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참여의 용광로, <마리텔>의 인기 비결

 

기미작가에 이어 이젠 초딩작가다? ‘초딩작가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야유회 버전 방송 대결에서 새롭게 참여한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이 미녀 도우미로 쓴 막내작가의 캐릭터다. 이은결이 키가 초딩이라고 소개한 이 막내작가는 억지로 끌려나와 목을 몸과 분리된 것처럼 빙빙 돌리는 모습을 보여줘 보는 이들을 폭소케 만들었다. 단 몇 초의 등장일 뿐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여느 출연자 못지않은 반응으로 이어졌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사진출처:MBC)'

이런 반응은 이미 백종원 셰프의 음식을 맛보는 인물로 등장했던 기미작가에게서도 발견됐던 일이다. 음식을 맛보고 그 놀라운 맛에 동공이 커지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그 특유의 동작은 프로그램의 과장된 편집을 통해 캐릭터화 되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날 야유회 버전 방송에서 백종원은 기미작가가 광고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했다.

 

기미작가와 초딩작가. 이밖에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극한직업 PD’로 불리는 PD의 존재감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예정화 코치와 기묘한 커플 요가 자세를 선보이고, 안 되는 굳은 몸을 억지로 펴는 고통을 감수하는 이 PD극한직접 PD’라는 캐릭터로 자리했다. 다시 돌아온 예정화 코치가 이 PD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그래서 그 날 방송에서는 또 어떤 고통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기도 했다.

 

이들은 분명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주인공들은 아니다. 단 몇 초 등장해 잠깐 맛을 보거나 보조를 해주는 역할을 할뿐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이들의 존재감은 웬만한 게스트들보다 더 주목받을까. 바로 여기에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이 소통과 참여라는 보이지 않는 두 축의 힘이 열광의 진원지로 자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네티즌들의 반응과 그 리액션이 가장 중요한 방송이다. 백종원이나 이은결, 예정화 같은 메인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방송 콘텐츠가 반이라면 그 콘텐츠를 보는 네티즌들의 리액션이 나머지 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짧은 한 줄로 올라오는 네티즌들의 댓글은 기발하기 이를 데 없고 때로는 출연자들의 콘텐츠보다 더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예정화 코치가 아이유의 좋은 날을 키를 낮춰 부르자 흐린 날’, ‘경상도 민요’, ‘고막아 미안해같은 댓글들이 따라붙는다. 워낙 노래를 못하자 카메라맨이 투입되고 현란한 카메라 워크가 보여지자 붙는 카메라맨 재능낭비, ‘고막에 근육생김’, ‘첫 운동 고막 강화운동같은 댓글들은 방송 장면 위에 덧붙여지며 입체적인 웃음을 만들어낸다.

 

야유회에 어울리는 음식을 물어보는 백종원에게 캠핑엔 역시 남의 살이라는 댓글이 붙고, 설탕을 많이 넣는다는 지적에 대해 백종원이 자가 붙은 건 다 설탕으로 만든 것이라는 걸 설명하며, “매실에 넣으면 매실청. 포도에 녹이면 포도청(?)”이라고 하자 붙는 마음에 녹이면 심청...’이라는 댓글은 이 프로그램에서 댓글이 가진 웃음의 지분이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준다.

 

결국 댓글이 이렇게 방송 출연자들과 어우러지는 그 소통과 참여의 현장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가진 진짜 힘이다. 방송은 출연자들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이제는 방송인들과 그걸 보는 시청자들이 함께 만들어간다는 걸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방송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기미작가나 초딩작가 그리고 극한직업 PD가 그렇게 짧은 순간 등장하고도 강렬한 존재감을 만드는 지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사실상 저 일반인들의 댓글 참여와 비슷한 차원으로 방송에 들어가는 것이다. 기미작가는 댓글의 리액션 같은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인물이고, 초딩작가는 댓글이 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그대로 해주는 인물이다. 또 극한직업 PD는 네티즌들이 가진 로망(?)과 따라잡기 힘든 고통을 동시에 대변해 보여준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작게 시작한 듯 보여도 그 파괴력이 커진 것은 이처럼 출연자와 제작진의 소소한 접근처럼 보이는 작은 창들이 저 무한하게 열려진 소통과 참여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그램을 키우는 건 규모 그 자체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성공은 그걸 보여주고 있다.

 

무존재감의 존재감, 정형돈 전성시대의 비밀

 

물론 <무한도전>에서부터 정형돈의 자기 존재감은 독특하면서도 확실했다. ‘무존재감의 존재감으로 불리는 그는 사실 콩트 코미디에서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들어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차츰 하나의 캐릭터가 되었다. 너는 왜 다 잘 하는데 웃기질 못하니? 이런 동료 출연자들의 농담은 그에게는 농담만은 아니었을 게다.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이라니.

 

'냉장고를 부탁해(사진출처:JTBC)'

그런데 이 무존재감은 다른 면으로 보면 보통 서민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 누가 보통 서민의 존재를 알아봐 줄 것인가. 정형돈은 그렇게 일단 서민들의 공감대와 지지를 어느 정도 얻기 시작했고, 그걸 바탕으로 한 발씩 앞으로 나와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엉뚱하다. 누가 봐도 잘 나가는 이들을 디스하고 나선 것이다.

 

유명 작곡가인 정재형에게 노래가 꽝이라고 디스를 하고, 누가 봐도 패셔니스타로서 주목받던 지드래곤에게 패션 감각이 꽝이라며 손수 거리의 보세 옷을 사서 입혀 주는 센스를 보여준다. 최근에는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셰프들을 디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현석 셰프가 과장된 몸짓으로 요리를 할 때, 그는 허세 쩔어!”하고 외친다.

 

작곡가에게 노래 실력이 꽝이라고 하고, 아이돌에게 패션감각이 없다고 말하며 요리사에게 허세라고 하는 말은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정형돈이 하는 디스는 이상하게도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디스 당하는 이들을 주목시키기까지 한다. 그의 디스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건 그의 디스가 얼토당토않다는 전제다. 그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무존재감이고 비전문가다. 그리고 그것은 캐릭터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 자신감있게 전문가들을 디스하는 장면에서는 두 가지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하나는 그의 과감한 디스가 서민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면서 속 시원함을 안겨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디스 받는 인물들을 서민 친화적인 인물로 다가오게 해준다는 점이다.

 

정형돈이 최현석 셰프를 그렇게 허세라고 놀리고, 또 김풍에게 연거푸 진 샘킴 셰프에게 위로는커녕 자극적인 디스를 하는 과정에서 허세를 부릴 줄도 아는 최현석 셰프의 재미짐과 샘킴 셰프의 인간적인 면모가 조금씩 드러났다. 그가 케미 킹으로 불리게 된 건 바로 이런 주고받는 시너지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디스 하나로 자신의 존재감도 살리고 상대도 주목받게 해준다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정형돈 전성시대는 그저 그만의 성공담에 그치지 않는 면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현재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례가 되어준다. 만일 그가 과거 무존재감을 벗어나려고 엉뚱한 노력을 했거나 다른 캐릭터를 인위적으로 연기하고 만들어내려 했다면 어땠을까. 그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지금 같은 전성기를 맞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형돈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그는 참 연예인 같지 않은 연예인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저마다 가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남의 것을 따라하거나 흉내 내려 하지 말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적극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충분히 자기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정형돈은 그걸 증명해내고 있다.

 

<냄새를 보는 소녀>가 남궁민을 활용하는 방식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SBS 수목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연쇄살인마 권재희(남궁민)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이 드라마는 지리멸렬해졌을 지도 모른다. 멜로와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와 형사물이 공존하는 이 드라마는 그 긴장과 이완이 적절하게 균형을 맞출 때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냄새를 보는 능력을 가진 소녀 오초림(신세경)과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 최무각(박유천)의 알콩달콩한 멜로에 자칫 긴장감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냄새를 보는 소녀(사진출처:SBS)'

일찌감치 권재희가 연쇄살인마라는 것을 밝혀놓은 이 드라마는 이 인물의 주도면밀함을 알리바이를 꾸미는 과정을 세세히 보여줌으로써 그의 존재감을 세웠다. 철두철미하고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으며 대단히 영리한 두뇌를 가진 연쇄살인마.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것을 드러내자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의 위협을 받는 오초림이나 최무각 또는 오초림의 아버지인 오재표(정인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됐다.

 

최근 몇 회 동안 드라마의 엔딩에 권재희를 세워놓은 건 그런 점에서 확실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가 오초림의 존재를 알아채고 마치 어떻게 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엔딩 크레딧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음 회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 하나는 장난처럼 죽일 수 있는 연쇄살인마이면서도 권재희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면인식장애를 갖고 있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그런 단점을 부여함으로서 극에 긴장감을 더욱 높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면인식장애 때문에 오초림의 존재를 알아보기 위해 그녀의 사진을 훔쳐 뒷조사를 하려는 권재희와, 그 사진을 바꿔 그가 영원히 오초림을 알아볼 수 없게 하려는 최무각과 형사들의 두뇌싸움은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권재희라는 극악의 캐릭터를 제대로 세워놓음으로써 드라마가 아주 작은 단서나 물건 하나로도 쉽게 극적 긴장감이 가능하게 한다는 건 대단히 효과적인 방식이다. 이제는 그가 누군가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짓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주고, 보호해주고픈 오초림 같은 주인공 옆에 서기만 해도 끔찍해진다. 그는 특별히 끔찍한 행위를 드러내 보인 적이 별로 없다. 생각해보라. 권재희가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는 유혈이 낭자했던 장면이 있었던가를. 그런 구체적인 폭력의 장면 없이도 이런 효과를 낸다는 건 주목해볼 일이다.

 

거기에는 남궁민이라는 연기자의 공이 절대적이다. 친절하고 따뜻한 웃음으로 다가왔던 그는 어느 순간 연쇄살인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웃음을 섬뜩한 살기로 바꿔놓았다. 어딘지 무심한 듯한 두 눈이 무언가를 멍하게 응시할 때 시청자들은 이 인물이 어딘가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박유천과 신세경이 보여주는 스릴러와 멜로를 넘나드는 연기 역시 괄목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바탕을 만들어주는 남궁민이라는 존재감이 없었다면 이 연기들 역시 밋밋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궁민이라는 연기자 하나가 드라마에 만들어내는 힘은 그래서 절대적이다. <냄새를 보는 소녀>를 계속 해서 궁금하게 하고 보게 만드는 힘은 바로 그에게서 나온다.

 

<차이나타운>, 김고은의 미래가 된 김혜수

 

<차이나타운>의 시작은 저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스>를 연상시킨다(본래 이 영화의 제목은 코인라커걸이었다고 한다). 일영(김고은)이라는 아이는 엄마의 배가 아니라 10번 코인로커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이 차이나타운이라는 오로지 쓸모 있어야 살아남는 곳에서 모두가 엄마라고 부르는 마우희(김혜수)에게서 자라난다. 엄마와 아이라는 관계로 서 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모성도 발견하기 힘들다. 엄마는 생명을 잉태하는 존재가 아니라 쓸모없는 생명들을 파괴하는 존재다.

 

김혜수(사진출처: 영화 <차이나타운>)

그 곳은 엄마 마우희가 만든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의 룰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엄마 마우희도 그 룰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한다. 언제든 쓸모가 없어지면 그녀 역시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우희가 밀입국해 차이나타운에 들어온 중국인들이나 어찌어찌해 흘러들어온 범법자들의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죽어도 그 누구하나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줄 가족이 없다. 마우희나 일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쓸모없어지면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마우희라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모성 없는 세상의 폭력성과 그 안에서 쓸모 있음을 증명함으로서 살아남으려는 유사가족의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기묘한 우화처럼 다가온다. 가족 관계마저 비정해진 그 세계는 우리가 사는 살풍경한 현실의 축소판이다. 차이나타운이 마우희라는 엄마를 중심에 둔 하나의 패밀리처럼 그려지는 건 그래서 흥미로운 일이다.

 

이 견고한 듯 보이는 세상의 변화는 그래서 쓸모의 차원을 넘어서 일영의 가슴으로 훅 들어온 감정과 함께 생겨난다. 그 작은 감정은 그래서 이 냉혹한 세상을 위협하는 불순한 어떤 것이 된다. 마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가 희수(신민아)를 보고는 생겨난 작은 떨림이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파국을 만들 듯이 일영은 마우희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파괴해나간다.

 

그런데 그것은 역시 쓸모 있음을 증명해내야 존재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룰을 따르는 일이다. 일영은 그걸 증명하려 하고 마우희는 자신의 쓸모가 어디까지인가를 회의한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파괴해야 하는 이 차이나타운의 법칙은 그래서 잔혹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저 생존의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방출되는 것이 현실의 법칙이 아닌가.

 

<차이나타운>은 조폭 누아르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주인공들이 두 명의 여성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바로 이 여성의 등장은 보스를 엄마로 부하를 딸로 그리고 조직원들을 패밀리로 치환해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낸다. 보스로서의 잔혹함과 동시에 엄마라 불리는 자의 모성을 담아낸다는 것은 그래서 <차이나타운>이라는 영화를 단순한 조폭 영화로 전락시키지 않는 중요한 지점이다.

 

김혜수의 연기는 놀랍다. 실로 얼굴 가득한 기미들과 잔뜩 살을 찌운 듯한 보형물을 넣어 만들어낸 마우희라는 캐릭터의 탄생은 김혜수라는 연기자의 단단한 공력을 보여준다. 화장기는커녕 기미가 가득한 얼굴에 피가 잔뜩 튄 그 모습조차 여배우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걸 김혜수는 보여줬다.

 

마우희의 삶이 일영의 미래가 되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김혜수가 그려나가는 연기의 길은 마치 김고은이라는 가능성 가득한 여배우의 미래처럼 보인다. 마우희가 구축한 패밀리 안에서 발군의 재능을 보여주는 일영처럼, 김혜수가 만들어내는 극의 무게감 위에서 김고은은 한껏 자신만의 연기 잠재력을 선보인다. 그래서일까. <차이나타운>은 김혜수와 김고은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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