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녀들’로 돌아온 송혜교, 더 멋있어졌다

검은 수녀들

2013년 대전에서 잠깐 배우 송혜교를 만난 적이 있다. 제2회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APAN STAR AWARDS)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갖게 된 기회다. 당시 송혜교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로 대상을 받았다. 그 해에는 <직장의 신>의 김혜수,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내 딸 서영이>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이보영이 후보로 올라 송혜교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결국 심사위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그녀가 대상으로 결정됐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심사기준이 오로지 연기력 하나라는데 입장을 같이 하면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 송혜교는 대상 수상자로서 간소하게 준비된 애프터파티에 참여했다. 스타라는 틀에 가둬져 있었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쳐온 송혜교의 면면을 유심히 봐왔던 나로서는 그 날의 수상이 남달랐다. 그래서 할 말도 많았지만 막상 송혜교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건 그 상이 끝이 아니고 이제 배우로서의 시작에 해당될 것이어서, 샴폐인을 일찍 터트리는 괜한 상찬으로 혹여나 앞으로 가야할 길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가을동화(2000)>와 <올인(2003)>, <풀하우스(2004)>를 거쳐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지만, 송혜교는 늘 갈증이 컸다. 반짝 스타가 아닌 롱런하는 배우로서의 길을 고민했던 거였다.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을 거친 후,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에서는 깊고 쓸쓸한 내면이 느껴지는 그녀의 연기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김은숙 작가와 만났던 <태양의 후예(2016)>를 통해 포텐셜이 터졌다. 멜로는 물론이고 액션부터 재난까지 다양한 장르가 겹쳐진 블록버스터였다. 도도하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강모연이라는 의사 역할로 송혜교는 <풀하우스>에 이어 또다시 아시아의 별로 떠올랐다. <풀하우스> 때와 달랐던 건, 그것이 그저 스타로서의 반짝임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성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송혜교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는 늘 따라다녔다. 실제로 멜로의 여주인공 역할을 대부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단순히 ‘멜로 퀸’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한 건 어딘가 송혜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같은 멜로라도 그녀가 해온 작품들을 따라가보면 여성의 성장사가 보여질 정도로 다채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동화>나 <풀하우스>가 동화처럼 풋풋했던 사랑을 표현했다면, <황진이>는 절절한 시대적 질곡 앞에 선 여성의 강단 있는 삶이 있었고, <그들이 사는 세상>과 <태양의 후예>에서는 일과 사랑의 영역을 모두 주도하고픈 여성의 삶과 사랑이 있었다. 이 과정을 거쳐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는 유한한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을까를 묻는 한층 성숙해진 멜로 연기를 선보였다. 

 

이러한 성장 과정들을 묵살한 채, ‘멜로 퀸’이라는 말로 가둬버리는 세간의 시선 앞에 송혜교는 새로운 선택을 시도한다. 마침 김은숙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그녀 역시 ‘멜로 장인’이라는 수식어에 가둬져 갑갑함을 느끼던 차였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더 글로리(2022-2023)>였다. 학교폭력이 소재였고, 송혜교는 피해자인 문동은을 연기했다. 멜로는 저 뒤편으로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복수극이 채웠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문동은이 보여주는 거침없는 말과 행보를, 송혜교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건 마치 억압된 자아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와 제 할 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폭력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문동은은 그렇게 부활하여 제 할 말을 했고, 그 문동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송혜교는 또 한 번 깨어날 수 있었다. 

 

<더 글로리>로 송혜교는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또 제2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마침 백상예술대상을 심사하게 된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2013년 대전의 한 시상식 뒷풀이에서 잠깐 얼굴을 본 후 10년이 지난 송혜교는 그 때 꿈꿨던 배우, 아니 대배우의 길 위에 서 있었다. 

 

최근에 그녀는 <검은 수녀들>이라는 영화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찍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새로운 재미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하지만 오컬트 장르에서 구마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사제가 아니라, 수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게다가 송혜교가 연기하는 유니아 수녀는 담배를 피우고 관습에만 머물러 있는 사제들에게 욕을 하며 마치 휘발유를 뿌리듯 성수를 통에 담아 부마자들에게 들이붓는 파격 그 자체를 보여주는 수녀다. 그런데 이 수녀는 절차나 규정보다 악마가 깃들어 죽을 위기에 처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뭐든 하는 그런 ‘열혈수녀’다. 사제들 중심으로 이뤄진 사회 속에서 소외된 구마하는 이 수녀는, 무병을 앓고 무속인이 될 운명이었지만 수녀가 되어 이를 거부하고 있던 미카엘라 수녀(전여빈)와 함께 소년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모두 소외된 자들이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연대가 오컬트 특유의 구마의식보다 더 전면에 나와 있는 듯한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적어도 송혜교의 이 작품 속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호평 일색이다. <더 글로리>에 이어 거침없는 수녀의 말과 행보를 보며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아니고, 또 그저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 하나에 가둬지지 않는 거침없는 송혜교의 연기 변신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이다. 송혜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을 내기보다는 차라리 그 빛을 떠나 다크해짐으로써 더욱 매력적인 ‘검은’ 언니가 되어 있었다. 혹여나 시상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도 입다물 생각이다. 그녀의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니.(글:국방일보, 사진:영화'검은 수녀들')

‘지헤중’, 헤어져도 사랑이 영원한 이유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평생 2월이면 애들 졸업시키는 게 업이었는데 내 인생에서 네 엄만 어떻게 졸혼시켜야 될지...” SBS 금토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 하영은(송혜교)의 아버지 하택수(최홍일)는 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는 중학교 교감선생님으로 매년 아이들과의 헤어짐을 반복했다. 하영은이 그게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아버지는 말한다. 

 

“못 본다고 인연이 끊기나 어디? 교문 밖으로 나갔다 뿐이지. 살다가 어려운 문제 부딪쳤을 때 아 택수 선생님이 이러라고 했지? 그 때 그 녀석은 잘 사나? 가끔 궁금해 하고. 그렇게 인생의 어느 자락에 늘 있는 거지.” 아버지는 헤어짐이 끝이 아니라는 걸 말한다. 하지만 정작 오래도록 함께 살아왔던 아내와의 헤어짐 앞에서는 난감해 한다. 그러면서도 집을 고쳐 놓고 나가겠다고 아내에게 말한다. 아내가 원하는 졸혼을 해주겠다는 것. 아버지에게 헤어짐은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인 셈이다. 

 

하영은은 결국 파리로 떠나는 윤재국(장기용)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떠나는 그의 짐을 함께 싸준다. 여기 이 곳에 자신이 해야 할 일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있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하영은을 윤재국도 애써 잡아 끌지 않는다. 물론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같이 떠날 비행기 티켓을 산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은씨 입장, 상황 안 되는 이유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하니까. 그런데도 티켓을 끊고 같이 가자고 한 건 내 마음 그대로라는 거. 그건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내가 혼자 떠난다고 해도 내 마음이 식어서거나 내 마음이 죽어서가 아니라, 나는 여전히 하영은이란 여자를 사랑하고 내일도 모레도 그럴 거라는 거. 그렇게 이어갈 거라는 거. 그건 꼭 말해야 될 것 같아서.” 그는 헤어짐을 선택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끝은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을 건네는 윤재국과 그 말에 담긴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하영은 앞에는 이제 따로 가야할 갈림길이 놓여있다. 하영은의 엄마 강정자(남기애)는 인생을 갈림길에 비교해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라는 게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거 같아. 갈림길도 만나고 절벽도 만나고. 같이 가던 사람들도 누군 이쪽 길 가고 누군 저쪽 길 가고. 아쉽지. 같이 가고 싶지. 그래도 어떡해? 갈 길이 다 다른데...”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그는 얘기한다. 

 

보통의 멜로들은 대부분 ‘만남’과 ‘결실’의 과정을 담는다. 그래서 그 흔한 동화 속 해피엔딩은 늘 “그들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그렇게 함께 오래오래 사는 것만이 해피엔딩도 아니고, 사랑의 완성도 아니며 서로를 끝까지 행복하게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주어진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만나고 사랑하지만 또 헤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헤어졌다 해도 그 사랑이 남긴 향기가 그 삶에 묻어있는 한 그 사랑은 끝난 게 아니라고.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그래서 잘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잘 헤어지는 것이 그 사랑을 얼마나 완성하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사랑만이 아니라 일도 삶도 그렇다. 황대표(주진모)가 하영은에게 그가 만든 브랜드 소노를 갖고 독립하라 제안하는 건 일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헤어짐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대해 하영은이 홀로 퇴사해 소노가 아닌 다른 자기만의 브랜드에 도전하겠다고 나서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황대표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가겠다 선택한 것. 이 선택에 황대표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하영은의 친구 전미숙(박효주)이 결국 암으로 사망하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이 드라마가 그리려 한 것 역시 헤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편과 아이 그리고 친구들과 잘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그는 모두에게 사진 속 그 밝았던 그 모습으로 남았다. 그런가 하면 민여사(차화연)가 죽은 아들과 끝내 헤어지지 못하고 집착하는 모습은 정반대의 의미를 전한다. 잘 헤어지지 못하는 삶은 결코 행복해질 수도 없다는 걸. 

 

만남의 스파크를 다루곤 하는 청춘들의 멜로와 달리, 헤어짐도 사랑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이 드라마는 어른들의 멜로다. 잘 헤어지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것이 삶과 사랑을 영원으로 만드는 길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어느 계절인들 아쉽지 않은 계절이 어딨어. 어느 꽃인들 꺾어서 곁에 두고 싶지 않은 꽃이 어딨어. 그런데 보내야지. 놔둬야지.” 하영은의 어머니인 강정자의 말처럼, 그렇게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 그럼에도 살아가다보면 또 어느 순간 기적처럼 다시 만나는 그런 일들이 가능할 지도. 잘 헤어질 수 있다면.(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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