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로 돌아온 ‘범죄도시’의 서민 영웅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한 침대 광고의 문구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마동석이다. 그가 내놓는 영화들은 이제 업계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성공을 보장한다는 신뢰가 생겼다. 그건 한 특정 작품의 성공이 아니라, 마동석이라는 하나의 브랜드가 보장하는 성공이라는 점에서 흔들림 없이 편안하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범죄도시> 시리즈를 떠올려보라. 시즌3까지 했던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잘 떠오르는가. 그 이름은 마석도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건 마석도가 아닌 그 역할을 연기한 마동석이다. 그래서 <범죄도시>가 68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을 거둔 후, 코로나19의 터널을 통과해 초토화됐던 극장가에 엔데믹 분위기와 함께 <범죄도시2>가 무려 1천2백만 관객을 끌어모았을 때 나온 ‘신드롬’은 <범죄도시> 신드롬이 아니라 ‘마동석 신드롬’이었다. 바로 1년 후 연달아 <범죄도시3>가 나왔을 때도 ‘설마’는 ‘역시’가 됐다. 이미 이 시리즈의 스토리라인이 관객들에게 익숙해졌고 그래서 단물이 이미 쪽 빠진 껌처럼 여겨진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려 1천만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그것이 말해주는 건 영화가 아니라 마동석을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만이 가진 확실한 ‘한 방’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한 방’의 공식은 간단하다. 너무나 악랄해 보기 불편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한 빌런들이 등장해 관객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고 나면, 그 긴장에도 흔들림 없이 등장해 관객들을 편안한 사이다의 세계로 이끄는 마동석의 모습이 이어진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간단한 ‘한 방’의 공식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범죄도시>가 마약과 연결된 강력사건들이 벌어지며 갈수록 살벌해지는 살풍경한 현실 사회를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 공포에 떠는 소시민들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빌런들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마동석의 모습을 그렸다면, <부산행>에서는 좀비가 창궐한 부산행 KTX에서 맨주먹으로 저들을 때려잡는 마동석을 그렸고, <동네사람들>에서는 한 동네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악의 카르텔과 상대하는 체육교사 마동석을 그렸다. 하나 같이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 적들이고, 거기서 마동석은 그들 앞에 벌벌 떨고 있는 소시민들을 보호하거나 구해주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이런 서사 구조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마동석은 그 서사의 경험을 공포와 편안함이라는 체감의 차원으로 전해주고 있다는 게 다르다.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는 실감에서 오는 공포가 관객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놓았을 때, 등장과 함께 보이는 거대하고 단단해보이는 체구만으로도 어딘가 ‘안전함’이 느껴지는 그 외적 이미지가 그렇다. 그 단단해 보이는 몸은 웬만한 칼도 뚫지 못할 것 같고, 심지어 총 한 방 맞아도 그리 큰 타격이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약자들의 든든한 보호막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그가 날리는 한 방에 마치 펀치볼처럼 날아가는 빌런들의 모습은 카타르시스도 안기지만 동시에 도무지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공포 또한 한 방에 날려버리는 효과를 준다. 이러니 마동석을 따라가며 관객들은 공포의 세계 속에서 안전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건 마치 롤러코스터의 작동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액면으로 보면 소름이 돋는 스릴이지만 안전함이 동반되어 그걸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그런 그가 돌아왔다. 이번엔 폐허가 되어버린 디스토피아 세상이다. 이제 당연히 사람들은 상상한다. 모든 게 무너져내린 폐허 속, 무법천지가 된 세상에서의 마동석은 어떨까.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핵주먹을 날리며 빌런들 때려잡는 든든한 서민 영웅의 모습일까. 예상대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황야>에서 마동석은 무법천지 세상에 유일하게 우뚝 선 비빌언덕 같은 인물(극중 인물의 이름조차 남산이다)로 등장해, 생체실험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겠다는 위험하고도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박사(이희준)와 대결한다. 그 결론은? 우린 이미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궁금하다. 그가 어떻게 저들과 맞서 나가고, 저들에게 시원시원한 주먹을 날릴 것인지가.
이미 <부산행>이 칸느영화제에서 소개됐을 때부터 “저 친구는 누구냐?”는 이야기가 외국 관객들로부터 나온 바 있고, <이터널스> 같은 마블 작품의 슈퍼히어로로도 등장한 바 있으니 그가 출연하는 <황야>라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 역시 글로벌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OTT 스트리밍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황야>는 넷플릭스 영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29일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대만, 일본, 홍콩 같은 아시아국가 나아가 프랑스 같은 유럽에서도 글로벌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사실 <황야>는 평가도 낮고 평점도 낮은 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동석이 나오는 작품에서 작품성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관객들이 기대하는 건 이미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 걸 반복해도 그 때마다 확실한 쾌감을 안겨주는 롤러코스터 같은 효능감이다. <황야>의 상당 부분이 마동석표 롤러코스터에 기대고 있다는 건, 이 작품과 세계관을 같이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비교해 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이병헌의 호연이 돋보였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속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을 통해 이른바 ‘아파트 공화국’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진지하게 담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황야>는 그 세계관만 가져왔을 뿐, 사실상 마동석이 디스토피아에서 펼치는 <범죄도시> 같은 작품에 가깝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마동석의 세계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는 걸까.
그건 불안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사회가 만들어낸 페르소나로서의 마동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벌해진 사건들을 매일 같이 접하게 된 대중들로서는 마동석 같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잠시나마 곁에 두고픈 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심지어 세상이 무너져도 그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든든함에 대한 희구. 편안함을 넘어서 심지어 그 공포를 스릴로 바꿔 즐길 수도 있게 해주는 그런 존재에 대한 갈망이 마동석 신드롬에는 어른거린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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