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되는 '나가수2', 걱정되는 MBC

 

김영희 PD와 함께 돌아온 '나가수2'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본격적인 생방송을 앞두고 벌어진 22일 첫 녹화현장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몇 개월 간의 공백기는 '나가수2'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높여놓았고, 캐스팅된 가수들의 무대는 그 하나하나에서 정성이 느껴졌다. 관객들은 오랜만에 음악의 축제 속에 푹 빠져들어, 때론 그 가슴을 울리는 깊은 감성에 젖어들었고, 때론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열정적인 무대에 가슴이 뛰었다. '나가수2'는 확실히 한층 업그레이드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가수다2'(사진출처:MBC)

무엇보다 12명의 가수 라인업이 돋보였다. '나가수1'에서 아깝게 탈락했던 가수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나가수2'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의 김연우가 부르는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분위기 있게 울부짖는 듯한 JK김동욱이 부르는 '미련한 사랑', 폭풍 성량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 이영현의 '연', 특유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박완규가 부르는 '천년의 사랑', 감미롭다 못해 날카롭게까지 느껴지는 정엽의 '잘 몰랐었다', 그리고 진정한 재도전을 보여준 김건모의 '서울의 달'까지. 더 듣고 싶었으나 듣지 못했던 '나가수1'의 가수들은 '나가수2'에 그 기대감을 그대로 이어주었다.

 

여기에 '나가수2'로 합류한 나머지 6명의 가수들의 존재감도 빛이 났다. 이은미는 '위대한 탄생'의 멘토로 출연하면서 상당 부분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가수2' 첫 무대에 올라 그녀가 부른 '녹턴'은 이 모든 걸 덮어버릴 만큼 가수로서의 매력이 철철 넘쳤다. 이미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최근 몇 년 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이수영이 부르는 '휠릴리'는 대단히 감미로웠고, 8년 간이나 가수로 활동했지만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인이 부르는 '미워요'는 절절한 감성이 느껴졌다.

 

늘 즐거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가창력은 상대적으로 묻혀 있던 박상민의 '멀어져간 사람아'는 걸쭉했고, 한때 김건모와 함께 흑인 감성이 묻어나는 보컬로 주목받았던 박미경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는 흥겨웠다. 무엇보다 고령이지만 현역 최고의 밴드인 백두산이 부르는 '러쉬 투 더 월드'는 80년대 헤비메탈의 매력을 뽐내며 향후 '나가수2'의 가장 파격적인 무대를 예감하게 했다. '나가수1'에서 아깝게 탈락해 아쉬웠던 가수들과 이번에 합류한 기대되는 가수들을 적절히 배합한 '나가수2'의 캐스팅은 그래서 잘 차려진 음식들처럼 저마다의 독특한 맛을 보여주었다.

 

현장에서 느낀 음향 수준은 향후 진행될 생방송이 주는 부담감을 상당 부분 덜어주었다. 오히려 생방송이 가질 리얼리티적인 요소에 대한 기대감마저 갖게 만들었다. 사실 음향적인 부분만 해결된다면 생방송은 '나가수'에게는 어쩌면 친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가수1'에서의 녹화시간은 거의 실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준비된 가수들이 있고 준비된 제작진들이 있으니 괜히 녹화라고 시간을 질질 끌지 않아야 준비된 관객들에게도 그만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김영희 PD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니 생방송에 대한 훈련은 이미 '나가수1'에서부터 끊임없이 해왔던 셈이나 마찬가지다.

 

확실히 '나가수2'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한 프로그램으로 보인다. 김영희 PD가 있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가수진들이 포진해 있는데다가 한동안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관객들의 기대 또한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현재 MBC가 처한 위치와 그로 인해 '나가수2'가 짊어지게 될 부담이다.

 

현재 MBC는 장기파업으로 인해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뉴스도 줄어들었고 시사 교양 프로그램은 실종된 지 오래다. 예능 프로그램은 줄줄이 결방되면서 시청률이 거의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외주제작되는 드라마가 그나마 어느 정도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생각만큼 좋은 형편은 아니다. MBC 예능의 대표상품이었던 '무한도전'이 장기 결방되고 있고, '일밤'은 애국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결국 '나가수2'가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짐을 지게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대중정서다. '나가수2'는 분명 그 매력이 넘치는 프로그램으로서 대중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대감이 MBC가 현재 처한 위치 속에서는 걱정으로 변할 수도 있다. 많은 대중들은 그간 파행되었던 MBC가 공영방송으로서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되찾기를 바란다. 물론 '나가수2'는 그 자체로서 완성도 높은 훌륭한 프로그램이고 대중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선사하겠다는 진정성이 느껴지지만, 그 좋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칫 MBC 사측이 가진 최후의 보루처럼 활용될 가능성도 높다. 과연 대중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들과 딸'의 귀남과 '넝굴당'의 귀남

 

92년도에 방영되었던 '아들과 딸'에는 귀남(최수종)과 후남(김희애)이라는 이란성 쌍둥이가 등장한다. 제목과 극중 이름에서부터 짐작하겠지만, 이 드라마는 당시 남녀의 문제를 가족드라마의 틀에서 다루었다. 남아선호사상 속에서 귀남이는 집안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후남이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귀남이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이 드라마는 남녀를 대결구도로 보기보다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부여되는 남자들의 부담과 짐 또한 다루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사진출처:KBS)

그리고 20년이 지난 2012년, 귀남이가 다시 돌아왔다. 물론 이름은 귀남이지만 사고방식이나 행동이나 모든 게 달라졌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귀남(유준상)이 그 주인공이다. 이름만 들으면 귀하디 귀하게 자란 전형적인 구세대의 아들 같지만, 성이 방씨라는 것은 이 모든 예상을 농담으로 반전시킨다. 방귀남. 이 드라마 속에서 귀남은 어쩌면 여성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한 남자', 넝쿨째 굴러온 복덩어리로 다가온다.

 

일하는 아내를 위해 아낌없는 외조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정 부모를 친부모처럼 생각하는 그 진심어린 마음은 결혼한 여자들이라면 홀딱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게다. 특히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제사 에피소드는 이 귀남이란 남자의 귀한 면모(?)를 뭇 여성들의 가슴에 확실히 각인시켜주었다. 일 때문에 제사 준비도 못하고 늦게 들어오는 아내를 대신해 팔 걷어 부치고 부엌에서 아내 몫까지 요리를 돕는 모습은, 남자들은 밤이나 까고 여자들은 온갖 요리를 해내야 하는 우리네 제사 풍경의 불합리를 통쾌하게 뒤집어 주었다.

 

이 20년 전 '아들과 딸'에 등장하는 귀남과 현재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 등장하는 귀남 사이의 변화는 그간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물론 20년 전 '아들과 딸' 역시 그런 남아선호사상을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봤지만, 그 분위기는 자못 무거웠다. 하지만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시집살이의 문제조차 발랄한 코미디로 풀어낸다. 하긴 이런 남편에 대한 판타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한 시집살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 엉뚱한 행동으로 시집사람들을 뒤집어놓는 귀남의 행동은 확실히 남자들이 봐도 공감이 가는 구석이 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주말드라마로서 무려 3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내고 있는 이유는 이 시집살이를 뒤집어놓는 귀남이라는 존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귀남은 아내인 차윤희(김남주)에게 결혼에 있어서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만드는 존재다. 차윤희는 시댁 식구가 하나도 없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귀남과 결혼했지만, 귀남이 잃어버린 가족(그것도 대가족이다)을 찾게 되면서 차윤희의 삶은 반전된다. 이웃으로 알던 처지에 마구 했던 행동들은 졸지에 시댁식구들로 관계가 바뀌면서 고스란히 그녀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또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귀남에 의한 반전이다. 사사건건 차윤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시누이 말숙(오연서)과 시댁식구들의 무차별 공격 속에서도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남편 귀남이 있어 그녀는 버틸 수 있게 된다. 미국에 입양되어 살아온 전력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귀남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시댁의 사고방식과 부딪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핵가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시댁으로 대변되는 기존 가족관계가 가진 비합리성을 꼬집으면서도, 동시에 가족이 가진 가치를 버리지 않는다. 귀남은 가족이 있다는 것의 행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 따라서 이 전근대적인 가치와 현대의 가치는 귀남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서로 부딪치며 화해하게 된다. 따라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귀남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귀남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되고 가치매김 되는 가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20년이 흐르면서 귀남은 이렇게 달라졌다.

가수가 연기하고, 배우가 웃기는 시대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연기 못하는 가수들은 이른바 연기력 논란을 겪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제 가수들이 주인공을 맡는다는 그 사실 하나로 비판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그만큼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가수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또 성공사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쇼'(사진출처:SBS)

이승기와 박유천은 드라마로 간 연기돌의 좋은 예다. '더킹 투하츠'에서 이승기는 깐족대면서도 때론 위엄을 보여주는 왕제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 있고, '옥탑방 왕세자'에서 박유천은 현대로 온 조선의 왕세자 역할을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를 품은 달'에서 주목받고 '적도의 남자'에서 매력이 확인된 임시완, '사랑비'와 '패션왕'에서 각각 활약하고 있는 소녀시대의 윤아와 유리 등등 지금 드라마의 중심에는 가수들이 있다.

 

물론 여전히 연기가 어색한 가수들도 있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확실히 나아진 건 사실이다. 이것은 이제 가수들이 연기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쉽게 보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이돌들 같은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연기를 배우는 것이 하나의 코스가 되어 있다. 가수들은 캐스팅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야 그만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소화를 못했을 때는 연기력 논란으로 자칫 가수 활동 자체에도 악영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수들의 드라마행이 이제 보통의 일이 되어버린 반면, 작년부터 배우들의 예능러시가 주목된다. 엄태웅은 '1박2일'의 멤버가 되면서 그간 드라마나 영화에서 올리지 못했던 주가를 올렸다. 그는 영화 '특수본'에 이어 '건축학개론'에도 출연했고, 최근에는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 맹활약 중이다. 송지효 역시 예능을 통해 주가를 올린 대표적인 사례다. '런닝맨'은 '쌍화점'에서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그 위에 송지효 특유의 편안한 매력을 부각시켰다. 그녀는 심지어 드라마 '계백'을 촬영하면서도 '런닝맨'에 출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사극에 있어서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송지효가 '런닝맨'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한혜진은 '힐링캠프'가 발견한 예능의 보석이 되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도 자기가 할 이야기는 빼놓지 않고 콕콕 집어 말하는 직설어법은 '힐링캠프'에서 그녀만의 존재감을 세워주었다. 이러한 성공사례들 덕분일까. 배우들의 예능 러시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고현정이 자신의 이름을 딴 '고쇼'로 예능 신고식을 치렀고, 이동욱은 이승기가 떠난 '강심장'에 MC를 맡아 첫 회부터 공동MC인 신동엽보다 더 확실한 존재감을 만들어냈다. 물론 시트콤은 예능으로 분류돼도 드라마에 가깝지만 아직까지 이 분야에 발을 딛지 않았던 차인표(선녀가 필요해)나 류진(스탠바이)이 최근 여기에 합류했다는 것도 배우들의 예능 러시와 같은 궤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배우들 중 특히 여배우들의 예능 활약은 두드러진다. 사실 여배우들의 예능 출연은 대부분 그들의 작품 홍보 시기와 맞물려 출연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여배우라는 존재 자체가 예능에서는 하나의 블루오션처럼 되어 있었던 것. 여배우라면 흔히 떠올리는 여신 같은 이미지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걷어내는 것만으로도 예능에서는 확실한 반전 효과를 줄 수 있다. 송지효나 고현정 같은 경우를 보면 그녀들이 본래 갖고 있던 이미지들을 예능을 통해 상당히 부드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배우가 예능을 하고 가수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연예인들이 점점 멀티 플레이어화되는 이유는 뭘까. 이것은 점점 퓨전화되고 섞이는 콘텐츠들의 시대적인 요구에서 비롯된다. 예능이 다큐나 드라마적인 요소와 섞이고, 드라마가 예능과 접목되는 등의 콘텐츠 퓨전화 경향은 그 종사자들인 연예인들의 자기 정체성 또한 하나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또한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지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자신을 어필하려는 것도 연예인들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들이 섞일 때 그 연예인 당사자에게 그것이 시너지를 만들 가능성도 훨씬 높다. 과거에는 배우가 예능에 출연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미지의 충돌이 생기기 때문. 하지만 요즘은 확실히 달라졌다. 예능 출연의 이미지와 영화나 드라마 출연의 이미지를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이다. 엄태웅 같은 경우에 '적도의 남자'나 '건축학 개론'에서의 진지한 이미지와 예능에서의 편안한 이미지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상생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스타들에게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는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물론 그만큼 치열해진 경쟁을 얘기해주는 것이지만, 또 한 편으로 특정 영역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뒤섞이는 문화적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콘텐츠의 퓨전화 경향처럼 이제 연예인들 역할도 퓨전화되고 있다. 가수가 연기하고 배우가 웃기는 시대다.

'적도', 시각장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우리는 눈을 통해 얼마나 진실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눈이 있기 때문에 진실은 오히려 가려지는 것이 아닐까. '적도의 남자'는 주인공 선우(엄태웅)가 눈이 멀게 되는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을 뜨고 있을 때 선우는 장일(이준혁)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선우가 그 실체를 보게 된 것은 바로 그가 눈을 멀게 되는 사건을 통해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세계 속에서 선우는 차츰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적도의 남자'(사진출처:KBS)

그 세상은 냉혹한 공포와 분노이면서, 동시에 따뜻한 마음이기도 하다. 공포와 분노는 성공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친구마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장일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세상이고, 그 따뜻한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구원처럼 손을 내밀어주는 지원(이보영)이라는 인물로 표상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담는 '적도의 남자'는 두 가지 장르를 담는다. 선우와 장일의 관계가 풀어져가는 복수극이 그 하나고, 선우와 지원이 점점 진심으로 다가가는 드라마틱한 멜로가 다른 하나다.

 

'적도의 남자'가 초반 부진을 털어내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복수극과 멜로라는 두 가지 씨줄과 날줄이 바로 '눈을 멀었다'는 그 설정을 통해 절묘하게 엮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각장애라는 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적도의 남자'는 상투적인 복수극과 상투적인 멜로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드라마에는 시각장애라는 설정에서만 가능한 극적인 상황과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선우가 못 보기 때문에 장일이 선우를 대하는 섬뜩한 실체가 더 부각되고, 안마 실습을 하면서 아버지를 죽게 한 진노식 회장(김영철)과 선우가 대면하는 극적인 장면이 가능해진다. 보이지 않는다는 선우의 장벽을 세워두자 그 앞에 이 철면피 같은 인간들이 하는 섬뜩한 짓들이 부각되는 식이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바라봐야 한다. 아마도 선우의 복수극은 그래서 이 못 본다는 설정을 뒤집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못 본다고 생각했던 선우가 사실은 그들의 치부를 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복수의 서막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못 본다는 설정을 단지 이런 복수극으로만 활용했다면 이 드라마는 자칫 너무 건조한 느낌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설정이 멜로에도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선우가 스카프를 사면서 옆에 따라온 지원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그렇고, 연주회장 앞에서 난 자동차 사고 소식을 들은 선우가 지원이 다친 줄 알고 안 보이는 와중에도 그녀를 애타게 찾는 장면이 그렇다. 불 꺼진 방안에서 선우가 지원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은 또 얼마나 시적인가. 또 눈이 보이게 된 선우가 지원과 다시 만나는 과정이 아련하게 이어지는 것도 과거 시각 장애를 겪었던 사실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시각장애라는 설정이 장르적으로 훌륭한 장치라는 것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이 설정은 그 자체로 이 드라마의 메시지에 접근한다. 보지 못하는 선우라는 존재가 겉으로만 번지르르 한 세상의 더럽고 잔혹한 치부를 제대로 바라보고, 허위와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진실된 사랑을 찾게 된다. 이는 또한 보지 못하는 자와 보는 자로서 선우와 장일이라는 두 인물의 대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보지 못하는 선우가 보는 장일보다 더 진실 되고 따라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 이것은 상황 자체만으로도 전해지는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 보지 못하는 남자와 보는 남자,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진 구원 같은 여자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해준 연기자들의 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준혁은 연기의 재발견이다. 이준혁은 순간순간 욕망에 따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거짓말을 하고 행동하는 이 섬뜩한 장일이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주었다. 지원이라는 구원자의 역할을 연기한 이보영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껏 그다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보영은 이 역할을 통해 그 투명할 정도로 순수한 매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적도의 남자'는 엄태웅의 존재감이 깊이 각인된 드라마임에 분명하다. 그는 왜 그가 엄포스라고 불리는가를 이번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었다. 투박해 보이지만 진짜 선우라는 캐릭터가 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그 자세에서 우리는 이 인물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이 절절한 진심이 담긴 엄태웅의 연기가 받쳐주지 못했다면 자칫 이 드라마는 그저 답답하게만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엄태웅이 있어, 이 시각장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더 섬뜩하고 더 절절하게 여겨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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