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가 되려면 크레용팝이 넘어야할 것들

 

몇 개월 전만 해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크레용팝이 최근 보여주는 행보는 놀랍기까지 하다. 소니 뮤직과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고 세계무대로의 한 발을 내딛은 것은 물론이고 빌보드닷컴은 아예 대놓고 “크레용팝이 제2의 싸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크레용팝(사진출처:크롬 엔터테인먼트)'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크레용팝이 내놓은 ‘빠빠빠’는 여러 모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콘텐츠다. 늘 섹시나 큐티 같은 비슷비슷한 콘셉트의 걸 그룹들이 홍수를 이루는 현재 크레용팝이 내건 B급 걸 그룹 이미지는 실로 충격으로까지 여겨진다. 헬멧과 트레이닝복을 입은 걸 그룹이라니. 그 자체로 참신하지 않은가.

 

춤이라고 하기에는 전혀 멋을 느끼기 어려운 동작들은 차라리 체조나 캐릭터 코스프레 동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의도적으로 허술하고 웃음이 터지는 어색한 동작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더 친숙하고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의 앙증맞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빈 구석이 많다는 것은 채워 넣을 구석도 많다는 이야기. 바로 이 완전체 걸 그룹이 아니라는 점은 크레용팝에 대중들이 개입할 여지를 더 많이 갖게 만드는 요인이다. 무수한 패러디들이 만들어지고 SNS상의 화제가 생기는 건 대중의 자리를 남겨놓는 크레용팝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크레용팝의 ‘빠빠빠’가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비교되는 건, 그 유사성 때문이다. 일단 노래가 단순하면서도 쉽게 귀에 달라붙는다. 여기에 B급 감성 가득한 뮤직비디오는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하다. 이른바 ‘직렬5기통춤’은 싸이가 했던 말춤의 걸 그룹 버전처럼 따라하고픈 욕구를 자극한다.

 

유튜브라는 매체를 활용한 전파 방식도 유사하다. 유튜브 없는 싸이가 존재할 수 없듯이, 크레용팝 역시 단순한 음악 위에 얹어진 유니크한 비주얼로 무장함으로써 유튜브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패러디처럼 팬들의 참여가 중요한 인기요인인 점도 그렇고, 유튜브에 얹어진 만큼 글로벌하게 이어지는 반응도 유사하다. 물론 노래가사가 외국인들조차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런 많은 장점들과 유사성들은 크레용팝이 제2의 싸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과연 크레용팝의 세계무대 진출은 가능할 수 있을까. 일단 일본 시장을 필두로 한 아시아 시장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미국이나 유럽 시장 같은 곳에 진출하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음악적인 실력이다. 유튜브가 띄운 싸이는 마치 비주얼적인 것만 강조된 바가 크지만 그는 음악적으로도 충분한 실력을 갖춘 아티스트다. 작곡능력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의 가창실력을 갖춘 데다 무엇보다 그는 무수한 라이브 경험을 통해 관객과 함께 놀 줄 아는 가수라는 점이다. 이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싸이에 대해 미국인들조차 고개를 끄덕였던 셈이다. 크레용팝이 이 정도의 음악적 성취를 갖추었는지는 미지수다.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싸이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영어로 소통가능한 정도의 언어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언어능력보다 중요한 건 그의 유머감각이다. 미국의 토크쇼 같은 데 나와 그가 언어적인 장벽을 전혀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영어를 잘한다기보다는 순발력 있게 나오는 유머 덕분이다. 크레용팝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아직 검증된 바가 없다.

 

마지막으로 크레용팝이 넘어야 할 것은 이미지 관리 능력이다. 물론 팬들과의 잘못된 소통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수 있지만 크레용팝은 여전히 일베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음악적인 호평도 이런 식의 정치적 색채를 띤 논란에 휘말리면 덮어지기 마련이다. 이념이나 정치성을 넘어서 모두가 응원할 수 있는 이미지를 갖추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언제건 크레용팝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크레용팝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함을 갖추고 있다. 늘 비슷비슷한 걸 그룹들의 홍수로 지칠 대로 지친 대중들이라면 이 재기발랄한 걸 그룹의 탄생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을 게다. 어렵게 탄생한 만큼 롱런하는 크레용팝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걸 위해서라도 크레용팝은 차분히 본인들이 부족한 면들을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 자체도 팬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크레용팝의 매력을 더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세계무대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전우치>, 어설픈 CG보다 급선무는

 

<전우치>가 첫 선을 보였다. 전우치라는 새로운 사극의 소재가 갖는 신선함과 차태현이라는 배우가 주는 기대감 때문인지 첫 방 시청률은 좋은 편이다. 단번에 1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청률과 다르게 반응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먼저 <전우치>라는 도술을 쓰는 존재를 그려내는데 있어 필수적인 CG가 기대 이하라는 평이다. ‘사극 버전 벡터맨’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전우치'(사진출처:KBS)

물론 CG의 완성도가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액션이 갖는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CG가 아니라 촬영과 연출의 문제일 수 있고, 또 대본이 가진 장르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전우치가 도술을 부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놓고 판타지를 보여주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CG에 확실히 자신감이 있거나 그만한 투자가 이뤄졌다면 모르겠지만 영화도 아닌 드라마에서 그런 CG는 맞지도 않고 효과도 별로 없다.

 

드라마는 결국 볼거리보다는 스토리와 캐릭터에 천착하는 장르다. 영화 <전우치>가 화려한 CG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신나는 한 판 놀이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런 방식이 드라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눈보다는 마음이 움직이게 해야 된다. 게다가 <전우치>는 한 시대의 영웅을 그리는 서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대중들이 희구하는 영웅의 요소가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과연 이 사극의 전우치(차태현)는 우리를 가슴 떨리게 하고 마음 한 구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그런 영웅일까.

 

첫 회에서 보여준 이 영웅에게서는 그런 소명의식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탐관오리들이 학정을 펼친다거나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민초들이 있다거나, 혹은 전쟁이 벌어져 외세가 쳐들어와 온 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썩은 정치적 관료들 때문에 백성들이 피폐한 삶을 산다거나 하는 그런 현실을 끄집어낼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우치의 개인사가 어설픈 CG와 함께 액션으로 보여졌을 뿐이다.

 

율도국에서 사랑했던 무연(유이)이 강림(이희준)에 의해 최면에 빠져버리고 전우치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건이 첫 회의 가장 큰 스토리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 전우치를 살려낸 스승이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강림을 막으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앞으로 이 사극이 하려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전우치는 결국 조선을 넘보는 강림을 제압하고 무연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은 전우치라는 영웅의 존재의미이기도 하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포졸들에게 쫓기다가 숨기 위해 닭으로 변신함으로써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그런 틀에 박힌 도술 시퀀스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 <매트릭스>와 <와호장룡>에서 나왔던 몇몇 액션 장면들을 따라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전우치>라는 고전소설의 주인공에게 지금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이 현실의 갈증을 빗대어 풀어줄 영웅의 서사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디딘 것에 불과하지만 CG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이 전우치라는 캐릭터가 어서 빨리 민초들을 구원하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놀라운 볼거리로 승부할 것이 아니라면(이것은 전술했듯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좀 더 명쾌한 대립구도 속에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 대중들이 갖고 있는 갈증을 사극의 형식으로 담아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전우치>는 자칫 B급 CG장르에 머물 위험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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