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슬럼프’, 자존감 바닥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멜로

닥터 슬럼프

“너 잘못 산 적 없어. 네 잘못 아니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보다 위로와 응원은 아니었을까. 정우(박형식)가 하늘(박신혜)에게 건네는 말은 갈수록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말 같다. JTBC 토일드라마 <닥터슬럼프>가 건드리는 감정의 실체도 바로 그것일 게다. 겉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있지만 속은 밑바닥에 떨어져 울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드라마는 말한다. 네 잘못 아니라고. 

 

멜로드라마가 사랑 타령에 머무는 것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멀어진 건 그것이 현실과 너무나 유리되어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멜로는 별로’라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 멜로드라마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건 여전히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뒷면을 들여다보면 현실에 지쳐 힘겨워 하는 우리들에 대한 응원과 위로의 목소리들이 채워져 있으니 말이다. 

 

<닥터슬럼프>의 전작이었던 <웰컴투삼달리>를 떠올려 보라. 그 멜로드라마는 조삼달(신혜선)과 조용필(지창욱)의 멜로를 그렸지만, 드라마를 가득 채운 건 누명을 쓰고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제주도 삼달리로 내려온 조삼달이 변함없는 고향 같은 따뜻함을 지닌 조용필과 삼달리 사람들의 위로와 응원을 받고 회복해가는 이야기였다. 

 

tvN에서 방영됐던 <무인도의 디바>는 어떤가. 그 드라마 역시 목하(박은빈)와 기호(채종협)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운 건 가정폭력 피해자 혹은 세상이 소외시킨 이들에 대한 위로와 응원이었다. 목하의 노래와 사랑이 특히 우리의 가슴을 울렸던 건 거기서 무인도 같은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비춰져서다. 

 

<닥터슬럼프>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노력해 성공했고 유명해졌지만 의료사고가 터지면서 억울하게 그 사고의 책임까지 떠안고 모든 걸 잃게 된 정우에게 술에 취한 하늘이 “누명”이라고 말해주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에 대해서도 “너가 좀 유치하긴 하지만 나쁜 짓하고 뻔뻔하게 우길 놈은 아니니까”라고 말해주는 대목에서도 우리의 가슴은 촉촉해진다. 잘 나갈 땐 모두가 친구처럼 다가오지만, 한번 미끄러지면 모두가 등돌리는 현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주하던가.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변치않는 마음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건 각종 갑질들을 견디다 못해 선배를 들이받고 병원을 나오게 된 하늘이, 그 사실 때문에 어떤 병원에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자 “잘못 산 것 같다”고 말하자 “네 잘못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정우의 대사에서도 느껴진다. 어려움에 봉착해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어딘가 내가 잘못 산 거 같다고 여기곤 하지만, 그럴 때 잘못된 건 네가 아니라 비틀어진 현실이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가. 

 

<닥터슬럼프>와 더불어 최근의 멜로드라마들의 경향을 들여다 보면, 확실히 사랑보다 우리가 더 원하는 건 위로와 응원인 것 같다. 저마다의 이유로 인생 슬럼프에 빠져버린 정우와 하늘이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울며 때론 무너지는 그 서로의 어깨를 지지해주고, 어디서도 털어놓지 못하는 하소연들을 들어주는 장면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설레고 흡족해지니 말이다. 물론 그 위로와 응원은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할 테지만.(사진:JTBC)

웰컴투 삼달리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이곳. 나의 고향. 나의 사람들. 내 사람들을 들여다 보는 것. 그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살아가야할 길이 있다.” 종영한 드라마 JTBC ‘웰컴투 삼달리’ 마지막회에서 조삼달(신혜선)이 내레이션으로 하는 이 말은 마치 배우 신혜선의 다짐 같다. 그는 드라마 종영 후 가진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이 “심신이 지쳐있던 나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고 했고, 결국 자신에게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준 작품”으로 남았다고 했다. 

 

실제로 ‘웰컴투 삼달리’는 스타 사진작가로 떠올랐지만 후배의 거짓 갑질 폭로로 하루 아침에 나락을 가버린 조삼달이 도망치듯 고향 제주도 삼달리로 와 상처를 회복하고 잃었던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제주 해녀들의 ‘숨피소리’는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이 담겼다. “해녀들을 교육할 때 가장 강조하는 말이 있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라고. 평온해 보이지만 위험천만한 바다 속에서 당신의 숨만큼만 버티라고.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땐 시작했던 물 위로 올라와 숨을 고르라고.” 경쟁적이고 각박한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는 울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면서, 이 작품이 쉼 없이 달려온 배우 신혜선에게도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웰컴투 삼달리’에서 조삼달이 어려서부터 제주를 개천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그 곳을 떠나 용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졌던 것처럼, 신혜선 역시 어려서부터 연기자의 꿈을 꿨다고 한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것과 이루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의 데뷔작인 ‘학교 2013’을 보면 첫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가 이미 연기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이런 재능을 갖고 있는 인물이 24살에 이르러 데뷔를 했다는 사실은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늘 서류에서 떨어져 오디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학교 2013’ 이후 ‘고교처세왕(2014)’을 통해 양희승, 조성희 작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재능은 조금씩 피어올랐다. 이듬해 양희승 작가가 쓴 ‘오 나의 귀신님(2015)’에서 발레리나가 꿈이었지만 사고로 두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된 강은희 역할로 대중들에게 확고한 눈도장을 찍은 신혜선은 그 후로 ‘그녀는 예뻤다(2015)’, ‘아이가 다섯(2016)’, ‘푸른바다의 전설(2017)’을 거쳐 드디어 ‘비밀의 숲(2017)’으로 확실한 존재감을 갖는 배우로 성장한다. 때론 절절한 눈물샘을 자극하는 인물에서부터 때론 코믹하고 때론 시원시원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까지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해낸 신혜선의 배우로서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들뜨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교처세왕’에서의 인연으로 ‘그녀는 예뻤다’에서도 신혜선을 감독에게 추천한 조성희 작가는 그가 보여주는 ‘힘을 빼고 담백하게 하는 연기’가 너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에, 때론 ‘또라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웃음을 주거나 혹은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당돌하게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면모로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무엇 하나 겉도는 느낌일 주지 않는다는 것이 신혜선의 장점이다. ‘비밀의 숲’은 그래서 그에게 ‘영또(영은수+또라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건 극중 그가 연기한 영은수라는 인물의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캐릭터를 그가 찰떡 같인 소화해서 생긴 일이었다. 

 

‘비밀의 숲’을 연기한 이듬해에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2018)’의 주인공 서지안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신혜선은 미니시리즈든 장편주말극이든, 장르물이든 가족드라마든 상관없이 넘나들 수 있는 전천후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단, 하나의 사랑(2019)’에서는 발레리나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하루 평균 7시간 발레 연습을 하며 몸을 만들어냄으로써 연기력만이 아닌 노력파라는 걸 입증해냈다. ‘신혜선이 개연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영화 ‘결백(2020)’은 이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걸 입증한 작품이다.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엄마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나선 변호사 딸 역할을 연기한 신혜선은 냉정한 얼굴에서 차츰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서 감정이 폭발하는 그 변화를 섬세한 연기로 표현해냈다. 또 드라마 <철인왕후(2021)>에서는 조선시대 왕후의 몸으로 영혼이 깃들게 된 현재의 허세남 역할로, 남성과 여성, 현대극과 사극, 정극과 코미디를 넘나드는 연기를 소화했고, 심지어 ‘이번 생도 잘 부탁해(2023)’에서는 전생을 기억하며 19회차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판타지적 인물을 연기해내기도 했다. ‘결백’ 같은 작품이 말해주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신혜선은 주어진 역할에 따른 자유자재의 변신을 보여줬는데, ‘타겟(2023)’에서는 중고거래를 하다 살인자의 타겟이 되어버린 피해자 역할을 소화한 반면, ‘용감한 시민(2023)’에서는 평범한 기간제 교사로 살아왔지만 불의를 보고는 본색을 드러내는 복면 히어로의 시원시원한 액션을 선보였다. 이처럼 신혜선은 이제 개천을 벗어나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이 가능한 한 마리의 용으로 승천한 배우가 됐다. 

 

하지만 신혜선이라는 배우가 가진 진짜 저력은 용처럼 떠오른 배우이면서도 ‘들뜨지 않는 한 결 같은’ 모습에 있다. 그건 조성희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연기가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한데, 판타지로 가든 사극이든 남자의 영혼이 깃들든 천년의 전생 기억을 가지고 있든 차분하게 제 안으로 소화시켜내는 저력이 거기서 나온다. 이제 겨우 10년 차 배우로서 그 짧은 기간을 쉬지 않고 도전해온 결과 이제는 뭐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역할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차분한 자세는 그의 타고난 천성일까 아니면 노력의 소산일까.  

 

조삼달이 삼달리에서 작은 공간을 빌어 연 첫 사진전시회의 제목은 ‘人: 내 사람, 그리고 날씨’다. 본래 서울에서 스타사진작가로 성공해 열려 했지만 논란에 휘말려 무산됐던 전시회 제목이었던 ‘人: 내 사람’에 ‘날씨’가 더해졌다. 서울에서 하려던 전시에는 그간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던 연예인 사진들로 채워질 것이었지만, 삼달리에서 한 전시에는 대신 제주도 삼달리 사람들로 채워졌다. 제 아무리 멀리 새로운 환경 속에 놓이더라도 제 본분을 늘 잊지 않고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는 자세. 현재의 신혜선을 만들어준 그 삶의 자세는 우리 모두에게도 곱씹어볼만한 일이다.(글:국방일보, 사진:JTBC)

요즘 드라마들 사투리에 푹 빠진 이유

소년시대

“아오, 환장하겄네. 진짜..”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소년시대>에는 찰진 충청도 사투리가 드라마 전체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온양에서 늘 맞고만 지내던 장병태(임시완)가 부여농고로 전학오면서, 전설의 싸움꾼 ‘아산 백호’로 오인받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는데, 마치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라도 된 듯 어색하게 허세를 부리는 이 인물이 페이소스 가득한 웃음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도드라지는 건 특유의 해학 가득한 충청도 사투리다. 학원 액션물로서 학교폭력이 일상이었던 1989년 어두운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드라마를 밝게 만들어주고 나아가 코미디의 웃음이 피어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충청도 사투리다. 두드려 맞으면서도 어딘가 여유가 느껴지고, 센 척 하면서도 허술함이 느껴지는 충청도 사투리의 맛이 드라마의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 때 정확한 언어 전달이 최우선이었던 시절에 사투리는 방송에서는 피해야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정확한 발음을 요구하는 아나운서 같은 직업에 사투리는 진입장벽이 되기도 했다. 물론 간간히 전원드라마에서 사투리가 등장하곤 했지만 그것도 너무 심해 알아듣기 어려운 수준의 사투리는 피하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사투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드라마들이 늘고 있는 것. 최근 방영된 드라마만 해도 <소년시대>를 비롯해 <웰컴투 삼달리>, <모래에도 꽃이 핀다>, <무인도의 디바>가 모두 유창한 지역 사투리들로 채워졌다. 지역도 다채로워서 <소년시대>가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면, <웰컴투 삼달리>는 제주 사투리를, <모래에도 꽃이 핀다>는 경상도 사투리를 또 <무인도의 디바>는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최근 드라마들만 해도 강원도 빼고 거의 전 지역의 사투리가 TV를 통해 흘러나온 셈이다. 

 

그런데 지역 사투리는 그냥 쓰인 게 아니고 그 작품의 색깔과 어우러져 특유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소년시대>의 충청도 사투리는 특유의 해학적 어감으로 최양락이나 김학래 같은 개그맨들이 개그 소재로 자주 사용했을 정도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만큼 코미디에 착착 붙는다는 뜻이다. <웰컴투 삼달리>의 제주 사투리는 해녀들의 풍진 삶을 대변하듯 지역 특유의 정감과 더불어 억센 삶과 비감이 뒤섞인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조삼달(신혜선)의 엄마가 해녀로 등장하고 그 세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억센 제주 사투리와 잘 어우러진 이유다.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 등장하는 경상도 사투리는 이미 <응답하라 1997>에서부터 쿨한 멜로의 정서를 잘 드러내는 사투리로 자리잡았다. 경상도 특유의 퉁명스러운 사투리의 어조는 이른바 ‘츤데레’라고 불리는 무심한 듯 다정한 사랑표현에 적합하게 활용되곤 했다. 또 <무인도의 디바>에 쓰인 전라도 사투리 역시 투박하지만 시골 정서를 가득 품은 서목하(박은빈)라는 캐릭터의 도시와는 다른 정감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이처럼 사투리를 써야만 하는 지역 기반의 드라마들이 많아지면서 이를 구사해야 하는 배우들의 자세도 달라졌다. 그저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라 드라마의 정서를 대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들은 사투리를 익히는데 공을 들인다. 박은빈은 그래서 캐스팅 이후 사투리 선생님과 함께 하며 말을 익혔다고 했고, 임시완은 부산 출신이지만 정서까지 담아내는 사투리를 준비해와 감독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모래에도 꽃이 핀다>의 주연배우인 장동윤은 대구 출신이고 상대역인 이주명 역시 부산 출신이라 아예 드라마와 맞춤인 경우도 적지 않다. 아예 해당 지역 출신 배우를 캐스팅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 사투리가 이렇게 드라마에 많아지는 건, 역으로 보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 청춘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들이고, 이들 드라마에는 도시의 경쟁적인 삶에서 밀려나 지역으로 내려온 청춘들이 적지 않다. 소외되고 상처받은 청춘들에게 지역은 이제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때론 소진된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곳으로 그려지곤 한다. 물론 실제 현실에도 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향하는 청년들이 생겨나곤 있지만 그게 하나의 흐름이라고 보긴 어렵다. 따라서 드라마가 그리는 건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판타지로서의 지역이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간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다양한 지역들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거기에 서울 중심의 표준어를 벗어나 지역 정감을 살리는 사투리가 전면에 배치되는 건 문화 다양성 차원에서만 봐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그만큼 많이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고, 그것이 도시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반복하면서 드라마 자체의 다양성도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역으로 가는 드라마들의 등장은 더 다채로운 이야기와 소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한 국가 안에서는 도시와 지역 간의 문제지만, 글로벌 콘텐츠 시장 안에서는 미국 할리우드 중심의 콘텐츠들과 변방으로 여겨진 아시아권이나 유럽, 남미의 콘텐츠들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글로벌 OTT가 콘텐츠 소비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떠오르면서, 콘텐츠 시장 역시 영어권 중심만으로는 그 다양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K콘텐츠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담은 콘텐츠들이 생산되어 시장 안에 들어서게 됐다. 애플이 1천억원을 들여 제작한 <파친코> 같은 작품은 단적인 사례다. 재일한인들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애플이 투자한 드라마지만, 한국인의 문화와 더불어 경상도, 제주도 사투리는 물론이고 당대의 재일한인 특유의 어투까지 고증을 통해 재현해내는 노력을 선보였다. 이런 노력이 결국 한국 고유의 진한 정서를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세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사투리는 이제 더 이상 변방의 언어가 아니다. 콘텐츠를 통해 그 다양한 목소리들이 되살아나고 있으니 말이다. (글:이데일리, 사진:쿠팡플레이)

‘웰컴투 삼달리’, 이 멜로라 휴먼을 품는 방식

웰컴투 삼달리

“아, 여, 여보, 여보, 아.. 여보, 나, 나 뭐라 그래야 돼? 뭐라 불러야 되지?” JTBC 토일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 제주 고향집으로 내려온 조진달(신동미)을 찾아온 전 남편 전대영(양경원)은 저도 모르게 ‘여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물론 그 먼 곳을 달려와 집앞을 서성이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갑자기 나타난 조진달에게 당황해서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그 말은 전대영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잘 드러낸다. 

 

전대영은 AS그룹 재벌가의 막내다. 그런 그가 싸움 잘하고 머리도 좋은 쎈 언니 조진달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 비행기 안에서다. 승무원이었던 조진달이 난동을 피우는 진상 승객을 한 방에 제압하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결혼까지 했지만, 갑질이 일상인 재벌가는 조진달에게는 맞지 않는다. 결국 이혼했지만, 전대영은 여전히 조진달을 잊지 못한다. 저도 모르게 “여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잘 지냈어요?”라는 조심스러운 말에는 걱정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웰컴투 삼달리>가 이제 제주로 내려온 조삼달네 세 자매의 멜로를 본격화하고 있다. 조삼달을 오래도록 짝사랑해왔지만 절친인 조용필(지창욱)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 때문에 다가서지 못하고 바라만봤던 부상도(강영석)는 “아직도 잊지 못하냐”고 조용필에게 묻는다. 다시 제주로 내려온 조삼달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려 했지만 어딘가 조용필과 그녀가 여전히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고 느껴져서다. 하지만 조용필은 말한다. 자신은 헤어진 이후에도 한번도 “잊지 못한” 적이 없다고. “잊지 않은” 것이지. 

 

그러면서 부상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 좋아하는 거 그거 남 눈치 볼만한 일은 아니지 않냐?” 즉 조용필은 자신도 여전히 조삼달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부상도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 이런 훈훈한 사랑의 경쟁은 조삼달이 겪었던 도시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뭐든 쟁취의 대상이 되는 도시의 삶에서, 사랑조차 이기고 가져야 하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그런 인간들 때문에 조삼달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바람을 피워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후배는 조삼달의 포트폴리오까지 훔쳐 갔으니 말이다. 

 

이러한 비교는 <웰컴투 삼달리>가 하려는 이야기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건 가진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래서 사랑조차 소유물처럼 여기는 속물적인 도시의 삶이 과연 진짜 행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AS그룹 대표인 전대영이 돈 많은 부자지만 조진달의 집 앞을 여전히 서성대고 습관처럼 ‘여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걱정스럽게 “잘 지냈어요?”라고 묻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웰컴투 삼달리>가 그리는 사랑은 이처럼 달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휴먼드라마의 훈훈함이 묻어난다. 

 

한편 세 자매의 막내지만 어린 나이에 떡 하니 딸을 가졌지만 남편이 사고로 사망해 과부가 된 조해달(강미나)의 멜로 역시 이러한 휴먼드라마의 결을 갖고 있다. 아직 서른도 안된 젊은 나이지만 딸 차하율(김도은)이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사랑을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너무 일찍 성숙해버린 아홉 살 딸이 이제 ‘사랑의 오작교’가 될 참이다. 

 

우연히 바닷가에서 만난 공지찬(김민철)이 그 인물이다. 제주남방큰돌고래 보호단체 돌핀 센터 대표인 그는 수족관에 갇혀 있던 돌고래를 제주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해 20대 청춘을 다 보냈는데, 그 중 한 마리인 남춘이는 자식이나 다름없다. 어느 날 남춘이 신호가 끊겨 제 정신이 아니던 중에 조해달과 인연이 맺어진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오인하게 된 것. 그런데 엄마 조해달을 기다리고 있다가 공지찬과의 묘한 기류를 우연히 보게 된 이 조숙한 딸이 하는 말이 가슴을 툭 친다. “가자. 이모! 아 가자고 이모.” 

 

이 조숙한 아이는 자신이 엄마 인생의 딸린 혹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가 아니라 이모인 척 거짓말을 한 것. 엄마를 생각하는 딸의 마음이 먹먹하게 다가오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자식’이라는 공통분모는 이제 조해달과 공지천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실종됐는데 제정신인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남춘이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는 공지찬이 조해달의 저렇게 착한 딸을 딸린 혹으로 생각할 리 만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주로 내려온 세 자매의 멜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웰컴투 삼달리>의 멜로는 달달하기만 한 게 아니다.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건 각박한 도시의 삶이 만들어낸 속물적 사랑과는 대비되는 사람냄새 나는 훈훈함이 더해져 있어서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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