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대비를 아는 배우, 주지훈의 여러 가지 얼굴

조명가게

“그 아저씨가 세상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지.”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에서 간호사 영지(박보영)는 원영(주지훈)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원영은 암흑뿐인 사후세계에 유일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조명가게 주인이다. 빛이 너무 눈부시다는 핑계로 늘 선그라스를 끼고 있지만 사실 그건 의식을 잃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배회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고양이 같은 눈빛을 가졌다)을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선글라스의 용도는 정체를 숨기는 것만이 아니다. 눈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속내를 숨기는 것도 그 중요한 용도다. 원영은 그 곳이 사후세계인지도 모른 채 조명가게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도 또 속내도 숨기려 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 곳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의식을 잃고 사후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다시 의식을 되찾고 돌아갔을 때 기억의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영지가 원영에 대해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다고 말한 건 그런 이유다.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한 이 배역에 주지훈만한 연기자는 없어 보인다. 주지훈은 지금껏 해왔던 연기들 속에서 무표정을 통해 표정을 극대화하는 연기를 줄곧 선보여온 배우다. 예를 들어 ‘마왕’ 같은 작품에서는 복수를 꿈꾸는 오승하라는 인물이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그가 가끔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면 마치 악마 같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킹덤’에서도 왕세자지만 후궁에서 난 서자로서 계비의 위협을 받으며 각성하는 그 변화 과정을 주지훈은 무표정에서 시작해 생존하기 위해 점점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 바 있다. ‘지배종’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폭발사고로 병사들을 잃고 사건을 추적하는 우채운이라는 인물을 속내를 알 수 없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연기해냄으로써 그 속내가 드러날 때의 반전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런 면모는 멜로 연기에도 똑같이 드러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같은 설정을 가진 드라마다. 석지원(주지훈)과 윤지원(정유미)은 그 집안이 원수지간이다. 두 사람 역시 학창시절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왔고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됐지만 사소한 오해로 관계가 틀어지면서 애증이 싹텄다. 그리고 1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이사장과 체육교사의 관계로 다시 만나면서 그 관계가 이어진다. 어찌 보면 뻔한 구도지만, 이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석지원과 윤지원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다. “나랑 연애합시다. 라일락 꽃 피면.” 이런 내기를 석지원이 툭 던지는 내면에는 진짜 다시 윤지원과 연애 하고픈 마음이 숨겨져 있지만, 그는 겉으로는 마치 내기에서 윤지원을 이기고픈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렇게 속내를 숨기다가 결국 석지원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을 윤지원에게 고백한다. “우리 그만합시다. 난 안되겠어. 그러니까 이딴 내기 집어치우고 나랑 진짜 연애하자. 윤지원.” 반듯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무표정을 하고 있던 이가 어느 순간 감정을 툭 드러내며 표정을 보여줄 때 전해지는 효과를 주지훈만큼 잘 알고 있는 배우는 없다. 

 

‘하이에나’ 같은 법정물에서도 주지훈은 윤희재라는 변호사 역할로 경쟁 관계에 있는 변호사 정금자(김혜수)와 대립 구도를 만들며 매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스펙 없이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금자에게 서서히 마음이 움직이고 그래서 그녀의 편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무표정에서 시작해 으르렁거리다가 멜로의 눈으로 바뀌어가는 주지훈의 얼굴이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효과를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의 반전은 여러모로 모델로 시작한 그의 필모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옷을 강조해야 하는 모델들의 경우, 얼굴 표정은 최대한 절제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간간히 드러내는 표정은 오히려 그 전달하는 감정을 더 극대화시킨다는 걸 모델에서 연기자로 넘어오며 그는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주지훈의 이런 연기적 면모는 한 작품 안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일련의 작품 선택 과정을 보면 익숙한 얼굴이 전혀 다른 배역을 차기작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반전효과를 내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궁’으로 주목받으며 주로 멜로 연기를 해왔던 주지훈은 ‘마왕’ 같은 스릴러로 진지하고 무거운 얼굴을 보여줬다. 또 ‘신과 함께’ 같은 영화를 통해서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더니 ‘암수살인’에서는 살벌한 희대의 살인마를 연기했다. 선과 악,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배역 선택은 그래서 매번 ‘같은 배우 맞아’라는 반응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조명가게’는 그래서 주지훈이라는 배우의 특징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으로 보인다. 그건 어둠과 빛의 대비를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조명가게’에서 원영 역시 어둠 같은 무뚝뚝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빛의 따뜻함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아파트 붕괴 사고로 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던 이 인물은 딸을 살리는 대가로 사후세계의 조명가게를 맡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조명가게를 찾아온 딸을 우연히 만나는 순간, 드디어 선글라스로 가렸던 그의 감정이 폭발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하는 이들을 위해 조명가게를 맡아온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마치 그 곳을 찾는 이들을 딸처럼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그 순간 드러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게 무표정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치 기계처럼 단조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감정이 밖으로 드러날 때 생겨나는 인간의 증명. 그건 어쩌면 건조한 현대사회를 촉촉하게 해주는 희망 같은 것이 아닐까. 주지훈의 연기는 바로 그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 오히려 더 빛나는 백열전구가 주는 희망을.(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조명가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의 상상력은 거기서부터 시작했을 게다. 사고로 인해 의식을 잃었지만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버텨내는 환자들. 그들은 무의식 속에서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동네를 배회한다. 그 곳에는 유일하게 밤새도록 환하게 빛을 내는 조명가게가 있다. 낯선 동네를 배회하는 낯선 사람들의 발길은 저마다의 이유로 그 조명가게를 향한다. 

 

어두운 동네를 배회하는 낯선 이들의 모습은 오싹한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누군가는 손톱이 손가락 안쪽에 붙어 있고, 누군가는 어두운 골목길에 갇혀 있으며, 누군가는 집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누군가는 밤새도록 짖어대는 개를 찾아 죽이겠다며 쫓아다니고. 누군가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온몸이 젖은 채 배회하는 이들을 찾아다닌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이고 이 곳은 어디인가. 8부작 ‘조명가게’는 4부까지 낯선 동네와 낯선 이들의 수상한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공포물의 형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4부 말미에 이르러 이들이 중환자들이었고, 이 낯선 동네가 이들이 무의식 속에서 가게 된 사후세계라는 게 밝혀지면서 이 공포의 존재들은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변모한다. 공포물은 휴먼드라마로 바뀐다.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사이의 사연이 펼쳐지고, 죽은 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들을 삶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눈물 겨운 안간힘이 그려진다. 그 어두운 동네를 지키는 조명가게에서 꺼질 듯 꺼지지 않고 가녀린 빛을 내는 전구들은 알고 보니 사후세계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죽지 않은 이들의 꺼지지 않는 삶의 빛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혹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삶의 빛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이들이 사후세계에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조명가게’는 바로 사후세계를 경험한 이들의 이른바 ‘임사체험’을 소재로 가져온 작품이다. 무수한 임사체험의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들, 이를 테면 누군가 나타나 돌아가라고 했다거나 혹은 밝은 빛을 봤다는 식의 신비로운 경험들을 강풀은 조명가게가 있는 낯선 동네라는 세게관으로 그려낸다. 공포물로 시작하던 작품이 휴먼드라마로 바뀌는 건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아닌가.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상황이 공포물의 전형을 그려낸다면, 그들이 죽음을 깨치고 나와 삶의 빛에 도달하는 과정은 눈물 겨운 휴먼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다. 

 

강풀이 임사체험이라는 신비한 이야기 속에 화두처럼 던진 질문은 어떻게 의식도 없는 환자가 어떤 의지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돌아오기도 하지만, 강풀은 거기에 환자만의 의지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있었다고 상상한다. 어떻게든 딸을 되살리려는 엄마의 안간힘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삶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눈물겨운 이별을 감수하는 이가 있었으며, 죽을 때까지 주인을 살리려 자신의 체온을 나눠준 반려견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었지만 그 낯선 사후세계의 어둠 속에서 배회하던 환자들을 조명가게의 빛으로 인도해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사후세계를 배회하던 환자들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게 된 데는 영지(박보영) 같은 간호사의 의지도 한 몫을 차지했다. 자신 역시 사고로 사후세계를 경험했던 영지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음악을 들려주고 평소 좋아했던 농구공을 환자 옆에 놔준다. 

 

‘조명가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하는 존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물의 양상을 담지만, 그들을 이해하게 되자 그 공포는 절절한 감동과 공감을 담은 휴먼드라마가 된다. 삶과 죽음을 별개로 보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며, 죽은 자들의 사연을 들으려는 태도는 한국형 공포물들이 자주 보이던 특징 중 하나다. 아랑전설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귀신들은 저마다 아픈 사연들이 있어 원귀로 나타나지만 그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비로소 편안히 떠나지 않던가. ‘무빙’으로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전형을 그려냈던 강풀은 ‘조명가게’로 휴먼드라마의 성격을 갖는 한국형 공포물의 전형을 그려냈다.(글:일간스포츠, 사진:디즈니+)

K콘텐츠에 투영된 K시민의 비판의식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탄핵 정국까지, 거꾸로 갈 것 같던 시간을 다시 현재로 되돌린 건 다름 아닌 시민들이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 과정들을 보다보면, 새삼 K콘텐츠의 진면목이 바로 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비판의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서울의 봄

비상계엄 사태를 ‘현실판 디스토피아’라 보도한 외신

지난 3일 갑작스런 비상계엄 선포와 그 해제 과정에 대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K팝과 독재자들:민주주의에 가해진 충격이 한국의 양면을 드러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 기사는 한국이 최근 한류 열풍을 통해 ‘문화적 거물’이 됐지만 갑자기 터진 계엄사태로 ‘현실판 디스토피아’가 생겨났다고 했다. 계엄 선포와 해제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고, 이를 막으려는 계엄군들이 군용 헬기를 타고 내려와 창을 깨고 국회로 난입하는 장면을 꼬집은 것이다. 실제로 그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콘텐츠의 한 부분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실시간으로 보도되던 그 과정을 바라본 시민들은 80년 서울 한 복판에 등장했던 탱크를 떠올렸지만, 그것이 2024년 현재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에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이 정도였으니, 이를 접한 외신들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국가적 위상과 이미지가 훼손됐다는 비판이 나왔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게다가 그 시점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순간이었고 이제 ‘오징어게임2’의 공개를 앞두고 전 세계의 관심이 다시 한국에 쏠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문화적 자긍심이 한껏 고조되는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사태는 단 몇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국회가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선언했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어진 후폭풍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저마다 응원봉을 하나씩 들고 국회 앞에 모여 대통령 탄핵안 통과를 독려하는 집회를 열었다. 국민의 힘 의원들이 투표에 참여조차 하지 않아 통과되지 못했던 탄핵안은 또다시 국회에 상정됐고 두 번째 투표를 통해 통과됐다. 그 광경 또한 드라마틱했다. ‘현실판 디스토피아’라고 외신이 보도했지만 그건 그저 절망적인 분위기만 가득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희망의 불씨 같은 게 담긴 드라마였는데, 그 주인공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다시 보이는 K콘텐츠의 진면목, 비판의식

외신들은 K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광에 국가적 자긍심이 높은 한국이 이번 사태를 통해 심각한 평판의 타격을 입었다고 전하기도 했지만, 잘 들여다 보면 이번 사태는 K콘텐츠의 힘이 어디서 비롯됐는가를 정확히 알려준 것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해외에서 주목받은 K콘텐츠들은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들을 꼬집거나 비판하는 작품들이었다. 외신이 ‘디스토피아’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K콘텐츠에 투영된 한국 사회는 어두운 터널 안에 들어 있었다. 

 

곧 시즌2가 나올 ‘오징어게임’이 그려낸 디스토피아는 치열한 경쟁이 내면화된 계급사회였다. 약자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그 치열함과 처절함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그것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기생충’은 어떤가. 지상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라는 공간으로 구획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 한국을 이른바 K좀비의 종주국으로 만든 무수한 한국형 좀비물들도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모순되고 부조리한 시스템들을 비판한 것들이었다. ‘킹덤’이 조선사회를 빗대 권력에 굶주려 좀비가 된 지배층과 배고픔에 굶주려 좀비가 된 서민들을 비교했다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한국의 입시경쟁이 만들어내는 몰개성화되어 엇나가기도 하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았다. ‘부산행’은 KTX에 창궐한 좀비들과의 사투를 통해서 압축성장한 한국사회가 마주한 위기들을 디스토피아로 그려내지 않았던가.  

 

즉 K콘텐츠가 가진 진짜 힘은 바로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은 우리만이 아닌 자본화된 현대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 세계적인 공감이 생겨났다. K콘텐츠가 글로벌한 각광을 받게 된 이유였다. 이렇게 된 데는 한국사회가 전쟁 후 짧은 기간 안에 압축성장해오며 겪은 일들이 사실상 자본화 단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을 포함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빠른 성장을 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문제들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의식들이 K콘텐츠의 자양분이 됐던 거였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시민들이 그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며 국회로 달려갈 수 있었던 데는 K콘텐츠가 그려내곤 했던 디스토피아의 양상들을 통해 이 사태가 야기할 문제들을 즉각적으로 실감한 부분도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서울의 봄’이 주목받게 된 건

작년 방영되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영화 ‘서울의 봄’은 이번 계엄 사태를 통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79년 12월12일에 버러진 군사 반란을 소재로 긴박하게 돌아간 7시간의 기록을 담은 이 영화는 시민들에게 중요한 교육적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도 이 영화를 통해 당대의 계엄 사태를 눈앞에서 생생히 경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을 ‘2024년판 서울의 봄’이라고 칭하며 재개봉을 추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또 ‘서울의 봄’을 패러디한 ‘서울의 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의 작품이 그 시대의 어둠을 치열하게 담아냄으로써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서울의 봄’은 이번 사태를 통해 보여줬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10월 공개됐던 김상만 감독의 영화 ‘전,란’도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재조명됐다. 임진왜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각각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이 되어 서로 칼을 겨누게 되는 상황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왕의 무능이 어떻게 민란으로까지 이어지는가를 그려냈다. 전쟁으로 피폐된 상황에서도 궁궐을 짓는데만 혈안인 왕의 실정으로 결국 봉기하는 민초들의 모습은 현재의 탄핵 정국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이어진 탄핵정국이라는 일련의 사태들이 보여준 건 몇몇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위기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시민의식이 한국사회가 가진 희망이라는 점이다. 여의도 집회 현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저마다 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한 마음이 되어 한 목소리를 내는 광경은 바로 그걸 상징하는 장면들이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틱한 장면들 속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K콘텐츠들의 잔상들은 이 작품들이 본래 시민들이 가진 건정한 비판의식들을 담고 있었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K콘텐츠는 바로 이 높은 시민의식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시대적 갈증들을 담아내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던 거였다. 

 

혹자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언젠가는 K콘텐츠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비현실적으로 여겨질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재연과 재구성을 통한 비판과 문제의식의 공유는 K콘텐츠에도 또 한국사회에도 희망을 갖게 하는 토양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시사저널, 사진:영화'서울의 봄')

소녀시대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거리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이건 콘서트나 축제의 현장이 아니다.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시위 현장이다. 아마도 소녀시대는 자신들이 부른 노래가 시위 현장에서 우려퍼질 줄은 몰랐을 게다. 그것도 응원봉과 함께라니. 

 

이번 시위가 펼쳐진 광장에서는 다양한 K팝이 울려퍼졌다. 물론 여전히 ‘아침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80년대 광장에서 울려퍼졌던 민중가요들도 빠지지 않았지만, 그 사이 사이를 에스파의 ‘슈퍼노바’나 로제의 ‘아파트’, 샤이니의 ‘링딩동’,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 같은 K팝들이 채웠다. 응원봉도 저마다 가지각색이었다. 특정 아티스트를 응원하던 응원봉이 시위 현장을 색색으로 물들였다. 과거 촛불 시위에서 똑같은 촛불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횃불이 되던 풍경을 떠올려보면, 색색의 응원봉과 LED 촛불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색깔은 시위문화에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흥미로운 광장의 변화는 외신들도 주목했다. 로이터 통신은 ‘K팝 야광 응원봉이 한국의 탄핵 시위에서 불타오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응원봉이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 통신도 ‘K팝 응원봉이 한국의 시위 참가자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서울의 경관은 K팝과 정치가 결합한 화려한 디스플레이로 변했다”며 “K팝의 밝은 분위기가 정치적 혼란상을 가려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위 참가자들이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들어간 축제의 북적임을 보여주면서도 질서정연했다”며 “차세대형 민주주의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광장의 진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진 걸까. 

 

본래 광장은 시민들의 것이었다. 민초들이 모여 권력의 비리를 꼬집고 그 아픔을 토로하며 또 공감하던 공간은 다름 아닌 마당에서부터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독재 권력이 등장했던 80년대에는 광장의 헤게모니 싸움이 치열했다. 신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쥔 전두환 정권이 여의도에서 ‘국풍81’을 대대적으로 벌인 건, 시민들의 광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독재정권은 87년 6월 광화문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에 의해 무너졌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의 폭력적인 진압이 이뤄지던 당대의 광장의 풍경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노래들이 당대의 광장에는 울려퍼졌다. 

 

그토록 비장했던 광장의 풍경이 2002년 월드컵 시즌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물결은 과거 광장과 밀실의 시대가 가진 트라우마를 밀어내는 듯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레드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붉은 물결이 하나의 축제로 광장을 물들였기 때문이다. 그 광장에서 윤도현은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고, 시민들은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우리 팀을 응원했다. 한 목소리의 응원은 월드컵 4강 진출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캐치프레이즈를 현실화시켰다. 시민들이 한 자리에 모인 축제의 광장이었다. 

 

2016년 탄핵을 부르짖으며 광화문 광장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었다. 시국이 불러일으킨 진지함이 있었지만, 이 때의 광장 문화는 87년의 그것도 또 2002년의 그것도 아닌 새로운 것이었다. 마치 87년과 2002년을 합쳐 놓은 듯한 광장의 풍경이랄까. 무려 190만 명이 운집했지만 분위기는 투쟁이 아니라 촛불이 상징하듯 차분한 공감과 기원에 가까웠다. 심지어 전경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시민들의 성숙한 모습들이 등장했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승환과 전인권 그리고 양희은 같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 와중에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한 여권 정치인의 발언은 아날로그 초가 LED초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바람이 불어도 절대 꺼지지 않는 촛불이 등장한 것이다. 

 

2024년의 광장은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진화해온 시위 문화가 또 한 차례 진화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은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가치가 투영된 광장이었다. 민중가요와 더불어 K팝이 울려퍼지게 됐다는 건, 광장을 찾은 세대가 얼마나 다양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거기에는 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거친 세대들도 있었지만, 그걸 겪어보지 못했던 2,30대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 세대를 대변하는 노래들이 다양하게 울려퍼졌고, 그들의 문화 또한 한 자리에서 어우러지는 양상을 보였다. 민중가요나 민주화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당대의 세대들을 이해하는 시간이 됐고, 거꾸로 기성세대들은 요즘 세대들이 즐겨듣는 K팝을 함께 흥얼거리며 그 팬덤 문화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광장의 시위 문화를 바꾼 중요한 요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디지털 기술’이다. 시위 현장을 응원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현장 근처의 카페에 송금 결제를 통해 시민들에게 커피를 나눠주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아티스트들은 응원봉을 들고 나온 팬들을 위해 핫팩을 주문해 보내주기도 했고,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시민들은 후원금을 소액 결제하는 방식으로 보태기도 했다. 아날로그의 광장 저 편으로 디지털 광장이 겹쳐져 있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엄중한 메시지를 내면서도 동시에 보다 다양한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같은 경쾌함이 넘치는 광장. 10대부터 50대까지 그 문화가 공존하는 다양성을 담보하는 광장. 나아가 아날로그와 더불어 디지털이 함께 하는 광장.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진화된 광장의 모습이 됐다.(글:이데일리, 사진: 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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