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의 안중근 의사로 돌아온 현빈의 어른이 되는 과정

하얼빈

영화 ‘하얼빈’은 끝없이 펼쳐진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나가는 안중근(현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 ‘듄’을 촬영했던 카메라 ARRI 65에 담겨진 광활한 압도적인 광경 속에 홀로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며 힘겨워 보인다. 영화 속에서 안중근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중이다. 신아산 전투에서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며 풀어준 적장 때문에 동료들이 희생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고픈 마음에 얼음바닥에 눕기도 하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그 때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안중근의 목소리는 그가 무엇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드러낸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먼저 간 동지들이 그를 계속 걷게 만들었던 거였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을 연기한 현빈은 그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을 몽골의 홉스골이라는 호수에서 홀로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 걷고 쓰러지고 누워버리다 다시 일어나 걷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찍었다고 한다. 영화만 봐도 그 촬영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느껴지는데 이에 대해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왔던 현빈은 의외의 말을 꺼내놨다. 힘들기보다는 그 “고립되어 있고 외로이 있는 상황들이”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데 도움이 됐다는 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위를 한 발 한 발 끊임없이 내디뎌야 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그 혹독한 촬영 현장 덕분에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얼빈’ 촬영 당시, 홉스골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는 현빈이라는 배우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한때는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외모 이야기가 배우로서의 이야기보다 더 많았던 현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필모를 잘 들여다보면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노력해왔고, 그 결과 현재의 아우라를 갖게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를 스타덤에 올린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 당시 그가 연기했던 현진헌이라는 인물이 가진 새로움이 느껴진다. 김삼순을 직원으로 둔 까칠한 연하남 사장이다. 그 까칠한 인물이 김삼순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래서 한라산 꼭대기에서 “누구 맘대로 김희진이야! 난 삼순이가 좋다고 그랬지?”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이 울컥하게 된 건 현빈의 눌러주는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이 작품을 통해 현빈은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배우가 된다. 

 

그리고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 가든’으로 현빈은 스타 배우로서의 정점을 찍는데 이 작품 역시 쉬운 역할은 아니었다. 백화점을 소유한 재벌3세 역할이었지만 스턴트우먼인 길라임(하지원)과 몸이 바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판타지가 들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현빈은 무수한 광고의 모델이 될 정도로 신드롬급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현빈은 이러한 초절정의 인기 속에서도 그 순간에 깊숙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건 평소 부모님이 현빈에게 “큰 거에 빠져 심취해 있으면 작은 것의 감사함을 모를뿐더러, 그것이 없을 때의 상실감도 클 수 있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의 이목이 다 집중되던 그 순간에 현빈은 해병대에 입대했고, 그래서 백상예술대상의 대상 수상소감도 군대에서 군복을 입고 찍은 영상으로 전해졌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그는 군대가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제 일과 현빈이라는 사람을 떨어져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 시기가 굉장히 좋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내무반에서 TV를 보다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 나오면 그게 어느 순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직업을 내가 이만큼 좋아하고 있고 이걸 놓지 않고 있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 좋은 시간이었죠.” 

 

이 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 현빈은 전역 후 보다 성숙한 배우로서의 면모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역린’으로 첫 사극을 찍었는데, 단 한 줄로 ‘세밀한 등 근육’이라고 써 있는 그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가 아닌 맨 몸 운동으로 잔근육을 만들 정도로 그는 연기에 진심이었다.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했고, 영화 ‘공조’에서는 임무를 받고 남한으로 내려와 남한 형사와 공조 수사를 진행하는 북한 형사를 연기했다. ‘협상’에서는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고,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실제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판타지 설정의 드라마에 그의 연기가 현실감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사랑의 불시착’으로 또 한 번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함께 연기했던 손예진과 세기의 결혼에 골인해 가정을 이뤘다. 

 

이러한 일련의 성장 과정들이 있어서일까. ‘하얼빈’으로 돌아온 현빈은 어딘가 달라보인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보다 깊이있게 담아내고 있는데, 그건 그 서른 즈음에 죽을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외면하지 않고 걸어간 안중근을 이해하려한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하얼빈’에서 현빈은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에 있어서도 도드라진 면모를 보인다. 물론 그가 주인공이지만 함께 독립 투쟁을 한 다른 인물들이 똑같이 주목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하얼빈’은 안중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덕순(박정민), 이창섭(이동욱),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같은 여러 독립군의 면면이 살아있는 작품이 됐다. 

 

“내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현빈은 가정을 꾸린 후의 변화를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점점 뒤로 가면서 이 상황들을 책임져가는 것. 내 중심에서 내가 중심이 아닌 사람이 점점 되어가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현빈의 연기에서 느껴지는 깊이는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한발짝 뒤로 물러남으로써 생겨나는 여유는 깊이를 만든다. 연기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현빈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글:국방일보, 사진:영화'하얼빈')

하얼빈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죽은 동지들의 참담한 비명이 귓가를 맴돌고 눈앞을 떠돌았습니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을 알았습니다. 대한제국을 유린하는 일본 늑대의 우두머리, 늙은 늑대를 반드시 죽여 없애자고.”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이러한 내레이션과 함께 죽은 줄 알았던 안중근(현빈)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살아돌아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봐야 그 압도적인 스케일이 느껴질 법한 그 광경은 실제 두만강의 풍경은 아닐게다. 칼바람이 불어오는 얼음 위를 홀로 걸어나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오한이 들 것 같은 느낌으로, 그 곳을 걷는 이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마음은 지옥이다. 

 

그는 신아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 장교 모리(박훈)를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풀어줬다가 동료들이 희생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내레이션으로 나온 그 말 그대로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는’ 마음까지 있었을 게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걷다가 그 차디찬 얼음바닥에 누워버린 그는 그러나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를 붙잡아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절망하게 만든 먼저 간 동지들이었다. ‘하얼빈’은 이 일로 목표를 분명히 알게 된 안중근이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이야기다. 그 끝이 결국 자신의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실 안중근의 이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없을 게다. 누구나 역사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접한 바 있고, 역사 다큐멘터리나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그 이야기는 자주 등장했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제작된 ‘영웅’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그려낸 영화 ‘도마 안중근’도 있었으며, 보다 인간적인 안중근의 면면을 따라간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도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왜 만들었을까 싶지만, 본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은 시대에 따른 재해석이 담기기 마련이다.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저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이나, 사막을 건너가는 장면처럼 마치 지옥도 같은 압도적인 풍광으로 펼쳐진 절망적인 심리적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안중근을 재해석했다. 그래서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은거지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마치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음영이 분명한 영상으로 담겼는데, 그것 역시 이들의 내면이 투영된 것처럼 표현된다. 어둠이 금세라도 이들 잡아먹을 것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그 어둠은 오히려 이들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는 얼굴을 빛나게 한다. 

 

결코 ‘하얼빈’은 편안하거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절망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꽁꽁 얼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요즘처럼 어려운 극장가에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영화의 힘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혹자는 ‘국뽕’을 이야기하지만, ‘하얼빈’은 결코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다. 이는 마지막에 사형대에 오르는 안중근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웅’에서 그 장면은 비장하게 그려지며 관객들의 감정을 끌어올리지만, ‘하얼빈’에서는 무감하게 처형되는 장면으로 간단히 연출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흥행은 여러모로 그 누구도 예상 못했던 현 시국의 영향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국이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대사 한 줄로 여겨졌을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에 대해 말하는 대사가 이토록 큰 화제가 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메인 예고편에도 고스란히 들어간 이 장면에서 관객들 대부분은 현재 벌어진 탄핵 정국을 떠올렸을 게다. 비상 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국회로 달려가 이를 저지했고, 탄핵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사당 앞에 구름 같이 모여 응원봉을 들었던 시민들을 떠올렸을 게다.

 

우민호 감독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장면에 대해 꺼내놓은 이야기 역시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한 말이에요. 유생들이나 왕은 하나도 두렵지 않은데, 마차 타고 총독부를 갈 때마다 자신을 쏘아보는 민초들의 눈빛이 너무 서늘했다고요. 민초들에겐 두려움을 느낀 거죠. 그런데 지금 시대가 이렇다 보니 그게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돼 참 아이러니하고 서글프기도 하네요.” 당대의 민초들의 눈빛처럼 현재의 관객들도 같은 눈빛으로 이 영화를 쏘아보며 현 시국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얼빈’은 그래서 그 절망적인 시국을 외면하지 않는 눈빛들이 모여든 영화처럼 보인다. 물론 이건 우민호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무능한 기득권자들에 의해 비극에 내몰린 민초들이 그 절망을 뚫고 나오는 그 과정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건 감독의 말처럼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풀 한 포기 자라날 것 같지 않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가 사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전환해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나뭇가지들을 보여준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절망이 꽃이 피어나는 봄으로의 희망을 꿈꾸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누군가 포기하지 않고 가야할 길을 꿋꿋이 걸어간 이들이 있어 그 봄이 오는 것이라고.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안중근의 외침이 가슴에 와닿는 꽁꽁 얼어붙은 시국이다. (글:이데일리, 사진:영화'하얼빈')

‘내 이름은 김삼순 2024’, 웨이브의 뉴클래식이 시작됐다

내 이름은 김삼순

웨이브에는 최근 드라마, 예능, 영화, 애니 등의 분류 맨 앞에 ‘뉴클래식’이라는 새로운 꼭지가 생겼다. 클래식은 ‘고전’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뉴’가 붙었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마치 ‘레트로’에 ‘뉴’가 더해져 ‘뉴트로’라고 불리는 것처럼 읽힌다. 

 

‘뉴클래식’으로 내놓은 첫 작품은 ‘내 이름은 김삼순 2024’. 2005년에 방영됐던 ‘내 이름은 김삼순’에 2024년 버전이라는 의미다. 김선아와 현빈, 정려원, 다니엘 헤니를 단박에 스타덤에 올렸던 그 드라마. 최고시청률이 무려 50%를 기록했던 레전드 드라마다. 19년의 세월을 뚫고 이 드라마는 어떻게 다시 돌아왔을까. 

 

이것은 최근 웨이브가 시작한 ‘뉴클래식’ 프로젝트의 첫 발일 뿐이다. 이미 예전부터 웨이브가 가진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방대한 아카이브 콘텐츠라는 이야기가 업계에서는 공공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상파 3사가 그간 오래도록 방영해왔던 옛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들이 웨이브에 독점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전원일기’가 다시 화제로 떠올랐을 때도 웨이브는 그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 할 수 있는 유일한 OTT였다. 19년 전 레전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2024년 버전으로 리마스터링해 돌아오게 된 건 그런 의미였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웨이브는 보유하고 있는 아카이브 중 레전드 작품들을 대상으로 뉴클래식 프로젝트를 이어갈 작정이다. 다음 작품으로는 역시 레전드 드라마인 이경희 작가의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서비스될 예정이다. 

 

물론 19년의 세월이 주는 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뉴클래식 프로젝트는 16부작을 8부작으로 압축 재편집했고 화질을 4K로 업스케일링했다. 또 OST 역시 클래지콰이의 ‘쉬 이즈(She is)’를 가수 이무진과 쏠이 재해석해서 다시 불렀다. 현재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중요한 건 내용이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도 여전히 공감 가능한가 하는 지점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촌스러운 이름과 뚱뚱한 체형 그리고 노처녀라는 콤플렉스를 가진 파티쉐 김삼순(김선아)이 고급 레스토랑 사장 현진헌(현빈)과 티격태격 로맨스를 그려나가는 드라마다. 시대의 흐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건 나이 서른을 노처녀라고 불렀던 당대와 현재의 차이다. 지금의 서른이라면 결혼은 아직 먼 한창 연애할 청춘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관점으로 ‘내 이름은 김삼순 2024’를 통해 당대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시대의 김삼순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멋진 인물이었는가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자기 일에 있어서는 프로페셔널하며, 또 ‘예쁜 척’ 같은 가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간적인 매력이 풀풀 피어난다. 

 

또한 현재 이른바 K드라마라고도 불릴 정도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한국드라마(그 중에서도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적인 서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작품에 들어 있는 ‘계약 연애’를 담은 로맨스 서사나, 전문적인 일의 영역을 드라마 인물들의 직업으로 가져와 풀어나가는 방식, 또 남녀 간의 티키타카와 관계의 진전을 기막힌 코미디로 풀어내는 과정들은 ‘고전’이라는 말이 공감갈 정도로 웃음과 설렘을 준다. 

 

반응은 어떨까. 이미 2005년에 MBC를 통해 이 드라마를 접했던 세대들에게는 향수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뉴’라는 접두어를 붙였듯이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젊은 세대들 역시 이 ‘빈티지’한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사랑의 불시착’ 같은 작품으로 글로벌한 인기를 끌고 있는 현빈의 젊은 시절이 등장하고, ‘키스 먼저 할까요?’, ‘붉은 달 푸른 해’, ‘가면의 여왕’에 출연했던 김선아와 ‘졸업’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정려원 또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등의 작품으로 국내와 해외를 종횡무진하는 다니엘 헤니의 젊은 시절이 등장한다. 일종의 ‘레어템’ 같은 작품이랄까. 

 

웨이브의 뉴클래식 프로젝트는 요즘처럼 K콘텐츠가 글로벌하게 저변을 넓혀가는 상황에는 그만큼 가치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 팬덤이 점점 형성되고 있어 이들의 소비욕구 또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과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이어 앞으로도 더 많은 레전드 드라마들의 귀환을 기대한다. 그것은 어쩌면 웨이브라는 지상파를 베이스로 하고 있어 아카이브가 충분한 OTT가 던지는 회심의 일격이 될 수도 있을 테니. (사진:웨이브, MBC)

‘사랑의 불시착’, 모두를 열광에 빠트린 캐릭터 맛집의 괴력

 

tvN 토일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종영했다. 마지막회는 최고시청률 21.6%(닐슨 코리아)를 기록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가 거둔 역대 tvN 드라마 최고기록을 경신했다. 드라마 시작 전만해도 많은 불안요소들이 있었고 실제로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북한을 소재로 했다는 점은 현 시국과 맞물려 ‘미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불안요소들은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기우에 불과했다는 게 금세 밝혀졌다. 북한 미화가 아니라 남북 간 소통에 대한 강력한 판타지가 담겼고, 그 판타지는 꽉 막힌 남북관계의 현실에 오히려 더 강력해졌다. 막히면 막힐수록 더 강해지는 열망이랄까.

 

돌풍을 타고 북한에 불시착해 벌어지는 남녀 간의 로맨스와 갖가지 사건들은 코미디 장르가 주는 유쾌한 웃음으로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연애초보 같은 순박함을 지닌 데다 카리스마까지 갖춘 리정혁(현빈)이라는 듬직한 캐릭터가 드라마에 무게감을 부여한다면, 욕망에 충실하고 다소 엉뚱하지만 영리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윤세리(손예진)라는 캐릭터는 그 위에서 드라마를 한껏 경쾌하게 만들었다.

 

리정혁과 윤세리의 관계를 든든히 받쳐주는 부대원들 표치수(양경원), 박광범(이신영), 김주먹(유수빈), 금은동(탕준상)이 그 캐릭터만으로 빵빵 터지는 코미디를 선사했고, 북한 마을의 아줌마들 4인방 마영애(김정난), 나월숙(김선영), 현명순(장소연), 양옥금(차청화)은 훈훈한 정과 의리로 이들을 지지해줬다. 여기에 드라마 전체에 긴장감을 부여한 조철강(오만석)이라는 악역과 정만복(김영민) 같은 웃음과 눈물을 오가는 반전 캐릭터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리정혁과 윤세리만큼 서로의 마음에 불시착한 또 다른 주인공들로서 서단(서지혜)과 구승준(김정현)은 코미디로 시작해 의외로 절절한 러브스토리를 그려내면서 시청자들의 응원을 받았고, 서단의 엄마 고명은(장혜진)과 외삼촌 고명석(박명훈) 역시 간간히 등장해 강렬한 웃음을 주는 미친 존재감들이었다.

 

이처럼 <사랑의 불시착>이 이토록 강력한 열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매력을 가진 ‘캐릭터 맛집’의 괴력이 아닐 수 없다. 인물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남북을 오가는 러브스토리라는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가 유쾌하면서도 쫄깃하게 그려질 수 있었다.

 

전반에는 북한에서의 리정혁과 윤세리의 만남과 관계의 진전을 그려내고, 후반에는 남한으로 배경을 바꿔 그 이야기를 이어간 것 역시 드라마의 지속적인 몰입을 이끌어낸 주요인이다. 특히 북한에서 내려온 리정혁과 부대원들의 남한 적응기는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일들조차 코미디적 상황으로 만들어줬고, 조철강의 위협 속에서 긴장감 또한 높여주었다.

 

사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는 최근 들어 과거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뻔한 로맨틱 코미디였을 때의 이야기라는 걸 <사랑의 불시착>은 보여줬다. 남북을 넘나드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과감한 선택과 이를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구현해냈다는 사실은 박지은 작가의 여전한 필력을 증명해주었다.

 

남녀 간의 장애물을 넘는 사랑의 이야기가 멜로드라마의 기본적 구조라면, <사랑의 불시착>은 그 장애물을 남북한이라는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경계로 세움으로써 색다른 로맨틱 코미디를 그려낼 수 있었다. 이것은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과의 사랑이야기라는 색다른 지점으로 시청자들을 열광케 했던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인다. 박지은 작가의 다음 작품은 과연 어떤 색다른 장애요소를 가져와 그만의 톡톡 튀는 캐릭터들의 로맨틱 코미디로 그려낼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사진:tv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