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눈빛으로 기억되는 영화, '포화 속으로'

'포화 속으로'의 전쟁 스펙터클은 한 편의 액션영화를 보는 것처럼 숨 가쁘고 정신없을 정도로 현란하며 심지어 때론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화려한 영상의 박진감 속에 빠져들 정도다. 하지만 그 스펙터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답답해진다. 많은 이들이 영화 개봉 전부터 불거져 나왔던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던 문제나, 특정 집단의 자본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로 인해 이 영화가 반공영화일 거라는 우려를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반공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반공영화가 아닌 이유는 당연하다. 상업영화이기 때문이다. 70년대도 아니고 2010년도에 반공영화는 대중들이 공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품성이 없다. 그래서 주인공 장범(탑)이, 죽어가며 '오마이'를 외치는 어린 북한병사를 처음으로 확인사살하고는 '그들 역시 괴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조금은 생뚱맞아 보인다. 반공을 주창하던 시기는 전후의 일이지, 전쟁이 막 벌어지던 당대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장면은 상업영화로서 반공 냄새를 없애려는 안간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반공영화가 아니라는 것이 반전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초반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전투장면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며 포항에 학도병을 놔두고 가버리는 강석대 대위(김승우).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 같은 인민군 776부대를 이끄는 박무랑(차승원). 이들은 어느 편이라기보다는 모두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던져진 그저 싸워야 하고 이겨야 살아남는 비슷비슷한 존재들처럼 그려진다. 한바탕 전투의 소란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장범의 넋 나간 얼굴과, 새로 온 학도병들을 장범의 손에 맡긴 채 떠나가며 강석대 대위가 "너희들은 군인인가 아닌가"를 묻는 초반부의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가 마치 반전영화인 것 같은 인상을 던져준다.

하지만 국군이 떠나가고 포항에 남은 학도병들은 이상하게도 이 덧없는 어른들의 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자가발전시키며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진다. 영화 후반부에 장범이 "우리는 군인인가 아닌가"를 선창하듯 질문하고, 다른 학도병들이 "군인이다!"라고 선언하는 장면부터, 거의 초인처럼 총을 쏴대는 장범과 갑조(권상우) 앞뒤로 마치 게임처럼 우수수 쓰러져버리는 북한 병사들의 모습은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논조는 이렇게 바뀐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조국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결국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전쟁은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

이 쉽게 드러나는 영화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장범을 연기하는 탑의 눈빛이다.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의 두려움과 순수함과 강인함, 그리고 슬픔이 교차하는 그 눈빛은 많은 걸 얘기해준다. 영화를 보다가 혹시 눈물이 났다면 그것은 영화가 꾸며놓은 화려한 영상 때문도 아니고, 조악하지만 꾸역꾸역 집어넣은 모성애적인 관점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는 탑의 슬픈 눈빛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탑의 눈빛은 이 영화와 이 영화가 방영되는 2010년도의 우리네 청년들의 눈빛을 닮았다. 마치 왜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나갔다가 죽음을 맞이한 학도병들처럼, 여전히 이런 국가의 메시지 속에 던져진 채 그 싸움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상에 여전히 편입되기를 강요받아야 하는 청년들의 슬픔.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뒤늦게 돌아온 강석대 대위가 장범을 안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어른들의 전쟁 속에 무참히 동원된 학도병에 대한 미안함, 혹은 그래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어른들의 시각에 대한 미안함. 탑의 슬픈 눈빛이 아픈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때문이다.

짧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런닝 구'

길면 되고 짧으면 안되는 것. 바로 드라마다. 심지어 50회를 훌쩍 넘기는 장편 드라마들은 50%의 시청률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단 한 편으로 끝나는 단편 드라마의 경우, 5%에서 10% 사이의 시청률을 향해 달린다. 장편 드라마가 풀코스 마라톤이라면 단편 드라마는 단거리 혹은 중장거리 달리기에 해당한다. '런닝 구'는 4부작이다. 그러니 이 사이에 낀 하프 마라톤 코스 정도는 될까?

한편에선 같은 집에서 내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욕망을 위해 폭력이 자행되는 지독스런 막장이, 다른 한편에선 전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월드컵이 서 있는 스타트 라인 위에 선 지독해도 착한 드라마 '런닝 구'는 극중 주인공인 구대구(백성현)를 빼닮았다. 이 드라마는 다음에 이어질 MBC의 야심작 '로드 넘버 원'의 페이스메이커다. 그래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경쟁 위에 서게 되었다.

'런닝 구'는 구대구처럼 마라톤 풀코스를 달릴 필요는 없다. 그저 30킬로까지 질주하고는 그 힘을 다음 작품에 넘겨주면 된다. '로드 넘버 원'은 그 힘을 받아서 골인점의 승리를 따낼 것이다. "너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을 둥 살 둥 뛰어주면 그 기운 받아서 지만이는 달려 나가 메달 따고 너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거잖아." 극중에서 행주(박민영)의 이 대사는 런닝 구' 같은 이 땅의 단편 혹은 중편 드라마들의 운명을 말하는 것만 같다.

KBS는 공영방송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단막극의 부활을 주창하며 'KBS 드라마스페셜'을 신설했다. 몇 편이 방영됐지만 각 작품마다 완성도의 차이도 있고 대중성에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인지 어떤 건 10%에 가까운 시청률을 내기도 했지만 보통은 5%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단막극이 아무리 시청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청률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게 달리는 드라마에서 시청률을 기대하는 것은 좀체 어렵다.

그래서인지 '단막극의 부활'이라는 이 슬로건은 공영방송의 명분 정도에 그치는 느낌이다. 단막극의 부활이 기성보다는 신인 작가들의 등용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무색하게, '드라마 스페셜'은 기성작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재기발랄하고 실험적인 스토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단막극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단거리 경기를 마라톤 중계 하듯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면 '런닝 구'라는 중편드라마는 장편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중요한 가능성을 몇 가지 보여주었다. 왜 단막극의 부활이라고 하면 늘 1회로 끝나는 단편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1회는 이미 길어진 호흡에 적응된 시청자들에게 드라마가 끝까지 달리기에는 너무나 짧아져버렸다. 이미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이 점점 장편화하는 추세라면, 그 취지를 살리면서 대중성도 어느 정도 살릴 수 있는 방법으로 왜 2부작이나 4부작 드라마들의 설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4부작이라고 하더라도, '런닝 구'가 가진 성취는 50부작 이상의 막장드라마들이 거둔 것보다 훨씬 크다. 그저 그런 자극적인 설정 몇 개면 늘 승리해온 장편드라마들의 패배를 모르는 허세보다, 이 작지만 죽을 힘을 다하는 드라마의 선전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끝까지 달리고 싶다"고 말하는 구대구의 진술이 이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드라마들의 항변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박지성의 팀플레이 정신과 공감의 힘

도대체 이게 뭘까. 달랑 공 하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일 뿐인데 전 세계가 들썩거린다. 공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실로 놀랍다. 공 한 개가 있고, 그 공을 차는 선수가 있으며, 그 선수를 둘러싼 팀과 팀이 있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그 공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선수들을 예의주시하는 수천 명의 관중이 있고, 카메라라는 시각의 확장을 매개해주는 매체가 전 세계인의 눈을 그 공 하나에 집중시킨다. 도대체 공 하나에 모두가 집중하게 되는 그 집단적인 힘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한국과 그리스전에서 박지성이 두 명의 그리스 선수를 제치고 골을 집어넣는 장면은 질리지가 않는다. 그 순간에 제 아무리 다른 환경에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있었다고 해도 그 마음은 똑같았을 것이다. 골을 몰고 들어갈 때의 그 기원 가득한 긴장감과 골을 찼을 때의 터질 듯한 심장박동, 그리고 골이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희열.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우리 모두는 한 덩어리가 되는 집단적인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가 타자와의 '완전한 공감'이라고 할 때 이 순간은 그 욕구가 충족되는 흔치않은 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흔히들 '공감'이라고 하면 우리는 문화적인 차원을 떠올린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웃거나 울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것이 공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공감은 그 한자(共感)가 그대로 말해주듯이 좀 더 감각적인 것이다. 누군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 내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이나,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누군가 들었을 때, 그 비슷한 감각을 느끼는 것 같은 감각적인 차원이 공감이다.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을 보기만 하더라도 뇌신경이 반응하며 그 감각을 느끼는(공명현상이라고 한다) 이른바 신경학에서 발견한 '거울 뉴런'의 존재는 '공감'의 매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준다. 따라서 거기 굴러다니는 것은 축구공 하나지만 그 공 하나로 인해 공감하는 이들은 전 세계인들이 된다. 그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존재이지만 공 하나로 똑같이 감각하게 된다. 집단적인 황홀감은 스포츠의 묘미이고, 거기에는 바로 이 공감의 매커니즘이 숨겨져 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실제로 기능하는 이 마법 같은 공감의 힘은 응원이 어째서 경기 결과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길 수 있다는 불굴의 의지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때, 그것은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까지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것은 경기장에서 팀을 이뤄 뛰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어떤 확신을 준다면 그 팀은 그 공감의 힘으로 경기를 잘 치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두려움에 가득하다면 그것은 고스란히 팀에 나쁜 영향으로 돌아간다.

박지성 선수의 자서전을 보면 히딩크 감독이 한국팀을 4강까지 가져갈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팀플레이 정신'을 자주 찾아낼 수 있다. 박지성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이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개개인이 아니라 팀이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 경기를 이길 수 있다고 자주 말해왔다. 히딩크 감독은 자주 경기를 뛰면서 전체 팀원들의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생각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차원으로 보면 일종의 '공감 훈련'인 셈이다. 11명의 선수가 제 각각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감각으로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면, 그 팀은 개개인의 역량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쉽게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히딩크가 강조했고 박지성이 자주 언급했던 한국팀의 힘은 바로 이 팀플레이라고 흔히 부르는 공감능력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축구는 공감의 스포츠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서로 공감하며 제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팀으로 달려야 승리할 수 있고, 그걸 바라보는 관중들은 자신들의 염원을 응원에 담아 선수들에게 보냄으로써 승리를 공감하려 애쓴다. 그러니 벌써 8년이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골이 터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한 그 이유를 알 것이다. 그 장면들은 다름 아닌 우리가 그토록 욕망하는 완전한 공감을 했던 인생에 흔치않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아르헨티나를 강팀이라고 한다. 그 팀에는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개인적 역량이 뛰어난 스타 선수들이 많다고 해서 그들을 강팀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됐다. 진정한 강팀은 각각의 선수들의 역량이 아니라, 하나의 팀이 마치 한 몸처럼 공감하며 움직일 때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면 우리 팀은 분명 강팀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면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승패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선수들과 똑같이 공감하는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 테니까.

막장의 시대를 그린 '김탁구'와 '자이언트', 막장이 아닌 이유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 가난과 비뚤어진 욕망들이 꿈틀대던 막장의 시대는 오히려 극적인 상황을 요하는 드라마로서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거기에는 빵 한 조각을 놓고 가족을 생각하는 눈물겨운 가족애가 있고, 살기 위해 길바닥에서 뭐든 해야 했던 그 처절함이 있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자본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벌어지는 여전한 신분의 차이가 주는 강력한 계급의식이 있다.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그 막장의 시대를 추억하는 드라마다.

막장의 시대를 추억한다고 해서 드라마가 막장인 것은 아니다. '제빵왕 김탁구'는 초반 '하녀' 컨셉트의 치정극처럼 시작했다. 거성가의 회장인 구일중(전광렬)이 보모이자 간호사인 김미순(전미선)과 하룻밤의 인연으로 김탁구(윤시윤)를 낳고, 반발하듯 구일중의 아내인 서인숙(전인화)이 비서실장인 한승재(정성모)와 불륜을 통해 낳은 아이, 마준(주원)을 구일중의 아이처럼 숨기며 키운다. 거기에 한승재가 마준을 거성가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김탁구와 김미순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파에 치정극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그런 막장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는 것은 그 속도감 때문이다. 이런 신파적인 요소나 치정극적인 요소들을 이 드라마는 하나의 자극적인 요소로 끄집어냈다가 재빠르게 정리해버린다. 김탁구가 구일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겼다면 출생의 비밀 코드로 넘어갈 텐데, 이 드라마는 일찍부터 이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자 이야기는 김탁구와 마준을 전면에 세운 대결구도의 드라마로 흘러간다. 선악구도는 아니지만,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대결구도 속에서 행복을 묻는 이 드라마의 메시지는 실로 건전하다. 막장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제빵왕 김탁구'가 막장의 시대의 이야기를 가족사적인 틀에서 풀어냈다면, '자이언트'는 좀 더 시대적인 틀에서 이 시대를 다루고 있다. 7,80년대라면 으레 떠오르게 마련인 그 군사정권 시절의 무법천지는, 이 드라마를 시대의 모험극으로 만들어낸다. 뭐 하나 상식적이지 않은 막장의 시대 위에서 가족애와 인간애를 품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 드라마는 묻는다. 성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조필연(정보석)이 당대 군부시절의 사생아를 대변한다면, 맨 주먹으로 성공의 길을 열어내는 황태섭(이덕화)은 당대 사업가의 비뚤어진 초상을 대변한다.

그 시대 속에서 이강모(여진구)의 가족은 풍지박산이 난다. 가난하지만 단란했던 가족의 붕괴.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고 형과 동생들을 모두 잃어버린 이 불행한 강모의 가족사는 이 막장의 시대가 만들어낸 아픔을 표상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 뿔뿔이 흩어놓은 가족이 다시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 가족으로 뭉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형태는 시대극이고 그 속에 강력한 가족극이 숨겨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자이언트'는 시대극이면서도 지극히 사극이 갖는 극적 재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를 그저 국책성 드라마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주인공만이 아닌 모든 인물들이 처한 상황들을 극적으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대결구도의 양상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강모의 성장담에 집중하는 만큼, 그 적이라 할 수 있는 조필연의 성장담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제빵왕 김탁구'나 '자이언트'가 모두 '눈물 젖은 빵'의 시대를 그려내는 것은 아마도 그 막장의 시대가 가진 극적인 요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수하게 되는 그 시대의 공기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로 들어가면 상황은 막장이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정의롭게 살아남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의 행복을 말해주는가 이 드라마들이 던지고 있는 메시지다. 막장의 시대를 다루는 '제빵왕 김탁구'와 '자이언트'가 막장의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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