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가는 길>이 불륜을 다루는 특별한 방식

 

어느 낯선 도시에서 잠깐 3,40분 정도 사부작 걷는데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복잡한 생각이 스르르 사라지고 인생 별거 있나 잠시 이렇게 좋으면 되는 거지... 3,40분 같아. 도우씨 보고 있으면.”

 

'공항가는 길(사진출처:KBS)'

최수아(김하늘)가 하는 이 한 마디의 대사는 <공항 가는 길>이라는 드라마의 색깔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도우(이상윤)와 함께 있으면 좋다는 이야기지만, 그래서 기혼자들끼리 마음이 오고간다는 걸 뜻하고 있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륜의 정서를 담지는 않는다.

 

그것은 잠깐 동안의 일탈이다. 늘 가던 길에서 잠깐 멈춰서거나 어느 날 살짝 자신도 모르게 다른 길을 걷다가 느끼는 잠시 동안의 일탈. 고작 3,40분에 불과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일탈이 어쩌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경험.

 

이 드라마의 제목이 <공항 가는 길>인 것은 그래서 단순히 그 길에서 최수아와 서도우가 만났다는 걸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우리가 공항을 갈 때 느끼는 그 설렘과 낯섦 그리고 여행의 의미만큼 더해지는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감이나 일탈의 느낌에서 오는 살짝 현실을 벗어난 듯한 그 해방감 같은 정서를 이 제목은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렇다고 함부로 일탈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인연이 어느 길에서 갑자기 등장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이나 떨림 같은 세세한 감정들을 잡아낸다. “공항, , 새벽. 몇 시간 전인데 벌써 까마득하다는 최수아의 말은 공항에서 서도우와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에 대해 그녀가 현실감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서도우 역시 딸의 죽음으로 그 유해를 갖고 돌아올 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최수아와의 공항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비가 내리고 그래서 잠시 딸의 유해가 들어있는 가방을 최수아에게 맡긴 채 차를 끌고 오는 서도우의 눈에 마치 자신의 딸이라도 되는 듯 그 가방을 꼭 껴안고 있는 그녀에게서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건 어떤 따뜻함과 위로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런 좋은 감정들은 조금씩 쌓여가며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을 만들어낸다. 딸의 유해를 납골당에 안치하고 사진을 붙이던 서도우가 어린 나이에 해외생활을 했던 딸 때문에 어렸을 적 사진 밖에 없는 걸 확인했을 때, 마침 그녀와 함께 살았던 자신의 딸이 갖고 있던 사진을 발견한 최수아가 그걸 서도우에게 보내주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인연이 어떻게 이어져 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사람과 사람은 정성스럽게 이어져 있어요. 한 올 한 올. 인연이란 건 소중한 겁니다.” 서도우의 어머니인 고은희(예수정)는 도우에게 딸의 유품을 챙겨준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하라며 조각보를 내민다. 그녀는 인간문화재 매듭장이다. 매듭은 인연의 또 다른 상징이다. <공항 가는 길>의 관계들은 그래서 이 고은희가 말하는 것처럼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이어져 있다.

 

마치 그 잠깐 동안의 일탈이 주는 좋은 감정. 서도우가 그 3,40분 같다고 고백한 최수아에게 그는 생애 최고의 찬사예요.”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그저 좋아하는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위로나 휴식 같은 특별한 시간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주는 인간적인 뿌듯함 같은 느낌이 들어가 있다.

 

최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서도우의 집으로 향한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위스키 한 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런데 그 독한 위스키의 느낌에서 기내 일식을 떠올린다. 마치 거대한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그 강렬함. 하지만 그 느낌은 타버릴 것 같은데 멀쩡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마도 불륜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공항 가는 길>이 만들어내는 정서일 게다. ‘온 몸이 타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강렬하지만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얽혀진 인연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아 좋다, <공항 가는 길>의 감성멜로

 

오랜만에 보는 정통 감성멜로다. 아주 천천히 전개되는 것 같지만 감성이 켜켜이 쌓여가면서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어찌할 도리 없이 넘쳐 흘러내리는 그런 감정의 경험. KBS 새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멜로는 지금껏 드라마들이 첫 회에 폭풍전개를 쏟아 붓는 그런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터트리는 게 아니라 조금씩 젖어간다고 할까.

 

'공항 가는 길(사진출처:KBS)'

첫 회 최수아(김하늘)와 말레이시아에 딸 효은(김환희)을 유학 보내며 딸의 룸메이트인 애니의 아빠인 서도우(이상윤)와 얽히는 과정은 그래서 조금은 느슨한 느낌마저 주었다. 하지만 딸들을 해외에 두게 된 부모로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최수아와 서도우가 인연을 갖게 된다는 점은 신선했다.

 

최수아가 노트북으로 화상통화를 할 때, 효은의 노트북에 비춰진 반대편 책상 애니의 노트북을 통해 서도우가 고국을 그리워하는 딸을 위해 한국의 갖가지 풍경들을 담아주는 장면을 보는 장면은 흥미로웠다. 각각 다른 공간에 놓여 있지만 부모에서 딸들로 또 그 딸들을 위하는 부모들끼리의 마음이 오가는 것이 그 장면에 한꺼번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제맥주집을 찾았다가 해외에 딸을 보내고 자신이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최수아에게 서도우가 전화를 걸어 딸들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위로해주는 장면도 두 사람의 관계가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조금씩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사실 최근 드라마들을 보면 마치 조급증에나 걸린 것처럼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첫 회의 기세가 드라마의 향방을 좌우한다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맥락 없이 남녀가 우연히 만나 그 해프닝이 첫 회에 일찌감치 사랑으로 발전하는 드라마들은 너무 성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마치 이미 정해진 짝짓기 놀이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공항 가는 길>은 그런 점에서 보면 차근차근 진행되어 무리함이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이 이 드라마가 밋밋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첫 회 중반 이후를 지나면서 고국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은 애니가 절망하고 그러다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서도우와 그가 애니의 아빠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스튜어디스 최수아는 그래서 드디어 미묘한 관계의 선을 넘기 시작한다.

 

해외에 딸을 보낸 부모의 공감대가 딸을 잃은 아빠, 그것도 그 딸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던 아빠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 물론 서도우도 최수아도 모두 결혼한 기혼남녀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서도우는 딸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자신이 견디기 힘들다며 딸을 거기 묻어달라고 말하는 아내 김혜원(장희진)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워한다. 최수아는 기장인 남편 박진석(신성록)과 사내 연애로 결혼했지만 직업적 특성상 같이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 회사에서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아예 모른 척 지나치기 일쑤. 서도우와 최수아의 평탄치 않은 결혼생활은 두 사람의 관계를 촉발시킬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이는 멜로의 틀을 보이는 것 같지만 <공항 가는 길>은 그 접근 방식이나 인물의 심리 묘사가 디테일해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미 결혼한 사이에서 갖게 되는 상대방에 대한 마음들이 그저 불륜의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일상에 던져진 파문이나 삶에서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운명적인 경험처럼 다가오는 면이 있다.

 

가을에, 무엇보다 김하늘이라는 배우와 정말 잘 어울리는 감성 멜로다. 물론 그 감성이 어느 정도의 선까지 나갈 것인가에 따라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 밑으로 격정적으로 흘러가는 조류들이 뒤엉키듯 그 감정들이 점점이 묻어나는 <공항 가는 길>의 감성 멜로는 의외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그것이 어떻게 치유되는가에 대한 과정으로 이 감성 멜로가 그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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