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가> 시즌2, 멤버 구성에 고려되어야 할 것들

 

<아빠 어디가>가 시즌2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적절한 선택이다. 프로그램의 특성 상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은 이 프로그램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방송을 차츰 알아가게 되는 순간부터 관찰카메라가 가진 자연스러운 발견들은 힘겨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어느 정도의 추억거리라면 모르겠지만 너무 과도한 방송에서의 이미지 소비는 아이들의 향후 교육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하지만 시즌2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심히 고민되는 지점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중 가장 뜨거운 감자가 멤버 구성이다. 멤버 구성이 어려운 점은 <아빠 어디가> 같은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는 일종의 유사 가족 같은 느낌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 출연하는 아이들을 마치 한 가족처럼 시청자들이 느끼고 공감해왔기 때문에 인물이 빠져나가는 것은 그만한 상실감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멤버 구성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면서 좀 더 새로운 시즌2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먼저 시즌1의 멤버 전체를 교체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프로그램처럼 여겨질 수 있고, 시즌1과의 연결고리 역시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캐릭터를 발굴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미 발굴된 캐릭터들의 가능성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후다.

 

윤후의 힘을 가장 잘 알 수 있었던 대목은 충남 청양군 개실마을로 떠났을 때 그의 빈자리가 만들어낸 존재감이다. 당시 윤민수가 몸이 아파 뒤늦게 합류하게 됨으로써 윤후가 빠진 채 방송이 진행됐는데, 의외로 그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다는 것. 이것은 이번 뉴질랜드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홈스테이에서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 서먹해진 윤후의 존재감이 적어지자 프로그램의 힘도 그만큼 빠져버렸던 것. 물론 이 부분을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민국이 동생 민율이었다. 언어와 상관없는 작지만 상남자 캐릭터 민율의 귀요미 콘셉트는 홈스테이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즉 시즌2를 한다고 해도 윤후를 뺀다는 것은 그만큼 프로그램의 손실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민국이나 준이의 존재감이 약한 건 아니지만 이 아이들은 방송을 통해 너무 성숙해진 면이 있다. 즉 맏형 민국이는 이제 방송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여겨지며, 나이에 비해 성숙한 준이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물론 준수는 예외적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4차원의 상남자 매력을 가진 준수 역시 시즌1에 이어 시즌2의 가능성 역시 무한하다 여겨진다.

 

새로운 멤버를 구성한다면 이미 시즌1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아이들을 출연시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여겨진다. 즉 민율이 같은 아이는 이미 대중들에게 확실한 자기 캐릭터를 인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아이보다 유리할 것이다. 또한 준이 동생 빈이 역시 강한(?) 캐릭터로 대중적 인지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즌2 후보군으로 나쁘지 않다 여겨진다.

 

물론 어떤 시즌2의 구성이 나올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시즌1과의 연계성을 가져가야 한다는 점과 새로운 멤버구성의 변화가 시청자들에게 좀 더 거부감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윤후나 민율 같은 아이는 좀체 버리기 아까운 카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어떤 구성이든 시즌2가 또 다른 유사가족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오려면 변화에도 그만한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스타 없이 스타 만든 <응답하라1994>, 조연들의 전성시대

 

스타가 없어 스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응답하라1994>가 그렇다. 생각해보라. 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가 정우라는 배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를. 또 꽤 많은 작품에 조연으로 나왔었지만 그에 대해 대중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KBS <최고다 이순신>에 출연했을 때부터였다. 빵집 사장으로 등장한 정우는 대중들에게 괜찮은 인상을 남겼지만 그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지는 못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하지만 <응답하라1994>는 달랐다. 첫 회부터 쓰레기라는 강렬한 캐릭터로 등장하다더니 어느새 여심을 쥐락펴락하는 무뚝뚝하지만 때론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정우라는 배우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실로 꽃미남이라 부를 수는 없는 외모지만 정우의 투박하고 서글서글한 이미지는 그저 비슷비슷한 꽃미남들과는 차별화된 그만의 개성을 부여했다. 특히 그의 투박한 사랑법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공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응답하라1994>가 끄집어낸 정우의 가능성이다.

 

조연들의 재발견은 어쩌면 <응답하라1994>의 핵심적인 캐스팅 전략이라고도 여겨진다. 김성균은 대표적이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이웃사람> 등에서 보여준 미친 존재감은 분명했지만 어찌 보면 악역에 어울리는 외모를 심지어 사랑스럽게까지 보이는삼천포라는 캐릭터로 만든 건 놀라운 일이다. 그의 강한(?) 외모는 촌놈의 어눌함으로 바뀌면서 웃음 코드로 전환되었고, 그 어눌함이 찾아낸 사랑의 감성은 타이니지의 도희라는 새로운 인물과의 조합으로 더 아기자기해졌다.

 

칠봉이로 나온 유연석은 어떤가. 그 역시 <건축학개론><늑대소년>을 통해 주로 악역으로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 드라마에서는 여주인공 나정(고아라)을 짝사랑하는 순애보를 보여준다. 해태 역할의 손호준이나 빙그레 역할의 바로 역시 드라마에서의 존재감을 그다지 드러내지 못했던 인물들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정이 가는 캐릭터로 부각되었다. 조연들, 특히 그 중에서도 악역으로 이미지화된 배우들을 끄집어내 멜로를 그려낸다는 발상은 결국 주효했다. <응답하라1994>가 캐스팅으로 보여준 건 조연들의 전성시대였던 셈이다.

 

특히 연기자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고아라에게 있어 이 작품은 커다란 전환점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결코 꾸미지 않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 고아라는 예쁘장한 외모가 오히려 가려버리는 연기의 폭을 이번 작품을 통해 확실히 넓혀 놓았다고 보인다. 이렇게 된 데는 이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이 여성적인 면으로만 지나치게 매몰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 데 있다. 방송 전까지는 누군지도 몰랐던 도희가 구수한 사투리에 시원시원한 욕을 얹어 곱상한 외모와는 정반대의 매력을 드러냈던 것도 마찬가지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흔히들 드라마를 얘기할 때 누가 주인공이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택기준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스타 캐스팅은 때로는 그 자체로 드라마에 한계를 지우기도 한다. 스타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크면 클수록 드라마 속 캐릭터와의 조합에는 그만한 이미지의 부딪침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라는 인지도를 통해 드라마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드라마는 드라마를 통해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스타 캐스팅 드라마들이 스타의 이름값도 못한 채 빛이 바랬던 일들을 우리는 이미 많이도 봐왔지 않은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스타 파워가 제작진을 좌지우지 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타가 자기 배역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대본을 고치게 함으로써 결국은 작품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종종 생겨난다. 또한 몇몇 스타 캐스팅에 집중된 비용은 고스란히 제작진과 스텝들이 떠안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즉 스타 캐스팅은 작품의 성패와도 점점 관계가 없어지고 오히려 부담만 가중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응답하라1994>가 던진 조연들의 재발견은 드라마 제작 관행에 있어서 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진다. 먼저 탄탄한 대본과 연출력이 갖춰졌다면 차라리 대중들에게는 백지상태인 발견되지 않은 배우들을 쓰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의 새로운 캐스팅 성공방정식에 앞으로 여타의 드라마들이 얼마나 응답할 것인가. 실로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최인선 감독이 말하는 <우리동네 예체능>

 

덕장이라는 표현이 아마도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현재 <우리동네 예체능>의 농구팀을 이끌고 있는 최인선 감독은 유독 을 강조했다. 한두 명 잘 하는 친구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팀 전체가 다 같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경기를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물론 이기려는 경기를 해야 하지만 너무 거기에 집착하다보면 더 큰 걸 놓치게 되요. 한두 번 당장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죠.” 즉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하게 되고 만족스런 경기를 해냈을 때 승리는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동네 예체능(사진출처:KBS)'

실제로 이번 <우리동네 예체능>의 농구팀은 실력 편차가 크다. 줄리엔 강이나 서지석, 김혁이 에이스 중에 에이스라면, 부상으로 주춤한 최강창민이나 아예 농구공을 잡아 본 경험이 별로 없던 강호동은 말 그대로 구멍이다. 아마추어의 강호인 창원팀을 만나 1쿼터에 무려 170이라는 스코어를 내줬을 때 최인선 감독은 골고루 선수들을 뛰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남겼다. “가비지타임이라 그러죠. 이미 패했어요. 그걸 그냥 버리면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되는 거죠....기량이 약하다고 해서 그걸 무시하면 농구 경기가 짝짝이가 되요.”

 

기량이 약한 선수를 무시하면 팀은 균형을 잃는다는 것. 이것은 최인선 감독이 말하는 팀스포츠 농구에 대한 철학이다. 그가 말하듯 농구는 기록만 갖고 선수를 평가했을 때 큰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기록 바깥에서 열심히 뛰어주는 선수들이 있기 때문에 기록을 내는 선수들도 있다는 것이다. 최인선 감독의 이 말은 농구라는 스포츠에만 국한되지 않는 울림을 준다. 우리 사회를 하나의 팀으로 생각해보라. 세계 몇 위의 경제를 수치적으로 자랑하며 몇몇 대기업들의 위상을 말하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노동자들이 흘린 땀의 가치를 우리사회는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가.

 

최인선 감독의 농구 철학이 단지 농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대목은 그가 강조하는 로컬에 대한 애정이다. 즉 그는 과거 농구대잔치가 농구 붐을 만들었던 이유가 우리 식의 농구와 우리 식의 팬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식축구가 미국에서만 하지 다른 나라에서는 안하잖아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인기가 있다는 겁니다. 즉 농구도 꼭 해외랑 겨루려고 할 게 아니라 우리 식으로 재밌게 하면 되는 거죠.” 해외 용병들이 들어오면서 몇몇 용병들의 기량에 따라 성패가 좌지우지되면서 다른 선수들이 전부 가려졌다고도 했다. “그런 용병들은 사실은 팀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죠.”

 

최인선 감독이 말하는 로컬은 90년대 우리네 사회가 온통 글로벌로 들썩거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화가 화두였던 그 시절, 결국 우리가 놓쳤던 것은 로컬이 가진 가능성들이 아니었던가. 결국 세계화의 끝자락에 IMF라는 철퇴를 맞았던 것처럼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최인선 감독은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 식의 농구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변했다. 실로 우리가 굳이 NBA를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슬램덩크가 아니라 어쩌면 슛도사슛쟁이가 아닐까.

 

최인선 감독의 이 로컬은 그래서 <우리동네 예체능>이라는 프로그램의 취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생각이다. 생활체육이 살아야 스포츠가 살아난다고 말하는 그는 <우리동네 예체능>이 보여주는 건강한 로컬 스포츠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로 스포츠라고 하면 늘 거대한 국가 스포츠로만 생각하던 우리에게 이 프로그램은 우리동네라는 일상 속의 스포츠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국가 스포츠가 오로지 승패와 메달 수와 순위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동네의 스포츠는 함께 하는 팀워크나 그를 통한 배려 같은 스포츠 이상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진정한 스포츠 정신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최인선 감독의 리더십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안녕들 하십니까운동이 보여주고 있는 안녕하지 못한 사회는 어쩌면 팀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팀 운용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오로지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국가경제 몇 위의 순위에만 집착하면서 정작 로컬을 챙기지 못하는 잘못된 국가 운용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건 어쩌면 최인선 감독 같은 덕장의 리더십인지도 모르겠다.

<정법>, 어쩌다 잔인한 프로그램이 되었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동물학대라 부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정글의 법칙> 사바나편에서는 갑작스럽게 동물학대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사냥을 하기가 쉽지 않은 오지에서 김병만이 무려 6시간에 걸쳐 만든 석궁으로 작은 새를 잡는 장면과, 촬영 끝날 때까지 올무에 잡히지 않은 딕딕(사슴처럼 생긴 동물)이 카메라를 끈 뒤에 잡히자 그 가죽을 벗겨내고 고기를 나누는 장면이 모자이크도 처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영된 것에 대해서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원주민들도 살기 위해 사냥해 먹는 동물이고, <정글의 법칙>은 어떤 면에서는 그 곳의 생존법칙을 배우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는 건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끊임없이 동물들을 사냥하고 잡아먹는 장면들을 반복하다 보니 거기에 둔감해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칫 잔인해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을 그대로 내보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것과 그래서 힘들게 석궁까지 동원해 새를 잡은 것까지는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석궁으로 잡아 껍질을 벗긴 새를 나무 위에 얹어놓고 원래대로 나무에 앉아있네하며 낄낄대는 장면을 굳이 자막까지 붙여 내보내는 건 그 뉘앙스가 다르다.

 

물론 현장에서 출연자들이 동물을 학대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달리 바라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더라도 동물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실제로 과거 <정글의 법칙>에서 강조한 것은 생존만큼 중요했던 게 공존이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사냥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생존하게 해주는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철학 중 하나였다. 이런 철학이 프로그램에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글에서의 사냥이나 어로, 채취가 허용되었다. 특히 먹거리가 풍부해 심지어 먹방의 느낌마저 풍겼던 뉴질랜드편에서조차도 이러한 먹거리들은 자연의 선물로 표현되기도 했다. 얼마나 다른 태도인가.

 

사실 동물학대라는 조금은 과한 비판마저 나오게 된 데는 이번 사바나편이 예능적인 재미를 별로 주지 못하고 거의 사냥과 먹방에 거의 집착했던 것에서 비롯된 바도 크다. 또 세렝게티에서 누떼를 보기 위해 기구를 타고 올라가 감탄하는 장면은 아마도 현장에 있는 출연진들이나 스텝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을지 몰라도 <정글의 법칙>을 즐겨보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너무 식상한 장면처럼 여겨졌을 게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동물 다큐들을 통해 더 생생한 동물들의 모습을 너무 많이 접했다. <정글의 법칙>에 시청자가 원하는 건 그런 그림이 아니라 진짜 그 세계 속에 뛰어들어 경험하는 교감이다. 이번 사바나 편과 과거 마다가스카르편을 비교해서 생각해보라. 물론 동물의 종류가 다를 것이지만 마다가스카르편에서 출연진들은 동물과 함께 어우러지는 장면들을 계속 해서 보여주지 않았던가.

 

만일 사바나라는 환경이 마다가스카르와는 달리 생존경쟁의 공간이라 어쩔 수 없이 동물들을 사냥하고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것이 프로그램을 통해 충분히 드러났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사바나편에서는 출연자들의 내면이나 심리변화 혹은 육체적 상태가 그다지 프로그램에 보여지지 않았다. 즉 그저 겉모습만 계속 보여주면서 그들의 생존상황은 좀체 시청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의 과도한 사냥 장면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사냥 그 자체에 대한 집착처럼 보였다는 얘기다.

 

인물들의 내면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는 걸 단적으로 말해주는 건 이번 편에서 유독 출연진들의 캐릭터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새롭게 합류한 이들을 포함한 출연진들은 만만찮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프로그램을 통해 잘 전달되지 않아 심지어 오인까지 받는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글의 법칙>이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왜 그 힘겨운 공간에 들어가는가에 대한 명쾌한 이유를 프로그램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생존과 공존 같은 의미는 이 프로그램의 존재 근거를 그저 재미에만 머물게 하는 위험성을 피하게 해준다. 만일 그저 재미만을 위해 정글에 뛰어든 것 같은 느낌을 프로그램이 자아내기 시작하면(그렇게 한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생존 행위는 그 자체로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게 된다.

 

이번 사바나편에서 상대적으로 보여지지 않은 아프리카가 겪고 있는 눈물은 그런 점에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누떼의 대이동은 그저 장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가 공존을 생각해야 하는 의미도 들어가 있다.

 

물론 조작 논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글의 법칙>은 꽤 괜찮은 기획이다. 하지만 이 기획이 괜찮으려면 거기에 합당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자연과 환경을 대하는 철학.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정글의 법칙>은 자칫 사냥의 법칙같은 잔인한 느낌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초심, 초심 하지만 <정글의 법칙>이야말로 초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