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비> 신민아, 살찌우자 비로소 보이는 연기

 

최근 여성연기자들은 예쁨을 감추려 안간힘이다? KBS <오 마이 비너스>의 신민아는 살을 주체할 수 없는 뚱뚱이로 분장했다. 대학시절에는 남자들을 줄줄 달고 다니는 말 그대로 비너스였지만 역변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아랑사또전>의 아랑이나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구미호 역할을 하며 미모를 뽐낼 때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연기가 이 뚱뚱이 분장을 하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오 마이 비너스(사진출처:KBS)'

최근 종영했던 <그녀는 예뻤다>의 황정음은 물론 <킬미 힐미><비밀> 같은 작품에서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정점을 찍은 느낌이다. 그저 연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스러움이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 그녀 역시 <그녀는 예뻤다>에서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에 폭탄머리를 하고 나왔다. 그랬더니 오히려 그녀의 연기는 더 돋보이는 효과가 나타났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여성 연기자들에게 미모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속박될 수 있는 족쇄가 된다. 특히 출중한 외모를 가진 여성 연기자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주목받지만 대신 연기를 해도 그 연기가 미모에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그 미모가 그 연기자의 이미지로 굳어져버려 새로운 연기를 할 때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젊은 나이에는 괜찮을 수 있지만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 미모의 여성 연기자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굳어진 이미지를 어떻게든 벗어나야 연기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외모를 가려버리는 캐릭터들은 이들 여성 연기자들에게 매력적인 기회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한때 이런 장치로 가장 많이 쓰인 건 남장여자였다. <커피프린스1호점>의 윤은혜는 그 남장여자 캐릭터로 대중들의 새로운 주목을 받았고, <바람의 화원>의 문근영은 늘 따라붙던 국민여동생 이미지를 그 남장여자 캐릭터로 깨버릴 수 있었다. 또 이렇게 이미지를 깨는 데 유용한 역할이 바로 악역이다. 수애는 <야왕>의 주다해 같은 악역을 통해 자신의 고고한 이미지를 깨려 노력한 연기자다.

 

<오 마이 비너스>의 신민아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녀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주는 캐릭터를 얻은 셈이다. 뚱뚱이 강주은이라는 캐릭터는 보기 불편할 정도로 뚱뚱한 몸과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갖고 있지만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일단 강주은이라는 뚱뚱이 캐릭터가 가진 씩씩하고 밝으며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다보면 그녀가 어서 살을 빼고 제 모습의 비너스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이건 놀라운 변화다. 대체로 신민아가 연기를 한다고 하면 시청자들은 흔히 그 외모를 오히려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마치 그 외모 때문에 캐스팅된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마이 비너스>는 정반대다. 그 외모를 뚱뚱이 캐릭터로 가리고 연기를 먼저 보여주고 나니 오히려 본래 신민아가 갖고 있던 그 외모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

 

여러모로 <오 마이 비너스>는 극중 캐릭터인 강주은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신세 마일리지라는 표현처럼, 신민아에게 신세 마일리지를 갖게 하는 드라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뚱뚱한 얼굴에서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참 많은 걸 표현해내는 신민아를 보게 되다니. 연기자로서 < 오 마이 비너스>는 신민아에게 어떤 분수령이 될 만한 작품이다.



연기자에게 필요한 것, 출연료 아닌 좋은 작품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입장이어서 일까. 드라마의 성패에 따라 가장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건 작가나 연출자가 아니라 연기자다. 그러나 연기자가 아무리 훌륭한 연기력을 갖추고 있어도 작품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연기는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연기력이 조금 부족하다 하더라도 작품의 캐릭터가 워낙 좋으면 그 연기자는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2007년도 드라마들에서도 그런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연기자들을 살렸던 드라마, 또 연기자들을 울렸던 드라마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연기자의 연기력을 극대화시킨 드라마들
그간의 부진을 씻고 정상의 궤도로 연기자들을 올려놓은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커피프린스 1호점’. 이 작품에 출연한 윤은혜, 공유, 이선균, 채정안은 모두 과거의 아픈 기억 하나씩을 갖고 있는 연기자들이다. 윤은혜는 ‘궁’, ‘포도밭 그 사나이’를 통해서 연기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지만 늘 따라다니는 건 연기력 논란이었다. 공유 역시 ‘어느 멋진 날’ 같은 작품에 등장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고, 이선균은 ‘하얀거탑’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약한 배역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채정안은 ‘해신’ 등을 통해 연기를 선보였지만 오랜 공백 끝의 복귀였다. 그러니 이 작품 하나는 이 네 명의 연기 인생을 바꿔놓은 셈이다.

윤은혜에게 ‘커피프린스 1호점’이 있었다면 이준기에게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있었다. ‘왕의 남자’로 일약 천만 관객의 배우가 된 그 지점에서 연기 첫걸음을 내딛던 이준기가 가진 부담감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 하지만 이 작품은 이준기의 다양한 연기의 결을 보여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상황에 따라 수없이 변해가는 캐릭터의 성격을 이준기는 큰 무리 없이 무난하게 연기함으로서 스타에서 연기자로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고맙습니다’. 이 작품은 공효진의 진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장혁의 연기자 복귀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해주었다. 이밖에도 ‘하얀거탑’의 김명민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연기자 본능을 과시했고, ‘외과의사 봉달희’가 발견한 이요원과 버럭범수 이범수 또한 2007년 드라마가 주목한 배우였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확실한 자신만의 아우라를 보여준 ‘마왕’의 주지훈, ‘인순이는 예쁘다’의 김현주 또한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연기력과 상관없이 연기자를 울린 드라마들
반면 작품을 잘못 만나 연기자가 연기력을 보일 수 없었던 드라마들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로비스트’가 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캐스팅만 보면 실로 최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연기자들이 포진된 작품이다. 먼저 주연을 맡은 송일국은 ‘주몽’으로 굳건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 상대역의 장진영 역시 영화 ‘소름’으로 연기력의 가능성을 보이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30회 황금촬영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인기여우상을 거머쥐면서 연기자로서 발돋움한 재원이다. 여기에 언제 등장해도 든든한 드라마의 기둥 역할을 해주는 허준호와 백발의 카리스마 연기까지 변신한 김미숙까지 동원됐지만 결과는 어이없게도 참패였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에어시티’를 들 수 있겠다. ‘에어시티’는 이정재와 최지우 같은 이른바 한류 스타들이 브라운관에 복귀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이슈가 될 정도의 대작 드라마였지만 역시 어이없는 참패를 맞았다. 공항이라는 관심을 끄는 소재는 전혀 작품의 스토리와 연관을 갖지 못하고 심지어는 공항 홍보 드라마냐는 비아냥까지 받았으며, 한류스타들에게마저 연기력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게 하는 굴욕을 안겨주기도 했다.

한편 ‘강남엄마 따라잡기’의 하희라 같은 경우는 작품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으나 캐릭터가 살지 않아 주목을 못 받은 경우다. 반면 ‘아이 앰 샘’의 양동근은 좋은 연기에도 시청률 틈바구니에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고 또한 작년 ‘마이걸’로 주목받았던 이다해는 ‘헬로 애기씨’라는 조금은 시대 트렌드에 뒤떨어지는 작품을 만나 외면 받았다. 어떤 경우든 역시 아무리 발군의 연기자라 해도 결국엔 좋은 작품 속에서만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2007년 연기자들을 울리고 살린 드라마들이 말해주는 것은 작품 없이 연기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자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실상 출연료가 아니라 좋은 작품인 셈이다. 내년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더 많이 나와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연기자들이 더 풍성하기를 기원한다.

드라마 속, 알파걸을 밀어주는 알파보이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최한결(공유)은 알파보이다. 재벌집 아들에, 다 허물어져 가는 왕자다방을 커피 프린스로 둔갑시킬 만큼 능력 있고, 잘 생긴데다가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다. 그런 알파보이가 소녀가장으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을 할 정도로 가난한 데다, 선머슴처럼 생긴 외모에 털털하기 그지없는 성격으로 남자로 오인 받는 고은찬(윤은혜)을 사랑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알파보이가 고은찬이란 여자의 숨은 재능을 키워내 알파걸이 되게 적극 밀어준다는 점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인기요인 중 한몫을 차지한 것은 바로 이 일하는 여성들이 갖는 환타지이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외국유학의 시간동안 묵묵히 기다리며 그녀의 성공을 빌어주는 남자는 아직까지는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은찬은 물론이고 한유주(채정안)-최한성(이선균) 커플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이미 둘 다 알파걸, 알파보이인 이 둘은 일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그 둘 다를 가지는 워킹우먼들의 환타지이다.

이런 알파걸을 밀어주는 알파보이는 현대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극 속으로 들어온 알파보이 이산(이서진)은 장차 알파걸이 될 성송연(한지민)을 적극 밀어준다. 그는 성송연에게 “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화원이 되려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조선시대라는 역사적 시점에 그것도 왕이라는 신분까지 감안한다면 이 제안은 실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라 할만하다. 지금 시대에도 하기 어려운 것을 남녀차별이 일상화되었던 조선시대에 한 셈이니 말이다.

그것은 단지 사탕발림의 말만이 아니다. 이산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 일에 뛰어든다.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회, 즉 다모가 화원이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단지 성송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당대 모든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밀어주기 위한 본보기로서 이 일을 벌인 이산은 어찌 보면 진정한 현대적 시각을 갖춘 남성이라 할만하다. 반면 대부분의 현대남성들이 그러하듯이 편견에 가득한 남정네들은 성송연과의 경합에서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저편에서 성송연의 사회진출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미소짓는 남자, 그녀의 알파보이 이산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여성의 사회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드라마 속 남성들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당연하다. 그만큼 현실의 남성들이 가진 편견과 싸우면서 당당히 사회 속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알파걸들이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또 다른 양태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남성들이 제시하는 것이 물질적인 부나 지위가 아니라 그녀들이 진정으로 잘 하고, 또 하고싶어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는 남성이 일방적으로 여성을 신데렐라로 만드는 이야기가 여성들에게 더 이상 매력이 없어질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현대여성들은 종속적인 신분상승이 아닌 자아성취를 지지해주는 남성과의 동등한 만남을 원한다. 그것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사극 속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현실여성들의 환타지가 스며든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는 또한 남성 캐릭터들의 변화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여성들은 자신을 알파걸로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알파보이를 원한다.

‘커프’는 동성애 드라마가 아니다

‘동성애’란 금기의 단어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을 타고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부에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마치 동성애 드라마나 되는 듯이 여기면서, 우리 사회가 터부시하던 ‘동성애’에 대해 이제 관대해졌다는 섣부른 관측을 하기도 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분명 장치로서 ‘동성애 코드’를 활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자체를 동성애 드라마라 하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다. 

헐리우드발 감동의 휴먼 드라마, ‘브로크백 마운틴’, 최근 게이 커플이 등장했던 ‘후회하지 않아’는 동성애 영화다. 이 영화들은 그 기본설정 자체가 동성의 커플의 애틋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다만 동성애를 다루는 시각은 조금씩 다르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동성애를 통해 인간애를 보여줬다면, ‘후회하지 않아’는 바로 그 동성애라는 자체에 집중하면서 존재와 계급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영화다.

모두 좋은 영화지만 이 두 영화는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주류영화 속에 들지 않는다. 그것은 동성애라는 금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10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왕의 남자’를 두고 동성애라는 금기의 벽이 무너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왕의 남자’의 성공은 예술과 권력 사이에서의 멋진 줄타기를 보여줬기 때문이지, 공길과 장생이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동성애 감정 때문이 아니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동성애를 가로막는 사회적 제약이 등장하지 않는다. 동성애 영화가 그렇게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 금기와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다. 따라서 그런 면이 부각되지 않는 ‘왕의 남자’를 동성애 영화라 부르는 것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루는 컨텐츠들은 과거부터 늘 마이너 문화였고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성공한 이유는 그것이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동성애 코드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찬(윤은혜)이 자신이 사실은 여자였다고 밝히는 순간, 드라마가 재미없어졌다 느껴지는 것은 동성애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 재미의 핵심요소였던 동성애 코드가 빠졌기 때문이다.

시청자도 알고 극중 인물들도 아는 남장여자를, 자신만 남자라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할 수 있다(이 정도로 사랑한다!)는 한결(공유)이 사랑스러운 것이지, 한결이 모든 사회적 억압의 틀에도 불구하고 실제 남자를 사랑해서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소위 말해 ‘동성애 코드’를 멜로의 장치로서 활용하고 있을 뿐, 동성애 드라마는 아니다. 즉 동성애 소재 컨텐츠와 동성애 코드는 오인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동성애 코드는 지금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류 컨텐츠 속에 이미 훌륭한 장치로서 활용된 바 있다. 그 첫 번째는 아무래도 ‘왕의 남자’가 될 것이다. ‘왕의 남자’가 왕과 장생, 공길 사이의 치정극이 되지 않고 예술가들의 고뇌와 권력의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성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국민의 4분의 1이 ‘왕의 남자’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를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남사당패의 역할놀이(남녀 구분이 없다)가 갖는 예술적인 승화가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가 애초에 남녀 관계 설정을 버리고 매니저와 한물 간 스타의 남남 관계로 재구성된 것은 똑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렇듯 동성애 코드는 종종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남녀 관계의 멜로 틀을 벗어 던지기 위한 장치로서도 활용된다.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의리나 우정이 더 참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동성애 코드는 또한 작품의 조미료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주몽’ 같은 남성적인 느낌의 드라마에서도 협보(임대호)와 사용(배수빈)의 동성애 코드가 쓰인 것은 그 설정이 갖는 코믹적 요소와 화제성을 십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발칙한 여자들’에서 상미(사강)의 남편 지환(장동직)이 동성애자라는 설정 역시 드라마의 재미를 높이기 위한 방식으로 채택된 것이다.

하지만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멜로의 재미를 주기 위한 동성애 코드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남장여자란 캐릭터와 금녀의 공간으로서의 ‘커피 프린스 1호점’이다. 동성애 코드에는 종종 남장여자 같은 털털한 이미지의 여성이 등장하는 이유는 여성성으로 억압되던 과거의 캐릭터들에 대한 혐오가 그 출발점이 된다. 소위 말해 예쁜 척 하는(혹은 해야만 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현대여성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즉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바로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남성들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앞서나가는 현 세태의 공감 가는 캐릭터를 창출하는 차원에서 동성애 코드를 활용한 면이 있다.

또한 남장여자 같은 중성적 캐릭터의 매력과 더해져 효과를 보고 있는 장치는, 이 캐릭터가 ‘금녀의 공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억압하는 존재로서 섞이기 어려웠던 남성들 사회에 들어가, 연애나 애정관계가 아닌 (남성과의) 동지관계나 의리를 경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짜릿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동성애 코드와 항시 같이 미소년들이 등장하는 것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선택하려는 남성으로서 미소년은 언제나 환타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남성 선택은 성적인 선택이 아니라, 팬시적이고 환타지적인 면이 더 강하다.

‘커피 프린스 1호점’를 비롯한 최근의 동성애 코드는 달라지고 있는 남성-여성의 관계까지를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이고 해방적인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똑같은 성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환타지지만, 그만큼 남녀 관계에서의 비뚤어진 수직구조들을 벗어나려는 강력한 욕망의 발현으로 읽혀진다. 이들 동성애 코드의 드라마들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 같은 인간애의 성격을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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