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사라지고 호평만 남은 이효리·김희선, 뭐가 달라졌나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최근 이효리와 김희선, 이 두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호평이 쏟아진다. 한 때는 늘 화제의 중심에 있던 만큼 비판도 적지 않았던 두 사람이다. 하지만 최근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 두 사람에 대한 반응은 거의 호평 일색이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이효리는 4년 만에 돌아와 MBC <무한도전>을 시작으로 JTBC <효리네 민박>으로 시청자들 앞에 얼굴을 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녀가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반색했고, 그렇게 방영된 <무한도전>과 <효리네 민박>에서의 편안하고 털털한 그 모습은 보는 이들마저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이런 호평이 쏟아진 건 다름 아닌 그 제주에서의 생활이 그녀에게 부여한 자연스러움 덕분이다. 물론 그간 간간이 SNS 등을 통해 보여진 그녀의 달라진 일상이 이미 화제가 되곤 했었지만, 실제로 달라진 그 모습은 과거 섹시 아이콘에서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 전하는 가수의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직접 쓰고 작곡한 곡들로 채워진 새 앨범의 선 공개곡 ‘서울’은 발표되자마자 화제가 되었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가능한 것만 꿈꿀 순 없다”는 어록(?)을 남긴 이효리의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음악과 조응하는 면이 있었다. 나이 들어가고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더 깊어진 생각들이 음악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가수란 노래와 삶이 떨어질 수 없는 것이란 걸 이효리에 대한 호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희선 역시 마찬가지의 행보다. 과거 김희선이라고 하면 그 출중한 외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연기력 논란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출연하고 있는 JTBC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에서 김희선은 어딘가 과거와는 달라진 면면들이 묻어난다. 우아진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품위’와 함께 어떤 ‘인간적인 면모’까지를 느끼게 해주는 모습들이 그녀의 연기를 통해 제대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품위있는 그녀>가 갖고 있는 박복자(김선아)와 우아진의 팽팽한 대립구도가 만들어내는 힘일 수 있다. 하지만 박복자와 대적하면서, 때로는 이 강남 사회의 허영을 즐기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현대판 계급을 방불케 하는 갑을 구조 안에서 을에게도 어떤 예의를 지키려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런 다층적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려던 그녀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무너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절절한가.

김희선에게서도 느껴지는 건 자연스러움이다. 늘 시대의 아이콘으로만 지칭되었던 그녀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이제 그녀는 한 집안의 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인 모습에 제대로 제 모습을 꺼내놓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맡은 배역에 투사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움. 그것이 외모에 가려지곤 했던 김희선의 연기가 도드라지게 한 원인이다. 

국내에서 여성 연예인들은 배우든 가수든 그 생명력이 상대적으로 길지 않다. 그건 그간 방송이 이들을 소비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표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수 이효리나 배우 김희선이라는 여성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원숙해진 그 자연스러움을 갖고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는 이 상황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회적 편견들 속에서 뒤틀어졌던 모습들이 오히려 편안해지면서 드디어 드러나게 된 진가랄까. 이들의 성과가 그들만의 성과 그 이상의 가치로 느껴지는 이유다.

‘피고인’과 ‘역적’, 시청률과 호평 왜 따로따로 놀까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의 시청률이 갈수록 치솟는다. 7회 만에 20%를 넘기더니 8회에는 22.2%(닐슨 코리아)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압도적 시청률만큼의 호평은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매회 기억을 잃은 박정우(지성)가 그 망각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단서 하나씩을 얻어가는 이야기 구조는 고구마 전개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게 만든다. 게다가 그 박정우를 제거하기 위해 쌍둥이 형을 죽인 살인자이자 그 사장 자리를 꿰찬 재벌3세 민호(엄기준)가 감옥, 그것도 박정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다는 설정은 현실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피고인(사진출처:SBS)'

그런데 어째서 <피고인>은 이런 개연성을 깨는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치솟는 걸까. 그건 박정우라는 인물이 겪는 고통에 시청자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여기에 지성의 연기는 절대적이다) 예상을 깨는 스토리가 주는 반전 효과의 힘이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박정우가 같은 감방에서 도와줘 풀려난 성규(김민석)가 갑자기 자신이 그의 딸을 죽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알고 보니 그가 차마 그의 딸을 죽이지 못하고 데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 시청자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라고 해도 재벌3세가 사형수를 직접 제거하기 위해 감옥을 저 스스로 찾아들어온다는 설정의 이야기는 나가도 너무 나간 느낌이다. 즉 이것은 <피고인>이 시청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더 센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의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청률은 오른다. 개연성을 파괴하는 이야기만큼 자극적인 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호평이 따를 수는 없다. 

반면 MBC 월화드라마 <역적>은 연일 호평이 쏟아지는 것에 비해 시청률은 10%에서 답보 상태다. 경쟁작이 <피고인>이기 때문에 이 시청률은 물론 <피고인>과의 대결구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역적>의 이야기는 그 세세한 면들을 들여다보면 홍길동전을 재해석한 요소들이 많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그런데도 왜 시청률은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걸까. 

<역적>은 사극의 틀을 갖고 있지만 굉장히 진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모개(김상중)라는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고 면천되어 잘 살아가는 모습은 체제 반항적인 이 사극의 방향성을 분명히 해준다. 무엇보다 홍길동이 반쪽 양반의 피를 물려받은 서자가 아니라 순수 노비 아모개의 아들이라는 설정은 <역적>이 갖고 있는 계급성을 분명히 한다. 아모개가 길동에게 장수가 되라고 하고, 그의 형인 길현에게는 과거시험을 보라고 하지만, 그들이 모두 이를 거부하고 방물장수가 되고 아버지 일을 돕는다는 이야기도 기존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드라마의 의지처럼 읽힌다. 

그래서 <역적>은 요즘 같은 시국에 더 많은 호평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금수저 흙수저 하지만 흙수저들이 금수저의 시스템에 편입되기보다는 저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청자들을 공분케 하는 악역으로 등장한 참봉부인 박씨(서이숙)의 면면들은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충”을 내세우며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아모개와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현재의 ‘애국’을 내세워 진실을 외면하려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역적>은 이처럼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들과 그 속에서 시스템을 거부하고 스스로 역적이 되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현재의 시청자들로 하여금 호평을 쏟아내게 만든다. 하지만 시청률이 따라주지 않는 건 아무래도 사극의 주시청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수적인 장년층들에게는 드라마가 너무 리버럴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에 쏟아지는 호평은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많지만, 역시 지상파 드라마의 시청률이란 보수적인 장년층의 힘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보수화되어버린 MBC의 이미지 역시 <역적>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게 사실이다. 

시청률은 <피고인>이 가져갔지만 호평은 <역적>에 쏟아진다. 물론 완성도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피고인>도 <역적>도 근본적으로는 시대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고한 이들이 감옥에 들어가거나 고초를 겪는 상황이 어째서 현대극인 <피고인>이나 사극인 <역적> 모두에서 등장하고 있을까. 시청률과 호평은 따로 놀고 있지만 두 드라마의 정서적 지반이 비슷한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반가운 신인 양세종·박혜수, 호평도 혹평도 자양분 삼아야

신인 연기자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연기 경험이 상대적으로 일천할 수밖에 없는데다 배역 또한 존재감 있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SBS 수목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 나란히 등장한 신인, 양세종과 박혜수는 다르다. 그들은 신인이지만 꽤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 박혜수는 사임당의 젊은 시절 역할을 맡았고, 양세종은 그 시절과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겸 역할과 현대로 넘어와 서지윤(이영애)과 과거 사임당의 행적을 추적해가는 조교 역할을 동시에 맡았다. 

'사임당, 빛의 일기(사진출처:SBS)'

흥미로운 건 두 신인배우들이 모두 최근 들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혜수는 <K팝스타>로 먼저 얼굴을 알렸지만 SBS <용팔이>에 출연한 후 JTBC <청춘시대>에서 호평을 받았고 tvN <내성적인 보스>에선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있다. 양세종은 SBS <낭만닥터 김사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후 SBS <사임당>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최근 여러 작품을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박혜수의 경우, <내성적인 보스>와 <사임당> 모두 연기력 논란을 겪고 있다. 차분한 역할로 <청춘시대>에서 받았던 호평과 달리 활달한 성격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내성적인 보스>에서는 연기의 과잉을 지적받고 있다. <사임당>의 경우도 비슷하다. 쉽지 않은 사극 연기인데다, 발성에 있어서 아직까지 준비된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건 어린 사임당이 이겸과 어쩔 수 없이 이별하고 다른 남자와 혼인을 맺는 그 비극적 상황에서 그래도 괜찮은 몰입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아직 신인이기 때문에 부족한 면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약점과 강점을 정확히 알고 여러 연기를 경험해가며 부족한 점들을 채우는 것이 신인들에게는 필요한 일이다. 

반면 양세종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는 거대병원 원장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서려는 도인범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냈다. 이기적인 면면을 가진 그가 차츰 강동주(유연석)와 함께 동료의식을 배워가고 자신을 성장시켜가는 과정을 잘 소화해냈다. 

<사임당>에서도 양세종은 신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1인2역을 해내고 있다. 과거 조선시대에서는 이겸이라는 풋풋하면서도 비극적인 인물을 소화했다. 현대로 넘어와서는 훨씬 더 신세대에 가까운 가벼운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서지윤과 선후배 관계지만 미묘한 멜로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양세종의 강점은 무엇보다 안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과잉되게 밖으로 무언가를 표현해내려 하기 보다는 안으로 감정을 꾹꾹 눌러 표현할 줄 안다. 

평가는 엇갈리게 되었지만 박혜수도 양세종도 신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평가는 어쩌면 배역에 따른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캐릭터를 맡게 되느냐에 따라 연기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건 신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다. 하지만 요즘처럼 신인배우 찾기가 어려운 시절에 이런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자양분 삼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예술혼과 진심이 느껴지는 나홍진 감독의 집념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5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 수치는 여기서 머물 것 같지 않다. 영화의 특성 상 재관람이 이어지고 있고, 칸느에서의 호평 덕분에 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영화 <곡성>

하지만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곡성>처럼 쉽지도 않고 또 보기 편하지도 않은 영화가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관객들의 발길을 <곡성>으로 향하게 했던 걸까.

 

그 첫 번째는 절대로 현혹되지 말라는 포스터 문구가 역설적으로 보여준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나홍진 감독의 신작이라는 데 대중적 관심은 분명 있었고, 시사회를 통해 드러난 평들은 이 작품이 문제작이라는 것에 모두가 공감하게 만들었다.

 

나홍진 감독은 영화 홍보를 위한 인터뷰를 통해 <곡성>에 대한 여러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꺼냈고, 그것은 이 영화의 훌륭한 미끼가 되어주었다. 대중들의 궁금증은 점점 커져갔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전히 남는 궁금증 때문에 분분한 의견들과 해석이 오히려 더 큰 궁금증을 만들었다. 미끼가 또 다른 미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이런 미끼를 던졌다고 해도 영화가 나름의 진정성을 갖지 못했다면 관객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졌을 것이다. <곡성>은 그러나 단지 관객들을 미궁 속에 빠뜨려 허우적대는 걸 즐기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나홍진 감독은 스스로도 말하듯 우리네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모습을 영화를 통해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주인공인 종구(곽도원)에게서 느껴지는 연민의 감정이다. 처음에는 시골 동네에 있는 겁 많은 경찰로 바로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함으로 다가오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해 가족의 비극을 야기하게 되는 그런 인물이다.

 

이 정도의 피가 튀기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이야기 속에서 인물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게 되는 건 그만큼 나홍진 감독이 영화에 기울인 진심이 깊다는 이야기다. 나홍진 감독은 그래서 <곡성>을 통해 인간 존재와 구원 혹은 그 한계에 대한 진심어린 질문을 던졌고, 그것이 관객들에게도 느껴졌다는 것이다.

 

종교를 통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건 자칫 잘못하면 먹물들의 자의식 강한 영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그렇지 않았다. 쉽게 현혹되고 흔들리는 인간 존재를 그리면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관객들도 기꺼이 이 미궁 속에서 종구라는 인물의 혼돈에 빙의될 수 있었다.

 

결국 예술혼이란 작가의 진심이 얼마만큼 담기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곡성>은 어려운 문제지만 에둘러 가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며 앞으로 걸어 나간 감독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 미진함이 허탈감이 아니라 감독이 끝까지 던진 질문으로 여겨지게 된 건 3시간 가까이 보여준 영화의 집념 덕분이다. 500만 관객은 그것이 통했다는 걸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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