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2’로 돌아온 이정재, 돌고 돌아 서민의 편으로

오징어 게임2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이건 그냥 게임이 아닙니다. 게임을 하다 걸리면 죽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에서 다시 그 죽음의 게임으로 돌아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게 된 기훈(이정재)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그렇게 외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미쳤다고 한다. 하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다 죽을 수 있다는 말을 그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기훈은 안다. 이미 한 번 그 잔혹한 게임을 치렀고, 그 곳에 참가했던 456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1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다. 저 멀리 술래처럼 서 있는 영희 인형의 눈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고, 움직임이 걸린 이들은 사정없이 사살될 거라는 걸. 한 번 겪어 봤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안다는 것. 그것은 기훈이 이들을 피니시 라인까지 이끌어 살아남게 하려는 이유다. 

 

이 장면은 영웅의 탄생이 대단한 운명이나 사명감 같은 거창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기훈이 나서게 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어나갈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456명이 참여해 1인당 1억씩 배정된 목숨값을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적립해 최후의 1인이 456억을 독식하는 게임이 오징어 게임이 아닌가. 사실 이건 ‘오징어 게임’ 시즌1의 맨 마지막에서 미국으로 떠나려던 기훈이 발길을 돌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떠나려던 기훈은 인천공항 지하철역에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딱지남(공유)’에게 뺨을 얻어 맞아가며 딱지치기를 하는 사내를 보게 된다. 그건 이 잔혹한 게임이 여전히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어디선가 저마다 절박한 이유를 가진 이들이 모일 것이고, 그들 중 마지막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처참하게 살해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차마 그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오징어 게임2’는 바로 그렇게 돌아온 기훈이 어떻게든 게임을 만든 이들을 찾아내 끝장내려는 과정을 담았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에서 이 평범 이하의 삶을 살다 456명 중 1인이라는 우승자가 되는 기훈의 모습에서는 이 캐릭터를 연기한 이정재가 겹쳐지는 면이 있다. 시작부터 ‘모래시계’로 한 순간에 스타덤에 올랐고, 영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 ‘하녀’, ‘도둑들’, ‘신세계’ 등등 하는 작품마다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정재는 늘 ‘연기력’에 대한 의문부호를 달고 다니던 배우였다. ‘모래시계’에서 과묵하게 눈빛으로 순애보를 보여주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주목받게 된 것도 실상은 연기력이 부족해서 대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과 함께 한 연기가 인상적이었지만 대중들은 그것 또한 이 두 배우의 투샷이 주는 비주얼 효과와 김성수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영상 연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정재는 배우가 아닌 모델로 시작했다. 그러다 인상적인 초콜릿 광고로 인해 ‘모래시계’ 재희 역할에 발탁됐다. 워낙 좋은 비주얼에 조각같은 몸매를 갖고 있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가 배우로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작품에 도전해오면서다. ‘하녀’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지만 무책임한 주인집 남자를 연기했고, ‘도둑들’에서는 비열한 뽀빠이 역할을 소화했다. 또 ‘신세계’에서는 경찰과 조직 사이에서 줄을 타는 언더커버 역할로 아슬아슬하면서도 위태로운 인물을 자기 색깔에 맞게 연기해냈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 이정재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진 건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을 통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다. 극 중에서 ‘이리’의 상으로 소개되는 수양대군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동물 다큐까지 참고해가며 연구한 이정재는 이 역할을 통해 그토록 오래 따라다니던 ‘연기력 논란’의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그 후 ‘암살’에서 희대의 친일파 역할을 소화한 이정재는 이제 그토록 청춘스타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따라다니던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배우로서 대중들 앞에 서게 됐다. 

 

그를 글로벌한 배우로 등극시킨 ‘오징어 게임’은 이러한 일련의 연기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였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은 그의 빛나는 비주얼을 앞세우는 그런 역할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밑바닥 인생이고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잔혹한 게임에 저도 모르게 뛰어들었다가 그 치열한 과정을 거쳐 최후의 1인이 되는 인물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가 한 연기 중 가장 도드라진 장면이 달고나 미션에서 혓바닥으로 달고나를 핥는 장면이라는 외신들의 평가는 그의 연기가 이제 비주얼이나 멋진 이미지와는 상관없는 배역에 대한 깊은 몰입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게 한 때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이 늘 따라다니던 이 배우는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배우조합상,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등 미국 메이저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또 그는 디즈니+ ‘스타워즈’ 시리즈의 새 드라마인 ‘애콜라이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국내 무수한 배우들 중 단연 도드라지는 한국배우로서의 꼭대기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정재는 앞서도 말했듯 시작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 스타였다. 워낙 도드라지는 비주얼을 갖고 있어 묵묵히 대사없이 눈빛만 보내도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배우로서는 족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가 꽤 오랜 세월을 거쳐 그 족쇄를 풀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그 높은 위치에 서 있던 청춘 스타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면서 서민들 가까이로 다가가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비열한 역할은 물론이고 악역, 친일파 등 자신의 비주얼과는 상관없는 역할들 속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게 ‘오징어 게임’의 기훈이 가진 서민의 얼굴이었다. ‘오징어 게임2’는 그렇게 지독한 생존을 통과한 그가 영웅적인 선택을 하는 모습들을 담았다. 저 높은 별이 아닌 바로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하며 그 아픔을 공감하는 영웅.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글로벌 배우가 된 이정재에게서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바로 그 서민 영웅의 페르소나가 어른거린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베이비시터>, 신윤주와 김민준의 연극 같은 연기는 왜?

 

KBS 4부작 월화드라마 <베이비시터>는 아예 대놓고 19금 딱지를 붙이고 나왔다. 베이비시터로 들어온 석류(신윤주)는 마치 의도적으로 접근한 듯 은주(조여정)의 남편 상원(김민준)을 유혹하고 결국에는 선을 넘어버린다. 석류에게 이끌리듯 키스를 하려다가 망설이는 상원을 오히려 석류가 키스해버리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베이비시터(사진출처:KBS)'

결국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또 어찌 보면 남부러울 것 없이(오히려 부러울만한) 사는 한 부부가 석류라는 베이비시터에 의해 파국에 이르는 이야기를 이 드라마는 다루고 있다. 그만큼 그 행복해 보이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거라는 걸 베이비시터라는 특수한 존재(마치 현대판 하녀 같은)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그런데 19금이라는 파격에 불륜을 첫 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서일까. <베이비시터>는 첫 회부터 연기력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은주 역할의 조여정은 잘 어울리지만, 어딘지 석류 역할의 신윤주와 상원 역할의 김민준의 연기가 어색하다는 것. 실제로 이들의 대사나 연기는 마치 대본을 읽는 듯 경직된 느낌마저 준다.

 

영화 <동주>에서 꽤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던 신윤주였던지라 <베이비시터>에서 왜 저렇게 어색한 느낌의 연기를 보여주는지가 의아하게 여겨질 만하다. 또 그녀와 불륜에 빠지는 상원 역할의 김민준 역시 그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의 대본이나 연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베이비시터>는 저 유명한 <하녀>라는 작품처럼, 계급적인 갈등이나 자본화된 삶의 이야기를 불륜과 파국이라는 파격적인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극단적인 인물의 얼굴 클로즈샷을 통한 미세한 감정을 포착하는 연출이나, 공간을 구획하여 마치 집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이면을 동시에 들여다보게 해주는 연출은 세련되게 작품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럼에도 신윤주와 김민준의 연기력 논란이 나온 데는 이 작품이 가진 연극적인 요소들 때문으로 보인다. <베이비시터>는 형식적인 가족의 모습이 그 연극적인 대사를 통해서 전해진다. 즉 일상어라기보다는 마치 연극을 하는 듯한 대사들이 오가고 그들의 행동 또한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어딘지 어색한 연극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는 마치 무언가 속내를 숨긴 채 겉으로는 행복한 가족이라고 연기하는 듯한 모습이다. 실제 삶은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고, 심지어 베이비시터로 온 인물의 행동 하나에도 질투를 느낀다. 베이비시터 석류는 바로 그 일 때문에 그 집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그러니 그녀가 하는 행동 역시 연극적일 수밖에 없다.

 

<베이비시터>라는 작품이 가진 이런 연극적인 요소들 때문에 이 작품에서의 연기는 결코 쉽지 않다. 속내를 숨기고 거짓을 가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연극을 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에게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 즉 오히려 이 인물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걸 연기자로서는 아예 드러내는 편이 시청자들에게는 더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신윤주와 김민준은 아직까지 그 캐릭터가 다 나오지 않아서인지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첫 회라서 그럴 수 있다. 차츰 이들의 연극적인 삶 자체가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라는 게 드러나게 된다면 조금은 이들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분명한 건 연극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연기하는 것과 연극 같은 연기를 하는 건 다르다는 점이다. 전자를 해야 하는 <베이비시터>는 쉽지 않은 연기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하녀’의 냉소, ‘시’의 관조, ‘하하하’의 유머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처럼,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몸부림을 하고 있을까. 칸느가 주목하고 있는 우리 영화 세 작품, 임상수 감독의 ‘하녀’, 이창동 감독의 ‘시’,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이 절망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하녀’가 5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견고한 시스템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면, ‘시’는 그 도저한 시간의 흐름 위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로 승화해냈고, ‘하하하’는 본래는 무의미한 절망적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의미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우리의 실존을 과거와 현재를 병치함으로써 홍상수 특유의 유머로 그려냈다.

김기영 감독이 ‘하녀’를 만들던 1960년도에서 50년이 지난 2010년,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녀’라는 텍스트가 50년을 넘어서도 그대로 다시 리메이크되는 현실은 그 질문에 답을 준다. 공장여직공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초상류층으로, 폐쇄공포증을 느낄 만큼의 좁은 저택에서 실제 공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판타지화된 대저택으로, 욕망의 화신에서 그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으로 바뀌어졌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이 ‘하녀’라는 계급이다. 자본의 시스템이 견고해진 현재에 ‘하녀’는 그 속에서 상류층에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하녀로 부속화한다. 자본의 하녀다. 그래서일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는 다른 처절한 절망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세상은 좀체 변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그 변하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이 삶의 본질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본질을 계속 쳐다보려는 노력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어딘가에서는 억울하게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세상은, 제 아무리 누군가의 죽음에 죽을 듯이 절망감을 느껴도 그저 아래로 흘러가기만 하는 강물을 닮았다. 즉 철저히 타인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은 그 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킨다. 따라서 그 아프고도 고통스러운 시를 쓰는 행위는 그 절망적인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이창동 감독은 말한다. 점점 시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 그 어떤 통렬한 비판보다 ‘시’가 우리를 울리는 것은 그 미사여구 없이 그대로 바라본 듯한 현실의 관조 덕분이다.

‘시’가 무심한 세상에 대한 의미화에서 시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를 발견해냈다면, ‘하하하’의 시는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농담 같은 의미화가 사실은 우리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해주는 소재다.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이 같은 시간대에 통영에서 겪었던 며칠을 그려내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이 두 사람의 막걸리 자리의 안주거리에 다름 아니다. 두 사람의 겪은 일들은 사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입장에서 각각의 이야기로 전한다. 즉 과거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삶을 한바탕 술자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제목처럼 하하하 웃게 만들지만 한편으론 허허로운 뒤끝을 남긴다. 홍상수 감독은 이제 삶의 절망감마저 유머로 승화시키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칸느에서 주목받은 이 세 작품은 모두 우리네 삶의 절망감을 다루고 있다. 그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절망감을 향해 누군가는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고, 누군가는 그 속에서 외면하지 않고 절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의 마음을 발견하며, 누군가는 그 절망감마저 하하하 막걸리 한 사발의 유머라고 달관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들 영화들이 우리는 물론이고 칸느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마치 절망이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허위들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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