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죽다 살아난 김래원의 욕망과 본질

 

아마도 거의 모든 콘텐츠에서 죽음은 사태의 본질을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아닐까. SBS 월화드라마 <펀치>에서 박정환(김래원)과 신하경(김아중) 검사가 맞닥뜨리게 되는 죽음의 사태가 그렇다. 이태준(조재현)의 심복으로서 그를 검찰총장까지 만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들까지 해온 박정환은 그러나 정작 그 권력의 눈앞에서 사망선고를 받는다.

 

'펀치(사진출처:SBS)'

하지만 수술 중 코마 상태가 되어버린 박정환을 두고 사태의 본질이 드러난다. 즉 이태준은 혼수상태인 그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애도의 눈물이 아니라 배신의 눈물이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박정환의 전처인 신하경을 살인자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한편 신하경은 박정환을 살리기 위해, 또 그를 예전의 그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 앞에서 아군과 적군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셈이다.

 

<펀치>가 흥미로운 건 욕망의 끝에서 발견되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겪고 난 자가 발견하는 새삼스러운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드라마들을 통해 박정환 같은 야망의 인물들을 봐왔다. 이미 7,80년대의 시대극들이 대부분 그린 것이 그것이 아닌가. 이 야망의 인물들은 성공시대를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개발시대의 끝자락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다.

 

90년대 IMF가 터지면서 성공신화는 거품으로 판명 나 버렸고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았던 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성공신화의 죽음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통해 발견된 것들이 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며 살아왔다고 믿었던 삶이 사실은 다른 것들을 소외시키고 파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은 이처럼 본질을 드러내는 속성이 있다.

 

<펀치>는 마치 권투 경기를 벌이듯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드라마다. 박정환은 죽음의 끝에서 회생했고 그 과정을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형제처럼 이어질 것 같던 이태준과의 의리는 사실 같은 욕망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면 이혼한 전처와는 완전히 식은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남아있다는 걸 발견한다. 죽음의 경험은 그에게 본질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데 왜 하필 다른 것도 아닌 죽음일까. 여기에는 박경수 작가가 갖고 있는 현실인식의 단면이 들어가 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 현실은 그 정도, 즉 죽음을 맞이할 정도가 되어야 겨우 폭주기관차 같던 욕망을 멈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권력과 욕망이 폭주하는 현실에서 그만큼 우리의 삶은 피폐해졌다. 심지어 자신을 위협하는 적과 늘 자신을 생각해주는 아군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죽다 살아난 박정환이 자신의 욕망을 벗어나 삶의 본질로 들어가는 과정은 그래서 한번 보면 <펀치>의 한 방에 눈을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 과정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살짝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앞으로만 달려가는가. 모두가 달려가니 따라 달리던 우리네 관성에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드라마. 그게 바로 <펀치>.

 

정의와 진실, 요즘 대중들의 갈망

 

센 놈들 잡으려면, 뭐가 필요한지 아냐. 다른 힘센 놈의 허락이다.”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최민수) 부장검사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강행하려는 구동치(최진혁)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이 대사 속에는 우리네 검찰이 처한 쓰디쓴 현실이 묻어난다. 정의를 구현해야할 검찰이 사실은 권력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을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그래서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부장검사는 보여준다.

 

'오만과 편견(사진출처:MBC)'

검사는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외부에 공표할 수 없다. 죄송하다.” <펀치>에서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에 서게 된 신하경(김아중)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총장의 비리를 폭로하지 못했다. 전 남편이 자신이 데리고 살고 있는 딸 예린이(김지영)의 양육권을 갑자기 들고 나오며 그녀를 협박했기 때문. 이 장면 속에는 검찰이라는 조직이 가진 권력적인 속성이 묻어난다. 쟁취하기 위해서는 딸까지 볼모로 내세우는 것.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은 피노키오가 진실만 말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또 사람들은 기자들도 피노키오처럼 진실만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피노키오도 기자들도 사람들이 자기 말을 무조건 믿는다는 걸, 그래서 자기 말이 다른 사람들 말보다 무섭다는 걸 알았어야죠. 그걸 모른 게 송기자님의 잘못입니다... 13년 전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임팩트를 운운하시는 걸 보니 송기자님은 13년 전과 똑같은 기레기시네요.”

 

<피노키오>에서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자신은 기자로서 할 일을 했다 말하는 송차옥(진경)기자에게 그녀의 딸인 최인하(박신혜) 기자는 기레기라는 강한 표현을 쓴다. 여기에는 과잉 취재 경쟁 속에서 팩트보다 임팩트가 더 중요해진 우리네 언론의 현실이 묻어난다. 바로 그 임팩트는 어떤 경우에는 한 가족을 풍비박산 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 <힐러>의 정의로운 기자 김문호(유지태)는 노조파업 현장에서 분신한 노동자의 병원을 찾아 그렇게 말했다. 귀 기울여주지 않는 세상에 분신이라도 해서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고 했던 것이지만 아무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는 노동자의 이야기에 김문호가 기자로서 사과한 것. 물론 김문호라는 인물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 판타지 속에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서민들의 갈증이 느껴진다.

 

최근 주중 드라마들은 왜 이렇게 연달아 검찰과 기자를 드라마의 소재로 다루고 있을까. 드라마가 대중들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보면 이 두 직종이 환기하는 건 정의와 진실에 대한 서민들의 갈망이다. 언젠가부터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권력기관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검찰에 대한 서민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오만과 편견>이나 <펀치> 모두 검찰의 비리 척결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건 그래서다.

 

한편 검찰만큼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언론이다. 팩트보다는 임팩트를 강조하고, 때로는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언론을 대중들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피노키오><힐러>가 다루는 언론의 문제는 자기반성으로 가득 차 있다. 잘못된 언론의 뉴스나 조명하지 않는 사건들이 누군가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자각이 그 밑바닥에는 깔려 있다.

 

검찰과 기자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대중들이 기대하는 건 정의와 진실의 승리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들 드라마들이 과거와 달리 손쉽게 정의와 진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은 더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대중들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같은 허구 속에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도 버거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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