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이 포르노? 국위선양?

 

왜 그저 음악을 음악으로 듣고 즐길 순 없는 걸까. 심지어 ‘젠틀맨’이 ‘국위선양 포르노그래피’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나왔다. 동아대 정희준 교수가 쓴 이 글의 골자는 ‘젠틀맨’이 사실은 포르노 수준의 선정적인 뮤직비디오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좋아하고 유튜브 클릭수가 폭발하는 등의 이른바 ‘국위선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찬양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문화를 담고 있기 보다는 미국문화를 열심히 홍보해주는 ‘젠틀맨’은 한류가 아니라 미국문화의 첨병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사진출처: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

아마도 보수적인 시선으로 본 ‘젠틀맨’의 뮤직비디오가 못내 역겨웠었던 모양이다. 지나치게 편향적인 글인데다가 그 근거 역시 해외의 반응(그것도 과격하게 안 좋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면 이 글 자체가 지나치게 미국 반응에 민감한 느낌마저 든다. ‘젠틀맨’이 보여주는 B급 유머는 물론 우리가 이제는 ‘SNL 코리아’ 같은 데서 토요일마다 보며 열광하는 미국식의 유머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한국적인 정서가 없는 건 아니다(이엉돈 피디를 어떻게 미국 SNL에서 볼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게 없다면 어찌 우리네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정희준 교수의 ‘젠틀맨’이 미국문화의 첨병이라는 얘기는 싸이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네 대중들의 미국 편향을 지적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가.

 

사실 싸이는 글로벌하게 네트워킹된 세상이 만들어낸 문화현상이다. 그것은 이미 국가나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다. 싸이가 곡을 발표한 지 단 이틀만에 전 세계의 음원차트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과거 국가주의적인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흔히들 모국어라고 말할 때 드러나는 국가적인 배타성이 싸이에게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빤 강남스타일!”이라고 부를 때 저편에서는 그것을 자기네 언어로 비틀어 “Open condom style!”로 듣거나 “말이야!”라는 말을 “마리아!”로 듣는 식이다. 여기서 국가나 언어의 장벽은 오히려 창조적인 재해석의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러니 정희준 교수의 이야기처럼 싸이의 곡을 미국문화니 한류니 하는 식으로 국적성을 드러내는 논리는 이제 구시대적 발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미국문화나 남미의 문화, 일본문화, 중국문화 나아가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를 바로 집 안에 앉아서 자유롭게 즐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화적 사대주의나 국가주의의 논리를 가져오면 이 국가를 초월한 다양성 추구 시대에는 어딘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아마도 정희준 교수는 ‘젠틀맨’이 가진 선정성에 대해 언론들이 관대한 것을 국가적인 망신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론이 지나치게 ‘젠틀맨’을 국위선양 운운하며 국가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로 정희준 교수의 논리 역시 그 국가주의적 시선 안에 포획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갑자기 촉발적으로 생겨난 싸이 현상에 국가나 정부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는 식의 모습을 보게 될 때다. 그래서 정부의 관계부처들이 싸이를 ‘한류의 첨병’이니 또 그 방식을 해석해 ‘창조경제’니 하는 식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현상은 이해되지만 의도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대중문화가 국가를 초월한 SNS 같은 네트워크를 타고 지구촌화된 전 세계로 뻗어나갈 때 거기에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너무 속보이는 일이 아닌가.

 

싸이는 자신의 음악이 그저 대중음악의 하나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인식되는 상황의 불편함을 이미 드러낸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국민가수’가 아니라 ‘국제가수’라고 이름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미국식(이 표현도 우습긴 하다)의 유머를 즐기면 안 되는가. 그걸 즐긴다고 우리의 본질이 달라지기라는 하는 걸까. 과거처럼 국가 대 국가로 폐쇄된 세계에서라면 그것은 침공이니 침략이니 하는 배타적인 표현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지구촌의 시대에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배타성이 과연 유효한 걸까. 싸이의 ‘젠틀맨’을 둘러싼 국가주의적인 잡음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이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낸 뜻을 요즘 의사들은 알까

 

<구암 허준>에서 허준(김주혁)의 스승 유의태(백윤식)는 병자가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에도 그가 백정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물러가라는 유도지(남궁민)를 보고는 혀를 차며 그 병자의 집을 찾아 나선다. 헐벗고 가난에 찌든 아이들이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 나와 유의태와 허준을 맞이하는데, 유의태는 똥오줌도 가리지 못해 냄새가 진동하는 병자의 욕창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낸다. 허준은 그걸 보고 비로소 심의(心醫)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구암 허준'(사진출처:MBC)

또 목을 맨 딸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가난한 노부부에게 자신은 의원이 아니라며 극구 거부하는 허준이 결국 그 딸을 시술해주는 장면도 그렇다.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딸을 살려내자 고마운 마음에 내미는 가락지를 극구 거부하며 “병자가 건강해지는 게 보답”이라 돌려보내는 허준에게서 지금의 대중들은 무엇을 느낄까. 또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병자들에게 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한글로 처방전을 써주는 그 마음은 어떤가. 돈이 아니라 오로지 생명만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 심지어 성인의 면모까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실력은 당대 최고 침술의 대가로 알려진 어의 양예수(최종환)를 구침지의로 꺾을 만큼 출중하지만 출사하지 못하고 낙향해 오로지 병자만을 긍휼이 여기는 명의 유의태나, 잘 나가는 내의원이었지만 어린 아들이 나병 환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업보를 풀기 위해 한 평생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길을 걷는 삼적대사 김민세(이재용), 김민세 일가에 찾아온 불행으로 자신도 관직을 던져버리고 산속에 은거에 부술(해부술) 연구에만 몰두하는 안광익(정호빈)이 지금의 대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반면 <구암 허준>에서 유도지의 모습은 지금의 의사들을 그대로 빼닮았다. 병자를 보는데 있어서도 그 귀천을 따지고, 배운 의술은 많지만 마음으로부터 병자를 긍휼하게 바라보는 진정한 심의(心醫)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의원. 오로지 의술을 통한 내의원 입성만을 목표로 세우는 유도지는 그래서 출세만을 추구하는 작금의 의사들을 닮았다. 일반외과나 내과 같은 생명을 다루는 과의 지원자가 점점 사라지고, 대신 성형외과나 피부과 같은 그래도 돈벌이가 되는 과로 몰리는 작금의 현실이 그걸 말해주지 않는가.

 

언제부턴가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직업이 아니라 돈 잘 벌고 출세하기 좋은 직업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생겼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은 제 아무리 어려운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의술의 혜택을 받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라도 처치 받지 못해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세상이다. 물론 모든 의사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본화된 의료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봐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되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치솟는 의료보험료와 그걸 내지 못해 의료 사각지대로 몰리고, 제 아무리 당장 죽어가는 병자라고 한들 돈 없으면 문전박대 당하는 현실을 겪고 있는 서민들의 입장에서 <구암 허준>이 보여주는 유의태나 허준, 김민세 같은 인술의 대가들은 그래서 그 자체가 감동일 수밖에 없다. 병자를 살리기 위해 고름을 손수 입으로 빨아내는 유의태와 허준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썼다는 것 외에 그다지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치료법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값비싼 중국 수입 약재 대신 우리 산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을 다수 소개한 <동의보감>은 그 자체로 허준이라는 심의(心醫)의 긍휼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올해는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한 1613년으로부터 정확히 400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무려 4백년 전의 허준이 작금의 세태에 전하는 메시지는 더 커졌다. 물론 극화된 것이지만 <구암 허준>을 보다가 느끼는 그 울컥함은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게 된 세상에 대한 아픈 반응일 것이다.

송승헌의 전쟁 같은 사랑, 연우진의 시 같은 사랑

 

남자의 사랑, 뭐가 달라서 <남자가 사랑할 때>라는 제목을 붙인 걸까. 임재범은 ‘너를 위해’라는 곡에서 남자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줄 거야. 널 위해- 떠날 거야.’ 아마도 송승헌이 연기하는 한태성이라는 남자의 사랑이 이럴 것이다. 남자의 사랑은 팩을 하고 인증샷을 찍어 보내달라는 여자 친구 앞에서 당황하는 것만큼 어색하고 면구스러운 그런 것이 아닐까.

 

'남자가 사랑할 때'(사진출처:MBC)

남자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래서 여자들이 사랑을 통해 받고 싶은 표현과는 동떨어질 때가 많다. 한태성에게 짐짓 다가와 자신의 딸 미도(신세경)가 피아노 치는 남자를 멋있어한다며 슬쩍 귀띔을 해주듯이 여성들이 원하는 사랑의 표현방식은 현실적이기보다는 로맨틱한 어떤 것일 게다. 따라서 여성들을 주 타깃으로 삼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남자의 사랑이란 현실적이기보다는 여성들의 판타지가 묻어난 것일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남자가 사랑할 때>는 이 판타지와는 조금 결이 다른 남자의 사랑을 전면에 내보인다. 한태성의 사랑은 첫눈에 반한 미도에게 달려가 사랑고백을 하는 그런 식이 아니다. 그는 미도의 뒷바라지를 하고 그 집안을 돕고 가끔은 현실에 찌든 삶을 털어낼 여유를 제공하며 앞으로의 미래와 꿈을 돕는다. 물론 가끔 얼굴에 진짜 팩을 붙이고 인증샷을 보내거나, 시집의 한 문구를 그녀의 집 앞 칠판에 적어놓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가 좋아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지 그의 사랑의 진짜 얼굴은 아니다.

 

그래서 신사의 모습으로 사랑 앞에 어린아이처럼 쑥스러워하는 한태성이 그에게 도발하는 구용갑(이창훈)에게 야수성을 목격했을 때 미도는 놀랄 수밖에 없다.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어린아이 같지만 그것은 사랑 앞에 모든 것이 무장해제 된 남자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저 전쟁터 같은 세상에 나가면 또 치열한 싸움을 벌일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이 남자들의 사랑 방식인 셈이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할 때>에는 전쟁 같은 사랑을 하는 한태성이라는 인물과 대척점으로서 여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이재희(연우진)라는 인물도 있다. 한태성이 보내준 해외출장에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 인물. 본래 인생에서의 판타지란 이처럼 현실적인 공간에서 몇 시간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짧지만(어쩌면 짧기 때문에) 더 강렬한 한 때의 추억은 어쩌면 여자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재희는 그래서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 같은 사랑을 하는 캐릭터다. 칠판에 ‘이 봄이 좋아. 네가 있어서’라고 적어 놓은 그에게 미도의 아버지가 “그게 끝이냐?”고 묻자 그는 “내가 봄을 불렀어. 너를 주려고.”하고 그 시의 뒤를 말해준다. 젊은 시절 문학을 했다는 미도의 아버지는 “유치하니 좋구만.”하며 이재희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다. 이재희는 퀸의 앨범이나 대학의 티셔츠 하나로 마음을 전하는 그런 사랑을 하는 존재다.

 

한태성과 이재희의 사랑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린다. 한태성이 남자의 사랑을 보여준다면, 이재희는 여자들이 갖는 판타지의 하나로서의 남자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재희가 이러한 판타지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한태성과 이재희의 형인 이창희(김성오)의 전쟁 같은 삶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여유 덕분이다.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심지어 판타지에 빠진 것처럼 사랑할 때 그 밑에는 누군가의 현실적인 희생이 있기 마련이다. 미도에게 그래서 한태성의 사랑은 연인보다는 아버지 같은 느낌일 때가 많다.

 

그렇다면 남자의 이 전쟁 같은 사랑은 결실을 보게 될 것인가. 어쩌면 한태성은 저 임재범이 부른 ‘너를 위해’의 노래가사처럼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떠나주는 사랑을 할 지도 모르겠다. 미도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판타지를 깨지 않고 든든히 지켜주는 현실적인 테두리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남자가 사랑할 때>의 진짜 모습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아버지들이 저 뒷전에서 남모르게 해왔던 것처럼. 어딘지 옛사랑의 느낌이 묻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남자가 사랑할 때>의 사랑은 천편일률적인 판타지 멜로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장옥정>의 끝없는 추락, 그 이유는 뭘까

 

역시 김태희의 사극 캐스팅은 무리수였나.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의 시청률이 7%대까지 추락하면서 그 원인으로 김태희의 연기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어색한 표정 연기와 어려운 사극 톤에 어울리지 않는 발성이 몰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일까. <장옥정>의 부진은 과연 온전히 김태희의 연기력 부족 때문일까.

 

'장옥정 사랑에 살다'(사진출처:SBS)

물론 김태희의 연기력은 <아이리스>에서 보여준 가능성을 되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극 특유의 맛을 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사극의 대사 톤은 현대극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일상적인 발성으로는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사극 특유의 연기 톤을 자기 특유의 색깔과 맞춰 자기화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김태희의 목소리는 복색만 한복을 입었을 뿐, 현대극의 그것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김태희의 연기력보다 더 큰 문제는 연기자들 사이에 조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옥정>의 유아인과 김태희 캐스팅은 극중 캐릭터와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멜로 드라마의 경우 드라마를 보는 관점은 캐스팅된 배우들의 조합 그 자체가 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나이 많은 김태희와 한참 어려보이는 유아인의 조합은 자연스러운 멜로의 결을 만들어내는데 장애요소가 되는 게 사실이다.

 

이런 남녀 연기자들 사이의 조합 문제는 동시간대 타 방송사의 드라마들과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직장의 신>의 김혜수와 오지호 조합이나, <구가의 서>의 이승기와 수지의 조합을 생각해보라. 그 캐스팅 자체가 기대감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대한 대로 김혜수는 카리스마와 코믹과 슬픔을 모두 껴안을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오지호는 <환상의 커플>과 <내조의 여왕>에서 보여줬던 코믹하고 과장된 캐릭터를 잘도 소화해내고 있다. 또 <구사의 서>의 이승기와 수지는 그 확실한 비주얼만큼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도 작품 속 캐릭터의 힘이 만들어내는 착시현상일 수 있다. 본래 연기력 논란은 캐스팅 논란이나 캐릭터 논란과 겹쳐져 나타나곤 한다. <장옥정>은 사극의 옷을 입고는 있지만 현대극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제목을 장옥정으로 달고 있기는 하지만, 만일 다른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 드라마에서 장옥정은 심지어 그 시대에 패션쇼를 여는 패션 디자이너다.

 

만일 장옥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들이대지 않았다면 조선시대의 패션 디자이너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을 수 있다. 실제로 군복 디자인을 하기 위해 이순(유아인)의 친위대 비밀야영지로 들어온 장옥정이 군복을 직접 입어보고 군영을 체험하는 장면은 사극으로서는 이색적이다. ‘옷을 만드는 여인’이 그저 미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위한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장옥정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그 패션 디자이너를 세우자 충돌이 생겨난다. 장희빈으로 기억되는 그 강렬한 이미지는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비록 악녀로 낙인찍히기는 했어도 그 절절함과 절실함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장옥정>에 등장하는 패션 디자이너는 기존 장희빈이 갖고 있던 그 절실함이 빠져 있다. 오로지 사랑에 목매는 여인이라도 역사적 인물로서 장희빈을 내세웠다면 적어도 그 절절함만큼은 가져갔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장옥정>은 기존 장희빈을 기억하는 사극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가벼운 사랑타령이 되어버렸고, 또 새로운 사극을 희망하는 젊은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옷(무려 장희빈이라는!)을 입은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마치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를 그리는 퓨전사극에 어색하게도 장희빈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억지로 꿰어 덧댄 느낌이다. 작품이 이렇게 어정쩡한 선에 서 있으니 그걸 연기하는 연기자들이 입은 캐릭터라는 옷이 잘 맞을 리 없다. <장옥정>의 추락은 물론 김태희 연기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바로 현대극인지 사극인지 알 수 없는 위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작품의 문제가 더 클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