도 조은정도 쓰디쓴 삶 앞에 놓여 있지만, 그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된다. 치열하게 싸워 쟁취하려는 고아인이라면, 주어진 상황이 어려워도 수긍하고 받아들이며 즐겁게 버텨나가는 조은정이다. 이 둘의 조합은 그래서 <대행사>를 흥미롭게 만든다. 싸워야 쟁취할 수 있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게 싸우다 자신을 고갈시키는 ‘상처뿐인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보통 일터에서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인물을 위로해주고 지지해주는 요소로 멜로가 등장하곤 하지만, <대행사>는 그런 클리셰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초반만 하더라도 게임회사 대표인 정재훈(이기우)과 혹여나 멜로적 관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 관계는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정재훈이 고아인에 대한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고아인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고아인 주변에는 다른 지지자들이 서 있다. 사내 정치에서 밀려나 포차를 하고 있는 과거 고아인의 사수였던 유정석(장현성)이 그렇고, 같은 팀에서 늘 든든하게 고아인을 업무적으로 챙겨온 한병수(이창훈) 부장이 그렇다. 하지만 유정석과 한병수가 업무적인 지지를 해주는조력자들이라면 조은정은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업무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폐허된 고아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아인의 사이다 가득한 전쟁과 더불어 조은정의 따뜻한 위로 한 스푼이 있어 <대행사>의 서사가 균형 있는 재미를 더하게 됐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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