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쇼 외면 시대, <해피투게더>가 살 길은

 

3.7%. 시청률이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지만 <해피투게더3>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유재석이 말했듯 시즌4를 향해 가기 위한 일종의 과정일 수 있다. 그래서 지난 주 새롭게 바뀌었으나 어딘지 산만했던 프로그램은 한 주가 지나자 훨씬 정리된 느낌(?)이었다. 게스트의 100가지 물건을 강당 같은 스튜디오에 늘어놓는 프로그램의 도입부분은 과감히 사라졌고, 대신 후반부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온 물건들을 갖고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프로그램의 전부를 구성했다.

 


'해피투게더3(사진출처:KBS)'

게스트로 출연한 조정석과 배성우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배성우는 전혀 웃기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빵빵 터트렸다. 형사 연기를 하고 있을 때 형사 목소리로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는 배성우의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매력을 잘 드러내줬다. 조정석 역시 과거 <건축학개론>에서 했던 납득이의 대사들이 상당 부분 애드리브에 의한 것이라는 걸 들려줬다. 그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기 위해 지난주의 앞부분을 과감히 잘라내자 뒷부분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전형적인 <해피투게더>식의 연예인 토크쇼가 되어버렸다. 물론 컨베이어 벨트가 있고 거기 물건들이 올라와 그걸 통해 이야기를 끄집어내긴 하지만 그들이 테이블에 앉아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방식은 단지 사우나에서 이 공간으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줬다.

 

이렇게 되니 게스트의 출연 역시 과거 <해피투게더>가 보여주던 방식 그 이상을 보여주진 못했다. 유재석은 끊임없이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복기하고 그렇게 캐릭터를 끄집어냈고, 박명수는 특유의 콕콕 찌르는 멘트들로 프로그램에 적당한 긴장감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니 전현무와 김풍은 전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과거 <해피투게더>의 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익숙한 유재석과 박명수 그리고 게스트들의 전형적인 토크쇼로 회귀한 것.

 

유재석은 시청자들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고 그걸 또 프로그램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을 포함한 MC들도 필요하면 하차하겠다는 뜻까지 언뜻 내비쳤다. 그 진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제아무리 유재석이 진심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도 연예인 토크쇼에 대한 시청자들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시청자들은 언젠가부터 연예인들이 나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토크쇼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JTBC에서 하는 <썰전>이나 <비정상회담> 나아가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프로그램을 연예인 토크쇼의 변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들의 관전 포인트는 <해피투게더>가 보여왔던 연예인 토크쇼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썰전>은 시사나 정치라는 특수한 소재를 가져왔기 때문에 연예인 이야기는 들어갈 틈이 없다. <비정상회담>은 연예인이 아닌 외국인들을 출연시켜 그들의 관점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틀이고, <냉장고를 부탁해>는 토크쇼라기보다는 웬만한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한 요리 버라이어티쇼에 가깝다. 즉 스튜디오에서 하는 예능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해피투게더>는 지금껏 시즌을 거듭하면서 위기 때마다 변신했고 그 진화를 성공시켜 왔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예능의 경향을 읽어야 하고 달라진 시청자들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토크쇼라는 형식 자체가 먹히지 않는 시대에 들어섰고 그것도 연예인 토크쇼는 제아무리 재미있어도 관심을 끌기 어렵다는 게 이미 드러났다.

 

SBS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가 자리를 잡은 것은 유재석이나 김구라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거기 매회 기막힌 사연과 이야기들을 갖고 출연하는 일반인 출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청자들에게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처럼 친근하다. 지석진이 중국에서 한류스타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야기나 개리가 힙합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몇 권의 노트를 빼곡히 가사로 채웠다는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시청자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상이몽>처럼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보여주거나, <썰전>처럼 정치나 시사에 깔려 있는 우리 사회의 현안을 쉽게 알려주거나, <비정상회담>처럼 외국인의 관점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냉장고를 부탁해>처럼 토크보다는 버라이어티쇼에 더 초점을 맞춰 눈을 떼지 못하게 하거나 해야 시청자들은 비로소 몰입한다.

 

<해피투게더>는 일반인을 출연시킬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토크쇼보다는 스튜디오에서 벌이는 버라이어티쇼를 취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그나마 연예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어떤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공포의 쿵쿵따같은 게임쇼를 하는 편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몰입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쟁반노래방같은 버라이어티 요소들을 더욱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유재석의 진심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육룡>의 시대, 진정한 역사 교육이란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는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실존 역사적 인물 이외에도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 같았으면 실제 역사의 왜곡이 아니냐는 질타를 받았을 수도 있는 인물설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실제 역사와 가상을 구별할 줄 안다. 사극은 진짜 역사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대 하나의 허구로 꾸며진 드라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대중들이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틈입을 허용한 건 단지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깔려 있는 의도의 진정성 때문이다. 역사라는 건 완벽한 팩트일 수 없다. 그것은 기록하는 자의 시선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의 역사다. 그들의 관점이 담겨진 편향된 역사일 수 있다.

 

거기에 삭제되어 있는 건 다름 아닌 민초들의 역사다. <육룡이 나르샤>에 허구로 들어간 세 인물, 이방지, 무휼, 분이는 그 삭제된 민초들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조선을 개국한 건 몇몇 왕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민초들 또한 있었고 그들의 희생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육룡이 나르샤> 같은 팩션 사극의 허구를 허용하는 이유가 된다.

 

<육룡이 나르샤>가 과거처럼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극, 이를테면 <주몽>이나 <선덕여왕>, <태조 왕건> 등등의 사극과 달리 여러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그 다양한 관점들을 포섭하려 하고 있는 데는 지금의 대중들이 생각하는 달라진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역사는 몇몇 한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관점만이 투영된 사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다른 관점들이 혼합된 사극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시대에 이제 대중들은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이성계다 라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 그 이면에는 이방원도 있었고 정도전도 있었다. 또 정몽주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인물도 있었고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모른 채 스러져간 민초들도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 이제 역사는 그 다양한 관점들과 그걸 통한 토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역사의식을 제대로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이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교과서는 많은 사례들과 관점들을 하나의 재료로서 제공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관점들을 담은 다양한 교과서들이 담보되고 그것이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스스로 가질 수 있게 하는 단초이자 실마리가 되어야 진정한 역사 교육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이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런 다양성을 해치고 한 가지 관점을 마치 정답처럼 제시함으로써 획일화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국가관이나 애국 같은 단어들이 덧붙여지지만 그것은 특정인들을 위해 역사를 호도하는 일이 된다.

 

본래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창업을 노래한 용비어천가1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것은 태조의 6대 선조를 한 마디로 찬양하는 노래다. 그런데 왜 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그 육룡을 조선창업을 했다는 태조의 6대 선조에 대한 찬양이 아닌 민초들이 함께한 조선 건국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을까. 그것은 역사 왜곡이 아니라 기록이 편향해 내놓았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다. 누군가 몇몇 사람들의 역사로 기록하려 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처럼 가려진 것들은 어차피 재해석되고 새롭게 가치매김 된다는 걸 하다못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지금은 육룡의 시대. 역사의 주역은 왕만이 아니라 민초들도 함께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한 마리의 용의 관점을 정답처럼 제시하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그건 과연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일일까. 이러다 진짜 역사의식에 대한 공부는 교과서보다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을 통해서나 배우는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닐까



<그녀는 예뻤다>, 황정음은 왜 주근깨 가면을 쓰고 나왔나

 

MBC 주말예능 <복면가왕>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리 이상하게까지 여겨지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나이든 세대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한 마디로 기괴하게 다가온다. 가수가 얼굴을 가리고 노래를 부른다니. 그것도 기괴한 모습의 가면을 쓰고.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가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예뻤다(사진출처:MBC)'

기성세대들이 <복면가왕>에서 느끼는 기괴함은 과거 이 세대들이 봐왔던 많은 가요제와 쇼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 때 방영되었던 국제가요제에서는 마치 우리나라의 대표선수처럼 무대에 올라 여러분을 열창해 관객들을 압도하던 윤복희가 있었고, 대학생들을 위한 대학가요제강변가요제에서 너무나 촌스러운 스타일이었지만 놀라운 가창력으로 주목받은 심수봉이나 이선희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드러내고 뽐내기 위해 무대에 섰다. 조금 부족해도 그들을 위해 마련된 무대가 있었고 대학생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을 선보이면 발탁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러니 이 시절의 가수들을 생각한다면 <복면가왕>의 복면 쓴 가수들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당시 무대에 오르고 노래를 부른다는 건 자기 얼굴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복면 쓰게 만들었을까. 흔히 복면의 기능은 실체를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복면가왕>에서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나오는 목적은 정반대다. 실체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고 오히려 진짜 실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아이돌이라는 얼굴에 복면을 씌우자 숨겨진 가창력이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그저 센 힙합 가수인 줄 알았는데 복면을 씌우자 의외의 깊은 감성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제 한 물 간 가수인 줄 알았는데 복면을 쓰고 나와 여전히 감동을 준다.

 

스스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실체를 드러내는 인물을 우리는 MBC 수목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에서도 발견한다. 여기 등장하는 과거 예뻤으나 역변한 김혜진(황정음)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게다가 옷 스타일도 꽝인데다, 스펙도 보잘 것 없는 인턴 나부랭이. 그런데 그녀가 예쁘다. 감춰져 있는 능력도 있다.

 

만일 김혜진이 예쁜 얼굴로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런 미모의 캐릭터라면 연애도 잘하고 일에 있어서도 능력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의 절친인 민하리(고준희)가 그렇다. 예쁜 얼굴에 잘 빠진 몸매 게다가 스타일도 좋고 좋은 집안까지 갖춘 그녀에게서 우리는 숨겨진 다른 능력이나 매력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당연히 능력도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김혜진이라는 인물은 주근깨 가면을 씀으로써 오히려 그녀의 진가를 드러내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는 예뻤다>가 제목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듯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사실은 예뻤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장치다. <복면가왕>에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듯이,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도 주근깨 가면을 쓰고 이 드라마의 무대에 올라서 있다. 목적은 같다. 진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복면가왕>의 가면 쓴 가수들을 보면서,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지금 우리네 청춘들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 공통분모로서의 가면이라는 장치 때문이다. 이들은 왜 이토록 가면까지 쓰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견해주길 바라게 된 것일까. 그 반대편에 거대한 스펙사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물론 좋은 스펙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걸 내보임으로써 어떤 이득을 가져가려 하겠지만, 대부분의 그렇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복면을 꺼내 쓴다. 제발 스펙을 가리고 실체를 봐달라는 간절한 호소. 그것이 이들 가면 세대들에게서 느껴지는 절절함이다.



연애가 아이돌에게 미치는 영향

 

아이돌도 사람이다. 그러니 적당한 나이에 누군가를 만나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가 이상한 일이다. 활짝 피어난 청춘들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건. 그건 과장되게 말하면 청춘의 방기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그들이 모태솔로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아이유(사진출처:로엔트리)'

아이유가 장기하와 사랑에 빠졌다. 디스패치가 또 하나의 특종을 낚았다. 이런 특종이 나올 때마다 이제는 무슨 큰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이런 연예인 열애 특종이 보도되는가 하고 되묻곤 한다. 물론 그건 음모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십성 연예인 뉴스들은 많은 정치적 현안들을 덮는 것이 사실이다. 국정 교과서 논란 같은 중대한 사안들은 연예인 뉴스들에 슬쩍 가려져 이슈를 분산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유의 열애설이 보도된 후 그 반응이 흥미롭다. 과거 같으면 팬들의 실망 가득한 토로들이 나아가 반감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을 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려니 한다. 하긴 사랑할 때도 됐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상대가 대중들에게 호감인 장기하라는 사실도 물론 작용한다. 하지만 아이유가 그간 보였던 음악적 성취들이 이런 열애설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쿨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주요 원인이다.

 

아이유는 작년 꽃갈피라는 리메이크 앨범을 통해 김창완의 너의 의미’, 조덕배의 나의 옛날 이야기같은 옛 노래들을 다시 히트시켰다. 물론 이전에도 그녀는 김광진이나 윤상, 이적 같은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신구세대의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 왔다. 하지만 꽃갈피에서 아이유의 감성은 더 짙어졌다. 원곡을 거의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성숙해진 노래의 해석력을 보여줬다.

 

서태지와 함께 소격동으로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드라마 <프로듀사>에 삽입됐던 마음은 놀라운 감성과 더불어 거의 시에 가까운 가사가 한결 원숙해진 음악적 성취를 보여줬다. ‘툭 웃음이 터지면 그건 너. 쿵 내려앉으면은 그건 너. 축 머금고 있다면 그건 너. 둥 울림이 생긴다면 그건 너.’ 도대체 이런 가사를 그렇게 깊어진 감성으로 불러내는 데야 웬만한 목석도 마음이 흔들릴밖에 도리가 없을 게다.

 

물론 필자 맘대로 상상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아이유의 이런 깊어진 감성은 사랑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나눈다는 건 그 사람을 성숙하게 해주는 일이다. 장기하와 아이유가 가까워진 건 음악적 교감이 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김창완이라는 인물을 가운데 두고 장기화와 아이유는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소녀시대는 한 때 더 이상 소녀시대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소녀들이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태연과 엑소 백현의 열애와 결별은 큰 화제가 되었다. 갖가지 가십성 추측 기사와 과장된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두 사람은 쿨하게 같은 소속사의 좋은 선후배로 남게 됐다고 밝혔다. 사람 사이의 사랑과 결별은 그 당사자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겪으며 갖게 되는 아픔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장통이 되기 마련이다.

 

이번 소녀시대가 발표한 라이온 하트가 좋은 반응을 얻더니 태연이 솔로로 내놓은 곡들이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타이틀 곡 ‘I’는 지금껏 태연이 솔로로 발표했던 곡들과는 사뭇 다른 색깔로 그녀의 음악적 성숙을 보여준다. 마치 팝음악을 듣는 듯한 비트에 태연 특유의 쭉쭉 뽑아 올리는 시원스런 고음은 외국의 팝 디바를 만나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앨범에 있는 ‘U R’은 익숙한 태연 특유의 발라드 감성이 느껴지는 곡이다.

 

물론 아이돌들이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그로인해 성숙해지면서 음악도 성장했다는 건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이유나 소녀시대 그리고 태연의 음악은 확실히 성숙해져 있다. 아마도 이제 아이돌의 열애에 대해 대중들이 보내는 이 쿨한 반응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드러나지 않았어도 사실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것이라는 걸 모두가 예상한 바라는 것이며, 나아가 그 일련의 정상적인 과정들이 음악에도 성숙된 결과로 돌아오게 해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아이돌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에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좋은 음악으로 팬들에게 되돌려질 테니. 적어도 아이유와 소녀시대 태연에 있어서는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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