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우리의 삶은 추락인가 비행인가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디즈니 픽사는 어떻게 삶과 죽음 같은 철학적인 주제마저 이토록 경쾌하고 명징한 상상으로 그려내는 걸까. <소울>은 한 마디로 인생 전체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지만, 그걸 표현해내는데 있어서는 아이들도 즐길 만큼 쉽게 담아낸 놀라운 작품이다. 그건 마치 구상에서 점점 깊어져 선의 단순한 연결로 오히려 실체에 접근한 피카소의 추상을 보는 듯하다. 스토리도 그렇지만, 그림이나 연출에서조차도 우리네 삶이 가진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추락과 비행의 아름다운 이중주가 묻어나는 작품이라니.

 

뉴욕에서 음악선생님으로 일하지만 평생의 목표가 재즈클럽에서 최고의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것인 조. 드디어 그 기회를 갖게 된 조는 그러나 맨홀에 빠지는 불의의 사고로 영혼이 되어 저 세상으로 가는 길 위에 서게 된다. 거대한 빛을 향해 저절로 움직이는 계단 위에 서게 된 조는 그러나 그 목표가 눈앞에 있던 순간 이렇게 끝나게 된 걸 용납할 수가 없고, 결국 그 곳을 벗어나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그 곳은 탄생 전 영혼들이 자신의 관심사로 인해 켜지는 마지막 불꽃을 찾아 지구로 돌아가는 곳. 하지만 조는 그곳에서 지구로 가는 걸 원치 않는 영혼 22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조는 다시 살아나 그토록 원하던 재즈클럽에서의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소울>의 스토리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조가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영혼 22 대신 지구로 가는 통행증을 갖게 되어 다시 살아난 조는 자신이 삶의 목표로 생각했던 재즈클럽에서 연주를 하게 되지만, 그걸 마치고 나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목표를 달성하긴 했지만 그것이 삶의 진정한 행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는 어느 날 은행나무에서 비행하며 떨어지는 씨앗을 보며 깨닫는다. 삶의 행복은 그런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고, 매일 먹던 음식,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느꼈던 희열의 순간, 처음 재즈를 접했을 때의 그 기분 같은 일상의 순간순간에 깃들어 있던 행복감에서 찾아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울>은 이러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조와 22의 모험을 통해서 우리네 삶이 추락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비행하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다. 드디어 평생을 원하던 목표를 눈앞에 둔 순간 맨홀로 '추락'하는 비운을 겪는 조의 상황은 우리네 삶에 대한 비관적 시각을 담아낸다. 삶이란 그렇게 어떤 최고의 순간에 다다르기 직전 추락하기도 하는 비극일 수 있다는 것. 추락하는 삶은 그래서 무겁디 무거운 존재의 무게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혼이 된 조는 거대한 빛을 향해 저절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삶의 무게는 죽음 후의 가벼워진 영혼과 대비된다. 그래서 추락하는 삶은 죽음 이후의 비상하는 영혼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조는 그렇게 저 위로 가벼워진 채 비상하는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뛰어내리고 그 무게 그대로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소울>이 깊은 감동을 주는 건 그것이 단지 삶과 죽음이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의 섬세한 표현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영혼의 세계가 마치 피카소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2차원적 형상으로 제리, 테리는 물론이고 영혼들의 가벼움을 표현해냈다면, 삶의 세계는 이와는 상반되는 중력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을 담아낸 점이 그렇다. 이런 가벼움과 무거움, 경쾌함과 장중함은 조가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재즈의 연주 속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그 누가 추락하길 원할까. <소울>은 조가 그랬듯이 어떤 목표를 세워두고 그 곳을 향해 오르는 이들의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추락에 대한 회피를 포착해낸다. 하지만 삶은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추락의 과정 그 연속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마주하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그렇지만 조는 떨어지는 은행 씨앗을 보며 그것이 추락이 아닌 비행이라는 걸 알게 되고, 더 이상 추락하지 않고 저 높은 곳으로 오르는 영혼의 세계보다 그 비행이 더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소울>이 전하는 '일상'의 소중함과 그 가치는 지금 같은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코로나 시국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몰랐던 길거리를 마스크 없이 활보하고, 마음껏 숨을 쉬며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 일상의 소중함들. 그것이 진짜 삶의 행복이었다는 걸 우리는 깨닫고 있지 않은가. <소울>이 말하고 있듯이.(사진:영화'소울')

어느 순간 식상해진 ‘전참시’, 그 이유가 뭘까

 

MBC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의 추락세는 명확해 보인다. 한때 13.3%(닐슨 코리아)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었지만 지금은 6%대까지 떨어진 시청률이 그렇고, 무엇보다 확 줄어든 화제성에 댓글 반응들이 이러한 추락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비이락처럼 마침 임송 매니저가 하차하면서 뚜렷하게 생겨난 변화는 그래서 이 추락세의 이유가 마치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물론 그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게다. 그만큼 <전지적 참견 시점>의 급상승을 이끌었던 주역이 바로 임송 매니저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전지적 참견 시점>을 보면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게 확실해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프로그램이 오래도록 반복되고 고정 출연자들이 계속 출연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들의 방송 분량이 어쩐지 비슷한 패턴 안에서 빙빙 돌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물론 스토리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보이는 모습이나 과정은 유사한 지점이 많다. 이를테면 이영자와 매니저 송성호가 함께 한 강연 소재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역할을 바꿔놓은 것 빼놓고는 새로울 게 없다.

 

이번에는 이영자가 매니저가 되어 송성호 매니저의 강의 준비를 도와주고, 그가 강연하는 걸 보며 감동의 제스처를 보인다. 또 강연이 끝나고 나서 올라오는 길에 빼놓지 않고 먹방을 하러 간다. 물론 이번에는 이영자가 아닌 송성호 매니저가 추천한 수제 국수집이지만, 막상 그 곳에 가서 나오는 풍경은 다르지 않다. 이영자는 특유의 맛 표현을 하려하고 그런 맛 표현에 스튜디오에서 이를 관찰하는 출연자들은 감탄한다.

 

너무 뻔해 보이는 스토리가 반복되고 있는데다, 이영자와 송성호 매니저의 역할 바꾸기 역시 너무 의도가 보이는 설정이다. 최근 <전지적 참견 시점>은 스타를 위해 헌신하는 매니저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시선이 180도 달라졌다. 한 때는 그 헌신이 굉장한 ‘배려’로 읽혔지만, 지금은 지나친 ‘과잉 행동’으로 읽히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현대판 노예’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물론 그건 과한 표현이고 실제 매니저가 그런 역할만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방송이 그런 부분을 부각시킨 면은 분명히 있다. 실제 매니저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왜곡을 걱정할 정도로.

 

그러니 이런 상황에 이영자와 송성호 매니저가 마침 역할을 바꿔 보여주겠다는 건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의도적인 설정처럼 보이는 면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실제라고 해도 시청자들이 그걸 실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새삼스런 변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의 의심은 <전지적 참견 시점>이 현재 직면한 가장 큰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제 아무리 배려가 넘치는 스타와 매니저의 모습을 보여줘도 ‘가식’과 ‘의도’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전지적 참견 시점>이 청하나 송가인 같은 새로운 출연자들을 계속 해서 게스트처럼 출연시키는 건 과연 효과가 있는 일일까. <전지적 참견 시점>이 가진 문제는 고정출연자들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진정성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게스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미 진정성이 의심되는 상황 속에 게스트가 들어가게 되면 자칫 그 게스트 역시 의외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전지적 참견 시점>은 지금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스타와 매니저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시점’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이들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계속 이어간다는 게 얼마만큼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또한 프로그램이 지속되면 출연자들은 자신의 방영되는 모습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실제 진실된 모습은 갈수록 퇴색될 수밖에 없다.

 

연예인 관찰카메라가 갖는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덜어내기 위해 매니저에 주목하는 새로운 관전 포인트를 가져온 <전지적 참견 시점>은 이제 매니저 또한 방송을 의식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진짜냐 가짜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될 수밖에 없는 관찰카메라에서 이런 변화는 프로그램의 기반 자체를 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지금 현재 <전지적 참견 시점>이 추락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임송 매니저의 하차 때문이 아니고.(사진:MBC)

헛된 판타지보단 아픈 현실 공감...드라마가 달라졌다

슈퍼스타 프로야구 선수의 화려한 삶에서 1년 실형을 받고 감방생활을 하게 된 제혁(박해수)은 참고 참았던 속내를 털어냅니다. “세상에 나만큼 인생이 꼬인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제혁이 지내는 감방생활을 다루죠. 거기에 드라마가 전가의 보도처럼 다루던 판타지 따위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보통 이하의 삶에 처해있기 때문에 굉장한 욕망을 판타지로 갖지 않습니다. 그저 좀 더 따끈한 물에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다고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죠. 

사실은 재벌가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 이야기를 듣고 덜컥 그 집으로 들어간 지안(신혜선)은 그게 지옥의 시작이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재벌가의 화려한 삶은 고사하고 실은 그것이 동생 지수(서은수)의 자리였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양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죠. 보통의 드라마, 그것도 주말극에서 ‘출생의 비밀’이라면 당연히 따라붙는 ‘신데렐라’ 이야기 따위가 이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는 없습니다. 지안은 이 지옥과 추락을 겪으며 자기 앞에 놓인 목재를 다듬고 가구를 만드는 일에서 오히려 더 큰 행복을 느낍니다. 가족의 포근함? 삶이 수저 색깔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 속에서 가족은 순간 지옥이 되어버립니다.

의사 남편에 그럭저럭 잘 살아왔던 삶이었습니다. 치매를 앓아도 좋았던 기억이 있는 시어머니와 망나니 동생이라도 지지고 볶으며 살아주는 올케가 있어 그런대로 버텨낼 수 있는 삶이었죠. 그래서 이제는 남편의 은퇴에 맞춰 시골에 내려가 살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갑자기 말기암이랍니다. tvN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1996년도에 방영된 드라마지만 하필이면 지금 왜 리메이크된 것일까요. 그것은 헛된 판타지보다는 아픈 현실을 공감해내려는 시대적 정서가 바탕에 깔린 선택은 아니었을까요.

JTBC 새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드라마는 붕괴된 건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정상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들이 서로 만나 그 아픔을 보듬고 어루만지며 상처를 이겨내고 해결해가는 이야기죠. 거기에 막연한 판타지 같은 것들이 들어앉을 자리는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사랑도 그래서 대단한 삶의 욕망을 건드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사랑’을 하는 것도 벅찬 그들에게는 그래서 ‘그저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일조차 엄청난 사건이니 말이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들 중 다수가 ‘성장 곡선’을 그리는 막연한 판타지가 아닌 한껏 추락한 삶이 보통을 추구하는 현실 공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물론 기획은 훨씬 전에 이뤄진 작품들이겠지만 이미 그 때부터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정서는 그리 녹록치 않았던 게 틀림없죠. 그저 열심히 살아도 점점 추락하는 삶, 제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삶, 그러다 한 순간 아픈 병이 닥치고 사고로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삶. 그것이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라는 인식이 이들 드라마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헛된 환상의 이야기에 쉽게 마음을 주지 못합니다.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저편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대신 망가진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를 버텨내고 보듬고 위로하고 그저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다루는 현실적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드라마 몇 편이 드러내는 이 같은 현실 정서는 그래서 못내 아픕니다. 우리는 성장을 꿈꾸는 게 아니라 ‘정상화’ 혹은 ‘그저 보통’을 꿈꾸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과연 이 추락하는 삶에도 날개는 있을까요.(사진:tvN)

‘화랑’, 문제는 사전제작이 아니라 완성도다

KBS 월화드라마 <화랑>은 결국 7.9%(닐슨 코리아)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지상파 경쟁에서 꼴찌를 기록하며 쓸쓸히 종영했다. 사실 시작부터 그리 좋은 출발은 아니었다. 첫 회 시청률 6.9%. 100% 사전 제작에 중국과의 동시방영 등을 내걸었던 작품인지라(물론 이건 틀어져버렸지만) 기대감이 높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청자들은 그리 반색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갈수록 식어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화랑(사진출처:KBS)'

혹자는 <화랑>의 추락의 이유로 사전제작이 가진 한계를 지목한다.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없는 게 아니다. 즉 문제가 초기에 발견됐을 때 100% 사전 제작 드라마는 이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 <화랑>의 경우 만일 사전 제작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첫 회 시청률이 6%대가 나왔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문제를 인식하고 대본 수정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화랑>은 안타깝게도 100% 제작이 완료된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사전 제작 드라마의 한계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사실 <화랑>의 이야기구조를 보면 100% 사전 제작 드라마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느슨하게 드라마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된다. <화랑>은 안지공(최원영)의 아들 막문(이광수)이 죽자 대신 그의 친구인 무명(박서준)이 그가 되어 살아가면서 차츰 화랑으로 거듭 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신라의 골품제도라는 틀이 있고 천민 출신인 무명이 실력으로 다른 화랑들의 귀감이 된다는 이야기는 금수저 흙수저로 얘기되는 현재의 청춘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태생으로 결정되는 계급 시스템과 대결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그려졌을까. <화랑>은 이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악역들이 제대로 서지 못했고, 그러니 이 주인공이 대결구도로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주제의식도 잘 드러내지 못했다. 이렇게 되니 이야기는 소소해지고 틀에 박힌 멜로가 빈자리를 채웠다. 여기에 천민인 줄 알았던 주인공이 본래 성골이었다는 출생의 비밀까지 등장하면서 시스템과 대결하는 문제의식은 퇴색해버렸다. 결국은 잘난 출생이 숨겨져 있었다는 귀결은 얼마나 허탈한 이야기인가. 

주인공인 선우가 이렇게 제 캐릭터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삼맥종(박형식)은 어미이지만 이상하게도 아들을 왕으로 즉위시키지 않고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왕비 지소(김지수)로 인해 전혀 캐릭터가 전면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왕이면서도 왕임을 밝히지 못하는 그 설정 때문에 늘 뒤편에 숨어 있게 됐던 것. 이런 캐릭터는 마지막에 진짜 자신이 왕이라는 게 밝혀지는 그 순간 잠깐 주목되지만 그 과정들에는 대부분 묻히게 될 수밖에 없다. 

<화랑>의 문제는 사전제작으로 인해 수정을 할 수 없었다는 점도 컸지만, 애초에 만들어진 작품이 너무 안이했다는 걸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설정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게 구성됐고, 드라마의 전개과정은 너무 느슨했으며 애초의 주제의식도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는 양상을 보여줬다. 사실 이건 사전제작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 드라마가 가진 완성도 부족의 문제라고 해도 될만한 사항이다. 

연달아 사전제작 드라마들이 고배를 마시는 상황이라, 마치 그 사전제작 시스템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전제작 시스템은 어쨌든 과거 쪽대본 시절을 떠올려 보면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제작 환경이다. 다만 중요한 건 그 사전제작을 제대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안전장치들이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하고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그 자체가 리스크일 수 있다. 그러니 그럴수록 더 많은 사전 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획단계에서부터 대본, 그리고 촬영 후 갖는 1차 편집본 등등 단계별로 모니터링을 하지 않는다면 사전제작은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화랑>의 쓸쓸한 종영은 그래서 사전제작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애초에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완성도 부족이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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