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가 연기하고, 배우가 웃기는 시대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연기 못하는 가수들은 이른바 연기력 논란을 겪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제 가수들이 주인공을 맡는다는 그 사실 하나로 비판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그만큼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가수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또 성공사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쇼'(사진출처:SBS)

이승기와 박유천은 드라마로 간 연기돌의 좋은 예다. '더킹 투하츠'에서 이승기는 깐족대면서도 때론 위엄을 보여주는 왕제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 있고, '옥탑방 왕세자'에서 박유천은 현대로 온 조선의 왕세자 역할을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를 품은 달'에서 주목받고 '적도의 남자'에서 매력이 확인된 임시완, '사랑비'와 '패션왕'에서 각각 활약하고 있는 소녀시대의 윤아와 유리 등등 지금 드라마의 중심에는 가수들이 있다.

 

물론 여전히 연기가 어색한 가수들도 있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확실히 나아진 건 사실이다. 이것은 이제 가수들이 연기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쉽게 보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이돌들 같은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연기를 배우는 것이 하나의 코스가 되어 있다. 가수들은 캐스팅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야 그만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소화를 못했을 때는 연기력 논란으로 자칫 가수 활동 자체에도 악영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수들의 드라마행이 이제 보통의 일이 되어버린 반면, 작년부터 배우들의 예능러시가 주목된다. 엄태웅은 '1박2일'의 멤버가 되면서 그간 드라마나 영화에서 올리지 못했던 주가를 올렸다. 그는 영화 '특수본'에 이어 '건축학개론'에도 출연했고, 최근에는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 맹활약 중이다. 송지효 역시 예능을 통해 주가를 올린 대표적인 사례다. '런닝맨'은 '쌍화점'에서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그 위에 송지효 특유의 편안한 매력을 부각시켰다. 그녀는 심지어 드라마 '계백'을 촬영하면서도 '런닝맨'에 출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사극에 있어서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송지효가 '런닝맨'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한혜진은 '힐링캠프'가 발견한 예능의 보석이 되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도 자기가 할 이야기는 빼놓지 않고 콕콕 집어 말하는 직설어법은 '힐링캠프'에서 그녀만의 존재감을 세워주었다. 이러한 성공사례들 덕분일까. 배우들의 예능 러시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고현정이 자신의 이름을 딴 '고쇼'로 예능 신고식을 치렀고, 이동욱은 이승기가 떠난 '강심장'에 MC를 맡아 첫 회부터 공동MC인 신동엽보다 더 확실한 존재감을 만들어냈다. 물론 시트콤은 예능으로 분류돼도 드라마에 가깝지만 아직까지 이 분야에 발을 딛지 않았던 차인표(선녀가 필요해)나 류진(스탠바이)이 최근 여기에 합류했다는 것도 배우들의 예능 러시와 같은 궤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배우들 중 특히 여배우들의 예능 활약은 두드러진다. 사실 여배우들의 예능 출연은 대부분 그들의 작품 홍보 시기와 맞물려 출연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여배우라는 존재 자체가 예능에서는 하나의 블루오션처럼 되어 있었던 것. 여배우라면 흔히 떠올리는 여신 같은 이미지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걷어내는 것만으로도 예능에서는 확실한 반전 효과를 줄 수 있다. 송지효나 고현정 같은 경우를 보면 그녀들이 본래 갖고 있던 이미지들을 예능을 통해 상당히 부드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배우가 예능을 하고 가수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연예인들이 점점 멀티 플레이어화되는 이유는 뭘까. 이것은 점점 퓨전화되고 섞이는 콘텐츠들의 시대적인 요구에서 비롯된다. 예능이 다큐나 드라마적인 요소와 섞이고, 드라마가 예능과 접목되는 등의 콘텐츠 퓨전화 경향은 그 종사자들인 연예인들의 자기 정체성 또한 하나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또한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지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자신을 어필하려는 것도 연예인들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들이 섞일 때 그 연예인 당사자에게 그것이 시너지를 만들 가능성도 훨씬 높다. 과거에는 배우가 예능에 출연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미지의 충돌이 생기기 때문. 하지만 요즘은 확실히 달라졌다. 예능 출연의 이미지와 영화나 드라마 출연의 이미지를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이다. 엄태웅 같은 경우에 '적도의 남자'나 '건축학 개론'에서의 진지한 이미지와 예능에서의 편안한 이미지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상생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스타들에게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는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물론 그만큼 치열해진 경쟁을 얘기해주는 것이지만, 또 한 편으로 특정 영역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뒤섞이는 문화적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콘텐츠의 퓨전화 경향처럼 이제 연예인들 역할도 퓨전화되고 있다. 가수가 연기하고 배우가 웃기는 시대다.

스펙사회에서 생존하려는 청춘들의 몸부림

 

‘패션왕’의 강영걸(유아인)은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주인공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주인공이라고 하면 주로 선의 입장에 서 있게 마련이고, 겉으로는 까칠하게 굴어도 여성을 보호해주는 인물이며, 심지어 복수를 할 때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친다거나 하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으로서의 정당성(적과는 다른)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패션왕'(사진출처:SBS)

하지만 강영걸은 자신에게 모든 걸 의탁하고 지지하는 가영(신세경)을 사장이라는 명분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지나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또 재혁(이제훈)에게 복수하기 위해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 가영을 그의 회사에 파견근무 보내고 거기서 안나(유리) 대신 디자인을 하게 시키지만, 결국 가영이 한 디자인을 자신이 상표등록 하는 방식으로 재혁의 뒤통수를 친다. 그는 결코 우리가 흔히 봐왔던 드라마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그래서 한때 강영걸은 민폐 캐릭터로 불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강영걸은 이렇게 물불 안 가리는 캐릭터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강영걸과 정반대에 서있는 인물들에게서 찾아진다. 재혁의 아버지인 정만호(김일우)는 자식에게조차 실적이 우선인 인물이다. 그는 자식이 사업에 실패해도 ‘자기 돈’ 아까운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뭔지 알아?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는 인간들이야.” 이렇게 말하는 그는 노력이나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인물이다. 모든 것이 결과로 드러나는 이른바 ‘스펙사회’의 전형.

 

흥미로운 건 ‘스펙사회’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또 다른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재혁은 그런 아버지 정만호를 거의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또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영의 디자인을 안나가 한 것처럼 돈으로 사려고 한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돈으로 가로채는 이런 방식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과정이 없고 결과만을 보는 스펙사회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정만호와는 달리 재혁이 그나마 괴로워하는 건과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가영이란 청춘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는 스펙사회의 공포에 질려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춘의 순수함을 갖고 있다.

 

앞뒤가 꽉 막혀버린 이 ‘스펙사회’의 틀을 놓고 바라보면 강영걸의 과도해 보이는 행동들이 이해된다. 도대체 공정하고 정의로운 공자님 같은 방식으로 이 스펙사회와 대적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강영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한다. 비열해져야 한다면 비열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고, 그래야 가영 같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도 챙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란 걸 그는 알고 있다.

 

재혁과 안나가 이 스펙사회의 기득권자로서 과정 없이 결과에만 집착하는 한계를 드러낸다면, 거꾸로 영걸과 가영은 애초부터 출구가 막혀 결과를 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재혁과 안나는 과정을 찾아야 하고, 영걸과 가영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한계를 넘으려면 재혁과 안나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하는 반면, 영걸과 가영은 스펙사회에서 몸에 새겨져 버린 패배주의를 넘어서 자신들만의 자존감을 되찾아야 한다. 이미 능력이 입증되었지만 여전히 ‘짝퉁 인생’을 살아가는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강영걸이 그토록 비열하게까지 그려지고, 재혁과 안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토록 안쓰럽게 여겨지며, 가영의 언제든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눈물이 가슴 한 구석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 이 모든 풍경들이 우리네 스펙사회 청춘들의 자화상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래 ‘장치나 프로그램을 만들 때 필요한 성능’ 따위를 지칭하던 ‘스펙’이란 말이 공공연히 인간에게 사용되고 있는 이 사회. ‘스펙사회’는 그래서 그 자체로 이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준다. ‘패션왕’을 보다보면 이 끔찍한 스펙사회에서 질식당하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실감하게 된다.

 '패션왕', 가슴 먹먹한 청춘들의 자화상

'패션왕'은 우리네 출구 없는 청춘들의 자화상 같은 드라마다. 비는 마치 그들의 처지처럼 추적추적 내리고 가영(신세경)과 영걸(유아인)은 우산도 없이 길바닥에 내쳐진다. 얼굴에 훈장처럼 상처를 달고 그들은 지금 맨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중이다. 살아남기 위해. 모욕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린 조마담(장미희)의 부띠끄에 의탁한 가영을 찾아온 영걸이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버스 안. 주머니에 있는 단돈 몇 천원.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 그 막막함. 아마도 지금의 청춘들이라면 이들이 흘리는 그 눈물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을 것이다.

 

'패션왕'(사진출처:SBS)

'패션왕'의 가영과 영걸이 태생으로부터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 있는 인물이라고 해서 이 드라마를 단순히 계급적 차이에 의한 빈부의 대립이나, 그 빈부를 뛰어넘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전혀 다른 계급에 속해보이는 재혁(이제훈)과 안나(유리) 역시 출구가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니까. 겉보기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재혁이지만 그는 바로 그 태생의 덫에 걸려 있는 청춘이다. 그는 부모라는 이유로 재혁의 삶에까지 관여하는 정만호(김일우)와 윤향숙(이혜숙)의 그늘에서 숨 막혀 한다.

재혁은 엄마인 윤향숙을 CEO처럼 생각한다. "CEO 전에 네 엄마야."하고 말하는 윤향숙에게 재혁은 "엄마면 이래도 되는 거야?"하고 되묻는다. 그들은 편의에 의해 때론 부모 자식임을 내세우지만 재혁이 사업에 실패하자 가차 없이 뺨을 날리고는 "내 돈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엄포를 놓는 그런 CEO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인물들이다. 과장된 면이 있지만 돈과 물질 만능은 때론 자식마저 하나의 물건처럼 보게 만들기도 하나 보다. 그런 부모일수록 출신성분에 집착하는 법. 마치 물건 고르듯 출신성분을 따지는 그들에게 안나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일찍이 부모가 이혼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안나는 어떻게든 노력해 그 기득권자들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지만 그것은 출신성분이라는 꼬리표에 의해, 또 부족한 실력에 의해 좌절된다. 마치 내세울 거라곤 그것밖에 없다는 듯 끊임없이 마이클이라는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을 인정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영걸에게 안나는 "좋겠다. 마이클이 인정해줘서..."라고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는다.

'패션왕'이 태생적으로 갈라진 두 개의 삶, 즉 영걸과 가영의 가난한 청춘과 재혁과 안나의 부유한 환경의 대립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두 삶 모두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참을 보다 보면 재혁의 그 까칠함 이면에 놓여진 우수와 힘겨움이 보이고, 안나의 꼿꼿함 이면에 숨겨진 안간힘이 보인다. 이 네 명의 청춘은 지금 모두 현실에 질식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숨 막히게 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기성세대로 대변되는 부조리들이다. 실력이 아닌 태생으로 결정되는 삶,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식의 물질 만능주의,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당연하다는 듯 밟고 서는 사회 시스템, 심지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관계의 굴레 혹은 폭력... 이것이 진짜 '패션왕'이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태생과 빈부가 다른 네 명의 청춘들이 각자 위치는 달라도 마치 한 배를 탄 듯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영걸이 은행에서 자금 대출을 하려 하자 대뜸 "담보 없어요?"하고 물으며 난색을 표하는 은행 직원. 그러자 영걸이 "중소기업 지원자금도 7천억이 풀렸다고 하는데 어디로 간 거예요?"하고 묻자 돌아오는 "고객님은 해당사항 없습니다" 라는 절망적인 답변. "그럼 저 같은 사람은 고리사채나 쓰라는 겁니까?"라고 외치는 영걸의 항변이 예사롭지가 않다. 또 정반대로 "엄마면 이래도 되는 거야?"하고 묻는 재혁의 목소리도 남달리 들린다. '패션왕'이 특별한 지점은 이 서로 다른 계급적 위치에 서 있는 청춘들이, 바로 그 청춘이라는 지점 하나로 기묘한 연대의식을 가질 때다. 재혁이 가영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이나, 영걸이 술 취한 안나의 신발을 벗겨주는 장면이, 가영과 영걸의 그 깊은 절망감을 보여주는 버스에서의 장면만큼 깊은 감흥을 주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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