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세종은 현재와 어떻게 소통했나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문제에나 나올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창제에 관한 일화들이 21세기인 현재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실제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세종과 한글창제가 갖는 의미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 몇 백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한 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첫 도입에서 글자를 몰라 죽게 되는 한 선량한 백성의 이야기에서 화두를 던지고, 그 일을 계기로 달라지는 세 인물을 끄집어낸다. 강채윤(장혁)과 소이(신세경)와 세종(한석규)이다. 강채윤은 그 글자를 몰라 죽은 백성의 아들로서 세종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소이는 그 죽음에 관여된 인물로서 한글 창제에 투신하게 되며, 세종은 그 두 백성(으로 표상되는 채윤과 소이)의 고통을 바라본 인물로서 역시 한글 창제를 하게 된다.

먼 길을 돌아온 강채윤이 세종의 진심을 알게 되고, 옆에서 임금이란 자리에서 겪는 고독과 또 한글 창제에 깃든 세종의 진심을 소이가 읽어내는 그 과정이 모두 소통이다. 즉 채윤과 소이가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라면 이것은 왕과 백성이 갈망하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글은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란 세력이다.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여진 자신들 같은 신하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제 백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또 백성과 왕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역병 같은 글자’의 파급력에 정기준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즉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소통과 불통의 대결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환경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 같은 새로운 소통체계는 기성 소통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일종의 왕이 해야 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 부친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걸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의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에 대한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소통체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그 담론들을 몇 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건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건 이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이다. 물론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를 세종이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소이가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소이는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적을 통해, 또 아이들의 노래를 통해 한글을 전파시킨다. 이것은 확실히 지금 현재 SNS시대가 갖고 온 새로운 소통체계에 대한 알레고리다.

어렸을 적 한 번쯤은 읽어봤을 위인전 속의 세종 이야기가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건 바로 이 사극을 통해 과거가 아닌 현재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세종과 소이, 강채윤이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한글 전파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그 모습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보여주는 소통에 대한 염원을 현대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뿌리 깊은 나무’는 그렇게 세종의 한글창제와 반포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넘어 조선조의 백성과 현재의 대중들을 소통시키고 있다.


한글창제의 의미 되살린, '뿌리'의 가치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한석규)는 내금위장인 무휼(조진웅)에게 묻는다. "무술로 따진다면 내 언변은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느냐?" 그러자 무휼은 "조선 제일... 아니 천하 제일검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유는 칼보다 강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 글이 가진 힘을 잘 보여준다. 세종은 자신의 논리라는 검으로 글자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다.

물론 '뿌리 깊은 나무'에 무(武)의 대결이 주는 흥미로움이 없는 건 아니다. 출상술을 쓰는 이방지(우현)와 무휼이 조선제일검의 자리를 놓고 부딪치는 대결이 그렇고, 강채윤(장혁)과 윤평(이수혁)의 쫓고 쫓기는 대결이 그렇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문(文)의 대결이다. 한글을 만들고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밀본 정기준(윤제문)의 대결.

집현전을 폐지하고서라도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은 한글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글자를 알면 밥이 나오냐, 양반이 되는 것이냐"고 묻는 강채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글자를 알면 백성도 힘이 생긴다.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밥을 더 많이 만드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양반이 되지는 않지만 양반들에게 그렇게 힘없이 당하지만은 않는다." 이것은 지식이 권력이던 시대에 글을 독점하던 양반들에게 한글 반포가 공포 그 자체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원급제를 한 반촌 노비 서용에 분개한 어린 유생 박세명이 그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다. 글이라는 것이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가리온으로 위장한 정기준은 강채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글자만이 오로지 힘인 분들이니 저에게는 검안이고 겸사복 나리께서는 칼이 아니겠습니까요. 가리온이 가리온인 이유는 검안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요. 저에겐 그것밖에 없습죠. 저 양반네들은 더 하지 않겠습니까요."

글자를 독점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권력을 의미한다. 서양의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것이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쿠텐베르크의 인쇄술이다. 이로써 특정인들만이 독점할 수 있었던 종교적 지식이 일반인들에게도 전파되면서 개혁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그만큼 글의 힘은 칼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기도 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태종 이방원(백윤식)이 칼로서 권력을 휘어잡으려고 했다면, 세종 이도는 글로써 독점된 권력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너만의 조선이란 무엇이냐"는 태종의 질문에 세종은 결국 답변을 준 셈이다.

지금껏 많은 사극들이 있었지만, 이처럼 문(文)의 힘과 문(文)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다루는 사극은 없었다. 물론 전쟁과 정치, 혹은 인물의 성장, 장르화된 사극 속에서도 말이 갖는 힘은 그 어떤 액션이나 스펙터클보다 강하게 시청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철학적인 깊이를 가지면서도, 그것을 단지 사변이 아닌 팽팽한 대결구도로 그려내는 사극은 일찍이 없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이 한글이 가진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이 사극의 또 다른 재미이자 의미다. 무(武)보다 센 것이 문(文)이라는 그 말이 실감나는 사극, 바로 '뿌리 깊은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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