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미

독특하다. KBS 수목드라마 ‘페이스 미’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성형외과 의사가 등장하는 의학드라마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 독특하다. 의학드라마가 주로 응급의학과나 외과 의사들을 주인공으로 다뤄온 건, 그들의 영역이 직접적인 생명과 직결되어 있고 그래서 수술을 하는 상황 또한 긴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미를 추구하는 성형외과는 직접적인 생명과는 거리가 있어 좀체 소재로 잘 다뤄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페이스 미’의 성형외과 의사 차정우(이민기)는 어딘가 다르다. 그는 응급의학과와 성형외과를 모두 섭렵한 전문의다. 이런 인물을 세운 이유는 ‘페이스 미’가 다루는 성형외과 수술이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범죄피해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차정우 역시 가슴 수술이나 안면 윤곽 수술 같은 걸로 돈을 버는 개업의인 건 맞다. 하지만 응급의학과를 굳이 했던 것처럼 환자들의 감정에 애써 선을 그으려는 그의 냉정함 뒤에는 오히려 그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게 되는 이 인물의 숨겨진 다정함이 느껴진다. 쌍둥이 중 한 명이 사망해 엄마가 자신에게 너무나 집착하는 걸 못 견뎌 성형을 해달라는 환자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지속적인 스토킹에 폭력까지 당해온 피해자가 또 당할 피해를 걱정한다. 성전환 수술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2차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 피의자로 지목된 환자를 위해 의사로서의 소견을 말해줌으로써 진범을 잡을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냉정해 보여 어딘가 돈벌이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형외과 의사가 사실은 범죄피해자들의 마음까지 걱정해 수술을 해주기도 하고 사건의 진상을 상처 부위를 통해 설명해주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펼쳐진다. 성형외과 의사가 등장하는 작품으로서는 독특하지 않은가. 

 

‘페이스 미’에서 독특한 건 차정우만이 아니다. 사건 수사에 함께 뛰어들게 되는 강력계 형사 이민형(한지현)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저 강하고 터프한 면모로 그려지곤 하던 범죄스릴러의 전형적인 강력계 형사와 달리, 이 인물은 어딘가 밝고 해맑고 나아가 피해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공감능력의 소유자다. 모두가 차정우 의사에 대해 그저 돈벌이에 눈먼 속물 취급을 할 때도 이민형은 그가 한 행위들 속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려 했던 마음을 읽어낸다. 즉 형사지만 이 인물 역시 사건 해결을 위한 수사만 보여주는 그런 캐릭터는 아니라는 것이다. 

 

‘페이스 미’는 그래서 차정우와 이민형이라는 어딘가 독특한 캐릭터들을 통해 범죄피해자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눈이랑 코랑 얼굴 윤곽을 좀 바꾸면... 어떻게 해야 달라질 수 있을까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달라지고 싶은데 성형수술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도 같고...” 눈, 코, 얼굴 윤곽 그 어느 것 하나 바꿀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이는 한 여성의 그 말만 들으면 마치 성형 중독에나 걸린 인물처럼 오해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여성이 지속적인 스토킹을 당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되고 싶어 그 곳을 찾았다는 걸 드러내 준다. 결국 그 여성은 스토킹 범죄자에 의해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고 수술을 받게 되는데, 차정우의 수술과 이민형의 수사가 공조해 이 여성은 얼굴은 물론이고 마음의 상처까지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학드라마와 형사물의 공조는 주로 법의학을 소재로 하는 범죄스릴러를 통해 자주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얼굴에 난 자상의 흔적을 통해 사건 정황까지 파악해내는 차정우라는 독특한 성형외과 의사의 등장은 색다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범죄스릴러가 진실을 찾아내고 범인을 잡는 것에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 나아가 피해자들의 마음까지 들여다 보고 다독이는 방식 또한 새롭다. 

 

냉정 속에 다정을 숨긴 차정우 역할을 이민기 배우가 제 옷 입은 듯 소화해내며 극의 중심을 잡아준다면, 그 무게감 위에서 이민형 역할의 한지현 배우는 경쾌하게 발랄한 모습으로 극의 균형을 맞춰준다. 이질적인 소재의 독특한 결합이 눈에 띠지만, 균형 잡힌 대본과 연기의 앙상블이 봉합의 흔적을 잘 지워내고 있는 작품이다.(글:일간스포츠, 사진:KBS)

‘나의 해방일지’가 해방시킨 배우들의 무한 매력들

나의 해방일지

김지원 하면 먼저 떠오르던 작품이 <태양의 후예>였다. 윤명주라는 캐릭터는 서대영(진구)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사랑받았고 김지원은 인생캐릭터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제 김지원의 인생캐릭터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으로 경신되지 않을까. “날 추앙해요”라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거의 유행어가 된 대사가 한동안 김지원이라는 배우를 따라다닐 것일 테니 말이다. 

 

좋은 작품은 좋은 캐릭터들이 있기 마련이고, 좋은 캐릭터들은 배우들의 매력을 끄집어내기 마련이다. <나의 해방일지>가 그간 숨겨져 있던 배우들의 무한한 매력을 해방시키고 있다. 김지원이 염미정이라는 인생캐릭터로 툭툭 던지는 엉뚱한 말들은 묘하게도 이 배우가 가진 차분하면서도 내면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듯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배우의 매력을 해방시키는 건 예사롭지 않은 대사들이다. “날 추앙해요”도 그렇지만 염미정이 구씨(손석구)와 함께 밤중에 산길을 오르며 깔리는 내레이션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어려서 교회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염미정과 함께 이른바 ‘추앙커플’로 불리는 구씨도 만만찮다. 아마도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 이 인물은 대사도 별로 없고 일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는 게 대부분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다 갑자기 멀리 뛰기 선수처럼 훌쩍 어떤 무한의 경계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더니,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안하는 자신을 염미정이 “쫄게 한다”는 말로 기막힌 추앙의 감정을 드러낸다. 

 

<마더>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했던 손석구는 <최고의 이혼>에서 이엘과 호흡을 맞추며(그러고 보니 <나의 해방일지>로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를 보여준 바 있다. <멜로가 체질>과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로 이어진 손석구의 이런 분위기 있는 연기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드디어 귀결점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 

 

염미정의 언니로 왜 날 아무도 사랑하지 않냐며 시종일관 투덜대지만 어딘가 그래서 귀여운 염기정 캐릭터를 입은 이엘과, 그 염기정과 조금씩 가까워지며 연인이 되어가는 조태훈(이기우) 역할을 연기한 이기우도 마찬가지다. 차였지만 찬 것 같은 기분에 좋아하는 조태훈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염기정이 드디어 조태훈과 연인 관계가 되는 순간은 역시 예사롭지 않은 박해영 작가의 대사로 두 캐릭터가 빛을 발했다. 

 

엉뚱하게도 머리만 밀면 해방될 것 같아 올 겨울엔 ‘아무나’ 사랑하든 머리를 밀든 둘 중 하나는 하자고 결심했다는 염기정에게 조태훈이 던지는 대사가 심쿵 그 자체다. “머리 밀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아무나.” 머리 밀지 말라는 대사도 곱씹어보면 너무 웃기고, 아무나라는 표현도 웃기지만 이토록 심쿵한 사랑고백이 있을까 싶다. 이러니 이 배우들까지 반짝반짝 빛나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인생캐릭터’를 이야기하며 염창희 역할의 이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없이 조잘조잘 투덜대며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인물. 그런데 이 인물이 끝없이 던지는 이야기들은 기상천외하고 엉뚱하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간다.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차, 그것도 5억이나 가는 차를 구씨를 통해 얻어 타게 된 염창희가 그런 경험이 자신을 ‘여유롭게’ 바꿔놓았다고 말하는 대사가 그렇다. 

 

할머니 산소, 동네 저수지 같은 곳을 혼자 그 차를 타고 다녔다는 염창희는 의외로 자랑하러 다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자신을 우연히 만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털어 놓는다. “몰랏는데 나 운전할 때 되게 다정해진다. 희한하게 핸들 잡자마자 다정해져. 어려서 사회과부도 보는 거 좋아했거든? 희한하게 그것만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머릿속으로 막 다녀. 춘천도 가고 광주도 가고 부산도 가고 울릉도까지. 꼭 그 때 같애.” 갈망할 때는 투덜대기만 했는데, 막상 하게 되니 여유로워지는 마음. 그걸 ‘다정’이라고 표현하는 대사로 염창희라는 캐릭터가 그걸 입은 이민기라는 배우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삼남매의 동네 친구로 지긋지긋한 도시의 삶을 질깃질깃하게 살아내는 지현아 역할의 전혜진, 염기정의 동창이며 조태훈의 누나인 조경선 역할의 정수영, 염기정 회사의 로또 선물하는 이사로 갈수록 매력을 드러내는 박진우 역할의 김우형, 진짜 그런 곳에서 싱크대를 만들고 있을 것만 같은 염제호 역할의 천호진, 역시 딱 진짜 같은 삼남매 엄마 곽혜숙 역할의 이경성,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네 카페 사장 오두환 역할의 한상조, 가끔 찾아오는 초등학교 교사 석정훈 역할의 조민국까지... 배우들이 저마다 빛난다. 작품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인생캐릭터라니... 배우들이 추앙할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 망가진 이들은 과연 진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의 해방일지

“사람들은 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하는데 전 이상하게 차분해져요. 드디어 세상이 끝나는구나. 바라는 바다. 갇힌 거 같은데 어딜 어떻게 뚫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그냥 다 같이 끝나길 바라는 것 같아요.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다. 다 무덤으로 가는 길인데 뭐 그렇게 신나고 좋을까. 어쩔 땐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더 정직한 사람들 아닐까 그래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김지원)은 이른바 해방클럽에 들어온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렇게 답한다. 그 해방클럽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행복지원센터에서 하도 동호회에 가입을 권유받지만 도무지 동호회에 들어가고픈 마음이 없는 세 사람, 염미정, 조태훈(이기우), 박상민(박수영)이 더 이상의 강권을 피하고자 만든 클럽이다. ‘행복지원센터’라는 지칭에 담긴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게 정말 행복일까. 이게 정말 제대로 사는 걸까.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민으로 살아 서울 중심으로 삶으로부터 비껴가고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서울에서 살면서 짐짓 웃으며 살아가는 삶이 과연 진짜 행복인가를 묻는다. 하루하루 힘겹게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휴가 때 어디 놀러갈까, 놀러가서 수영복은 뭘 입을까, 비키니는 무슨 색으로 입을까를 이야기하며 버텨내는 삶. 맞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로또 몇 장을 마치 행복전도사나 되는 듯 나눠주는 이사와 그것조차 받지 못해 “왜 나만 건너 뛰냐”고 하소연하는 삶. 언제 넘어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하이힐을 신고, 시술만 하면 예뻐진다는 말에 되지도 않는 시술을 받고는 더 나빠진 상태를 애써 나아질 거라 위안하며 사는 삶.... 

 

기정(이엘)은 이런 삶을 계란 흰자 같은 삶이라 농담하지만 너무 힘든데 쓰러지지도 않고 코피도 안 난다며 로또 열장을 사과하듯 챙겨주는 이사에게 그 답답함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이 이사는 기정에게 심호흡을 해보라 권한다. “힘들 때 잠깐 심호흡하면 그것도 휴식이라고 괜찮아져요.” 과연 이래서 진짜 괜찮아질까. 기정은 뜬금없이 머리를 밀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것조차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사는 끝없이 긍정을 얘기한다. “그래서 제가 쉬지 않고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한 지칠 수 없거든요.” 긍정한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뀔까. 삶의 본질의 문제에서 오는 답답함이 심호흡 한 번으로 괜찮아질까. 퇴근 길 전철 안에서 저 편에 보이는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같은 긍정의 문구가 진짜 좋은 일을 만들어줄까.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뉜다. 너무 망가져 아슬아슬하게 버텨내는 사람들과 망가졌지만 아무렇지도 않는 척 잘 사는 사람들. 점주를 고객으로 상대하는 창희(이민기)는 퇴근해서도 1시간 넘게 전화 응대를 해줘야 하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 염제호(천호진)는 계획 없이 살아서 그렇게 사는 거라 답답해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의 삶 역시 계획을 잘 세워서 농사에 싱크대 설치 투잡 뛰며 사느냐고 비수를 꽂는다. 일해주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주눅 들며 살아가는 아버지가 아닌가. 

 

미정의 가족들은 망가졌다. 그건 단지 서울 외곽 경기도에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사는 삶이 불행하고, 그럼에도 가짜 행복으로 채워져 가짜 위로를 던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고층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거기 사는 사람들이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위험 속에 살아간다며 그래서 안전한 반지하에 산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삶이 우리가 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미정의 가족들보다 더 망가진 구씨(손석구) 같은 인물도 있다.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대화도 거의 없고, 밥도 잘 챙겨먹지 않은 채 매일 염제호의 일을 도와주며 살아간다. 거의 유일한 낙처럼 보이는 게 저녁에 홀로 평상에 앉아 깡소주는 마시는 일이다. 그의 존재는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창희나 미정을 통해 그런 식으로 돌파구는 절대 없다고 외치는 듯하다. 심지어 이 사회 시스템 바깥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그에게 창희는 ‘로망’이라고까지 말하지만 그건 그가 선택한 삶이 아니다. 그저 ‘잘못 내린’ 밀려난 삶일 뿐. 

 

<나의 해방일지>는 거의 블랙 코미디에 가깝게 대사 하나하나 상황 하나하나가 빵빵 터지는 웃음을 준다. ‘추앙’ 같은 낯선 대사를 던질 때 그것이 너무 낯설어서 어색하고 그래서 헛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인물이 얼마나 절망적이면 이런 잘 쓰지 않는 단어까지 꺼낼까 생각하게 만들면서 짠해진다. 그러면서 이 드라마는 이 답답한 가짜 행복들에 둘러싸여 사는 이곳의 삶을 뚫고 저기로 넘어갈 거라는 기대감을 준다. 

 

“어디에 갇힌 건지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미정의 이 말은 그래서 박해영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허위로 가득한 세상과 얼마나 날선 대결의식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바람에 훅 날아간 모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빙 돌아 저편까지 갔다 와야 하는 상황 속에서 마치 넓이 뛰기 선수처럼 단번에 그걸 뛰어넘는 그런 통쾌한 비상을 그려낼 거라는 기대감. 

 

망가진 자들이 서로 연대해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며 추앙함으로서 단 한 번이라도 가짜가 아닌 진짜 행복을 느끼는 걸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주길 기대한다. 구씨가 마치 새처럼 날아오르는 그 순간의 비상이 될 지라도. 그것은 지금 현재 사실은 불행하지만 우린 행복하다고 애써 강변하는 가짜 세상의 허위를 잠시라도 깨칠 수 있는 길이 될 테니.(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 흰자의 삶에 대한 박해영표 위로

나의 해방일지

“넌 그냥 딱 촌스러운 인간이고, 난 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는 경계선 상의 인간이고.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라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이민기)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이유로 경기도에 살아가는 자기 삶의 환경을 이야기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계란 노른자와 흰자로 비유해 말하는 대목이 웃음을 준다. 그런데 그 뒤에 어딘가 짠한 페이소스 같은 게 남는다. 이건 대체 뭐지?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 남쪽 수원 근처 산포(가상의 지명이다)라는 곳에 살아가는 창희, 미정(김지원), 기정(이엘) 남매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사실 어느 정도는 과장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고 어떤 건 너무나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서울의 변방에 살아가는 이들이 처한 상황들을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코미디로 먼저 채워 넣는다.

 

출퇴근만 했을 뿐인데 하루가 다 가는 이 흰자의 삶 때문에, 미정은 회사에서 지원하는 동호회 하나 들지 못하고 회식에 가서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유는 하나. 집이 너무 멀어서다. 기정은 출퇴근 하다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답답한 삶을 토로한다. 만나자는 남자가 약속장소를 삼청동으로 잡는 것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정을 힘들게 한다. 경기도민이 주말에 서울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냐며 그런 인간을 소개시켜준 이를 질타한다. 

 

창희가 다른 남자가 생긴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꺼내놓은 감정을 들여다보면 그 흰자의 삶이 준 고충이 담겨있다. 강북에 사는 여자친구 때문에 헤어지고 집에 가는데 매일 1시간 반이 걸렸다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갑자기 서울과 경기도, 도시와 촌스러움으로 나뉘는 노른자와 흰자의 삶이 애인과 남친이라는 지칭의 차이로까지 등장해 감정을 건드린다. 결국 창희는 “그 놈은 서울 사람이냐?”는 자격지심 가득한 말까지 터트린다. 

 

박해영 작가가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또 오해영>과 <나의 아저씨>로 기억되는 작가. 그런데 박해영 작가가 코미디도 이렇게 잘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채워진다. 그 웃음은 도시인들에게는 로망으로까지 여겨지는 전원생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가져온 데서 비롯한 것들이다. 

 

서울에서 양복 챙겨 입고 멀쩡하게 일하던 이 삼남매가 택시비를 아끼려고 강남역에서 만나 같이 택시를 타는 광경이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 한 편에 있는 수돗가에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물을 끼얹는 창희의 모습이 그렇다. 주말에 전원생활을 즐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하는 파 농사로 땀에 절어 일을 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박해영 작가는 코미디도 잘 쓴다. 

 

그런데 이러한 흰자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건 단지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경기도민이라는 지역이 가진 소외감이나 고충을 드러내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건 어떤 걸 중심으로 세워두고 그것이 마치 바람직한 인생인 양 내세워지는 세상에서 그 바깥에 놓여진 이들이 겪는 소외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그 소외 속에서 답답하고 그렇게 살다 인생을 다 보낼 것 같은 불안감에 빠져 있다. 

 

그런 소외는 단지 지역적 차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물론 우리나라는 지역이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회사 생활에서 동호회 같은 것에는 관심 없는 아웃사이더이거나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모두가 거치는 걸 자신만 빼놓고 지나는 일을 겪는 누군가에게서도 생기는 일들이다. 즉 창희, 미정, 기정은 본인들이 경기도민으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소외를 겪고 있다 느끼지만, 그 집에서 일을 해주며 살아가는 구씨(손석구)는 이들보다 더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그는 할 일이 없을 때는 멍하니 깡소주를 까는 걸로 시간을 죽인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래서 이렇게 소외된 이들이 그 답답한 일상을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폭발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결국 모종의 무언가를 터트리는 이야기다. 2회의 마지막에 미정이 집으로 돌아가던 그 챗바퀴의 마지막 발길을 되돌려 갑자기 구씨(손석구)에게 다가가 “날 추앙해요”라고 어색한 단어까지 동원해 얼토당토한 제안을 하는 건 그래서 우스우면서도 짠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거나 심지어 관심 갖지 않는 것 같은 소외 속에서 미정은 자기보다 더 바깥에서 살아가는 구씨에게 명령하듯 그런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나의 해방일지>는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점점 다가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이 왈칵 우리 앞에 쏟아진다. 과연 이 변방에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곳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해방은 과연 노른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진정한 해방은 어디서 찾아질 수 있는 걸까. 웃기지만 짠한 페이소스가 가득한 박해영표 희비극이 가진 매력이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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