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2

“왜 한국인 이야기를 쓰나요?” 한국판으로 번역되어 나온 소설 ‘파친코’에 한국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이민진 작가는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민진 작가는 10년 넘게 집필해 ‘파친코’를 낸 후에도 ‘아메리칸 학원(American Hagwon)’을 쓰고 있는데 이 역시 한국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이민진 작가가 내놓은 답변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한국인 이야기를 씁니다.”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가 시즌2로 돌아왔다. 2년만에 돌아왔지만 선자(김민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시즌1에서의 그 매력이 다시 상기된다. 그 매력은 핍박받고 차별받는 상황에서도 당당한 이 인물의 태도에서 나온다. 어쩌면 저렇게 가난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꼿꼿할 수 있을까. 이민진 작가가 말하는 한국인의 매력이란 바로 선자가 보여주는 바로 이 모습 그대로일 게다. 

 

‘파친코’ 시즌1에서 선자는 한수(이민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아이까지 갖게 됐지만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수가 이미 일본에 아내와 딸들이 있고 곧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마침 하숙집을 찾아와 죽을 위기를 넘긴 이삭(노상현)이 홀로 아이를 키우려는 선자의 사정을 알게 된 후 함께 오사카로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선자는 고향을 떠나 오사카로 오지만 그 곳의 삶 또한 팍팍하기 이를 데 없다. 어려운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싸우다 이삭마저 감옥에 끌려가자 홀로 두 아이(한수의 아들과 이삭 사이에서 낳은 아들)를 키워야 하는 선자는 길거리에 나와 김치 장사를 시작한다. 시즌2는 바로 그 오사카에서 그 힘겨운 삶을 버텨내는 선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7년이 넘었지만 이삭은 돌아오지 않고, 궁핍한 삶에 밀주를 담가 밀거래까지 하다 체포된 선자는 감옥살이를 해야할 처지에 놓이지만 한수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오사카에 선자와 이삭이 왔을 때부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한수는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 노아(김강훈)가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 역시 살피고 있었던 것. 마침 미군의 대규모 공습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알게 된 한수는 선자에게 그 곳을 떠나라고 말하지만 선자는 단호히 이를 거부한다. “옥살이 중인 남편 두고 내 어디 못갑니더. 그 사람 두고 내 어디 안갑니더. 못가예.” 여기서 한수와 선자의 대비되는 모습이 드러난다. 한수가 저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자는 자신과 아들을 거둬준 이삭을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나 일본에 정착해 살아가는 재일 한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핍박받는 한인들과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 사이의 대비를 드러낸다. 그것은 크게 보면 총칼에 의한 무력과 돈에 의한 금력이다. 즉 제국주의와 더불어 자본화되어가는 세상의 폭력이 이들 재일 한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파친코’는 제국주의와 자본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그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당당한 한인들의 태도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 당당함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어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외면하지 않는 삶에서 나온다. 

 

언청이에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게 선자를 키워낸 아버지,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하숙집을 홀로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살아낸 선자의 엄마 양진(정인지), 자신을 밀고해 감옥살이를 하게 만든 이를 용서하고 죽는 순간에도 아내와 아이 걱정을 하는 이삭, 그렇게 죽어가는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는 내 남편한테 사랑받고 존중받았으예. 전부 다 받은 거라예.”라 말하는 선자... ‘파친코’에는 저 이민진 작가가 말했던 매력적인 한국인들이 넘쳐난다. 대지진으로 도시가 무너지고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도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며 살아가는 한인들이 보여주는 당당함은 그래서 자본과 무력이 권력이 된 세상을 숙연하게 만드는 카타르시스를 준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failed us, but no matter)’ 인상적인 이 ‘파친코’ 원작 소설의 첫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도 바로 그것이다. 역사가 되기도 하는 세상의 폭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대한 헌사. ‘파친코2’가 우리는 물론이고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글:일간스포츠, 사진:애플TV+)

‘스즈메의 문단속’은 우리 대중에게는 어떻게 읽힐까

스즈메의 문단속

“다녀오겠습니다” 아마도 이 대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 담긴 정서를 한 마디로 담은 게 아닐까. 감독이 말했듯 문은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다. 아침마다 그 곳으로 나가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저녁에 돌아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재난이라는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 날 등굣길에 우연히 만난 사내 소타. 그는 폐허를 찾아다닌다. 스즈메는 그 사내가 마음에 걸려 자신이 알려줬던 폐허를 찾아갔다가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해주는데, 그것은 이승과 저승이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이기도 하다. 별 생각 없이 문 앞에 놓인 고양이석상을 뽑아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문이 열리지 않게 몸으로 봉인해온 고양이신 다이진이었다. 문이 열리면 그 곳으로부터 미나미라는 거대한 기둥이 빠져나오고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지진이 일어난다. 

 

문을 본 후 스즈메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미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거대한 미나미가 폐허에서 솟아나오는 걸 본 스즈메는 그 곳을 찾아가 애써 문을 닫으려 하는 소타를 발견한다. 소타는 미나미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단속을 하는 소임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도망친 다이진이 소타를 스즈메 엄마의 유품인 세발 다리 꼬마의자에 가둬버리고 도망치자, 스즈메는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다이진을 찾아 나선다.

 

말하는 고양이이자 신이 등장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는 문이나 저주를 받아 꼬마의자가 된 사람이 나오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판타지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지진이라는 재난상황은 일본에서는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아픈 현실적 상처다. 실제로 이 작품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했다. 이 작품은 그래서 대지진이라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아름다운 마을을 폐허로 만드는 재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지진이 남긴 상처들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다. 

 

스즈메는 어린 시절 대지진으로 인해 엄마를 잃었고, 며칠을 엄마가 살아있다며 울며 찾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소타가 하는 이 일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고 앞장선다. 문을 닫기 위해서 그 문이 있던 자리가 폐허가 되기 전 사람들이 나눴을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그래야 문을 잠글 수 있는 열쇠구멍이 생겨난다는 설정은, 여러모로 재난이 파괴해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다녀올게”라는 말은 그래서 이 순간에는 더더욱 강렬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영화는 스즈메와 소타가 사라진 다이진을 찾아나서는 로드무비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여정 중 도처에서 열린 문으로 미나미가 튀어나오는 걸 두 사람이 막는 긴박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처럼 끔찍한 재난이 눈앞에 펼쳐지기 직전까지 보이는 두 사람의 여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해 마치 즐거운 여행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는 점이다. 그 여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스즈메를 챙겨주고 도와주는 인간적인 온기를 전해준다. 

 

즉 이 이중적인 변주가 <스즈메의 문단속>이 전하고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이나 ‘삶의 의미’ 같은 메시지를 강화한다. 즉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미나미가 보이지 않아 너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정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정조를 띤다. 그것은 곧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이들의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빛의 마술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 일상에 깃든 작은 빛들마저 축복처럼 느껴지게 구현해낸다. 심지어 도시나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이나 설렘, 두려움 같은 감정들까지 그가 그려낸 영상을 통해 전해질 정도다. 

 

반면 스즈메와 소타는 앞으로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 비극을 맞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 지진 때문에 엄마를 잃은 그 충격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소타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소타가 마침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되는 저주는 그래서 엄마가 만들어준 꼬마의자라는 점에서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갖는다. 

 

세발 다리 꼬마의자는 뒤뚱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어 재밌는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 불안정함과 그럼에도 누군가 그 위에 앉으면 애써 버텨내는 소타의 모습을 통해, 재난이라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삶과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의지를 은유한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스즈메의 여정 속으로 들어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비극 같은 허망함 앞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결국 스즈메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폐허 위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고 다니는 어린 스즈메를 끝내 안아준다. 그리고 아이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희망을 선사한다. 그 상황은 미래에서 온 스즈메가 과거의 어린 스즈메에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어린 스즈메가 엄마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스즈메가 마주하고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트라우마를 벗어나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아마도 우리 식의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월호 참사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에게 벌어졌던 그 많은 인재들을 대입해보면, 제대로 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한 미래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은 최근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과거사 관련 문제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제대로 된 과거를 마주하지 않고 과연 미래의 문은 열릴까. 나라마다 다른 국가적 트라우마가 있게 마련이다. 그걸 넘기 위해서는 저마다 과거에 벌어졌던 그 일들의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거기서 비로소 과거의 문이 닫히고 미래의 문이 열릴 테니까. (사진:영화'스즈메의 문단속')

‘파친코’가 담아내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

파친코

“1910년 일본은 제국을 확장하며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한국인이 생계를 잃고 고향을 뒤로하고 외국 땅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견뎠다. 가족들은 견뎠다. 여기 몇 세대에 걸쳐 견뎌낸 한 가족이 있다.” 

 

애플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한 가족이 4대에 걸쳐 버텨내고 견뎌낸 삶을 담겠다고 한다. 자못 비장한 자막이 흘러나온 후 드라마는 선자의 어머니 양진(정인지)의 결의에 찬 얼굴을 비춰준다. ‘몇 세대에 걸쳐 견뎌낸 한 가족’을 그리는 것이지만, 그 중심에 바로 여성이 있다는 걸 드라마는 그렇게 말한다. 

 

무당을 찾아온 양진은 어머니가 박복했고 자신까지 낳아 고생하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마음이 아파 술만 먹고 다녀 자신과 동생은 거지처럼 빌어먹고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언챙이라 장가를 못간 하숙집 아들과 혼인시키고, 그래서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모두 죽었다는 것. 그가 무당을 찾아온 건 어떻게든 지금 또 가진 아이를 살리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양진은 딸 선자(전유나)를 낳는다. 

 

딸이 너무나 귀한 아버지는 선자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내 뭔 짓을 해서라도 이 세상 드러운 것들이 니 건들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아버지 그 약속 지킬기다.” 그런 아버지는 결국 병으로 돌아가신다. 그 앞에서 오열하는 어린 선자의 모습에 아버지가 남긴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옛날에는 내 팔자가 왜 이리 모진가 할 때가 있었다. 오만천지 다 행복해도 내랑은 평생 먼 얘긴지 싶었데이 그런데 니 엄마가 내게 오고 니도 생겼지. 그라고 보니께 팔자랑 상관이 없는 기라. 내가 니 부모될 자격을 얻어야 되는 거더라. 선자야. 아버지가 강해져갖고 세상 더러분 것들 싹다 쫓아버렸으니까 아인나 니도 금세 강해질 거다. 나중에는 니 얼라들도 생기겠지. 그 때 되면 니도 그럴 자격이 되야 된다. 선자 니는 할 수 있다. 나는 니를 믿는다.”  

 

<파친코> 첫 회에 담긴 선자네 가족의 이야기는 1915년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을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세상 더러운 것들이 건들지도 못하겠다 했던 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 모질고 힘든 세상 앞에 선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 그가 걸어갈 한 평생의 삶을 우리는 근현대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원폭 투하와 일본의 항복 선언 그리고 터진 한국전쟁 등등. 그 과정에서 선자는 일본으로 넘어가 파란만장한 삶을 버텨낸다. 김치를 리어커로 만들어 팔아가며 자식들을 부양해온 삶.

 

<파친코>는 선자네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파란만장한 한 세기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첫 회, 선자네 하숙집에서 술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아저씨들이 ‘뱃놀이’를 부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어찌 보면 일제가 다 빼앗아가는 통에 더 가난하고 더 고단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노래에는 한과 더불어 흥이 가득하다. 가난하지만 나눠 먹는 상이 풍족하고, 일제의 폭력 앞에 짓밟히지만 당당하다. 

 

<파친코>가 그리는 선자네 가족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은 그래서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그것은 무수한 외세의 침탈을 받아온 한국인들이 끝까지 버텨내는 끈질긴 생명력과 더불어, 가난해도 정이 있고 또 당당한 삶의 면면들이 묻어나서다. 이런 모습은 선자라는 캐릭터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선자(김민하)가 갖지 말아야할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숙집에서 양진의 보살핌으로 죽다 살아난 이삭은 딴에는 도움이 되겠다며 선자에게 입양을 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선자는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세상이 다 무시하는 사람의 사랑 받으면서 컸어예. 우리 아부지. 이래가 아부지 생각하는 게 뭐 염치가 없지만서도 다들 우리 아부지 평생 장가도 못가고 자식도 없을 기라캤는데 지가 요래 있잖아예. 없어야 할 아가 요 있다 아입니까. 야도 있으면 안되는 아지만 요 배 속에 잘 있심니더. 야도 사랑받으면서 클기라예. 지가 밤낮으로 일해가 손톱이 다 부러지고 허리가 뽀사지고 배를 쫄쫄 굶는 한이 있어도 내 아는 부족한 거 하나 없이 키울 겁니더. 그래 약속했십니더. 지 아부지 지한테 약속하신 것처럼예. 안돼지예. 지 아는 못 버립니더.”

 

세상 더러운 일들이 삶을 업신여기고 힘들게 만들어도 끝끝내 버텨내는 힘이 만들어내는 끈질긴 생명력. 선자는 그렇게 부모의 간절함 속에서 태어났고, 선자 역시 그렇게 자신에게 온 아이를 키우려 한다. 그리고 그 삶의 무게는 이제 노년의 선자(윤여정)의 얼굴 주름 하나하나 속에 각인되어 있다. 

 

1989년의 선자와 1915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온 선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절묘하게 교차되면서 전해지는 <파친코>에서 노년의 선자 역할을 하는 윤여정의 연기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옛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흘려도 거기에 만만찮은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밤낮으로 일해 손톱이 다 부러지고 허리가 부서지고 배를 쫄쫄 굶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 아이만큼은 부족한 거 하나 없이 키우겠다는 다짐. 그것이 한국인의 저력이라고 선자의 패인 주름은 말하고 있다.(사진:애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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