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로 살아갈 것인가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가

 

나 아주 나쁜 놈이야. 당신 말대로 쓰레기고. 동우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지옥 같아서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무섭고 두려웠어. 그래서 도망쳤어. 상처를 마주볼 용기가 없어서 있는 힘껏 도망쳤어. 기껏 도망친 곳이 진짜 지옥인지도 모르고 썩은 권력에 기생하면서 그들이 던져준 돈과 권력에 취해서 벌레처럼 살았어. 참 어리석었어. 매순간 진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매순간 그걸 놓치고 더 큰 죄를 지었거든. 그들도 나도 그렇게 살았어.”

 


'기억(사진출처:tvN)'

tvN 금토드라마 <기억>에서 태석(이성민)은 전처이자 뺑소니사고로 죽은 동우의 엄마인 은선(박진희)을 찾아와 참회한다. 그는 자신이 지옥 같은 고통 때문에 기억으로부터 도망쳤지만 그 도망친 곳이 진짜 지옥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일에 빠져 살았던 태선로펌. 그 대표인 이찬무(전노민)의 아들 승호(여회현)가 사실 뺑소니범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것. 게다가 그들은 뺑소니 사고를 덮기 위해 씻을 수 없는 더 큰 죄를 지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똑같은 어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동우의 어버이와 승호의 어버이는 너무나 다르다. 동우의 어버이인 태석과 은선은 드러난 진실 앞에 분노한다. 그리고 자각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벌레의 삶이었다는 것을. 가해자들이 준 돈과 권력에 기생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하지만 승호의 아버지인 찬무와 할머니인 황태선(문숙)은 여전히 돈과 권력을 이용해 진실을 덮으려 한다. 태선은 찬무에게 태석이 의심을 갖는다고 해도 증명할 건 아무 것도 없다며 걱정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찬무는 깨닫는다. 자신이 아들 승호의 죄를 덮기 위해 했던 일들이 승호에게는 어떤 기분을 주었을 지를. 그는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모든 걸 덮으려 했던 어머니 태선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모두 널 위해서 한 일이다.” 태선의 변명 같은 말에 찬무는 답한다. “승호도 이런 기분이었겠군요.” 대물림되는 죄. 진실을 은폐한 대가는 이토록 무겁게 대를 이어 자식을 지옥 속에서 살아가게 한다. 뺑소니 죄에 대한 응당의 벌을 받지 않고 살아오면서 승호나 그의 아버지 찬무 모두 또 다른 죄를 짓게 했으니.

 

<기억>이 건드리고 있는 건 어른의 삶과 선택이 후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다. 권력에 기생해 살아온 대가가 얼마나 벌레 같은 삶이었는가에 대한 참회이고, 그 권력이 그 과거의 진실을 덮기 위해 여전히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칭해 쓰는 어버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무게감을 갖는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어버이는 진정 어떠해야 어버이라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어버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부끄러운 단어로 오염되어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태석의 참회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도 내가 용서가 안되는 데 누가 날 용서할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그를 전처인 은선은 오히려 위로해준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현실에 맞서는 태석은 비로소 동우의 아버지로서 어버이라는 자리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어버이들은 어쩌다 보니 부끄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스스로는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그것이 과거의 죄를 덮어버리고 쉽게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대가에 의해 이뤄졌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참회하기도 한다. 이러니 젊은 세대와 어버이 세대의 골은 깊어져간다.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세대는 친구가 되지 못한다. 이 얼마나 아픈 현실인가.

 

태석은 자신이 상대방의 약점까지 잡아 변호를 했던 대가로 자살한 김선호 박사의 유서를 젊은 변호사인 정진(이준호)에게 건네준다. 자신이 할 일을 끝내고 나서 모든 진실을 밝힐 것이라는 것. 그렇게 되면 자신의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한다. 그리고 정변호사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정변은 김선호 박사와 관련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 유죄라면 유죄야. 그치만 책임질 일은 없어. 내 말 알아들었어?”

 

자신의 죄를 자신이 책임짐으로써 젊은 세대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 태석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건 바로 그것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짐까지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다는 태석에게 정변호사는 뜬금없이 인디언 말로 친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그게 친구랍니다. 오늘부터 저 변호사님이랑 친구 먹은 겁니다.” 세대 간의 소통은 이런 식으로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곧 어버이날이 다가온다. 하지만 어버이라는 말이 이토록 창피하고 부끄럽게 여겨지는 현실이라니.

<기억>, 어느 한 남자의 추락을 바라본다는 건

 

태석(이성민)의 하루는 한 마디로 지옥 같았다. 하루아침에 멀쩡했던 그는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뇌가 쪼그라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방 대신 쓰레기를 들고 나오질 않나 심지어 자기 차를 찾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알츠하이머에 대해 멍청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재벌3세 의뢰인 영진(이기우)의 말은 이제 더 이상 남 얘기가 아니다.

 


'기억(사진출처:tvN)'

영진이 가진 병원측을 대신해 태석이 내부고발을 하려는 의사의 사적인 약점을 들춰내고 그것으로 문제를 덮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의사가 덜컥 자살을 해버리고, 백지유서에 그의 명함을 남겨 놓는 일이 발생한다. 의사의 자살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거기 남겨진 태석의 명함 때문에 형사가 찾아와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한 가지가 어그러지기 시작하자 모든 게 뒤틀어지고 나쁜 일은 함께 몰려온다고 태석에게 그간 아무렇지도 않게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일상들이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를 돕는 젊은 변호사인 정진(이준호)은 태석의 비도덕적인 행위들을 사사건건 문제 삼고, 같은 로펌의 한정원(송선미) 변호사는 어쩐지 태석과 직장 내에서의 정치 싸움에 돌입하는 모양새다. 겉으론 무표정하지만 어려운 일들을 대신 태석에게 밀어내고 거기서 생겨나는 문제를 끄집어내 로펌에서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한다.

 

그 와중에 결혼식장에도 보지 못한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한 태석의 아버지(장광)가 나타난다. 태석의 회사를 찾아온 아버지는 자기 친구가 처한 문제에 대해 태석에게 변호를 부탁하지만 그는 자신에겐 아버지가 없다며 그를 내쫓는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는 어쩐지 태석에게는 또 다른 걸림돌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거의 신경쇠약 직전에까지 이른 태석은 자기 스스로 머리에 물을 붓는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다. 1인 아들은 어찌 된 일인지 편의점에서 술을 훔치고 학교도 빠져버린다. 왕따 문제 같은 학교 문제에 연루된 것이 틀림없다. 아직 태석에게까지 이 문제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만감 이 문제는 그에게 치명타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 밖에서의 문제야 그렇다 치지만 그나마 그것이 모두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고 위안하며 살았을 그가 아닌가. 가족의 붕괴는 그를 절벽 끝으로 내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의사가 자살한 병원의 간호사가 나타나 사실 그 백지유서를 놓은 건 자신이라며 진짜 유서는 자기가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키운 아이를 생모가 돌려달라고 한다며 이를 막아달라고 태석을 협박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한 의사의 진짜 유서를 공개해버리겠다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라고 소리치는 태석이 먼발치서 엄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가 보낸 이 지옥 같은 하루와 겹쳐지면서 시청자들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토록 힘겹게 버텨내고 심지어 세상과 타협하면서까지 얻게 된 지위와 부 그리고 그로 인한 가족의 평안함이 무너지는데 드는 시간이 고작 단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다는 건 실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억>이라는 드라마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에서의 고군분투가 진정한 삶의 가치에서는 얼마나 벗어나 있는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 그래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찾아 해나가는 것. 이것은 <기억>이라는 드라마가 태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많은 드라마들이 성장과 성공 스토리를 그려낸다. 그 안에는 판타지가 뒤섞인다. 현실에서는 쉽게 이룰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쟁취하는 인물을 통해 갖는 대리 충족. 하지만 <기억>은 거꾸로 이미 최고의 위치에 오른 한 인물의 추락을 그려낸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 성공을 위해 저당 잡혀 왔던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본다는 것. 모두가 성장과 성공으로만 달려가는 시대에 우리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의미 있는 충격요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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