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상관없어...” 신혜선의 상처를 치유시킨 강훈의 고백(나의 해리에게)

나의 해리에게

“전 상관없어요. 혜리씨. 왜냐하면 난 그냥 혜리씨가 있어주기만 하면 되거든. 내 옆이 아니어도 살아서 건강하기만 하면 난 그걸로 충분해요. 날 사랑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 숲으로 들어간대도 난 괜찮아. 원하면 내가 거기 같이 가줄 수도 있어요. 나 진짜 다 버리고 같이 가줄 수 있어요. 그딴 건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혜리씨. 왜냐하면 전요 혜리씨. 처음부터 혜리씨가 그 누구라서 좋아했던 게 아니거든. 그저 이런 내게 와준 사람이라… 내가 혜리씨를 그래서 좋아했던 거고 그래서…”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강주연(강훈)은 갑자기 사라져 너무나 보고 싶었던 주은호(신혜선)를 보고는 그렇게 외친다. 물론 강주연이 기다렸던 건 주은호가 아니라 그의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 주혜리(신혜선)였을 게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 마음을 나눴고 그리워하게 됐던 주차관리소에서 일하던 주혜리를. 그래서 돌아온 그가 주은호인지 주혜리인지 너무나 궁금해하지만 그는 결국 그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주혜리를 좋아했던 건 ‘누구라서’가 아니라 ‘그저 이런 내게 와준 사람’이어서였으니까. 

 

그 말을 들은 주은호는 강주연에게 다가가 그를 꼭 안아준다. 바로 옆에 서서 주은호를 걱정하고 보살피려 한 정현오(이진욱)는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는 깜짝 놀란다. 주은호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정현오다. 너무나 사랑했지만 결혼을 꿈꾸는 주은호에게 이를 거절하고 이별 통보까지 했던 그였다. 자신이 홀로 감당해야할 할머니들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만, 주은호가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갖게 된 사실이 그는 마치 자신 때문인 것 같아 괴롭다. 주은호가 아닌 주혜리가 되고 싶을 정도로 그 이별 통보가 아팠던 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주은호가 주혜리가 되어 돌아온 것 같은 그 광경이 그에게는 몹시 아프다.

 

실제로 주은호는 자신과의 결혼을 거부하던 정현오가 결혼을 한다는 사내에서의 소문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부모를 잃었고, 숲으로 들어간 동생을 잃었으며 그 빈 자리를 유일하게 채워줬던 사랑하는 사람 정현오와도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가 비혼주의자라서인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다니. 물론 그건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주은호는 무너지고, 방송사고를 내고 결국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주은호는 자신을 버리고 싶어진다. 대신 주혜리가 궁금하고 되고 싶어진다. 그 애가 왜 행복했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주은호는 숲으로 들어간다. 자신을 버리고 주혜리가 되고 싶어서 심지어 자기 팔에 주혜리가 가졌던 상처까지 내며서 자기를 버리려 한다. 그는 그렇게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난 언제나 혜리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주혜리. 넌 행복해? 만약 니가 행복하다면 나는 이제 너로 살아보려해. 내가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끝내 혜리가 되지 못한 채 돌아왔다고 강주연에게 고백한다. 그건 그가 모든 걸 버리고 그 숲 속 오두막집을 찾아가면서도 버리지 못한 한 가지가 있어서였다. 정현오가 작은 메모지에 그린 목걸이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주혜리가 되려는 주은호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었다. 

 

‘나의 해리에게’는 구도로만 보면 주은호를 두고 정현오와 강주연 그리고 문지온(강상준)까지 사랑하게 되는 4각구도의 멜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계성 정체성 장애를 겪으며 주은호와 주혜리를 오가는 이 인물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밀고 당기는 꽁냥꽁냥 멜로와는 차원이 다른 걸 담고 있다. 그건 강주연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다 ‘존재론적인 사랑이야기’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심지어 동생이 실종되면서 결코 행복할 수 없던 삶을 살아온 주은호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불행의 늪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인격을 꿈꾸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이번 생은 망했다’며 다음 생을 꿈꾸거나, 과거로 되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는 삶을 꿈꾸는 회귀물에 빠지는 건 그래서가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현재의 내가 싫고 불행하게만 느껴져 차라리 다른 인격이 되고 싶은 그를 끝내 붙잡아주는 건 뭘까. ‘나의 해리에게’는 그 질문에 강주연이라는 인물의 사랑을 통해 답하고 있다. 그 누구여서가 아니라 그런 내게도 와준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설혹 불행의 늪에 빠져 있어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딱 하나”라고 믿는 강주연에게 주은호는 자신이 주혜리가 되지는 못했다며 대신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누구보다 사랑이 필요했던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아까 주연씨가 했던 말은 내가 주연씨한테 하고 싶었던 말예요. 맞아요. 나도 처음부터 그 누구라서 그쪽을 좋아했던 게 아니고 그저 내게 와줘서 이런 내게 와줘서 고마웠어요. 주연씨.” 그가 강주연을 꼭 안아줬던 건 주혜리여서가 아니라 고마움 때문이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주은호가 강주연을 안아주는 장면은 이 대목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강주연의 말이 사실 주은호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뜻은, 자신이 주혜리가 되면서까지 찾고 싶었던 행복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래서 강주연의 그 말은 주은호가 스스로를 되찾을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는 의미다. 주은호가 안은 건 강주연만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드디어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너무 아파서 다른 인격을 가진 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로 시작한 드라마는 이제 그 모험 같은 여정을 돌아서 인간 존재의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상실감과 그 상처를 어떻게 회복하고 돌아올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 없었다고 생각했던 주은호는 드디어 그 먼 길을 돌아와 알게 된다. 자신이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던 정현오를 붙잡아 잠깐 동안 함께 있었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준다면 말해야지. 말해줘야지. 말해줘야지. 고마워. 내 사랑. 이런 내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의 해리에게’는 그래서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다소 우리에게는 낯선 장애를 소재로 삼은 멜로드라마지만,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마음 속에서 계속 벌어지는 일들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드라마다. ‘나의 해리에게’는 묻고 있다. 당신의 혜리는 어떤 존재인가. 또 우리 모두의 혜리는? 그리고 우리가 붙박혀 살아가는 현실과 우리가 꿈꾸는 행복 사이에서 저마다 하나씩 혜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다시 현실로 되돌리는 진짜 행복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런 내게 와준 소중한 존재들이 옆에 있어서 힘겨워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사진:지니TV)

밴드음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말해주는 것

최근 데이식스나 QWER, 실리카겔, 쏜애플 같은 밴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움츠러들었던 콘서트 열기가 더해져 밴드 기반의 아티스트에 대한 팬덤도 커지고 있는데, 이런 변화는 무얼 말해주는 걸까. 

데이식스

최근 주목되는 데이식스와 QWER

지난 10월22일 멜론차트를 보면 로제와 브로노마스가 함께 한 ‘APT.’와 에스파의 ‘UP’ 그리고 제니의 ‘Mantra’ 같은 K팝 아이돌의 음악들이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띠는 건 데이식스다. 데이식스는 멜론 탑100 차트 20위 권에만 최근 발매한 ‘Fourever’ 앨범 수록곡들인 ‘Happy’, ‘Welcome to the Show’는 물론이고 예전에 냈던 곡들인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녹아내려요’, ‘예뻤어’까지 순위에 올랐다. 물론 아이돌 같은 외모에 남다른 밴드 실력을 갖춘 팀인데다, 확고한 팬덤까지 갖추고 있어 이런 차트 상위권 기록이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여러 곡이 동시에 채워지고 있는 건 놀라운 일이다. 늘 아이돌로 대변되는 K팝(이것이 K팝 전체를 지칭하는 건 아니지만 이른바 아이돌 음악이 K팝을 지칭하는 것만 같은 건 실제 현실이다)이 차트를 채우고 있던 풍경과 비교해보면 이런 차트의 변화는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건 마치 밴드음악에 대한 대중적 저변이 만들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예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같은 날 차트 20위권에 오른 QWER의 ‘내 이름 맑음’과 ‘고민중독’이나, 버추얼 아티스트 플레이브의 ‘Pump up the volume!’과 ‘Way 4 LUV’, 나아가 ‘선재 업고 튀어’의 ost로 극중 이클립스 밴드의 보컬 역할을 한 변우석이 부른 ‘소나기’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이들 곡들은 물론 색깔이 조금씩 다르지만, 밴드음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가요계에는 ‘밴드 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찍이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잔나비는 물론이고 최근 인기가 급상승해 차트를 올킬하고 있는 데이식스, 남다른 음악 스타일로 현재의 밴드 붐을 견인했다고 평가받는 실리카겔,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진 인물들의 밴드 결성 과정 자체가 주목받으며 그 위에 실력까지 겸비하면서 밴드 음악의 대중화에 한 몫을 했다 평가받는 QWER 등등 다양한 밴드들이 등장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코로나 시국에 억눌려 있던 콘서트에 대한 갈망이 밴드 음악을 통해 폭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올해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역대 최고 관객수를 경신했고, 부산국제록페스티벌 역시 3만5천여명의 관객이 몰려 뜨거운 열기 속에 공연을 즐겼다. 특히 이번 부산국제록페스티벌에는 국내에도 팬덤을 가진 일본의 유명 락밴드 스파이에어 공연에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건 최근 J팝에 열광하는 Z세대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밴드 음악에 대한 갈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이돌 바깥을 찾아보기 시작한 Z세대들

물론 방탄소년단이 군대 문제로 완전체 활동이 정지된 상태지만 솔로로 이어지는 정국이나 진, 지민의 활동에는 여전히 글로벌 팬덤이 결집된다. 또 에스파나 뉴진스, 세븐틴, 르세라핌, 아일릿, 스트레이키즈 같은 K팝 아이돌들의 글로벌 저변 또한 분명하다. 가온차트의 글로벌 K팝 차트를 보면 그 꼭대기를 차지하는 건 대부분 이들 아이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K팝이 아이돌 음악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해져야 한다는 목소리는 국내외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비슷한 장르의 믹싱과 거기 어울리는 아이돌 특유의 춤과 노래 그리고 뮤직비디오는 이제 K팝 아이돌 음악의 공식처럼 되어 있지만 그래서 클리셰처럼 되어가는 면이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목소리는 의외로 국내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아예 태어나서부터 K팝을 듣고 자란 Z세대들의 경우 이제 모두가 똑같아 보이는 이 음악에 대해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남들과 다른 나만의 경험을 추구하는 Z세대의 특성상 모두가 듣는 차트 꼭대기의 음악은 오히려 ’개성없음‘으로 여겨지는 추세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나만의 음악을 찾아 아이돌 음악 바깥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밴드 음악이 주목된 이유이고, 최근 갑자기 J팝이 국내 팬덤을 갖기 시작한 이유다. 밴드 음악은 자체적인 악기 연주와 창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그 다양성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게다가 최근 Z세대가 원하는 라이브 무대에도 최적화되어 있다. 똑같은 음악과 무대에 식상해하는 Z세대들은 라이브 무대의 일회성과 그 대체불가한 시간을 함께하는 것에 열광한다.

 

물론 아이돌 음악이 가진 잠재성과 가능성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돌 음악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라도 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 밴드 음악 같은 저변들이 폭넓어져야 한다. 밴드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아이돌 음악의 색다른 양분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K팝, 이제는 애프터 K팝을 생각해야 할 때

특히 오래된 지적으로서 여전히 ’아이돌‘이라는 틀에 가둬 놓는 방식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아이돌은 본래 10대 혹은 20대를 대상으로 높은 인기를 얻는 연예인 특히 가수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언젠가부터 나이의 제한을 받는 용어가 되었다. 보아가 일찍이 어린 나이부터 연습생 과정을 거치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20대만 되도 아이돌로서 나설 수 없는 나이처럼 여겨지던 당시 아티스트들의 데뷔는 더 일찍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이돌의 범주가 30대 이전의 20대까지를 아우를 정도로 넓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아이돌이라는 개념의 틀은 연습생은 물론이고 데뷔한 그룹의 멤버들조차 이 틀은 그들을 옥죄는 족쇄가 되고 있다. 아이돌 데뷔에 있어서 나이의 제한이 있다는 압박감이 연습생들에게는 초조와 불안을 만들어내고, 데뷔한 후에도 끝나는 시효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돌 그룹에도 향후의 나아갈 방향을 흔들리게 만든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팀이 해체되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저마다의 솔로 활동을 하거나 잊혀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적어도 이 틀을 깨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롱런할 수 있는 아티스트들이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K팝이 아이돌 음악을 통해 갑자기 글로벌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저마다 그것이 하나의 유일한 방향성처럼 치부되는 건 그 자체로 K팝의 발목을 잡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서구에서는 K팝의 획일성을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서 J팝이나 V팝 같은 새로운 지역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지어 국내의 젊은 세대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취향을 담보할 수 있는 장르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찾아 개인적인 플레이리스트를 꾸미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 ’K’로 지칭되듯, 마치 모두가 다 좋아할 것 같은 음악에는 오히려 시큰둥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차라리 남들이 모르는 인디음악을 찾아 드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는 것이다. 

 

글로벌하게 사업이 확장된 기획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변화는 마이너한 일이라 여겨질 수 있다.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좀더 보편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 더 채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은 그렇게 비즈니스만으로 지속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다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아티스트들이 다양한 음악들을 내놓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생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밴드 붐이 보여주는 대중들의 갈증을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제 애프터 K팝을 생각해야 K팝의 미래가 보이는 시점에 들어와 있다. (글:시사저널, 사진:JYP엔터테인먼트)

한강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일주일 전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특강을 요청 받아서였다. 알다시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데, 그 곳을 굳이 가야할까 싶었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하필이면 한국의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며 살아가는 나를 불렀다는 건, 그 곳에도 한류 열풍이 있다는 걸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곳에서 환대해준 러시아 한국어 교수들(행사에 심사를 맡은 러시아안들이다)은 유창한 한국어로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빗대 한국과 러시아의 상황을 농담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전쟁과 평화’ 중입니다. 전쟁 중이라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지만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우니 말입니다.”

 

그들의 한국어 실력은 그저 소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문학과 역사를 이야기할 정도로 깊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푸쉬킨 같은 대문호를 가진 자부심이 대단한 그들은 한국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도 드러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거론하며 한국의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김호연 작가의 베스트셀러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한국 소설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또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통해 당시 조선의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학생들 중에는 사도세자 이야기나 정조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영화와 드라마 같은 콘텐츠들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도 영화를 통해 먼저 접하고 소설을 보게 됐다고 했고, 정조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그를 다룬 ‘이산’이나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사극을 통해서 시작됐다고 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과연 그만큼 우리 역사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어서였다. 

 

물론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그들은 한국어가 통번역이 특히 어려운 언어라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앞부분에 하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고 뒤에는 수식어를 붙이는 방식이라 동시통역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어는 마지막 한 마디로 앞부분의 이야기를 모두 뒤집을 수 있어서 끝까지 들어야 겨우 통역이 가능하죠. 그런 말도 있잖아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한국의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그래서 이제는 그 관심이 먹거리부터 패션, 여행 등등 한국문화로까지 옮겨가고 있는 추세인데 거기에는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한국어 간판들이 지저분하게만 보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멋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한국을 로케이션으로 작품을 찍는 외국감독들은 카메라를 드리우면 골목 하나도 다 그림이 된다는데,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한글의 아름다움이다. 한국말도 마찬가지다. 한국말 가사 그대로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물론 작품 자체의 뛰어난 성취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 어느 정도는 일조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 한류의 흐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전쟁 이후 비교적 짧은 시기에 놀라울 정도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온 그 과정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또한 들어있다. 최근의 한국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건, 약 40년 간 한 국가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그의 저서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인류 문명사의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 재현했다’며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갔다고 말했다. 이 말은 전쟁 후 반공국가, 경제발전, 민주화, 사회정의와 인권을 차례로 요구해온 대한민국의 변화과정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각각의 욕망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공존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만들어내는데, 콘텐츠들이 이걸 다양하게 담아냄으로써 보다 폭넓은 글로벌 공감대가 가능해졌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여전히 성장서사의 로망을 담은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지만, 동시에 양극화 문제가 고도화된 서구권 국가들은 이 문제들을 담은 사회비판적인 콘텐츠들이 인기를 끈다. 한국은 실로 성장과 분배, 경쟁사회에 대한 애증, 속도와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 같은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나라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건 이러한 한국이 역사적으로 겪어온 아픔과 상처들을 온전히 자신 속으로 끌어안아 문학으로서 품어냈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담은 이야기지만, 저마다의 욕망의 단계에 따른 문제에 봉착해 있는 전 세계인들 또한 공감하게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으로 한강 작품들은 국내 출판가에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수상 이후 닷새간 종이책만 97만2천부가 팔렸고, 베스트셀러 10위권을 모두 한강의 작품이 채웠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국내 출판가에도 기대감을 만드는 모양새다. 최근 ‘텍스트 힙’이니 ‘독파민’이니 하는 새로운 독서 트렌드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지금이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쏠림현상이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저변을 넓힐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책과 독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발시대의 압축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면, 최근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중의적인 표현이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한 또 한 번의 ‘한강의 기적’을 기대한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깊이가 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나기를. (글:이데일리, 사진:Nobel Prize)

‘정년이’로 또다시 청춘의 아이콘으로 돌아온 김태리

정년이

“참말로 고맙구만이어라. 하지만 받지 않겄습니다. 그 길은 제 길이 아니어라.”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윤정년(김태리)은 자명고 대본을 내주며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해주려는 매란국극단 스타 문옥경(정은채)의 호의를 거절하며 그렇게 말한다. 문옥경은 장터에서 윤정년이 소리를 하는 걸 듣고는 단박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를 매란국극단에 들어올 수 있게 도운 인물이다. 그런 문옥경의 호의가 고맙지만 이를 거절하는 정년에게서는 보다 당당하게 제 힘으로 서고 싶은 청춘의 기세가 엿보인다. “안 그래도 다들 지가 지 실력으로 이 국극단 들어온 거 아니라고 떠들어 싼디, 여기서 또 쉬운 길을 선택해 불믄, 그 사람들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된께요.”

 

첫 회 4.8%(닐슨 코리아) 시청률로 시작해 단 4회만에 12.7%까지 급상승한 ‘정년이’의 저력은 바로 이 윤정년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에서 나온다. 목포 시장 바닥에서 아무런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살아가던 이 청춘은 어느 날 별천지에서 온 대스타 문옥경을 만나고 국극의 꿈을 꾸게 된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집을 떠나 매란국극에 들어온 윤정년은 거기서도 그를 시기하는 이들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갖은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청춘은 물러서거나 좌절하는 법이 없다. 돌덩이 같은 단단한 역경을 피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기세. 이 청춘의 기세에 시청자들은 빠져든다. ‘정년이’가 파죽지세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유다. 

 

서이레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정년이’는 드라마 리메이크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우려의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작 캐릭터의 싱크로율을 감당할 배우가 과연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 활달한 성격에 소리까지 연기해야 하니 만만찮은 역할이다. 하지만 김태리가 정년이 역할로 분한 첫 회가 등장하면서 이런 우려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원작 웹툰에서 막 튀어나온 듯 싶을 정도로 발랄한 청춘의 캐릭터를 제 옷 입은 듯 소화해냈고, 소리를 하거나 국극의 무대에 설 때는 너무나 진지한 모습 또한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을 납득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김태리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유독 ‘청춘의 초상’으로서의 역할들을 주로 해왔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2016년 영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김태리라는 배우가 가진 밝고 쾌활한 면모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담긴 이 작품에서 김태리는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의 제안으로 귀족 아가씨(김민희)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되는 인물이다. 하녀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이 인물이 백작이 아닌 아가씨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김태리는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소화해낸 바 있다. 그 후 2017년 ‘1987’에서는 1987년 독재정권과 맞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회의적이었지만 차츰 그 대열에 참여하게 되는 이연희라는 청춘의 고뇌와 성장을 연기했다. ‘1987’에서 그랬던 것처럼 김태리는 하는 작품마다 당대의 청춘들이 겪는 아픔들을 공유하면서도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저마다 성공하고픈 꿈을 꾸지만 그것이 청춘을 마모시키고 좌절하게 만드는 현실을 담은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그랬다. 김태리는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와 거기 나는 식재료들로 음식을 챙겨먹으며 자신을 회복해가는 청춘 송혜원을 통해 당대의 청춘들을 위로했다. 

 

“나도 꽃이요. 다만 나는 불꽃이요.”라는 명대사를 남긴 ‘미스터 션샤인’은 또 어떤가. 구한말 사대부가의 영애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힘겨운 의병활동의 길을 선택한 고애신 역할을 김태리는 특유의 발랄한 에너지로 소화해냈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분위기를 뚫고 나오는 드라마의 발랄함은 김태리라는 배우와 만나 기분좋은 시너지를 만들었다. IMF를 배경으로 그 힘겨운 시절 어른들로 인해 청춘들이 겪게 된 아픔과 성장을 담은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도 김태리는 나희도라는 인물을 통해 큰 위로를 줬다. 이러한 김태리가 써온 청춘의 초상을 담은 필모그래피는 심지어 오컬트 장르인 ‘악귀’에서도 이어졌다. 각박한 현실 앞에 좌절한 청춘들이 그 엇나간 욕망이 탄생시키는 악귀를 그린 이 작품에서, 김태리는 구산영이라는 공시생 역할로 악귀가 자신을 잠식하려는 위기와 맞서는 청춘을 연기했다. 

 

그래서 김태리가 나왔던 작품들을 들여다 보면 지금의 청춘들이 마주한 현실이 엿보인다. 수저 색깔로 미래가 결정되는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도, 어떻게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번번히 좌절되는 현실 앞에 갑갑해 하는 청춘들의 초상이다.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이른바 N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포기’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건 청춘들이 원해서가 아닐 게다. 그들이 진짜 바라는 건 그래서 김태리가 해온 작품들 속 인물들이 보여주듯이 그 현실을 뚫고 나가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김태리가 가진 청춘의 에너지가 빛나는 ‘정년이’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1956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고단한 삶을 살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정년이’가 그리고 있는 건 그런 좌절과 포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국극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 정년이의 성장드라마다. 그 고단했던 시절에도 그 힘겨움을 위로해줬던 건 다름 아닌 국극 같은 당대의 문화들이었다. 그 문화의 현장 속에서 민초들도 잠시 현실을 잊고 웃고 울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 예인의 길을 그려낸 ‘정년이’가 주는 위로가 남다른 건 그래서다.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겨지던 시절, 역경을 뚫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정년이의 모습은 큰 위로와 더불어 용기를 준다. 제 아무리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꿈꿀 수 있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남다른 청춘의 기세를 보여주는 정년이와 그 역할을 맡은 김태리는 말해주고 있다.(글:국방일보,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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