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와 버려진 신발, 그리고 서민들

어느 동네나 유명한 바보 한 명쯤은 있게 마련. 그 바보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나. 그냥 그런 존재는 없는 것처럼 지나쳐버렸던가. 너무 더러운 그 모습에 벌레 쳐다보듯 피했던가. 혹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던가. 대부분은 이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혹스럽게도 당신이 지나치거나 벌레 보듯 도망쳤던 바로 그 바보가 주인공이다.

신발을 닮아버린 바보, 승룡이
영화 ‘바보’의 바보, 승룡이(차태현)는 늘 맨발이다. 그 맨발을 지켜주던 낡은 신발이 있지만 칠칠치 못하게 늘 잃어버리고 만다. 구멍난 낡은 신발은 바로 바보 승룡이 자신을 닮았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마저 바보가 되었으며, 그런 바보에게 어머니는 동생마저 맡기고 떠나지만 정작 승룡이는 웃을 뿐이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세상의 더러움을 막아주고 소중한 발을 보호해주면서도 늘 버려지는 신발처럼.

바보는 늘 버려져왔다. 부모에게서 버려졌고(물론 부모는 승룡이를 버리지 않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승룡이 혼자 남겨졌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돌봐주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동생 지인이(박하선)에게도 버려졌다. 영화가 굳이 그걸 보여주진 않지만 가족이 이럴진대 타인은 오죽할까. 그런데 이 버려진 바보, 버려진 신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어릴 적 친구였던 지호(하지원)와 상수(박희순)다. 지호(하지원)는 바보와의 재회에서 버려진 승룡이의 신발을 주워온다. 의사인 지호의 아버지는 승룡이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늘 찾아와 문진을 해준다. 자신이 태워먹은 학교 피아노 때문에 대신 누명을 쓰고 학교를 떠난 승룡이에게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수(박희순)는 늘 바보 곁을 맴돌고 기꺼이 자신의 신장을 승룡이의 동생에게 떼어준다. 그들은 바보의 맨발 같은 삶에 신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길거리에 버려진 더럽고 낡은 신발 같은 바보 승룡이의 마음이다. 바보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 즉 덜떨어졌다는 부정적 의미와 착하다는 긍정적 의미는 작품에 의해 주목된 승룡이를 통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어 나간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하며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는 바보의 위대성이다.

모든 이들을 위해 웃으며 선택하는 바보의 죽음은 마치 예수의 희생을 연상케 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지호는 비로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고, 상수와 희영(박그리나)은 술집생활을 청산하고 각각 토스트 가게와 은행안내원을 하게 되며, 동생 지인(박하선)은 새 생명을 얻게된다.

진심을 전하는 반복의 힘
영화가 바로 이 바보가 가진 진심의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것은 어눌하지만 반복되는 진술과 장면들을 통해서다. 바보는 많은 어휘를 알지 못하지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그 말의 무게를 더한다. 상수에게 “동생을 돌봐달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할 때, 처음에는 지나쳤던 것이 차츰 정색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영화는 이런 반복의 문법을 통해 관객에게 진심을 말한다. 이것은 강풀의 만화가 가진 장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강풀은 여러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마디의 반복되는 말로 전하는 말의 힘을 아는 작가다.

학교에서 아픈 동생을 업고 가려는 바보를 막아서며 당신 누구냐고 묻는 선생에게 “얘는 제 동생이구요, 저는 지인이 오빠 승룡이에요”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마지막에 와서 바보의 사망신고를 하러 온 지인이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반복해서 “이 사람은 제 오빠구요. 저는 이 사람 동생이에요”라는 화답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의 힘은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고물상 아저씨의 승룡이네 집으로 신발을 던지는 장면의 반복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인상적이다.

버려진 신발을 계속해서 주워와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고물상 아저씨와, 지인이의 반복된 진술은 모두 타인으로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행동까지를 요구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제 더럽고 비천하며 어딘가 덜떨어진 사람으로서만 치부하던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선입견은 이 즈음에 와서는 나의 오빠이자 나의 동생, 친구, 가족 같은 일이 되어버린다. 지인의 대사와 고물상 아저씨의 장면은 세상에 버려진 나와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비천한 사람들의 죽음이 사실은 바로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바보에게 빚진 당신의 삶
‘바보’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진짜 육체적인 장애를 겪는 바보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매일 매일이 힘겹지만 불평 없이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바보들을 위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힘없고 가난하며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층적 차별의식에 차별 당하면서도 늘 이 땅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들었던 우리네 착한 서민들을 닮았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숨쉬며 버젓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바보들, 승룡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영화는 바로 우리가 삶을 빚진 그들에 대한 채무의식을 승룡이라는 인물을 통해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승룡이가 하는 일거수 일투족은 거꾸로 우리가 승룡이에게 저지른 그 죄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 버려진 수많은 낡은 신발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항변도 없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고는 버려진 그 신발들을 귀하게 주워서 주인에게 던져주는 영화 속 고물상 아저씨의 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 그 버려진 것들에게 빚진 바가 크기 때문이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728x90
반응형

공식에 빠진 주말극, 남은 건 작가색

먼저 서로 다른 집안환경에서 자라난 남녀가 있다. 그런데 그들은 집안환경과 상관없이 서로를 사랑한다. 밖에서 연애를 할 때야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나이가 되자 문제는 복잡해진다. 결혼을 앞두자 남자 혹은 여자는 그동안 상대방에게 속여왔던 자신이 부자임이 드러나거나, 스스로 그 사실을 밝히게 된다. 공교로운 것은 대체로 그 부잣집 자제는 상대방이 다니는 회사의 회장 자제라는 점이다. 부유한 집안 부모는 결혼을 반대하고 결국 그 반대에 모멸감을 느끼던 한 쪽은 회사를 그만두거나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혹은 그 반대의 결정을 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위에 적어놓은 스토리는 지금 현재 주말 드라마로 인기를 얻고 있는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와 김정수 작가의 ‘행복합니다’가 똑같이 가진 이야기 구조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기 때문인지 어떨 때는 같은 날 방영하는 드라마의 내용이 거의 같게 맞아떨어질 때도 있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고은아(장미희)가 스스로 대사 속에서 “드라마에 나오는 편견에 가득 찬 교양 없는 시어머니 역할 하기 싫어”라며 밝힌 것처럼 그 장면은 드라마라면 어디에나 한번쯤 등장하는 시퀀스가 되어버렸다. 고은아는 자신의 대사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연인인 영미(이유리)를 불러서 모멸감을 준다. 같은 날 방영된 ‘행복합니다’에서도 역시 같은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재벌집 사모님인 이세영(이휘향)은 딸과 결혼하려는 이준수(이훈)를 불러 얼굴에 물을 끼얹는다. 다른 것이라곤 시어머니가 장모로, 그리고 며느리가 사위로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이 두 부유층의 사모님들은 모두 자신의 딸 혹은 아들이 격에 맞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기를 원한다. 이 두 드라마는 서민들의 시선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서민적인 주인공을 데려다가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거나 물을 끼얹는 장면은 자못 자극적이다. 그것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의 얼굴에다 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준다.

이렇게 한 차례씩 당한 주인공들은 저마다 회사를 그만둔다. 그 회사의 회장 자제로 있는 상대방과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 역시 ‘엄마가 뿔났다’와 ‘행복합니다’에서 같은 날 방영되었다. 이 정도 되면 주말 가족극의 패턴은 이미 공식화되어버렸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만일 이 두 드라마를 모두 즐기는 시청자라면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같은 날 반복적으로 시청한 셈이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공식화된 이야기가 식상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두 드라마는 저마다 색깔이 다른 느낌마저 주면서 번갈아 볼 때 역할 바꾸기(남자와 여자의)의 재미까지 선사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여성의 시선을 통해 계층 갈등의 묘미를 본다면, ‘행복합니다’는 남성의 시선을 통해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게임 같다. 공식화된 틀 속에서 다른 캐릭터들을 갖고 한 시간 동안 즐기는 게임.

이 공식화된 구조의 두 드라마가 주는 진짜 재미는 작가에게서 나온다. ‘엄마가 뿔났다’는 김수현 작가가 주는 속도감 있는 대사들의 잔치와 자잘한 일상의 디테일들을 통해 재미를 주고, 김정수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구성에 작가 특유의 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묘미를 더한다. 만일 이 두 대작가들의 색채가 없었다면 이 두 주말 드라마는 자기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유사한 구조의 스토리를 가지고도 비슷한 높은 시청률을 모두 거두고 있다는 점은 지금 우리가 주말 드라마를 통해 얻는 재미가 독특한 소재나 색다른 시각 혹은 주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우리는 똑같은 구조를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내느냐는 ‘이야기꾼’의 그 이야기 능력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재미있는 두 거장의 이야기 풀어내는 능력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은. 이 거장들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는, 삶이란 결국 그렇게 독특하고 색다른 무엇이 아니라 다 같은 구조 위에 있지만 그 위에서의 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728x90
반응형

국민 마스코트된 상근이, 그 명과 암

평범한 개에서 어느 날 불쑥 이름이 뜨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근이. ‘1박2일’의 마스코트였던 상근이는 이제 국민 마스코트가 되어가고 있다. ‘하룻밤 자고 났더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근이에 대한 관심은 갑작스레 커졌고, 그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월수입은 얼마나 되며 나이는 몇이고 결혼(?)은 했는지 같은 사생활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라디오 방송 출연에 발로 찍어서 하는 팬 사인회, 게다가 피겨스타 김연아와의 만남까지 상근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평범한 개로서는 상상도 못할 호사처럼 보인다. 벌써부터 연예기획사가 나서서 상근이를 매니지먼트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니 그 관심은 같은 프로그램 출연자들마저 부러울 정도가 아닐까.

상근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제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국민견이 되었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상근이도 우리가 생각하듯 스타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먼저 상근이가 어떻게 이런 국민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뜬금 없는 질문을 던져보자. 상근이와 한때 3D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던 아담 같은 사이버스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떠오르는 건 둘 다 독특한 캐릭터로 주목받았다는 점이다. 캐릭터 비즈니스에서는 심지어 괴물까지 캐릭터로 활용할 정도인데, 여기서 말하는 ‘독특한 캐릭터’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 이상의 대우를 받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상근이는 은초딩(은지원)과의 대립구도를 통해 확고하게 캐릭터를 세웠다. 그것은 먼저 거대한 상근이, 작은 은초딩이라는 외관의 대비가 각자의 캐릭터를 강화시켰다. 상근이 옆에 서면 은초딩은 더 작아서 진짜 초딩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고, 반대로 상근이는 더 큰 존재처럼 보인다. 이러한 외관에 인간과 개의 대결구도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초등학생 같은 사고방식으로 상근이를 갖고 놀려는 은초딩의 모습과 이를 귀찮아하는 어른스러운 상근이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때론 자신의 말을 듣다가도 상근이에게 번번이 당하는 은초딩은 누가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개와 그런 승부를 겨루고 있다는 점 자체가 각각의 캐릭터를 강화하는 장치가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진짜 사람이름처럼 친근한 이름을 가진 상근이의 캐릭터가 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상근이가 보여준 캐릭터가 아니라 연출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이다. 이것은 저 사이버 스타들의 그것처럼 부여된 것일 뿐,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다. 사이버 스타야 생명체가 아니기에 문제는 없지만, 상근이의 경우는 다르다. 인간은 아니지만 상근이는 엄연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을 못하기에 항변조차 하기 힘는 생명체.

‘1박2일’, ‘아현동 마님’에 겹치기 출연을 하면서 모 광고CF도 찍고, 팬 사인회까지 하러 다니는 등의 바쁜 나날은 상근이가 원하지 않는 삶일 수도 있다. 그것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상근이를 통해 대리충족을 하려는 욕구로 인해 인격을 부여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근이를 그저 자연으로 돌려보내자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상근이를 통해 얻은 행복만큼 좀더 상근이 입장에서의 행복을 고려하자는 말이다. 자칫 상혼에 찌든 비정한 연예비즈니스의 세계 속에 빠져 행복한 개가 아니라, 불행한 인간화된 개로 살아가지 않게 하자는 이야기다. 상근이는 다른 개들보다 좀더 행복한 개 정도로 살아가야 한다.

728x90
반응형

'뉴하트' 같은 의드를 유독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정도의 아이템을 가지고 이정도의 결말로 달려간 '뉴하트'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사실 의드는 이제 어느 정도 정착된 장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하얀거탑' 이전의 의드들은 이른바 '무늬만 의사'라는 비아냥이 많았죠. 이유는 병원의 디테일들은 없고 병원을 배경으로 한 멜로가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이후 우리네 의드는 한단계 발전했다고 보여집니다. 거기에는 이미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미드에 매료당한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과 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이런 비판적인 시선은 늘 새로운 시도의 밑거름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뉴하트'가 처음 시작할 때 저는 이 심장이라는 소재에서 세가지 포인트를 생각했습니다.

‘뉴하트’, 세 가지 심장 살릴까
네모난 세상/명랑TV 2008/01/18 00:46 Posted by 더키앙

그 첫째는 장르적인 심장, 즉 흉부외과라는 현실적인 디테일이었죠. 이것이 제대로 그려진다면 장르 드라마의 기본을 충족시킬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뉴하트'는 초반부 이 흉부외과의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과이지만 그 어려움 때문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현실, 막상 그 과에 있다 하더라도 거의 병원에서 생활하며 개인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금전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 등등이 최강국 교수와 이은성, 남혜석의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습니다. 의학적인 장면들의 디테일? 이제는 거의 기본이 되었죠. 실제 의사의 도움을 받으니 이만큼 리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현실적인 문제들은 후반부로 가면서 이은성의 학벌 파벌 문제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또한 현실적이라는 면에서 괜찮은 접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두번째 심장은 인간애, 즉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최강국이라는 의사를 생각하면 단박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죠. 최강국은 말 그대로 환자만을 생각하는 의사였죠. 초반부 흉부외과의 현실이 배경으로 제시되고 그 현실 속에서도 의사가 버틸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환자가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고 있었죠. 최강국은 실로 이런 의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화된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세번째 심장은 다름 아닌 하트, 즉 사랑이었습니다.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멜로라인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저 '그레이 아나토미'나 '외과의사 봉달희'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디테일이 살아서 병원 환경과 맞아떨어졌을 때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멜로는 비판이 아닌 환호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멜로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중간부터 갑자기 시작된 이은성과 남혜석의 사랑은 좀 갑작스런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후로 급물결을 탄 이 둘의 멜로는 차츰 그 불길을 병원 전체로 퍼뜨렸고, 그러자 병원 의사들은 전부 사랑에 몸살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 세 심장의 봉합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면 '뉴하트'는 제목처럼 의드의 새로운 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뉴하트'는 장르적인 재미 그 자체만을 추구했지 무언가 새로운 의드의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외과의사 봉달희', '그레이 아나토미'식의 멜로와 '하얀거탑'의 병원내 권력다툼이 모두 등장했지만 이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지는 않았고 그저 각각의 나열식 에피소드로 흘러갔습니다.

마지막회는 바로 이런 나열된 에피소드가 가진 파편성을 급히 봉합하는 것이었죠. 마지막회 초반 15분 정도가 이 병원 의사들의 멜로 이야기로 채워지고 사회적 이야기로 확장되지 못하는 이야기는 의사 개인의 사생활로 파고들었습니다. 즉 내가 혹은 내 주변의 사람이 환자라면 하는 가정으로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의사의 모습으로 결론을 지었죠. 급히 1년 후로 지나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1년 동안의 변화 과정이 더 궁금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병원은 시스템이 바뀌었고, 멜로 라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결론이 아닌 과정이 궁금했지만, 마지막 한 회가 남은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이 보여주지 않음으로 해서 기대충만해 시작한 드라마가 멜로로 봉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즌 2를 요구하고 싶은 심정은 '뉴하트'가 그만큼 잘된 드라마였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함이 많아서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이 남은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의드가 나왔을 때 '뉴하트'가 줄 의드에 대한 선입견은 어떤 것이 될까요. 여전히 기대감만일까요? 아니면 또 비슷한 코드들의 봉합일뿐인가 하는 의구심일까요? 여러모로 아쉬운 의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매력적인 ‘뉴하트’, 왜 의드의 새 심장 못됐나
네모난 세상/명랑TV 2008/02/29 00:09 Posted by 더키앙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