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에서 최민식까지, 신들린 연기 전성시대

사진출처:'범죄와의 전쟁'

드라마든 영화든 요즘 이 맛에 본다. 바로 연기의 재발견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 팽팽한 대본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진 건 연기자들의 '신들린 연기'였다. 송중기는 꽃미남 이미지에 연기자 이미지를 확실히 부각시켰고, 한석규는 한 가지 장면에서도 계속 변화하는 섬세한 감정 연기로 보는 이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브레인'의 신하균은 야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욕망에 충실한 역할을 보여주면서도 한 편으로 그 인물에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균신이라고까지 불린 신하균과 팽팽한 대결양상을 보여준 정진영 역시 인술을 행하는 명의에서부터 그 껍질을 하나 벗겨낸 가식어린 모습까지 드러내줌으로써 연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해를 품은 달'에서는 여진구와 김유정이라는 놀라운 아역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섬세한 멜로 연기는 초반부터 이 사극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미 30%를 넘어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 데는 전적으로 이 두 아역이 남겨놓은 강한 여운이 한 몫을 하고 있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신들린 연기'들이 주목을 받았다. '부러진 화살'에서 안성기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강한 효과를 남겼고, 판사 역할로 나온 김응수, 이경영, 문성근의 보는 이를 치 떨리게 만드는 연기가 흥행에 한 몫을 차지했다. 아쉽게도 흥행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페이스메이커'의 김명민은 역시 메소드 연기의 또 한 차원을 보여주었다. 완전히 페이스메이커에 빙의된 그의 연기는 그 앙상한 몸과 발만으로도 보는 이를 찡하게 만들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그 '나쁜 놈들 전성시대'라는 부제가 '신들린 연기 전성시대'로 보일 지경이다. 최민식은 이 작품에서 나쁜 놈들 중의 나쁜 놈 역할을 연기하지만, 그 안에 진한 페이소스까지 담아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나쁜 놈의 전형 속에서 가장의 고단함까지 느껴지는 이 작품은 최민식 특유의 광기어린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에 하정우라는 든든한 아우라가 덧붙여지고, 최근 '뿌리 깊은 나무'로 주목받은 조진웅이 빛을 발하니 그 연기력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란할 지경이다.

최근 들어 확실히 연기는 재발견되고 있다. 물론 그간 연기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다. 특히 드라마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연기력 논란'은 이제 대중들이 얼마나 연기에 민감해 하는가를 잘 말해준다. 사실 영화계에서 최민식이나 하정우 같은 배우들의 연기력은 늘 인정받아왔다(물론 영화에서도 겉멋든 배우들에 대한 논란은 계속 있어왔다). 반면 드라마에서 연기력이란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만큼 엄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감히 이 영역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연기자들이 잘 생긴 얼굴 하나로 투입 되었던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일로 여겨질 정도다. 최근 들어 러시를 이루는 가수들의 연기 영역 진출은 그 상업적인 목적은 알 수 있지만, 연기자로서의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에서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한석규나 신하균이 보여준 것처럼 이제 드라마에서의 연기력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도 한껏 높아져 있는 게 사실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연기라는 영역이 가진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 편에서는 신들린 연기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마당에 다른 한 편에서는 끊임없이 연기력 논란이 쏟아지는 것이 현재 연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다. 그만큼 겉멋이나 외모가 아니라 진정한 연기를 보고 싶은 대중들의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이 정도 되면 연기자들도 각자 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연기자다'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온 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다. 연기가 어디 장난인가. 어쨌든 연기의 재발견, 요즘 이 맛에 드라마든 영화든 보게 된다.

유사가족, 팀(team)이 보여주는 ‘히트’

“대외홍보용인가요?” 히트(H.I.T. : 강력특별수사팀)의 팀장이 된 차수경 경위(고현정)의 질문에 경찰청장(조경환)의 답변은 정치적이다. “자네가 성과를 낸다면 그건 우리 경찰의 승리고 자네가 실패를 한다면 그건 여성의 실패가 될 테지.” 그리고 이어지는 차경위의 요청. “팀원들 바꿔주세요.” 하지만 완고한 경찰청장의 발언. “그 사람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 이 짤막한 대사들 속에는 이 드라마가 앞으로 보여줄 이야기의 전조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

그것은 경찰사회라는 완고한 남성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그것도 마이너리티로 치부되는 인물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여성 강력반 팀장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연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과 그것을 풀어가는 퍼즐 같은 재미를 줄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기대감이 커지는 것은 바로 캐릭터다. 마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진한 사연 한 가지씩 가졌을만한 인물들. 그래서 경찰 외부에 따로 지어진 히트 사무실에서 지내는 것이 특권이라기보다는 소외로 느껴지는 인물들. 게다가 총칼이 난무하는 살벌한 현실 속에서 심지어는 유사가족의 형태를 띄게 될 팀의 캐릭터들이니 기대감이 커질 밖에.

차수경, 그녀 속에 남자 있다
무엇이 가녀린 그녀를 연쇄살인범에 집착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애인이었던 한상민(정호빈)이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 후 죽은 한상민은 한 여자이기만 했던 차수경 속으로 들어와 자리한다. 한상민과 접신한 그녀는 그래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한상민과 차수경이 만나는 지점, 즉 오로지 연쇄살인범을 쫓는 상황에서야 이 분열된 자아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여성으로서의 형사는 이 드라마에서처럼 ‘대외홍보용’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남성을 내세운 여타의 형사물들과 차별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현장에서 강인하고 털털해 보이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에서야 제대로 차별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여성으로서의 차수경이 보이는 것. 그러나 그 시간에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픈 기억뿐이다. 한 남자의 여자로서 사랑 받으며 살고 싶었던 기억. 하지만 부서진 기억.

김재윤, 그녀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 기억 속으로 들어오는 남자, 김재윤(하정우)이다. 우연히 가게된 그녀의 집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곰 인형과 하이힐로 대변되는 그녀의 본모습(여성성)이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고 복잡하게 사는 걸 싫어하는 김재윤에게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은 호기심 이상의 그 무엇으로 다가간다. 안전한 삶을 희구하던 김재윤에게 부서질 것 같은 차수경의 모습은 자꾸만 변화를 요구한다. 그녀 밖의 남자였던 김재윤은 차수경 속에 있는 남자(한상민)를 밀어내고픈 욕구를 갖게될 것이 분명하다.

남 일 상관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스트 김재윤이 검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민초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그가 그럭저럭 버티다 나중에는 편안하게 변호사나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에서 김재윤과 차수경의 갈등과 사랑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예감하게 한다. 차츰 차수경의 안간힘에 눈이 밟히는 김재윤은 지금까지 ‘남 일’이었던 사건들이 차츰 ‘내 일’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용하-김일주, 전형적 형사물의 구도
형사물을 보면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형사. 베테랑에 경험도 많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폐인에 가까운 형사가 장용하(최일화)다. 승진보다는 범인 잡는 데 삶을 바친 이 같은 전형적 형사 캐릭터의 존재이유는 형사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잠복수사같은 현장중심의 수사방식에서 과학수사로 넘어오면서 차츰 공룡이 되어버린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디 수사가 과학만으로 되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전 경험이다.

그런 그에게 도전하는 인물. 과학수사를 내세우는 원칙주의자 김일주(정동진)다. 장용하가 임의동행을 하려는 것을 피의자가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막는 김일주는 과거식의 수사방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대표격인 장용하와 부딪칠 수밖에. 실력으로만 인정받고픈 그에게 무능함의 대명사로 보이는 장용하는 그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점은 역시 경험과 열정. 그러니 이 둘의 만남은 묘한 균형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이 부족한 장용하와 경험이 부족한 김일주가 파트너가 된 이유다.

남성식-심종금, 투캅스의 부활
영화 ‘투캅스’의 재미는 서로 다른 캐릭터의 부조화에 있다. 닳고닳은 타락한 고참형사와 세상물정 모르고 정의만 부르짖는 신참형사의 만남. 그러나 차츰 닮아가고 나중에는 심지어 청출어람(?)을 보이는 신참의 모습에 오히려 고참이 훈계(?)하는 형국으로의 전환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드라마 ‘히트’의 남성식(마동석)과 심종금(김정태)은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생각은 좀 모자란 듯 하지만 완력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남성식은 이름에서도 느껴지지만 여성 강력팀장인 차수경의 빈 구석을 꽉 채워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완벽한 수족이 될 그는 그러나 여성적인 내면(?)까지도 갖추고 있다. 머리가 나쁘다는 콤플렉스와 외모가 조폭인 그의 섬세한 면모들은 한편으로 그럴듯한 외모에 머리만 굴리며 살아가는 세태를 꼬집는 묘미가 있다. 그와의 대척점에서 심종금의 면모가 교활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투캅스’에서 안성기가 타락한 형사가 된 것은 사실 사회의 부조리함을 뒤집어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심종금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밝혀질 즈음, 보여질 그의 진면목에서 우리는 동정심과 애정을 예감하게 된다.

전문직, 멜로,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다
이 밖에도 이 드라마에는 전직형사이자 선술집 주인인 김영두(김정민), 수사본부의 부지휘자로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서 그 넉넉한 허리가 되어주는 조규원(손현주), 과학수사의 진면목을 보여줄 정인희(윤지민)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꿈틀거린다. 이들 캐릭터들은 처음에는 외인부대처럼 버려지거나 외면될 위기에 처한 상태로 서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보여주려는 것은 그들이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며 팀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여러모로 미국 드라마 ‘CSI’를 연상케 하는 전문직 드라마지만 ‘히트’의 전개양상은 이러한 캐릭터 설정으로 인해 저네들의 드라마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 분명하다. 스타일은 따왔으되 하려는 이야기는 저네들의 쿨한 관계보다는 좀더 끈끈한 팀 간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정두홍이라는 걸출한 무술감독으로 인해 깨지고 부서지는 우리 식의 액션이 선보여지고 있는 것처럼, ‘히트’가 서는 지점은 형사물로 대변되는 전문직드라마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그리고 팀으로 대변되는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게 되지 않을까. 따라서 이 드라마의 성패는 바로 그 적절한 배합과 균형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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