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왜 하필 이 시점에 홍길동인가

“나는 그저 내 아버지 아들이오. 씨종 아모개(김상중). 조선에서 가장 낮은 자.” MBC 새 월화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광활한 평원에서 말을 타고 대치하고 있는 임금(김지석)과 길동(윤균상)의 장면을 전제로 깔아놓는다. 절박한 얼굴의 임금과 여유로운 표정의 씨종의 아들 길동. 이 장면은 <역적>이 그리려는 전체 이야기를 압축한다. 결국 임금과 역적이 똑같은 눈높이로 마주 서게 되고 도대체 누가 시대의 역적인가를 되묻는 것. 

'역적(사진출처:MBC)'

사실 우리가 <역적>이 그리려는 세계를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거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문장으로 기억되는 홍길동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적>은 이 뻔할 수 있는 홍길동 이야기에 몇 가지 새로운 설정들을 집어넣는다. 그 하나는 길동이 양반의 서자가 아니라 씨종 아모개의 아들이라는 순수 노비 혈통(?)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길동이 아깃적부터 남다른 힘을 가진 ‘애기 장수’라는 설정이다. 

홍길동의 이야기가 서자 출신으로서 출사가 금지된 시대의 ‘적서차별’을 그 밑바닥 정서로 깔고 있다면, <역적>은 아예 양반의 핏줄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태어날 때부터 종살이가 결정된 삶, 즉 ‘씨종’의 아들이 부여하는 ‘흙수저’의 정서를 깔고 있다. 하지만 남다른 힘을 가진 ‘애기 장수’ 길동은 이 ‘흙수저’가 갖게 되는 평탄치 않은 삶을 예고한다. 만일 금수저로 태어난 애기 장수라면 나라를 구할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만, 흙수저 애기 장수란 나라를 뒤흔들 ‘역적’의 씨앗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홍길동 이야기가 탄생하던 시기에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가질 자에게 부여되어야 비로소 힘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절대로 부여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 그래서 가진 자가 절대 갖지 말아야할 자들을 마음껏 부리는데 사용되는 것. 그것이 힘이고 권력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렇게 부여된 힘과 권력이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들끼리 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 생겨난 민초의식. 그 발현이 홍길동 같은 체제 전복의 서사를 탄생시켰다는 것.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하필 2016년 현재 다시 재해석되고 있다는 건 그 시국에 대한 공감이 홍길동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공감 때문이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이지만 국민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사익을 위해 치부되었다는 걸 확인한 촛불들이 횃불이 되어 광화문 광장에 모이는 시국이 아닌가. 진정한 힘이 무엇이고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는 그 촛불의 질문처럼 <역적> 역시 묻고 있다. 진짜 역적은 과연 누구인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네 민초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어려운 시기마다 소환해와 위로받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주었던 영웅서사의 또 다른 시작일 게다. 그래서 <역적>은 그 소재를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여기에 “그런데 말입니다” 하며 무언가 잘못된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것만 같은 김상중이 첫 회부터 깔아놓은 씨종 태생이 갖게 되는 그 아픈 민초들의 정서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느끼는 현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껏 자신의 힘을 누르며 잘못된 현실 앞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아모개나 그의 아들 길동이 어느 순간 각성하고 그 힘을 민초들을 위해 쓰게 될 순간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된다. 고구마 현실에 길동이라는 애기 장수이자 ‘백성을 훔친 역적’은 그래서 현재의 시청자들의 마음 또한 벌써부터 훔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억눌려진 힘이 사이다처럼 터져 나올 그 순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탐정 홍길동>, 한국형 판타지 히어로물의 탄생

 

사실 <탐정 홍길동>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낮설다. 홍길동이라는 고전적 영웅 서사의 인물에 탐정이라는 현대적인 직업(?)을 덧붙였으니 그런 낯선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게다. 게다가 <탐정 홍길동>은 사극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극이라고 할 만큼 현실적인 바탕을 내세우고 있지도 않다. 마치 <배트맨>의 고담 시티 같은 가상의 공간이 <탐정 홍길동>에도 주요 배경이 된다.

 

사진출처:영화<탐정 홍길동>

마치 프랭크 밀러와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만들었던 <씬시티>를 우리 식으로 재해석한 것 같은 장르의 혼용과 만화와 실사의 결합이 놀랍게도 <탐정 홍길동>에는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게 시도되어 있다. 이야기는 그래서 배경보다는 홍길동(이제훈)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에 맞춰지고 그가 속한 활빈당이라는 비밀조직과 그들이 대항하는 광은회의 대결구도가 영화의 주요골격이 된다.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기억과 두려움을 모두 잃어버린 홍길동이 한 마을로 들어가 자신의 과거를 캐고 복수를 하는 일련의 단순한 과정들이 영화의 내용이지만, 영화는 의외로 흥미진진하다.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이 무지막지한 액션들을 선보일 때 관객들은 그 비현실성도 잊은 채 카타르시스에 빠져든다.

 

이미 영화의 장르적 문법들에 익숙한 관객들은 <탐정 홍길동>이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현실적 소재나 공간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게임을 하듯 인물들이 부딪치고 추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또 어떤 반전을 이루는 그 과정들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는 그 캐릭터가 갖는 함의는 분명 존재했을 터다. 왜 이 현대적인 판타지 히어로물에 굳이 홍길동이라는 고전적 영웅 서사를 붙였는가 하는 건 활빈당이라는 그가 속한 조직의 성격과 맞닿아 있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 조직.

 

바로 이 지점에서 <탐정 홍길동>은 하나도 직설적으로 현실적인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우리네 현대사의 현실성을 상징적으로 유추하게 만든다. TV를 통해 나오는 정치인의 모습이나 군인의 모습은 80년대의 어느 한 시점을 떠올리게 하고, 광은회가 한 마을에 퍼붓는 엄청난 폭력 역시 우리네 현대사의 아픈 지점을 건드린다.

 

결국 <탐정 홍길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은 우리네 뒤틀어진 현대사의 상징처럼 보인다. 무고한 마을 주민들이 있고 그들에 대한 엄청난 폭력과 착취가 행해지며 그렇게 얻어진 부는 정치권과 군부에 맞닿아 있다. <탐정 홍길동>은 어쩌면 현대사를 겪어온 우리네 심연 속 어느 마을로 찾아가 그 아픈 기억들을 헤집고 판타지를 통해서나마 이를 극복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영화는 전형적인 판타지 히어로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어찌 보면 서구의 장르적 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갱스터 무비의 성격을 우리 식으로 해석한 점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목이다. 하지만 <탐정 홍길동>은 이런 장르적 재미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네 정서와 메시지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수작이라 할만하다. <늑대소년>에서 어떤 장르적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보였던 조성희 감독은 <탐정 홍길동>을 통해 한층 더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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