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런거야>, 김수현 작가 최대의 위기

 

SBS 주말드라마 <그래 그런거야>는 첫 회가 방영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김수현 작가가 아닌가. 막장드라마들이 주말 시간대를 장악하고 있는 현재, 김수현 작가라면 이를 깨치고 가족드라마의 부활을 알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그런거야(사진출처:SBS)'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다. 첫 회 시청률 4%(닐슨 코리아). 물론 2회에 5.8%를 기록하긴 했지만 이것이 시청률 상승의 신호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다분히 tvN <시그널>이 금토드라마로서 일요일에 방영되지 않았다는 점과 무관하다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청률이야 지상파에서 가장 높은 게 막장드라마들이니 그렇다 칠 수 있겠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래 그런거야>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도 그다지 좋지 않다. ‘기대 이하라는 평가 속에는 김수현 작가에 대한 실망감이 상당부분 엿보인다. 무엇보다 늘 비슷비슷한 패턴의 김수현식 가족드라마가 이제는 식상하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늘 어르신들의 교훈조의 이야기들이 따발총 대사로 이어지고 젊은 등장인물들은 그 어르신들의 눈에 포획된 존재들처럼 보이는 것도 그렇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가족은 심지어 보수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듯한 뉘앙스로까지 느껴진다.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보다는 그저 일상적인 일들이 수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도 전형적인 김수현식 가족드라마의 문법들이다.

 

이 비슷한 문법에 등장인물 또한 매번 비슷비슷하다보니 죄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인상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 보수적인 가치가 결국은 본래부터 가족드라마가 지향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런거야>에는 지금 시대의 공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한 10, 아니 20년 정도 옛날 가족 이야기를 재탕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들게 된 것일까. 가장 큰 것은 제 아무리 가족드라마라고는 해도 현재의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2회가 방영되었지만 이 드라마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들만으로 꽉 채워져 있다. 그들이 속사포로 쏘아대는 대사들을 듣고 있노라면 이 드라마의 제목처럼 보수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어떤 어르신이 젊은이들에게 인생이란 그래 그런거야라고 달관하듯 가르치려는 모습이 연상된다.

 

김수현 작가가 고령에도 대작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그 나이와 상관없이 당대의 젊은이들과도 호응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이야기들을 심지어 가족드라마 속에서도 거침없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 평생을 가족 뒤치다꺼리 하며 살아왔던 엄마의 파업(?) 선언을 다뤘던 <엄마가 뿔났다>가 그렇고, 불륜을 그 끝까지 밀어붙여 그 밑바닥을 보여줬던 <내 남자의 여자>가 그랬으며, 동성애라는 새로운 문제를 가족드라마 틀로 끌어들여 화제가 됐던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랬다. 그런데 <그래 그런거야>에는 아직까지 그런 파격과 혁신적인 소재에 대한 도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응답하라1988>이 가족드라마이면서도 그토록 화제가 되고 기적적인 시청률까지 거둬갈 수 있었던 건 흔한 지상파들의 가족드라마를 재현하거나, 그 변종으로서의 막장드라마를 그려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응답하라1988>은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새롭게 맞춰 가족드라마를 재구성했다. 어르신들의 가르치는 목소리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어르신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헌사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응답하라1988>이 가족드라마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래 그런거야>는 정반대다. 이 드라마에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르신들의 목소리만이 들려온다. 그것도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이래서는 젊은 시청자층은 물론이고 중장년 시청자층도 그리 공감하기가 어려워진다. 중년의 시청자라고 해도 드라마를 통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건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물론 막장드라마와 대결하겠다는 그 취지는 나쁘지 않다. 그래서 파괴되어가는 가족의 가치를 되새기겠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막장드라마만큼 보기 힘겨운 것이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건네는 보수적인 드라마다. 가족의 가치를 다시 세우겠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옛날식의 가족으로 돌아가자는 건 퇴행이다. 이제 2회가 끝났을 뿐이니 섣부르게 모든 걸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래도 기대한 만큼 남는 아쉬움도 크다. 김수현 작가는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평가도 그리 좋지 않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장영실>, 어째서 이 좋은 소재가 이렇게 그려질까

 

KBS 주말사극 <장영실>은 충분히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소재다. 장영실(송일국)이란 청춘이 가진 처지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천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어도 출사하지 못하는 처지가 그렇다. 결국 조선을 떠나겠다고까지 마음먹었던 장영실이 아니던가.

 


'장영실(사진출처:KBS)'

그런데 초반 <장영실>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매력이 떨어져간다. 그 흙수저로 태어난 장영실에 대한 공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를 알아봐주는 세종(김상경)이나 마치 형처럼 그를 허물없이 대해주고 밀어주는 이천(김도현) 같은 인물들이 일찌감치 그를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소현옹주(박선영)와 장영실은 신분을 뛰어넘어 연정을 가진 관계로까지 그려진다. 이건 역사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멜로 설정까지 집어넣는 건 흙수저로 태어나 가진 게 없었던 장영실을 사실상 모든 걸 다 가진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다.

 

장영실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이야기는 그가 명나라에 가서 주태강(임동진)의 집에 있는 전설의 물시계 수운의상대를 재현하는 데에도 등장한다. 그는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실제 본적이 없는 수운의상대를 척척 재현해낸다. 그런 장영실을 주태강은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본다. 장영실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태강은 심지어 조선의 과학이 명나라를 앞지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꺼내놓는다. 제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이런 식의 극단적인 찬양은 <장영실>이라는 사극에 마치 군대에서 만드는 정훈 영상물 같은 느낌을 덧씌운다. <장영실>은 왜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한 현재적인 재해석은 보이지 않고 찬양만 가득할까.

 

이와 상반된 느낌을 주는 작품은 SBS <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김의성)와 이방원(유아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드라마는 이 인물들을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정몽주가 그래도 고려를 지키려는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면 이방원은 신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모두가 못하는 것들을 실행해 옮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이방원을 완벽한 인물로 그리는 건 아니지만 확연히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극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룬다는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즉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하지만 그 역사를 굳이 지금 현재 들춰본다는 건 그 관점이 현재에 맞춰져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장영실>은 어떨까.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이 사극은 모든 걸 다 갖춘 과학자로 그려낸다. 그는 천문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뭐든 척척 만들어내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천출이라고 해도 청춘의 그림자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토록 현재와 호응하지 못하는 걸까.

 

<장영실>이라는 사극이 그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창조 경제같은 구호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장영실>은 어째서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같은 신선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옹주와 사랑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집어넣어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장영실처럼 노력하면 지금의 청춘들도 출사해 성공할 수 있다고? 글쎄. 거기에 호응하는 현재의 청춘들이 몇이나 될까.

<시그널>의 욕망, 조진웅의 몸과 이제훈의 머리

 

죄를 지었으면 돈이 많건, 빽이 있건, 거기에 맞는 죗값을 받게 해야죠. 그게 경찰이 해야 되는 일이잖아요.” 지극히 당연한 대사지만 이 대사가 주는 울림은 너무나 크다. 상식보다 권력이 앞서는 법 정의 현실에서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의 이재한(조진웅) 경사라는 캐릭터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어떤 권력의 협박이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우직하게 할 일을 실천해 가는 그런 인물.

 


'시그널(사진출처:tvN)'

이재한 경사는 지금의 과학수사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당대의 형사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도사건 수사에서는 제보만으로 엉뚱한 인물을 체포함으로써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생각보다는 몸이 앞서지만 그가 여느 형사들과 다른 것은 정의에 대한 남다른 신념과 소신이다. 그의 대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지만 그는 죄를 지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심지어 잘 아는 사람이라도)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와는 정반대의 형사도 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 총을 쏜 안치수(정해균) 같은 형사다. 그는 바로 이 원죄 때문에 상관인 김범주(장현성)와 같은 배에 타게 된다. 이재한 경사처럼 정의를 위해 온 몸을 던진 이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권력과 결탁해 제 배를 채우는 김범주나 안치수 같은 인물은 현재까지도 잘 살아간다. 이 부조리한 현실은 시청자들이 분노하게 되는 이유다.

 

이재한 경사가 몸으로 뛰는 형사라면 그와 무전기로 연결되어 있는 현재의 프로파일러 박해영(이제훈)은 머리로 승부하는 형사다. 그는 프로파일러답게 모든 정황들을 사건현장의 작은 단서에서도 찾아낸다. 재벌가 자제로서 대도사건의 진범이자 이와 관련해 살인을 저지른 변호사 한세규(이동하)를 두뇌싸움으로 증언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그는 사이다 같은 시원한 한 방을 보여준다. 요즘처럼 법을 잘 알고 그래서 법망을 이용하거나 빠져나가는 점점 지능화되는 범죄에서 박해영처럼 머리를 쓰는 형사가 필요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무전기라는 판타지로 연결되어 있지만 과거의 형사 이재한 경사와 현재의 프로파일러 박해영의 조합은 그래서 완벽하다. 이재한은 몸으로 뛰고 박해영은 머리로 분석한다. <시그널>이 타임 리프라는 설정으로 과거의 형사와 현재의 프로파일러를 각각 우직한 행동파와 과학수사의 상징처럼 엮어놓은 건 흥미롭다. 이 과거와 현재의 중첩이 그저 시간을 뛰어넘는 신기함만이 아니라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어딘지 과학수사는 아니더라도 몸으로 더 뛰어 범인을 잡으려는 과거의 형사와 훨씬 진화된 방식으로 과학수사를 해나가는 현재의 프로파일러의 조합을 이상적인 형사상으로 그려내는 것.

 

물론 이 상이한 성향의 두 사람이라도 같은 점은 있다. 그것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정신이다. 과거 이재한의 상사였고 현재는 박해영의 상사인 김범주의 그 긴 세월동안 해온 권력과의 결탁과 압력에도 두 사람은 모두 소신 있는 수사를 해나간다. 결국 <시그널>의 공적으로서 한세규나 김범주 같은 인물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악의 고리이고 이재한과 박해영 두 사람 모두가 대결해야할 적이 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만큼 법 집행이 오래도록 권력과 결탁해왔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두 형사. 한 사람은 사건 해결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끝없이 두뇌를 사용하지만 모두 정의 실현에 갈증을 가진 그들의 조합은 이상적이다. 그 이상적인 조합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부조리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안치수, 김범주와 대결하는 이야기. <시그널>은 이 대결구도를 통해 지금 현재 우리네 서민들이 느끼는 공정하지 못한 법 집행의 연원이 꽤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다는 걸 말해주는 것만 같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그 뿌리 깊은 부조리를 척결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시대의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형사들을 이어놓은 이유가 아닐까.

동북공정에서 항일로, 일본 버리고 중국 향하는 한류

 

KBS <12>3.1절 특집으로 중국 하얼빈을 간다고 한다. 3.1절이라는 의미도 그렇고 하얼빈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라는 점은 이 특집이 갖고 있는 방향성을 확실히 보여준다. ‘항일의 의미로서 하얼빈이라는 장소는 우리와 중국의 뜻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1박2일(사진출처:KBS)'

하지만 지난 2008년 이른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와 민감했던 시기에 <12>이 떠났던 백두산행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당시 외교적인 갈등 상황 때문에 촬영 자체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독도, 가거도, 우도, 백령도에서 가져온 물을 백두산 천지에 붓는 장면은 나름 <12>의 방식으로 백두산을 생각하는 우리네 정서를 표현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8년 전 중국과의 대립에서 마치 하나의 상징물처럼 존재하던 백두산을 갔던 분위기와 현재 항일이라는 동일한 뜻이 모이는 하얼빈 출국을 준비하고 있는 분위기는 이토록 다르다.

 

물론 <12>이 중국과 공존하려는 최근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런닝맨>이 중국 상하이에서 찍은 이른바 ‘10인의 결사단특집을 떠올려 보라. 옛 난징루 거리를 재현한 곳에서 <런닝맨>이 게임을 하며 가져온 스토리는 다름 아닌 일제에 맞서 싸우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작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암살>이 중국시장을 염두에 뒀고 또 실제로 중국 흥행에서 꽤 괜찮은 수익을 거둔 사실은 흥미롭다. 물론 초반 기록적인 흥행이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지속적으로 이뤄지진 못했지만 <암살>이라는 작품이 중국에서도 관심을 끌어 모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미 <별에서 온 그대>로 주목받고 있는 전지현이 항일 독립투사로서 캐스팅되었다는 점이 주효했던 것.

 

올해 개봉을 준비 중인 김지운 감독의 <밀정> 역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과 그를 둘러싼 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여러모로 <암살>과 궤를 같이 하는 블록버스터가 아닐까 싶다. 이밖에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동주>, ‘위안부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이미 해외에서까지 반향을 얻고 있는 <귀향>도 어찌 보면 이러한 항일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한류의 목적지는 일본으로 귀착됐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종착역이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 일본 아베총리의 망언에서부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역사인식의 부재, 어이없는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의 정치적 사안들이 한일 간의 교류의 물꼬였던 한류마저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여전히 일본의 한류는 진행 중이지만 매해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한류의 흐름과 비교해보면 한풀 꺾인 모양새다.

 

최근 들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콘텐츠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 않는다. 해외여행에 있어서 명확한 명분이 필요한 <12>8년 전 백두산을 갔던 데 이어 하얼빈을 선택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어쨌든 현재 우리네 한류는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이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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