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 온 더 블럭

 

“손흥민, 김연아에 맞춰진 눈높이가 기준이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기자회견장에서 한 작심발언에 대해 배드민턴협회는 장문의 보도자료와 함께 문제의 발언을 내놨다. 그 발언에 대해 누리꾼들의 맹비난이 이어졌다. 안세영 선수가 그간 거둔 성과는 ‘손흥민, 김연아 급’이 맞다는 이야기다. 사실이 그렇다. 안세영 선수는 22살의 나이지만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대회 그리고 올림픽에서도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모든 국제대회 배드민턴 경기에서 정상을 차지하는 이른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니 손흥민, 김연아 급은 아니라는 협회의 비꼬는 뉘앙스가 담긴 발언에 누리꾼들이 발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협회의 이 발언이 더 당혹스러운 건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스포츠가 맞닥뜨리고 있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른바 국가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엘리트들을 선발하고 그들을 국가대표로 키워내 국제무대에서 메달을 따오는 것이 우리네 스포츠가 지금껏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한 동력이었다. 실제로 이처럼 될 성 부른 싹을 일찍부터 발굴해 육성하고 집중 지원하는 방식은 좋은 결과로 돌아온 게 사실이다. 88올림픽 때 무려 총 메달 33개를 땄던 것도 또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를 따는 놀라운 성과를 낸 것도 이러한 엘리트 스포츠를 집중 육성하는 방식이 힘을 발휘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집중 육성과 일반인들의 생활체육이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다는 건 아쉬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엘리트 스포츠의 성과는 정반대로 일반인들의 생활체육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다. 배드민턴 같은 종목은 단적인 사례다. 올림픽 등을 통해 전해진 승전보가 가져온 효과로 배드민턴 동호인 수가 급증했다. 그 저변이 현재는 약 3백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즉 스포츠에서 엘리트를 육성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제 집단적 성과만이 목표가 아닌 개인의 성취가 중요해진 시대에 과거적 개념의 시스템을 고집하는 건 자칫 개인들의 동기부여를 막아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세영 사태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안세영 선수도 밝힌 것처럼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시대에 맞는 보다 융통성 있는 열린 접근으로 이렇게 등장하는 불합리한 관행들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협회에서 ‘형펑성’을 문제로 들고 나와 안세영 선수의 주장을 ‘특혜’처럼 치부하는 이야기 속에는 안타깝게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도 된다는 과거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이 담겨있다. 이건 7,80년대 개발시대를 거치며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을 위해 감수해야 했던 희생의 방식이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나서고 가족구성원들이 희생하는 가부장적 시스템이 그것이었고, 직장에서도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일하는 이른바 ‘가족경영’이 그것이었다. 국가 역시 모두가 매일 같이 태극기 앞에 멈춰서서 의례를 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래서 실제로 나라는 잘 살게 됐고, 국민 개인소득도 높아졌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그런 집단의 이익이 실현되면서 야기하는 개인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다. 한 개인이 하는 이야기를 이제 그저 ‘일탈’이라고 치부하는 일은 그래서 집단주의 시대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안세영 선수의 작심 발언은 그래서 ‘손흥민, 김연아 급’ 운운하며 비꼬는 투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사실상 현 한국의 배드민턴 선수 중 최고의 성과를 낸 선수가 하는 말이 아닌가. 경청하고 대화를 통해 수용할 건 수용해야 하는 게 맞다. 

 

특히나 이번 작심발언에서 개인 후원 계약 제한 문제나 개인 자격 국제대회 출전 제한 문제는, 개인주의 시대로 들어온 현재 개인적 차원에서의 충분한 동기부여를 위해서도 진지하게 변화를 고민해야 하는 사안이다. 이제 국가가 몇 개의 메달을 따내느냐가 중요해진 시대는 지나갔다. 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일은 때로는 경기 조작 같은 부작용으로도 나타나지 않았던가. 이제는 반대로 스포츠 선수 개개인들이 자신이 하는 종목에서 성과를 내면 충분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게 시스템을 바꿔나가야 한다. 

 

개인 후원 계약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후원사들이 스타선수들에게 몰려, 협회로서는 후원금이 줄어들게 되고 결국 대표팀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고민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협회 중심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은 제2의 안세영, 나아가 제2의 손흥민, 김연아가 나오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 또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국가대표로 활동한 기간이 5년이 넘어야 하고 여자는 만 27세, 남자는 만 28세 이상이어야 가능하다는 규정도 좀더 융통성 있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규정은 국가대표를 마치 군복무처럼 의무화하는 조항처럼 보인다. 제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있어도 의무를 치러야 국제대회 등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안세영 선수가 중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7년 동안 막내로서 일부 대표팀 선배들의 방청소와 빨래를 대신했다는 이야기 또한 너무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대중문화를 들여다보는 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안세영 사태는 마치 K팝의 글로벌 성공과 함께 등장했던 연습생 시스템에 대한 변화의 요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스포츠가 엘리트들을 모아 집중 육성하는 시스템을 가져온 것처럼, K팝도 유사한 연습생 시스템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장기 계약 문제나 연습생 개개인들의 인권 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조금씩 시스템 또한 변화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 변화과정 동안 적지 않은 안세영 선수 같은 이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 아픈 목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시대에 관행처럼 과거의 기준들이 전도 유망한 청춘들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진:tvN)

뒷것 김민기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

한국 포크 음악과 민중음악의 선구자이자 전 학전 대표였던 김민기가 별세했다. 향년 73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 전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야기는 현재의 문화 예술계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아침이슬’처럼 떠난 김민기

지난 21일 김민기가 별세했다. 향년 73세였다. 그는 떠났지만 그는 ‘아침이슬’처럼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나 이제 가노라’며 ‘저 거친 광야’로 떠난 그는 이제야 좀 ‘서러움 모두 버리고’ 갈 수 있었을까. 그의 삶의 행적을 좇다보면 ‘시대의 아픔’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스무살에 내놓은 ‘아침이슬’이라는 곡 하나만 두고 봐도 그렇다. 1971년에 낸 데뷔앨범에 들어 있던 그 곡은 김민기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유신 정권 반대 시위 현장에서 울려퍼졌다. 결국 정권이 금지곡으로 지정했던 그 곡은 김민기 평생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됐다. 

 

물론 김민기 스스로도 시대의 아픔 한 가운데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그가 당시 했던 활동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재정권과 정면대결을 벌였던 시인 김지하를 만나고 일찍이 야학에 뛰어들었으며 김지하가 쓴 희곡인 ‘금관의 예수’ 공연에 참가해 주제가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했던 김민기였다.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에 참여했고 군 생활 이후에는 인천 부평 봉제공장에 취직해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하며 ‘공장의 불빛’ 같은 음악극을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운동가요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광장에서 울려퍼졌던 ‘상록수’는 사실 공장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였다. ‘공장의 불빛’ 제작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던 김민기는 10.26 사태가 벌어진 후에는 농부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고, 탄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삶을 몸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통해 그의 금지곡들은 일부 해제되었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어져온 혹독한 독재정권의 그늘 아래서 그의 삶을 가장 낮은 자들 곁에 있었다. 그들을 위해 살았고, 그 삶이 노래가 됐고, 그래서 핍박받았지만 끝내 그 노래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네 현대사의 아픈 구석들을 들여다보면, 그의 노래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삶이 그 시대의 아픔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맨, 김민기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요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용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김민기가 쓰고 곡을 만든 ‘친구’는 고등학생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창이다. 가사는 시이고 곡 또한 단순하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실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썼다는 이 곡을 보면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김민기의 면모가 일찍이 드러난다. 거기에는 문학이 있고 음악이 있다. 그런데 그의 활동은 그 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노래도 만들고 불렀지만 음악극도 했다. 연극 또한 직접 만들었던 것. 1991년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고 그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지난해까지 8천회 이상 상연했고 무려 70만명의 관객이 함께 했다. 

 

그가 만든 학전(學田)은 ‘배우는 텃밭’이라는 의미다. 그 이름 그대로 예술인들의 텃밭이 됐다.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 무수한 배우들이 이 곳을 거쳐갔고, 동물원, 들국화, 장필순, 박학기, 권진원, 유리상자, 윤도현 등이 이 곳에서 노래했으며 고 김광석은 1천 회 공연을 했다. 그가 운영한 학전은 출연자들에게 그 날의 공연 수익을 밝히고 정산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그건 그 스스로 예술인들의 텃밭이 되겠다는 그 취지에 합당한 방식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문학과 연극과 음악을 아우르는 예술인이면서 동시에 그런 예술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학전’의 대표이기도 했다. 늘 적자에 시달리며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스스로에게는 ‘돈 안되는 일’을 자처함으로써 예술인들을 살게 하는 일에 앞장섰던 후원자에 가까웠다. 

 

뒷것 김민기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그가 학전을 세워 했던 일들은 그가 생전에 했던 이 말 하나로 설명된다. 그건 물론 뮤지컬, 아동극, 가수들의 공연 등을 무대에 올리는 역할을 자신은 뒤에서 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한 것이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예술인들에게 내려주고 자신은 무대 아래서 그걸 비춰주는 역할을 자임한 그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나서지 않고 묵묵히 예술가들의 못자리가 되어주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닌가. 

 

결국 김민기의 생애는 개관 후 33년 간이나 버텨왔지만 재정난으로 지난 3월 폐관한 학전과 거의 닮았다. 건강이 악화됐고 지난해 가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끝까지 학전의 레퍼토리들을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는 우리네 예술계에 영원히 든든한 ‘뒷것’으로 남았다. 

 

올해 4월에 방영됐던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은 그가 뒷것을 자임하며 남긴 우리네 예술계의 흔적들을 담아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다큐멘터리가 담아낸 내용을 보면 그가 뒷것을 자임한 건 예술인들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피혁공장에서 일하며 만난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고 노동자들을 위로해주는 ‘공장의 불빛’이라는 음악극을 만들었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나온 그들에게 야학의 길을 열어 주기도 했다. 농사꾼이 되겠다고 연천에 내려가서도 그는 농민들의 뒷것을 자처했다. 중간유통업자들 때문에 농민들이 제 값을 못받고 소비자도 비싸게 쌀을 사야하는 현실을 알고는 직거래를 통해 모두가 좋은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 야간학교를 열었고,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유아원 건립을 위해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나서기도 했다. 또 ‘지하철 1호선’이 큰 성공을 거뒀을 때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한 아동극에 뛰어들었다. 돈 안되는 일, 하지만 꼭 필요한 일에 앞장섰던 거였다. 

 

김민기가 삶 전체로 전하는 메시지

그는 떠났지만 그 삶은 우리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먼저 예술이란 시대와 공명한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담아낸 예술은 당대의 대중들과 호흡함으로써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걸 김민기는 보여줬다. 그렇게 세상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또 모든 것이 자본화되고 상품화되어가는 세상에 ‘돈 안되는 일’이 오히려 예술이 해야 하는 일일 수 있다는 걸 그는 보여줬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 뒷것을 자임하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알려줬다. 만일 문화예술에 대해 정부 등이 나서 지원을 한다면 든든한 뒷것의 전형을 보여준 김민기의 선택들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앞것을 자임하는 현실들 앞에서 그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무수한 뒷것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김민기는 보여줬다. 가난해도 작품을 통해 세상을 말하는 예술가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돈벌이의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농사를 짓는 농부들 같은 존재들이 있다는 것. 김민기는 그런 이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삶 전체로 우리에게 전했다. (글:시사저널, 사진:SBS)

불안사회와 러브 유어셀프

인사이드 아웃2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의 누적관객수가 745만명(13일 기준)을 넘어섰다. 국내 개봉 픽사 애니메이션 최다 관객을 동원했던(724만 명) ‘엘리멘탈’의 기록을 깬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 흥행이 끝이 아니라고 예상한다. 800만 혹은 900만 관객 기록도 충분히 낼 수 있는 장기 흥행의 예감을 보이고 있어서다. 

 

사실 ‘인사이드 아웃2’는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해도 시즌1에 비해 아쉽다는 평단의 평가들이 나왔다. 라일리라는 인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 캐릭터들의 모험을 다룬다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워낙 돋보였던 작품인데다, 기쁨이, 슬픔이는 물론이고 빙봉이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었다. 그러니 워낙 신선했던 첫 충격의 잔상이 그만큼 커서 시즌2에 대한 아쉬움을 만들었을 게다. 게다가 어린 라일리에서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는 아이들 애니메이션치고는 조금 어렵다는 평가들도 나왔다. 인물의 내면 감정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이들이 보기에 쉬운 내용이라 보긴 어렵다. 그런데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기존 감정들만이 아니라 새롭게 생겨난 불안, 부럽, 따분, 당황 같은 감정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감정 제어 본부를 두고 벌어지는 쟁탈전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이드 아웃2’는 아이들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어울리는 작품에 가까웠다. 이러한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아웃2’가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얻게 된 건, ‘불안’이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그려낸 서사가 우리네 사회현실과 맞물리면서 생겨난 신드롬에 가깝다. 작품 내적인 힘만이 아니라, 작품 외적인 힘이 작용했다는 것인데, 이른바 ‘불안사회’라고 불러도 될 법한 한국사회의 현실이 이 작품에 대한 남다른 반응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2’에서 라일리는 사춘기 소녀로 성장해 자신이 동경하는 고등학교 명문 하키팀에 들어가고 싶어하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성장통으로 등장하는 감정이 바로 ‘불안’이다. 혹여나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라일리를 더욱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즉 이 불안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불안이 과도해지면서 생겨나는 부작용들이다. 불안에 잠식당한 라일리는 자신의 성취를 위해 친했던 친구들을 등한시하거나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해버리는 부정적인 일들도 저지른다. 또한 불안과 함께 등장한 캐릭터인 부러움 같은 감정도 이러한 라일리의 불안을 더욱 부추긴다. 불안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건 자신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 역시 과도해지면 시기나 좌절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불안이나 부러움 같은 새로운 감정들이 야기하는 부정적인 느낌은 과거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들이 만들어 놓았던 긍정적인 느낌들과 부딪쳐 내적 갈등을 만들어낸다. 기존 감정들이 만들었던 자아가 끊임없이 라일리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속삭일 때, 불안 같은 감정들이 만든 새로운 자아는 ‘난 아직 부족해’라고 말한다. 이 상반된 두 감정이 맞부딪치면서 결국 라일리는 패닉 상태에 빠져든다. 무엇 하나 제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서사는 우리네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는 불안 정서를 건드리면서 이 작품에 보다 깊게 공감하게 만든다. 패닉 상태에 빠진 불안이를 기쁨이 같은 다른 감정 캐릭터들이 꼭 껴안아주며 ‘괜찮다’고 보듬어주는 장면은 그래서 놀랍게도 우리네 관객들(특히 성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건 라일리의 상황이 바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각자도생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들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공감 때문이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렇게 힘들고 외롭다고 여겨질 때 적어도 우리 안에는 우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마운 존재들인 감정들이 있었다는 뭉클한 인식 때문이다. 

 

우리네 사회의 압축성장 과정을 들여다 보면, 바로 이 불안을 부추기는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강력한 동력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경쟁에서 떨어지면 낙오하게 된다는 불안감은 우리를 끊임없이 채찍질함으로써 그 짧은 기간 안에 그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뤄낸 힘을 만들었던 거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결국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고 채찍질하는 자기 희생들이 담보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을 이뤄냈지만, 그 만만찮은 후유증들이 우리 앞에 놓였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건 양극화로 인해 누군가는 부유해졌지만 여전히 그렇지 못한 이들이 갖는 불안과 좌절의 감정들이다. 그건 비뚤어진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사회는 자꾸만 그걸 개인의 부족함으로 밀어낸다. 당신이 성장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난 아직 부족해’라는 라일리 내면의 목소리는 그래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 울려퍼지고 있다. 

 

‘토닥토닥!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최근 픽사에서 한국관객들을 위해 제작 공개한 스페셜 아트에는 ‘인사이드 아웃2’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인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당황, 따분, 부럽이 불안 캐릭터를 꼭 껴안아주는 장면과 함께 그런 카피가 더해졌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거나, 성공하기 위해 끊없이 나의 부족을 찾아내고 채찍질해온 우리들에게 그 카피는 말하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너로 충분하다고.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의 청춘들을 공감시켰던 메시지가 바로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것 역시 우리네 불안사회가 야기한 우리 스스로를 그냥 놔두지 않게 된 현실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불안사회를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회로 나가는 길. 그건 어쩌면 압축성장 이후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후유증이 해결해야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글:이데일리, 사진:영화'인사이드 아웃2')

지배종

 

지난 1월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2부작으로 방송된 ‘지속 가능한 지구는 없다’는 환경 위기의 문제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다룬 다큐멘터리다. 2부 ‘재활용 식민지’편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로 불법 수출(?)되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다뤘다. 값싼 플라스틱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해 시멘트를 만들고 두부를 생산하는 공장을 16살 환경운동가 니나가 방문해 그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이 담겼다. 값이 싸다는 이유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하지만, 그래서 쌓인 쓰레기들과 유해한 가스들은 인도네시아의 환경을 급속도로 오염시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니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어디서 온 것인가를 확인하는데, 미국, 유럽, 호주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간 쓰레기들도 쏟아져 나온다. 

 

썩지 않는데다 태워도 유해가스가 나오는 플라스틱이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플라스틱 재활용이 유일한 대안처럼 제시됐고 분리수거만 잘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OECD에 의하면 전체 플라스틱 쓰레기의 약 9%만이 재활용되고 19%는 소각되며 50%는 매립되고 22%는 통제를 벗어나 자연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니 유일한 대안은 사실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일이다. 인도네시아의 니나가 자국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채워지는 걸 전세계에 폭로하고 환경운동에 앞장서는 이유다. 

 

하지만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전 지구적인 위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고, 또 그것이 지구를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만들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이를 바꾸지 못할까. 거기에는 플라스틱에 의존해 흘러온 기존 산업들이 만만찮은 장벽으로 등장한다. 당장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선택으로 플라스틱을 전면 금지하거나 쓰지 않게 되면 이들 산업들은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니지만 ‘친환경’을 실천하고 있다는 식의 위장전술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이 갖게 되는 죄책감을 친환경 제품이라는 마크를 붙이거나, 재활용에 앞장서는 친환경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더해 상쇄시킨다. 소비자들 역시 늘 해왔던 습관대로 소비하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구나 다 이대로 가면 위기가 닥친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 변화에 다양한 이익과 손실들이 부딪치며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지배종’은 어째서 세상을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가를 그 포스터에 담긴 문구 한 줄로 표현한다. ‘세상을 바꾼 자. 모두의 표적이 되다’가 그것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인공 배양육의 시대를 연 생명공학기업 BF(Blood Free)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드라마는 인공 배양육이 왜 필요한가를 설득하는 BF 대표 윤자유(한효주)의 사업설명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고기를 소비하지만, 그 고기를 위해 무수한 소들이 사육되고 도축된다는 걸 마치 없는 사실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윤자유는 그 과정을 눈앞에서 입체영상으로 보여주면서 환경 오염 문제나, 생명 윤리의 문제 같은 것들을 인공 배양육이 필요한 이유로 제시한다. 기업의 이름처럼 피(희생) 없이 생산된 고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대.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친환경’이라는 포장지를 덧씌움으로써 소비의 죄의식을 상쇄시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플라스틱의 사례처럼, 인공 배양육도 일종의 기만술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들이 제기된다. 인공 배양육이 세균덩어리라는 소문이 떠돈다. 또한 윤자유가 사업설명을 하는 연회장 바깥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든 피켓에는 ‘살인기업 BF 각성하라’라는 글귀와 더불어 ‘축산 다음 타깃은 어디?’라는 문구도 보인다. ‘식량을 위한 피’를 보지 않겠다고 주창하는 인공 배양육을 내놓은 생명공학기업에게 ‘살인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공 배양육의 탄생은 축산업자들의 도산으로 이어질거라는 것. 이처럼 세상을 바꾸려하는 일에는 만만찮은 반발과 도전이 이어진다는 걸 ‘지배종’은 보여준다. 플라스틱을 쓰지 말자고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뒤져 그 출처를 밝히고 그 불법적인 일들을 폭로하는 16살 소녀 니나의 외침은 너무나 합당하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 맞은 편에는 플라스틱을 사용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는 전 세계의 기업들이 서 있다. 그들은 소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그래서 심지어 이를 막기 위한 일들도 서슴지 않는다. 

 

변화에는 반발이 따른다. 이건 ‘지배종’을 쓴 이수연 작가가 지금껏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그려온 세계의 역학이다. ‘비밀의 숲’이 검찰의 부패를 척결하고 그 조직을 개혁하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세력과의 대결을 그렸다면, ‘라이프’는 병원에 대한 두 관점, 즉 생명을 다루는 곳이면서 자본의 논리에서 경영되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두 관점을 대변하는 세력의 대결을 그렸다. ‘지배종’ 역시 인공 배양육이라는 근미래에 화두로 대두될 수 있는 문제를 가져와 생명윤리와 환경문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 이면에 놓여진 기득권자와 새로운 세력 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사실 정치가 요구되는 건 바로 이러한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과 분쟁들을 대화와 타협으로 이끌어내는 일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보수와 진보는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과 이를 원치 않는 자들 사이의 대결구도로 등장한다. 물론 보수든 진보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고 어떤 타협점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편가르기를 통해 상대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려 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또 그 과정은 당연히 어려워야 한다. 정쟁이 아닌 진짜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다. 총선이 끝나고 민심이 드러난 현재, 국민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것이다. (글:이데일리,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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