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먹어도 보면 그만? 임성한 월드의 참상

 

이제 임성한 월드는 더 이상 욕하는 것도 지겹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아예 임성한 월드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비판 기사는 사실상 임성환 월드가 먹고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임성한 월드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칭찬은 당연히 논란으로 이어지고, 당연한 비판 역시 그 논란을 부추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이것이 임성한 월드에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무관심이 답일 수 있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조금 오른 시청률 때문에 자꾸만 임성한 월드에 대한 재조명 기사들까지 나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시청률은 작정하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장 쉬운 것은 룰을 깨는 것이다. 드라마라는 창작의 공간에도 정해진 룰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이걸 깨버리면 당연히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그 시끄러움은 임성한 월드가 목적하는 것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여기서 함정은 방점이 욕하면서에 찍히는 게 아니라 보는에 찍힌다는 점이다.

 

이렇게 찍힌 방점은 본말을 전도시킨다. 보게 하기 위해 욕먹기를 자초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등장인물(그것도 주인공급)의 어이없는 죽음은 욕먹기가장 좋은 수단이다. 물론 거기에는 작가의 욕망이 들어 있다. 이 세계에는 작가가 신이다. 그는 인물과 인물을 이어붙이는 것에서 장애물이 있다면 거침없이 제거해낸다. 그 세계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시청자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데서 나오는 잡음들은 오히려 을 통한 시청률로 이어진다.

 

죽었던 인물이 다시 유령이나 환시로 재등장하는 건 그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논란의 불씨를 끄기 보다는 오히려 계속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 섬뜩해진다. 마치 길거리에서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임성한 월드는 무관심이나 비판조차도 가만두지 않고 오히려 키워버린다.

 

당연히 작품을 일관적으로 통과하는 메시지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 지극히 이상한 임성한 월드가 마치 보편적인 세계인 양 매일 같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끔찍한 악영향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장면들이 주는 황당함과 어이없음은 그 강도가 너무 강해서 비판조차 허탈하게 만든다. 그러니 작품성 자체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자극만을 쳐다보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시청패턴이다.

 

이 황당한 세계가 매일처럼 대중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등장인물을 의심 없이 바라보다보면 마치 사람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듯한 세계관을 내면화하게 될 수도 있다. 룰 자체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야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마치 그런 임기웅변식의 삶이 우리가 지향해도 무방한 삶의 본질이라는 것에 승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임성한 월드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세계를 매일 매일 보여주는 방송사의 윤리 부재의 현실이다. 시청률만 되면 뭐든 받아들인다는 이런 식의 태도는 모든 가치들을 경제적인 논리 아래 굴복시킨다. 일부 기자들을 비판하는 기레기라는 말을 끌어와 작레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을 방송사는 왜 좌시하고만 있는 걸까.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디즈니랜드에 비유해 설명하며,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임성한 월드가 갖는 정치적 위험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극단의 막장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지독한 현실의 막장을 은폐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펀치>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막장의 현실들을 환기시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임성한 월드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막장에 쏟아지는 욕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괴물처럼 보인다. 이 룰도 없고 삶과 죽음의 예의도 없는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혀를 차고 있는 순간, 저 바깥세상에서 돌아가는 막장의 현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마비된다. 과연 욕먹어도 그만일까. 이런 세계를 방치하는 것은.

 

힐러 혹은 킬러, 힐링 혹은 킬링

 

KBS 월화드라마는 <힐러>라는 낯선 제목을 달았을까. 우리 식의 슈퍼히어로를 담아내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그 영웅적 존재가 힐러라 불린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즉물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고 X맨처럼 세련된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힐러는 그림자처럼 다가와 비밀스런 일들을 하는 존재다.

 

'힐러(사진출처:KBS)'

힐러라는 제목이 더 명쾌하게 이해되려면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진 킬러를 떠올려보면 된다. 즉 이 드라마에서 힐러인 서정후(지창욱)는 밤에 어둠 속에서 나타나 누군가를 죽이고 사라지는 킬러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누군가를 살리고 위로하며 구원하는 존재다. 그를 사랑하게 된 영신(박민영)이 정후가 킬러인지 힐러인지를 헷갈려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어린 시절 버려진 충격에 정신적인 장애를 겪는 그녀는 그녀를 구원해줄 힐러를 기다린다.

 

<힐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MBC 수목드라마 <킬미 힐미>는 적어도 그 제목만으로는 <힐러>와 유사한 연관성이 엿보인다. 7개의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 차도현(지성)의 자아 중 하나인 요섭은 자살을 기도하는 인물이다. 건물 옥상 위에 올라가 킬 미(KILL ME)’라는 죽음의 표식을 남기고 자살하려는 그를 구해낸 오리진(황정음)은 그 글자를 힐 미(HEAL ME)’로 바꿔 놓는다. 이 장면은 이 드라마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죽게 놔둘 것인가 아니면 구원해낼 것인가.

 

<힐링캠프>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대중들의 관심이 힐링 트렌드의 종언을 얘기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힐링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다만 <힐링캠프><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같은 힐링에 대한 조금은 여유 있는 접근방식이 당장이 갈급한 대중들에게는 점점 공감대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지금 새롭게 떠오르는 힐링은 그래서 킬링을 전제한다. 구원받지 않으면 죽음을 맞게 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는 그 급박함은 도대체 뭐고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힐러><킬미 힐미> 그리고 <하이드 지킬 나> 같은 드라마들이 거의 모두 정신증을 다루고 있다는 건 흥미롭다. <힐러>의 영신은 일종의 공황장애 같은 걸 겪고 있고, <킬미 힐미>의 도현이나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현빈)은 모두 다중인격 장애를 겪고 있다. 공황장애가 죽을 것 같은 고통이라면, 다중인격 장애는 자신의 정체성이 지워질 것 같은 공포감이다.

 

최근 들어 드라마에 등장하는 질환이 과거 같은 외과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과적인 문제라는 점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이른바 멘탈붕괴의 시대다. 작년 한 해를 두고 봐도 우리는 너무 많은 사건 사고를 통해 아주 가까이서 죽음을 들여다봐야 했다. 게다가 그 죽음에 대해 무력하고 심지어는 무책임하기까지 했던 공권력의 부재를 보면서 그 사회적 불안감은 더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멜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한계는 있지만, 그래서 이렇게 죽음의 공포 앞에 놓여진 정신증의 문제들을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개인적인 사랑으로 넘어서려는 한계를 보이고 있지만 그나마 힐링을 갈구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정신증의 문제는 외과적 문제와는 그 치료의 접근방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외과적 문제는 병변을 적으로 간주해 제거하는 것으로 치료를 꾀하지만, 정신증은 그럴 수가 없다. 다중인격으로 드러난 또 다른 자아는 적이나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나와 싸울 수 없다. 그러니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요즘처럼 적을 외부에서 발견하기보다는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는 사회의 구조를 닮았다. 지금을 정신증의 시대라고 말하는 건 세상을 치유하는 방식으로서 외과적인 방식이 아닌 정신증적인 방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저 SBS드라마 <펀치>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디가 적이고 어디가 아군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상태라는 점이다. 좋은 내 편과 나쁜 적이 있는 게 아니라, 덜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 있고, 그것도 영원히 유지되는 게 아니다. 때론 적과도 손을 잡는 그 비정한 세상에 남아있는 건 법과 정의 따위가 아니다. 법은 이미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선량한 국민조차 그 과정에서는 희생자가 된다.

 

이것은 정신병증의 사회다. 우리는 한 가지 일관된 자아를 유지하고 산다기보다는 무한한 욕망 속에서 분열된다. 그 분열된 자아는 어쩌면 자신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보호색일 것이다. 그리고 보호색을 갖지 못한 자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넘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도움도 테두리도 되어주지 못하는 국가나 법은 방관자이자 공범자가 된다.

 

지금 우리 대중문화를 뒤덮고 있는 힐링에 대한 새로운 갈증은 그래서 킬링하고 있는 현실의 암담함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를 살려야할 이들이 오히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고, 누군가를 지켜야할 이들이 오히려 그들을 더 힘겨운 현실 앞으로 내몰고 있다. 정작 여기서 말하는 힐링이란 저 <힐링캠프>가 가끔 보여주는 그런 사치스러운 고민 따위가 아니다. 그저 <삼시세끼> 걱정 없이 편하게 먹고 싶다는 것뿐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소박한 욕심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된 걸까.

 

 

<펀치>, 짜장면 한 그릇에도 담기는 은유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른 뉘앙스로 읽힌다. ‘먹는다는 건 가장 기본적인 삶의 본질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것은 또한 욕망의 다른 표현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SBS 월화 드라마의 <펀치>먹는다는 표현이 그렇다. 이 드라마에서는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그 먹는 행위에 남다른 은유가 담긴다.

 

'펀치(사진출처:SBS)'

검찰총장이 된 이태준(조재현)과 그를 검찰총장 만들었으나 그에게 배신당한 박정환(김래원) 검사가 함께 먹는 짜장면은 그들의 관계를 그대로 상징한다. 처음에는 같이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상징하던 짜장면이지만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서로 다른 중국집의 짜장면이 맛있다고 의견이 갈린다. 그렇게 영원히 틀어질 것 같았던 두 사람이지만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을 공동의 적으로 세우며 연합할 때는 또 같이 앉아 짜장면을 먹는다.

 

음식은 하나의 기호와 취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걸 같이 먹는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이태준 총장과 윤지숙 장관의 입맛이 다른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다른 욕망으로 엇나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는 식당은 그들의 관계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홍어를 좋아하는 이태준 총장이 윤지숙 장관에게 홍어를 한 점 얹어 먹으라고 권하는 장면은 이태준 총장이 권력의 우위를 잡게 된 상황을 말해주고, 반대로 윤지숙 장관이 스파게티집으로 이태준 총장을 부르는 장면은 반대의 상황을 말해준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이처럼 <펀치>에서는 권력 관계의 은유로서 사용된다. 윤지숙 장관과 이태준 총장이 서로의 비리를 하나씩 잡고 공동운명체가 되는 순간, 이태준 총장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가야되는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떤다. 윤지숙 장관이 까만 커피에 프림을 넣는 장면을 은유해 깨끗한 검찰을 만들겠다고 하는 장면이나, 박정환 검사가 커피에 검은 설탕과 하얀 설탕을 넣으며 (윤지숙 장관이나 이태준 총장이나)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또 이태준 총장의 형 이태섭(이기영)이 자살 직전에 동생과 칡뿌리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그 칡뿌리는 이태준 총장의 책상에 간직되어 두 사람의 형제애를 표징하는 도구가 된다.

 

<펀치>의 박경수 작가는 이처럼 음식에 대한 은유를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단 자칫 이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드라마의 권력 관계들을 가장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누구와 연합하고 또 누구와 대립하는 정치적인 관계의 변화는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함께 밥을 먹는 장면만으로도 그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효과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건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박경수 작가 특유의 사유가 거기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밥 한 끼 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꽤 많은 목적들이 담기기 마련이다. 욕망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들이라면 그러니 그 밥 한 끼의 의미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목적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것이 <펀치>의 인물들이 밥을 먹는 장면이 맛있다기 보다는 탐욕스럽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이유다.

 

최근 나영석 PD<삼시세끼>가 화제다. 도시를 떠나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삼시세끼를 챙겨먹는 그 행위에 대중들은 뜻밖의 열광을 보낸다. 차승원과 유해진이 만재도의 한 집에서 챙겨먹는 밥 한 끼에는 아무런 목적성도 탐욕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밥 한 끼에는 두 사람의 진심이 담긴다. <펀치>의 삼시세끼와는 너무나 다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하지만 그 먹는다는 행위가 삶의 본질에 닿아있지 않고 어떤 욕망과 목적성을 내포할 때 그 밥 한 끼는 우리네 삶의 피와 살이 되지 못할 것이다. <펀치>의 목적화된 음식들은 그래서 그 관계의 피폐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좋은 사람과 만나 진심이 담긴 밥 한 끼 챙겨먹는 일. 어쩌면 진정한 삶과 관계의 회복은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래원, 절제와 광기의 절묘한 조화

 

2006년 개봉했던 <해바라기>라는 영화 속에서 김래원의 가능성이 발견되었다면, 최근 드라마 <펀치>와 영화 <강남1970>에서의 그는 그 가능성을 최대치로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 그에게서 발견됐던 것은 광기감성을 공유한 배우였다. 그는 한없이 순진무구해 심지어는 바보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가 어느 순간 악마 같은 광기를 폭발해내는 얼굴로 돌변할 때 그 에너지를 드러낼 줄 아는 배우였다.

 

'펀치(사진출처:SBS)'

<펀치>에서의 김래원은 그 다소 단조롭던 두 가지 얼굴이 여러 개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태준(조재현)을 검찰총장으로 만들어내는 박정환은 욕망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태준의 충실한 개가 되어 검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는 냉혈한이었다. 그랬던 그가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고 그 와중에 이태준의 버림을 받게 되면서 문득 가족으로 돌아온다.

 

갑자기 찾아오는 엄청난 병의 고통을 견뎌내고, 그것보다 더 지독한 이태준과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 같은 인물들의 공격을 버텨내면서 그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 그는 병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며 가족 앞에 서는 인물이지만 그 얼굴은 좀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통증을 숨기려 자기만의 방안으로 들어가 입술을 질끈 물고, 파상 공격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숨긴다. 그리고 가족 앞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듯한 얼굴을 보여준다.

 

똑같은 무표정의 얼굴이지만 그 안에는 세 가지 다른 감정들이 요동친다. 병의 고통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을 숨기고, 자신을 희생양 삼아 권좌에 오르려는 한때는 같은 꿈을 꾸던 인물들 앞에서는 그 분노의 감정을 숨긴다. 그리고 가족 앞에서는 자신의 이 고통들을 숨기려 애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살고 싶다며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그래서 김래원 특유의 감정 폭발을 만들어낸다. 멀쩡한 듯 보이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고 눈물로 범벅이 될 때 우리는 그간 그의 무표정 뒤에 있었을 고통들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김래원이라는 배우의 특별함이다. 그는 절제의 미학을 안다. 한껏 감정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번 눌러 줌으로써 다음 장면에서 더 강한 긴장감이 유발되고 클라이맥스에서의 강렬함이 커진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얼굴은 그다지 특징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바로 그런 얼굴이기 때문에 무표정에 눌려진 감정들은 더 폭발력을 갖는다.

 

유하 감독의 신작 <강남1970>에서의 김래원은 욕망과 우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용기라는 인물을 연기한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종대(이민호)와 함께 형제처럼 추운 밤을 살 부비며 버텨왔던 그는 차츰 강남이라는 욕망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은 종대와 맞서게 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에서 김래원의 무표정은 조직 내에서의 암투를 통해 빛을 발한다.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긴 채 하나하나 조직을 잠식해 가면서 또한 형제 같던 종대와의 엇나가는 관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김래원이라는 배우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그려진다. 그의 욕망은 그래서 비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강남1970>이 그려내는 권력자들의 게임 속에 이용되던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광기의 액션과 욕망, 감성을 동시에 드러내주는 김래원만큼 맞춤인 배우가 있을까.

 

<펀치><강남1970> 같은 작품이 모두 권력과 희생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흥미로운 일이다. 그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그 앞에서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박정환이나 종대는 김래원이라는 배우를 만나 그 무표정 속에 더 아픈 감정들을 담아낸다. 그것은 어쩌면 무표정한 듯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네 보통 서민들이 갖는 욕망에 대한 양가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그 무표정에 더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힘. 이것이 김래원의 특별함이 아닐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