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와 '남자의 자격', 뭐가 다를까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는 음악이 대세다. 일반인들이 오디션을 통해 최고의 1인을 가리는 '슈퍼스타K'는 15%에 육박하는 케이블 채널로서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먼저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참가자가 100만 명을 넘어선 '슈퍼스타K'는 전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LA에서까지 오디션의 열기가 뜨거웠다.

그 중 단 한 명의 슈퍼스타를 뽑는 만큼 옥석을 가리는 과정은 냉정할 수밖에 없다. 심사위원들은 면전에서 "느끼하다"거나 "구리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실력 미달의 참가자를 가차 없이 잘라낸다. 반면 최후의 1인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엄청나다. 2억 원의 상금과 최고급 승용차, 무엇보다 앞으로 가수로 활동할 수 있는 탄탄대로가 열린다. 1인에 대한 혜택이 큰 만큼 탈락자들이 겪는 상대적인 박탈감 역시 클 수밖에 없다.

'참가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거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미사여구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심사위원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참가자에게 "우리는 프로를 뽑는다"며 "최선보다는 최고여야 함"을 강조한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모습이다. 심사위원들은 참가자에게 독설을 해주고는, 그걸 계기로 오히려 "독하게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초반에 뭐라 독하게 말을 못하는 심사위원 이하늘에게 이승철이 "너 착한 척 하지 마라"고 하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슈퍼스타K'는 그만큼 힘겨운 가수가 되는 길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이 혹독한 현실만을 다룬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혹독한 현실 위에 세워지는 것은 하나의 판타지다.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진 경쟁자들은 이 오디션 과정을 통해 저마다의 꿈을 드러내고, 그리고 결국 최후의 1인은 그 꿈을 성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쟁률이 엄청난 만큼, 현실이 혹독한 만큼 그 1인이 되는 과정의 판타지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슈퍼스타K'가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유는 바로 이 최고의 1인을 뽑는 과정이 보여주는 냉정한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판타지가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경쟁적이고 혹독함을 그려내는 '슈퍼스타K'와는 완전히 상반된 프로그램이, 최근 예능에 음악 붐을 일으킨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이다. '슈퍼스타K'에서는 최고의 1인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남자의 자격'에서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모여 단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 서로 마음을 맞춰나간다. 물론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츰 이들은 '최고'라는 가치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참가한 대회에서 한사랑 실버 합창단의 하모니를 들으며 그들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흘리고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는 모습은 그 하나가 되기 위해 보여주는 '최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잘 보여주었다.

'슈퍼스타K'가 지향하는 세계가 프로인 반면, '남자의 자격'이 보여준 것은 아마추어들이 보여주는 그 순수함이다. '최고'와 '최선'이라는 두 가치는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두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두 가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1인으로 서야하는 가요계의 현실과 많은 목소리들 중의 하나로 존재하는 합창단이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음악을 소재로 하는 이 두 프로그램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경쟁적인 현실이다. 하나는 그 경쟁 속에서 최고의 1인이 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이 아닌 상생의 하모니를 이루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작금의 지상파와 케이블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신에게는 어떤 가치가 더 소중한가. 지금 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두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남자의 자격'이 보여준 하모니의 매력

'남자의 자격' 합창단원들은 왜 대회에 참가한 할머니 할아버지로 구성된 실버합창단의 하모니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을까. 방송 자막에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눈물'이라고 그 감동의 실체를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눈물에는 합창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실버합창단을 통해 언뜻 보게 된 것은 하모니의 진짜 의미였기 때문이다.

대회에 참가하기까지 '남자의 자격' 합창단원들은 꽤 긴 시간 동안 연습을 해왔고, 그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안되는 성량과 훈련되지 못한 목소리, 게다가 몸치에 박치까지 있었지만 합창단원들은 차츰 노래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합창단으로 묶여지기까지 서로 잘 몰랐던 그들처럼, 각자 놀던 목소리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기 시작할 때 그들이,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들의 가슴이 먹먹해졌던 것은 그 마음들의 교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는 대회인지라, 그리고 너무나 높아진 기대감에 부담감도 큰데다, 그것도 첫 번째 대회출전 경험인지라 아마도 숨 가쁘게 달려온 그들은 바로 이 '합창의 본질'을 잠시 잊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객석의 자리에 앉아 거기 출전한 다른 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들은 다시 합창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다른 마음이 모여 노래 하나로 한 마음이 되는 그 순간의 감동.

특히 두 번째 참가자였던 60세 이상으로만 구성된 '한사랑 실버 합창단'은 합창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소박할수록 아름다운' 마음들이 거대한 하모니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회라는 경쟁적 의미는 사라지고, 그저 그렇게 마음들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합창 본연의 힘을 느끼며 어찌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눈물을 참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남자의 자격' 합창단 스스로 합창을 하면서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감동의 실체이기도 하니까.

멋 내지 않은 수수한 곡들과, 나이 같은 것은 마음을 나누는 데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하모니의 어우러짐,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보여준 진지함에서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진 것은, 그것이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하나가 되기를 희구한다. 그 하나됨의 기쁨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남자의 자격'이 알려준 하모니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생면부지였던 그들이 이제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들로 서로에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모니를 통해 그 각자 존재들의 소중한 삶을 우리가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달라도 모두 서로가 하나 되길 원하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노래를 조금 못 불러도, 나이가 들어도 그것은 바꿀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소통의 쾌감에 충실한 영화, '하모니'

‘아바타’가 전 세계 영화시장에 던진 파장은 쓰나미급이다. ‘타이타닉’이 세웠던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 치웠고, 우리나라에서 외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러고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아 항간에는 국내 최고 흥행 기록인 ‘괴물’의 기록까지 갈아치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아바타’의 질주를 의식한 나머지 3D로만 개봉하는 제재를 가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니 우리네 영화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바타’의 쓰나미에 몇몇 우리 영화들은 흔적 없이 쓸려 내려가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 영화들이 차례로 개봉되면서 조금씩 ‘아바타’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하모니’다. 이 작품은 그다지 언론을 통한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았지만 특유의 스토리가 갖는 입소문으로 대중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도대체 ‘아바타’와는 다른 그 무엇이 ‘하모니’를 버티게 해주는 것일까.

‘하모니’는 여러 모로 보나 작년 최고의 흥행작인 ‘해운대’를 닮았다. 윤제균 감독에 의해 제작된 이 영화는 먼저 각본이 ‘해운대’를 쓴 이승연과 윤제균에 의해 만들어졌고, 감독도 윤제균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던 강대규가 메가폰을 잡았다. 물론 ‘해운대’처럼 쓰나미가 몰려오는 거대한 블록버스터는 없지만, ‘하모니’는 ‘해운대’의 그 쓰나미를 빼고는 거의 비슷한 톤의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사연들을 가지고 감방에 수감된 여죄수들. 그들의 이야기가 전면에 배치되어 제각각의 사연들을 들려주다가, 가족들을 앞에 둔 무대 위에 올라 하나로 묶여지는 하모니로 울려퍼지는 것은, ‘해운대’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쓰나미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묶여 울림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야기 구조다. 즉 ‘하모니’에서의 쓰나미는 바로 그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쏟아내는 감동의 하모니가 만들어내는 쓰나미인 셈이다.

‘해운대’가 웃기고 울리는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볼거리의 블록버스터보다는 감정이입의 블록버스터에 더 치중했던 것처럼, ‘하모니’도 마찬가지다. ‘하모니’의 인물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관객들을 웃기지만, 한 꺼풀 안으로 들어가 보면 모두 눈물 나는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 순간적인 증오심에 죄를 짓고 감방에 들어왔지만, 그렇게 모여 한 방에 살아가는 그들은 유사가족을 형성한다. 그들이 더 끈끈해지는 것은 이 각자의 사연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버린 가족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모니’는 이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하모니라는 점에서 공감과 소통의 쾌감을 주는 영화다.

‘하모니’를 굳이 ‘아바타’ 같은 작품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주는 감정의 질주가 여타의 멜로드라마나 휴먼드라마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하모니’가 주는 감정이입은 저 '해운대'가 그랬던 것처럼 울다가도 웃음을, 또 웃다가고 울음을 터뜨리게 할 정도로 속도감이 있다. 작품의 메시지를 위해 머뭇거리거나 하는 지점을 이 영화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장르와 영화가 주는 즐거움(웃음뿐만 아니라 눈물까지)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충실함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하모니’를 우리는 굳이 ‘작품’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또 혹자는 이를 ‘해운대’에서처럼 신파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기능적인 측면을 두고 말한다면 ‘하모니’는 ‘아바타’처럼 충분한 즐거움을 주는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바타’가 보편적인 이야기가 갖는 공감 위에 세워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기한 볼거리의 블록버스터라면, ‘하모니’는 가장 보편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호소하는 감정이입의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 있다.

‘아바타’는 물론 현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모니’ 같은 우리 이야기가 갖는 강점들이다. ‘아바타’에 대처하는 ‘하모니’의 자세를 통해, ‘아바타’가 가진 쿨한 볼거리만큼 중요한 것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정서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의 본질이 어떤 소통의 쾌감이라고 한다면, '하모니'는 바로 그 쾌감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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