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의 무리수, 운빨에 맞춰버린 전개라니

 

역사를 상상력으로 재해석하거나 바꾸는 건 이제 그다지 큰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역사 왜곡의 문제가 어느 선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따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SBS <대박>이 그리는 다소 무리한 전개들, 이를테면 숙빈 최씨(윤진서)가 도박에 빠진 남편이 있었다거나, 그 남편 백만금이 숙종(최민수)과 도박을 벌여 숙빈 최씨를 얻었다거나 하는 것 같은 설정은 차치해두고 이야기하자.

 

'대박(사진출처:SBS)'

하지만 드라마가 내적 개연성을 따라가기보다는 너무 인위적인 흐름이 느껴지는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다. 숙종의 명으로 이인좌(전광렬)가 형장에까지 나오게 되고 형 집행이 막 벌어지려는 그 순간 마침 숙빈 최씨가 사망하면서 집행이 유보되는 이야기는 너무 인위적이다. 대길(장근석)과 연잉군(여진구)이 그토록 노력해 잡은 이인좌가 아닌가. 하지만 그가 거의 죽음 직전에 살아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운이 좋아서다.

 

어쨌든 <대박>이라는 드라마가 도박을 다루고 그래서 운이라는 것이 중요한 동기나 결과에 작용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극적 상황을 애써 만들어놓고 그저 운이 좋아 인물을 살린다면 거기에 몰입해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이인좌라는 인물이 억세게 운이 좋은 인물이니 그렇게 살아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드라마가 운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합당한 근거와 이유들을 대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운이라는 것이 그저 하늘에서 점지해준 어떤 것이 아니라, 최소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우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의 행동과 부딪침, 그로 인해 생겨나는 화학작용 등을 좀 더 세세하게 다뤄주는 게 오히려 시청자들에게는 더 흥미진진함을 안길 수 있지 않을까.

 

이 사극이 그리고 있는 숙종은 그 캐릭터만 보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신하들과 세자는 명분을 찾지만 숙종은 그저 명령한다. “짐이 말하고 있노라하고 엄포를 놓으면 그 많은 신하들의 반대는 그대로 수그러든다. 그토록 이인좌를 붙잡을 명분을 찾기 위해 대길과 연잉군이 고생을 했지만 숙종은 한 마디로 명분 따윈 필요 없다며 당장 그를 잡아넣으라고 명하고, 며칠 후 능지처참시켜버리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숙종 앞에 그간 유약함을 보이던 경종(현우)이 이인좌의 형 집행을 유보시키고 그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대노한 숙종은 칼을 뽑아 들고 경종을 향해 다가와 죽고 싶으냐며 으름장을 놓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순간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버린다. 그간 지병을 앓고 있던 것이 마침 그 순간 터져버린 것이지만, 이런 전개 역시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우연적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이런 우연의 반복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굴러가기보다는 작가에 의해 개연성 없이 전개되는 걸 계속 보다보니, 이미 죽은 걸로 알고 있던 대길의 아버지 백만금(이문식)을 다시 살려놓은 것 역시 작가의 인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애초에 백만금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복선을 우리는 과연 봤던가. 갑자기 이인좌가 감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죽었던 인물을 다시 살려놓은 느낌이다. 대길에게 아버지를 보고 싶으면 자신을 살려내라고 엄포를 놓는 이인좌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이야기 전개가 어떤 내적 개연성으로 흐르지 않고 작가의 자의적인 의도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은 <대박>에 시청자들이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다. 주인공들은 저마다 굉장한 일에 빠져든 듯 진지하지만 그들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육룡이 나르샤>에서 육룡은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저마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대박>의 인물들은 심지어 대길이나 연잉군도 그리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들 캐릭터가 스스로 가진 내적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무언가에 의해 휘둘리거나 열심히 능동적으로 움직이려 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이인좌의 손바닥 위라는 걸 발견하고는 허탈해한다. 그들이 느끼는 허탈함은 고스란히 시청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열심히 몰입해 들여다봤는데 그게 그들 캐릭터의 내적 힘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작가의 손바닥 위에서 감정놀음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시청자들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박>의 전광렬과 최민수에 가린 장근석과 여진구

 

SBS 월화드라마 <대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근 들어 사극의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경우는 낯설지 않다. <육룡이 나르샤>가 조선 개국의 이야기에 여섯 용을 등장시킨 건 한 주인공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들을 교차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대박>은 그 주인공이 명확하다. 숙종(최민수)과 숙빈최씨(윤진서)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 저자거리에 버려진 대길(장근석)이 그 주인공이다.

 

'대박(사진출처:SBS)'

이 점은 <대박>의 포스터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대길 역할의 장근석이 정중앙에 서 있고 바로 뒤에 훗날 영조가 될 연잉군(여진구)이 그리고 그 뒤에 숙종과 이인좌(전광렬)가 서 있다. 무엇보다 대길이 연잉군과 공조해가며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얽혀있는 연원들을 풀어가고 그런 운명을 만든 이인좌에게 복수하려는 내용이 줄거리라는 점에서 <대박>의 주인공은 이 여정을 이끌어가는 대길이 분명하다.

 

이렇게 <대박>의 주인공이 대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이 사극이 그러나 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장면들만 놓고 보면 대길의 분량이 많고 그와 연잉군이 공조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대길이 이인좌와 맞서기 위해 육귀신(조경훈)과 골사(김병춘)를 하나하나 도장 깨기하듯 투전판 깨기를 하고 나면 그것이 결국은 이인좌가 이미 다 예상한 손안의 게임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알고 보면 이인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길이라는 청춘이 지금까지 고난과 성장을 거듭해온 그 이면에는 모두 이인좌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인좌는 범 새끼가 아니라 범이 되라며 대길을 칼로 찔러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이인좌에 대한 복수심으로 대길은 성장하고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 복수의 행보를 보이는데 그것이 결국은 모두 이인좌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그의 예상 시나리오대로의 결과라는 것. 드라마는 세상을 통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인좌라는 특별한 인물이 한 시대를 어떻게 농단했는가를 다루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사극에서 이처럼 어른의 농단에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청춘의 모습은 대길만이 아니다. 연잉군 역시 금난전권 폐지같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고 싶지만 그 때마다 그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아버지인 숙종에게 불려가 세상이 네 뜻대로 그렇게 될 듯싶으냐?”라는 식의 무시를 당한다. 그리고 연잉군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숙종은 거의 모두 꿰고 있으며, 심지어 그를 도발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이 판을 움직이려 한다.

 

결국 <대박>의 이야기는 그래서 전면에 대길과 연잉군이 갖가지 시대의 어둠과 싸워나가는 모습을 그리지만, 그 실제적인 대결은 숙종과 이인좌라는 그 배후의 인물들에 의해 계획된 것들처럼 보인다. 대길이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육귀신 같은 인물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흥미롭고 통쾌한 면이 있지만, 그것이 결국 이인좌의 생각대로의 결과라는 걸 아는 순간 맥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대박>의 이야기는 마치 숙종과 이인좌가 두고 있는 체스판에 대길과 연잉군, 나아가 담서(임지연) 같은 청춘들이 하나의 말로서 등장하고 있는 듯한 구도를 만들고 있다. 이런 구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사실 대길과 연잉군 중심으로 움직여야 하는 이야기가 엉뚱하게도 숙종과 이인좌의 캐릭터가 강해지면서 그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의심할 수 있는 건 초반 장희빈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숙종의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 다른 캐릭터들이 주목되지 않을 정도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최민수와 전광렬이라는 배우의 강렬한 연기가 어떤 면에서는 장근석과 여진구의 존재감마저 덮어버린 면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러 연기자들의 연기가 조합이 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드라마에 있어서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독주는 바람직한 건 아니다.

 

세 번째는 이 구도를 작가가 의도했다는 것이다. 숙종과 이인좌라는 어른을 대변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짜놓은 판 위에서 대길과 연잉군 같은 청춘들이 처음에는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다가 후에 이를 뒤집는 이야기를 그리려 했을 수 있다는 것. 이 관점으로 보면 <대박>은 최근 <육룡이 나르샤><사도> 같은 여러 사극들이 다루었던 어른과 청춘의 대결구도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주인공인 청춘들과 주변 인물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깨버린 것일까. 필자의 생각은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점이다. 현실에 더 적응되어 있고 판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난 노회한 어른들은 청춘들을 때론 도발하고 때론 다독이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려 한다. 그것은 <대박>이라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 드라마의 중견연기자와 젊은 연기자 사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주인공인 청춘들이 숙종이나 이인좌 같은 어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나아가 이들과 좀 더 명쾌하게 대적하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사극을 보는 시청자들이 느끼는 답답함이다. 이 답답함은 물론 지금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지만, 아마도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는 조금 다른 판타지를 원했을 수 있다.

 

고구마보다는 사이다를 더 요구하는 요즘, 이런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도는 시청률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청춘의 답답함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은 이 사극이 가진 미덕일 것이다. 대길과 연잉군이 아니 이들을 연기하는 장근석과 여진구의 안간힘이 느껴질수록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건 그래서일 게다

거대담론보다 소시민적 삶에 공감한 대중들

 

월화극의 대결구도는 이제 12소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애초 예상은 그 1강이 SBS <대박>이었다. 사극인데다 <육룡이 나르샤>의 후광이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MBC <몬스터> 역시 만만찮은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됐다. <기황후>, <자이언트> 같은 대작을 성공시켰던 장영철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1강은 가장 약할 것으로 여겨졌던 KBS <동네변호사 조들호>에게로 돌아갔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반전을 만든 것일까.

 


'동네변호사 조들호(사진출처:KBS)'

먼저 <대박>은 예상과 달리 <육룡이 나르샤>의 후광이 아니라 오히려 비교점을 만들면서 힘이 빠졌다. 무언가 강렬한 극적 상황들이 계속 해서 등장하긴 하지만 그 사건과 사건이 맥락없이 연결되어 힘이 모이지 않는 상황이다. <육룡이 나르샤>가 무려 여섯 명의 주인공을 세워두고 여러 사건들을 겹치게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일관된 힘으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개국이라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박>의 대길(장근석)이나 연잉군(여진구)이 그토록 이인좌(전광렬)와 대결하는 그 과정들이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지가 애매모호하다. 물론 대길은 복수하려는 것이고 연잉군은 날개를 펼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것이지만 그런 사적인 욕망들이 시청자들에게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들에 몰입하고 그들의 사적 욕망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을 시청자들이 갖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표가 지금의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만큼 공적이어야 한다. 이런 목표제시가 제대로 공감대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대박>은 그저 도박과 복수극의 자극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몬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50부작에 이르는 거대한 서사를 강기탄(강지환)이라는 인물의 복수극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소소한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그다지 마음이 얹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강기탄이 싸우고 있는 도도그룹이라는 세력이 보통의 시청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가 이 드라마에는 빠져 있다. 그래서 강기탄의 복수극은 마치 현실이 아닌 게임처럼 여겨진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연상시키는 연수과정의 이야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드라마가 아닌 만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몬스터>의 최대 약점은 이 안에 배치된 많은 이야기들과 캐릭터들이 너무나 스테레오타입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시력을 잃어 오히려 청력이 좋아진 이국철(이기광)이었을 때만 해도 그 주인공은 참신한 면이 있었지만 강기탄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그마저 사라졌다. 도도그룹의 연수 최종 미션이었던 실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강기탄이 증인인 오승덕을 법정으로 데려와 상황을 반전시키는 이야기는 너무 깊이 없이 다뤄져 마치 하나의 가상극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자극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들어와도 시청자들이 몰입하기가 어려워진다.

 

반면 <동네변호사 조들호>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거대담론의 거창함을 피하고 동네변호사라는 소시민적 삶으로 내려옴으로써 오히려 공감대를 넓혔다. 물론 이 드라마도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건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이 아버지의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라든가 악덕 건물주에 의해 쫓겨나게 된 세입자들의 입장 혹은 아버지로서의 조들호의 이야기 같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대중들은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소시민적인 삶의 이야기에 더 공감했다. 물론 이것은 아직 시작일 뿐일 것이다. <대박>24부작이고 <몬스터>는 무려 50부작이다. 그러니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만일 <대박>이나 <몬스터>가 이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다면 자잘한 이야기 전개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지금의 시청자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대박> 마치 디카프리오 같았던 장근석의 하드캐리

 

살아있는 뱀을 맨입으로 뜯어먹고, 똥통에 빠지고 갯벌에 몸이 처박혀진 채 생게를 씹어 먹는다. 사실 이런 장근석은 낯설다. 지금껏 아시아 프린스라고 불리던 그가 아닌가. 곱상한 외모에 꽃미남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장근석이지만 이번 SBS 월화사극 <대박>에서는 아예 작정을 한 듯싶다. 마치 영화 <레버넌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보는 듯 했으니.

 


'대박(사진출처:SBS)'

<대박>은 갈수록 배우 장근석의 하드캐리가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고 자신마저 손목과 발목이 꺾이고 칼을 맞은 채 벼랑 위에서 차가운 강물로 떨어진 대길(장근석)이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그는 홍매(윤지혜)에 의해 염전에 팔려 인간 이하의 가혹한 노동과 착취 속에 내던져진다. 그 염전의 수장인 아귀(김뢰하)는 반항하는 대길에게 혹독한 매질과 벌을 일삼는다.

 

대길이라는 가련한 청춘이 수도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수의 일념으로 원수인 이인좌(전광렬) 앞에 살아 돌아오는 과정은 처절하다. 하지만 그것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대박>이라는 사극은 확실히 힘이 생겨난다. 그 힘은 대길이라는 청춘의 고통과 그 고통을 부여하는 이인좌라는 어른의 폭력이 마치 지금의 우리네 현실 같은 구도를 그려내면서다.

 

이것은 왕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왕좌를 꿈꾸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연잉군(여진구)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술과 여자만 밝히는 한량처럼 꾸며 살아간다. 숙종(최민수)은 연잉군에게 왕좌의 뜻이 있는가를 묻지만 그는 끝내 그걸 부정하며 속내를 숨긴다.

 

대길이라는 청춘이 어른들이 만들어내는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도박판 같은 밑바닥으로 내던져졌다면 연잉군은 어른들의 시선에서 자신의 속내를 숨기기 위해 스스로 도박판으로 들어온다. 청춘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세상을 배회하고 이인좌나 숙종 같은 어른들은 세상을 제 손에 넣고 제 맘대로 주무른다.

 

물론 이런 구도는 의도한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사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현재의 시청자들과의 공감대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청춘의 이야기는 현재의 현실과 우연히도 조우했을 수 있다. <대박>에서 엽전 한 냥이 전 재산인 대길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내기를 거는 이야기들은 그래서 슬프다.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은 그렇게 제 몸뚱어리 하나를 걸고 살아간다.

 

아마도 지금의 청춘들은 저마다 대길 같은 하드캐리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길이 그러한 것처럼 포기하지 않는 삶만이 기회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 험난한 고통 속을 헤쳐 나와 이인좌 앞에 팔모가지를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그런 기회.

 

고구마 현실 때문인가. 사이다 드라마들이 넘쳐난다. 드라마라는 가상을 통해서나마 잠시 현실을 잊고 속 시원함을 느끼고픈 욕망이 거기에는 어른거린다. 하지만 사이다 드라마가 고구마 현실을 바꿔주진 않는다. 오히려 드라마가 얘기해주고 있듯이 현실은 포기하지 않을 때 변화의 조짐을 보일 수 있다. 선거에 즈음해 장근석이 투표가 대박이라는 피켓을 들고 찍은 사진이 특히 의미심장해 보이는 오늘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