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안나’가 담은 리플리 증후군의 변주

안나

유미(수지)는 맨발로 23층까지 비상계단을 걸어 오른다. 처음에는 하이힐을 신고 올랐다. 하지만 하이힐을 신고 23층을 오르는 건 힘든 일이다. 결국 하이힐을 벗었고 맨발로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럭셔리한 최고급 아파트에서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굳이 비상계단을 걸어 오르게 된 건 그 곳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현주(정은채) 때문이다. 

 

과거 마레 컬렉션에서 일할 때 그는 현주의 개인 수행비서나 다름없었다. 현주는 자신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어떤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들이 주는 갖은 모욕과 수모 속에서도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 말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꾹꾹 눌러 참고 또 참던 유미는 결국 폭발했고, 현주의 학위와 그의 영어 이름 ‘안나’를 훔쳐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스펙으로 굴러가는 사회에서 거짓 학위는 힘을 발휘했고 그렇게 거짓에 거짓으로 자신을 새로이 쌓아올린 안나는 젊은 사업가이자 유력 정치인이 된 최지훈(김준한)마저 속이고 결혼해 과거 도저히 오를 수 없다 여겼던 현주의 삶을 자신도 살게 됐다. 유력 정치인의 아내이자 대학교수에 최고급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 하지만 그 거짓으로 쌓아 올린 삶이 진짜 안나인 현주를 만나게 됨으로써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놓였고, 그래서 유미는 그를 애써 피하기 위해 맨발로 23층까지 계단을 오르고 오르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었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가 보여주는 이 비상계단 시퀀스는 이 드라마가 단지 리플리 증후군의 서사만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보여준다. 알랭 드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로 기억되는 ‘리플리 증후군’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이 만든 허구를 진실이라고 믿고 거짓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다음백과)’를 말한다. 1999년에는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로 리메이크되기도 했고, 우리네 드라마도 <미스 리플리(2011)>로 변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나>는 끝없이 거짓으로 쌓아올린 정체성이 무너지는 비극을 담았던 리플리 증후군 소재에 사회적인 함의를 더해 넣었다. 그건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뭐든 척척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의 투영이다. 안나가 된 유미가 그렇게 23층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실제로는 맨발로 23층을 계속 오르는 장면은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이들이 저 높은 곳의 삶에 도달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면 밑에서 발을 동동 저어야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안나>는 자신의 삶 자체를 바꾸는 사기를 친 유미의 범죄를 그리고 있지만, 한참을 보다보면 이 인물에 공감하고 그가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가슴 졸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게다가 <안나>가 보여주는 유미를 둘러싼 저들 세상의 ‘거짓들’은 유미가 하고 있는 거짓 삶이 저들과 비교해 무에 그리 나쁜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남편 최지훈은 바로 그 거짓 가면을 뒤집어쓴 인물이다. 대외적으로는 성공한 젊은 사업가이고, 약자들을 위한 기부에 앞장서는 의식 있는 인물처럼 미디어에 의해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운전기사가 단 10분 늦게 도착한 일로 폭행과 폭언을 하고는 해고시키는 비정한 인물이다. 또 정치인으로서 그는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행동도 일상적으로 하는 인물이다. 유미의 거짓과 최지훈의 거짓 어느 쪽이 더 나쁜가. 

 

하지만 거짓은 가진 자들만 하는 게 아니라 유미의 유일한 선배인 지원(박예영)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더 큰 신문사의 스카웃 제의로 정치부 기자가 된 지원은 그것이 유미의 부탁으로 최지훈이 힘을 써 생긴 일이라는 걸 알고는 분노하고 또 유미의 삶이 거짓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지만 바로 그 실체를 폭로하지는 않는다. 그 역시 낙하산 인사의 수혜자가 됐기 때문이다. 즉 <안나>는 리플리 증후군을 소재로 가져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양극화와 스펙사회 그리고 가진 자들의 네트워크 무엇보다 겉과 속이 다른 거짓 가면의 사회 같은 현실들을 투영시킨다. 거짓으로라도 버텨내기 위해 맨발로 오르고 또 오르는 그 고단한 유미의 현실이 더 절절한 공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글:PD저널, 사진:쿠팡플레이)

‘안나’, 수지의 천연덕스런 거짓 연기가 좋다

안나

“항상 그랬어요. 난 마음먹은 건 다 해요.”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는 유미(수지)의 다소 역설적인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하다. 이 내레이션이 역설적이라는 건 바로 이어지는 차량 사고(혹은 사건)으로 드러난다. 거대한 기둥을 받아버린 차가 위태롭게 연기를 뿜어대고 힘겹게 열린 문에서 유미가 피를 흘린 채 내린다. 유미는 스카프를 풀어 백에 얹고 불을 붙여 차량 안으로 집어던진 채 걸어간다. 그러면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이 첫 시퀀스는 앞으로 <안나>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를 말해준다. 항상 마음먹은 건 다 한다는 유미의 말은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한다는 의미이고,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건 그걸 하기 위해 유미가 선택한 것이 ‘거짓’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는 어쩌다 거짓 삶을 선택했다. 자신이 아닌 ‘안나’라는 이름의 삶을.

 

리플리 증후군. 미국의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유래된 이 말은 우리에게는 이 소설을 영화화한 르네 클레망 감독,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로 잘 알려져 있다. 1955년부터 1991년까지 재해석된 이 작품은 우리에게도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안나>는 바로 이 리플리 증후군을 보여주는 유미라는 인물이 왜 그런 거짓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평범한 양복점을 하는 아버지와 농아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많지만 가난해 할 수 있는 게 없던 유미. 그는 자신의 부모 이야기부터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과 연애를 하다 들켜 혼자 서울로 오게 되고, 하숙집에서 생활하며 대학 시험을 치르지만 떨어진다. 하지만 힘들게 고생해서 딸 하나 바라보고 사는 아버지에게 유미는 거짓말을 한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숙집에조차 그가 대학에 들어갔다고 알려지고, 남몰래 재수 준비를 하던 차에 같은 학교 선배 언니가 유미를 챙겨주면서 그 학교 동아리에 들어가고 유미의 거짓 대학생활도 시작된다. 그나마 자신의 유일한 진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던 부모와도 유미는 점점 멀어진다.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했고, 농아인 어머니는 치매를 앓게 돼서다. 유미의 거짓 삶은 더 과감해진다.

 

남자친구를 속여 같이 미국에 가려 하다 정체가 들통 나 모든 게 무산되고, ‘학력무관’ 하다는 한 갤러리에 취직한 유미는 그 곳에서 갖은 수모와 모욕을 견뎌내며 하녀 같은 삶을 살아간다. 뭐든 원하는 대로 다 누리고 살아가는 현주(정은채)의 삶에 대한 동경과 분노를 느끼던 유미는 결국 그의 돈과 여권, 학력증명서 같은 걸 훔쳐 달아난다. 현주의 여권에 적힌 ‘안나’라는 이름으로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이후 그는 잘 나가는 사업가를 속여 결혼까지 한다. 

 

어떻게 거짓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질까 싶지만, 가짜로 꾸며진 학력이나 예쁘장한 얼굴 같은 외적인 것에 쉽게 휘둘리는 스펙사회는 안나의 거짓된 삶에 날개를 달아준다. <안나>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유미에서 안나가 되는 거짓 삶을 선택하는 그 과정에 그저 범죄라 여겨지지 않고 그럴만하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들. 가진 자들은 뭐 하나 노력하지도 않고 뭐든 다 얻어가는 데, 없는 이들은 하고 싶어도 노력을 해도 얻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껴지는 절망감. 

 

갤러리의 대표 이작가(오만석)은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고파 하루만 쉴 수 있겠냐고 묻는 유미에게 모멸감이 느껴지는 말을 쏟아낸다. “니들 문제가 뭔지 알아? 게으르고 멍청한데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려니까 그 모양인거야! 평생을 그러고 살래? 평생!” 하지만 그건 유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려 했고 똑똑했다. 그리고 남들 하는 거 하고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냥 태생이 달라 처한 현실일 뿐이었다. 그래서 유미가 거짓으로라도 안나의 삶을 살고픈 마음은 시청자들에게도 공감을 준다.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어쩌면 그 많은 리플리 증후군을 다룬 콘텐츠들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서사지만 <안나>가 흥미진진해지는 건, 차분하게 이 유미라는 인물이 안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그려내며 시청자들을 몰입시켜서다. 그리고 이것을 200% 공감시키는 건 다름 아닌 이 문제적 인물을 연기하는 수지의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박살내는 색다른 연기 덕분이다. 한때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며 그 틀에 갇혀있던 수지는 이제 그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버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중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수지가 이렇게 발칙한 매력이 있었던가. 마치 이런 유미에서 안나로 넘어가는 페르소나가 자신에게 절실하기라도 했던 듯, 수지는 천역덕스럽게 거짓 삶을 살아가는 연기를 해낸다. 그리고 이런 거짓을 연기하는 연기는 수지라는 배우가 껍질 하나를 벗겨내고 나온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꼭꼭 숨겨뒀던 욕망이 결국 터져 나와, 그저 청순하고 순수한 얼굴로만 비춰지던 유미라는 껍질을 깨고 안나라는 인물을 창출해낼 때, 수지는 드디어 자신의 배우라는 정체성을 찾아낸 듯하다. 이제 마음먹는 연기는 다 하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수지의 변신이 반갑다.(사진:쿠팡플레이)

<그알>, 어째서 현 시국을 악의 연대기라 명명했을까

 

이건 차라리 소설이나 영화여야 하지 않을까.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파헤친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40년 고리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다만 그 영화가 평이한 드라마가 아니라 악에서 악으로 이어지는 사회극이자 스릴러 나아가 <곡성> 같은 오컬트 장르까지 연상시킨다는 게 시청자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사진출처:SBS)'

일제강점기에 일본 순사를 지낸 최태민이 독립운동을 위한 밀정이라 주장했다는 내용은 영화 <밀정> 이야기의 최태민식 해석처럼 보였다. 전문가는 시험도 안보고 순사 추천을 받았다는 건 그가 일제에 충성도가 높았다는 단적인 증거라며 그의 밀정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확인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친일파들이 자기 친일 경력을 숨기기 위해 많이 한다며 해방 후 최태민이 개명을 한 걸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암살>의 염석진(이정재)을 떠올리게 했다.

 

최태민이라는 인물의 삶은 마치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처럼 거짓말과 사기로 점철된 삶의 연속이었다. 무려 7개의 이름과 6명의 부인. 훗날 만들 사이비 종교를 준비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살다보니 교주가 된 것인지 각종 종교를 전전하다 박근혜와 인연이 되어 구국선교단으로 승승장구하게 된 삶. 그리고 그 인연의 고리에는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인해 생겨난 약해진 감정을 최면으로 파고들었다는 마치 <곡성>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의혹 제기도 들어 있었다.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끝장나고 청와대를 떠나 박근혜가 자리한 육영재단은 사실상 최태민 일가의 사적 축재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사적 조직에 가까웠다. 여기서 최태민에서 최순실로 이어지는 악의 연대기가 본격화됐고 10.26 사건으로 청와대를 나온 박근혜의 대통령 만들기는 마치 종교나 군사조직처럼 진행되었다.

 

황상민 전 연세대 교수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심리 분석은 이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보다 쉽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는 2년 전 60명을 상대로 조사한 이미지 분석 결과, 60명 중 40명이 박 대통령을 혼군, 즉 어리석은 지도자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다음이 얼굴마담’. 황 전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대중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황 전 교수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당시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직 사퇴를 말실수해 대통령직 사퇴로 얘기한 사실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이는 “15년간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도 그냥 대통령이라는 마음으로 지냈다는 것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심리가 내가 자라던 집에 돌아가서 우리 아버지의 나라를 내가 주인으로서 지키는 것, 거기에서 내 집을 뺏겨가지고 쫓겨났을 때 그 이후에 아버지에 대해서 상당히 욕되게 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의 사회 작동 원리에 맞지 않는 박정희식 통치의 방식들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주 최선을 다해서 사익을 추구했다, “권력을 가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의 시대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방식 때문에 결국 오늘의 이 사태가 터진 것 아니냐고 지적한 김윤철 경희대 교수의 이야기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가 추적한 악의 연대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그 어두운 시기를 하나의 실타래로 꿰어냈다. 그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결코 영화가 돼서는 안되는 현실이기에 보는 내내 참담함을 금치 못하게 했지만. 우리가 살아온 한 시대가 어쩌면 한 사기꾼에서 사기꾼으로 이어지는 농단의 연대기였다니.

KBS 드라마의 총체적 부실 무엇이 문제일까

 

KBS 월화드라마 <태양은 가득히>는 시청률이 2.2%. 물론 시청률이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KBS라는 이름에 2.2%라는 시청률은 너무하다. 4% 시청률을 내고 있는 JTBC <밀회>에도 밀린다는 건 KBS로서는 심각한 문제다.

 

'감격시대(사진출처:KBS)'

문제는 이것이 <태양은 가득히>라는 작품 하나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전작이었던 <총리와 나>5% 시청률에 머물렀고, <미래의 선택> 역시 4%, <예쁜 남자>2.9%라는 부진한 시청률을 냈던 경험이 있다.

 

보편적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는 KBS에서 2%대의 시청률이 나온다는 건 사실상 안 본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이른바 애국가 시청률 드라마들은 KBS 드라마의 총체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그것은 단지 각각의 사안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다.

 

최근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는 <감격시대>의 출연료 제작비 미지급 문제도 마찬가지다. 출연자들이 소송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제작사인 레이앤모는 지급할 것이란 얘기와 지급 중이란 얘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종영에 가까워오면서 출연자들과 관련 업체들은 불안한 상황이다. 이것이 또 다른 KBS 드라마 먹튀의 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미 KBS 드라마 7편이 출연료 미지급 사태를 겪었다. 지난 2월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에 따르면 <그들이 사는 세상>67천여만 원, <도망자 플랜비>46천여만 원, <국가가 부른다>26천여만 원 등의 출연료가 미지급됐다. 드라마가 끝난 후 제작사가 파산을 선언하면 출연자나 관련업체들은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KBS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를 만들어내는 걸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방송3사 중 KBS의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게 지급하는 드라마 제작비가 가장 낮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외주제작사가 KBS와 드라마를 제작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이유다. 이번 <감격시대>의 제작사 레이앤모는 지금껏 드라마를 제작한 적이 없는 신생제작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작품으로 150억 규모의 블록버스터 드라마 제작을 하고 KBS가 편성을 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KBS의 드라마 제작비 지원이 상대적으로 일천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결국 제작자체를 충당할만한 수준의 제작비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도 일단 편성을 받아 한방을 노리는 영세한 제작사나 신생제작사들이 KBS 드라마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결국 이 제작비 지원과 관련된 시스템의 문제가 KBS 드라마의 이른바 끊이지 않는 먹튀 논란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셈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구조 안에서 제대로 된 기획이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 <예쁜 남자><태양은 가득히> 같은 어딘지 지금 시대와는 잘 맞지 않는 작품이 애국가 시청률을 내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트렌드에 민감한 시대에 대중들의 취향과 정서와 기호를 들여다보고 작품과 연결시키는 기획 부분은 거의 드라마의 성패를 가름하는 일이기도 하다.

 

혹자는 KBS의 재정상황이 어려워 드라마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재정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재정운용의 문제다. 최근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따르면 억대 연봉을 받는 최상위직의 무려 60%가 무보직이라고 한다. 즉 하는 일 없이 억대 연봉을 받아가는 이들이 최상위직의 60%나 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돈이 콘텐츠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수신료 인상운운하는 것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KBS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는 재정 운용이 콘텐츠에 투자되지 않고 방만하게 운영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되지 않는 작품에 편성을 주거나, 검증되지 않은 제작사에 외주제작을 주고는 문제가 터지면 그건 외주제작사의 문제라고 발뺌하는 식은 KBS라는 공영방송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국내의 드라마 제작 환경 자체를 취약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KBS에서 유일하게 되는 일일극이나 주말극 혹은 사극만을 제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 공영방송으로서 단막극에 오히려 투자한다면 대중들의 공감대도 커질 것이다. 무리한 수익사업으로 접근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수익으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민폐로 만드는 시스템의 문제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사안이다. KBS 드라마의 총체적인 문제와 부실을 점검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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