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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인물

신혜선 │개천을 잊지 않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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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삼달리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이곳. 나의 고향. 나의 사람들. 내 사람들을 들여다 보는 것. 그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살아가야할 길이 있다.” 종영한 드라마 JTBC ‘웰컴투 삼달리’ 마지막회에서 조삼달(신혜선)이 내레이션으로 하는 이 말은 마치 배우 신혜선의 다짐 같다. 그는 드라마 종영 후 가진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이 “심신이 지쳐있던 나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고 했고, 결국 자신에게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준 작품”으로 남았다고 했다. 

 

실제로 ‘웰컴투 삼달리’는 스타 사진작가로 떠올랐지만 후배의 거짓 갑질 폭로로 하루 아침에 나락을 가버린 조삼달이 도망치듯 고향 제주도 삼달리로 와 상처를 회복하고 잃었던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제주 해녀들의 ‘숨피소리’는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이 담겼다. “해녀들을 교육할 때 가장 강조하는 말이 있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라고. 평온해 보이지만 위험천만한 바다 속에서 당신의 숨만큼만 버티라고.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땐 시작했던 물 위로 올라와 숨을 고르라고.” 경쟁적이고 각박한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는 울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면서, 이 작품이 쉼 없이 달려온 배우 신혜선에게도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웰컴투 삼달리’에서 조삼달이 어려서부터 제주를 개천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그 곳을 떠나 용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졌던 것처럼, 신혜선 역시 어려서부터 연기자의 꿈을 꿨다고 한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것과 이루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의 데뷔작인 ‘학교 2013’을 보면 첫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가 이미 연기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이런 재능을 갖고 있는 인물이 24살에 이르러 데뷔를 했다는 사실은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늘 서류에서 떨어져 오디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학교 2013’ 이후 ‘고교처세왕(2014)’을 통해 양희승, 조성희 작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재능은 조금씩 피어올랐다. 이듬해 양희승 작가가 쓴 ‘오 나의 귀신님(2015)’에서 발레리나가 꿈이었지만 사고로 두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된 강은희 역할로 대중들에게 확고한 눈도장을 찍은 신혜선은 그 후로 ‘그녀는 예뻤다(2015)’, ‘아이가 다섯(2016)’, ‘푸른바다의 전설(2017)’을 거쳐 드디어 ‘비밀의 숲(2017)’으로 확실한 존재감을 갖는 배우로 성장한다. 때론 절절한 눈물샘을 자극하는 인물에서부터 때론 코믹하고 때론 시원시원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까지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해낸 신혜선의 배우로서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들뜨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교처세왕’에서의 인연으로 ‘그녀는 예뻤다’에서도 신혜선을 감독에게 추천한 조성희 작가는 그가 보여주는 ‘힘을 빼고 담백하게 하는 연기’가 너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에, 때론 ‘또라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웃음을 주거나 혹은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당돌하게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면모로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무엇 하나 겉도는 느낌일 주지 않는다는 것이 신혜선의 장점이다. ‘비밀의 숲’은 그래서 그에게 ‘영또(영은수+또라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건 극중 그가 연기한 영은수라는 인물의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캐릭터를 그가 찰떡 같인 소화해서 생긴 일이었다. 

 

‘비밀의 숲’을 연기한 이듬해에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2018)’의 주인공 서지안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신혜선은 미니시리즈든 장편주말극이든, 장르물이든 가족드라마든 상관없이 넘나들 수 있는 전천후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단, 하나의 사랑(2019)’에서는 발레리나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하루 평균 7시간 발레 연습을 하며 몸을 만들어냄으로써 연기력만이 아닌 노력파라는 걸 입증해냈다. ‘신혜선이 개연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영화 ‘결백(2020)’은 이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걸 입증한 작품이다.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엄마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나선 변호사 딸 역할을 연기한 신혜선은 냉정한 얼굴에서 차츰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서 감정이 폭발하는 그 변화를 섬세한 연기로 표현해냈다. 또 드라마 <철인왕후(2021)>에서는 조선시대 왕후의 몸으로 영혼이 깃들게 된 현재의 허세남 역할로, 남성과 여성, 현대극과 사극, 정극과 코미디를 넘나드는 연기를 소화했고, 심지어 ‘이번 생도 잘 부탁해(2023)’에서는 전생을 기억하며 19회차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판타지적 인물을 연기해내기도 했다. ‘결백’ 같은 작품이 말해주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신혜선은 주어진 역할에 따른 자유자재의 변신을 보여줬는데, ‘타겟(2023)’에서는 중고거래를 하다 살인자의 타겟이 되어버린 피해자 역할을 소화한 반면, ‘용감한 시민(2023)’에서는 평범한 기간제 교사로 살아왔지만 불의를 보고는 본색을 드러내는 복면 히어로의 시원시원한 액션을 선보였다. 이처럼 신혜선은 이제 개천을 벗어나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이 가능한 한 마리의 용으로 승천한 배우가 됐다. 

 

하지만 신혜선이라는 배우가 가진 진짜 저력은 용처럼 떠오른 배우이면서도 ‘들뜨지 않는 한 결 같은’ 모습에 있다. 그건 조성희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연기가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한데, 판타지로 가든 사극이든 남자의 영혼이 깃들든 천년의 전생 기억을 가지고 있든 차분하게 제 안으로 소화시켜내는 저력이 거기서 나온다. 이제 겨우 10년 차 배우로서 그 짧은 기간을 쉬지 않고 도전해온 결과 이제는 뭐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역할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차분한 자세는 그의 타고난 천성일까 아니면 노력의 소산일까.  

 

조삼달이 삼달리에서 작은 공간을 빌어 연 첫 사진전시회의 제목은 ‘人: 내 사람, 그리고 날씨’다. 본래 서울에서 스타사진작가로 성공해 열려 했지만 논란에 휘말려 무산됐던 전시회 제목이었던 ‘人: 내 사람’에 ‘날씨’가 더해졌다. 서울에서 하려던 전시에는 그간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던 연예인 사진들로 채워질 것이었지만, 삼달리에서 한 전시에는 대신 제주도 삼달리 사람들로 채워졌다. 제 아무리 멀리 새로운 환경 속에 놓이더라도 제 본분을 늘 잊지 않고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는 자세. 현재의 신혜선을 만들어준 그 삶의 자세는 우리 모두에게도 곱씹어볼만한 일이다.(글:국방일보, 사진: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