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들 사투리에 푹 빠진 이유

소년시대

“아오, 환장하겄네. 진짜..”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소년시대>에는 찰진 충청도 사투리가 드라마 전체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온양에서 늘 맞고만 지내던 장병태(임시완)가 부여농고로 전학오면서, 전설의 싸움꾼 ‘아산 백호’로 오인받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는데, 마치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라도 된 듯 어색하게 허세를 부리는 이 인물이 페이소스 가득한 웃음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도드라지는 건 특유의 해학 가득한 충청도 사투리다. 학원 액션물로서 학교폭력이 일상이었던 1989년 어두운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드라마를 밝게 만들어주고 나아가 코미디의 웃음이 피어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충청도 사투리다. 두드려 맞으면서도 어딘가 여유가 느껴지고, 센 척 하면서도 허술함이 느껴지는 충청도 사투리의 맛이 드라마의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 때 정확한 언어 전달이 최우선이었던 시절에 사투리는 방송에서는 피해야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정확한 발음을 요구하는 아나운서 같은 직업에 사투리는 진입장벽이 되기도 했다. 물론 간간히 전원드라마에서 사투리가 등장하곤 했지만 그것도 너무 심해 알아듣기 어려운 수준의 사투리는 피하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사투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드라마들이 늘고 있는 것. 최근 방영된 드라마만 해도 <소년시대>를 비롯해 <웰컴투 삼달리>, <모래에도 꽃이 핀다>, <무인도의 디바>가 모두 유창한 지역 사투리들로 채워졌다. 지역도 다채로워서 <소년시대>가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면, <웰컴투 삼달리>는 제주 사투리를, <모래에도 꽃이 핀다>는 경상도 사투리를 또 <무인도의 디바>는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최근 드라마들만 해도 강원도 빼고 거의 전 지역의 사투리가 TV를 통해 흘러나온 셈이다. 

 

그런데 지역 사투리는 그냥 쓰인 게 아니고 그 작품의 색깔과 어우러져 특유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소년시대>의 충청도 사투리는 특유의 해학적 어감으로 최양락이나 김학래 같은 개그맨들이 개그 소재로 자주 사용했을 정도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만큼 코미디에 착착 붙는다는 뜻이다. <웰컴투 삼달리>의 제주 사투리는 해녀들의 풍진 삶을 대변하듯 지역 특유의 정감과 더불어 억센 삶과 비감이 뒤섞인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조삼달(신혜선)의 엄마가 해녀로 등장하고 그 세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억센 제주 사투리와 잘 어우러진 이유다.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 등장하는 경상도 사투리는 이미 <응답하라 1997>에서부터 쿨한 멜로의 정서를 잘 드러내는 사투리로 자리잡았다. 경상도 특유의 퉁명스러운 사투리의 어조는 이른바 ‘츤데레’라고 불리는 무심한 듯 다정한 사랑표현에 적합하게 활용되곤 했다. 또 <무인도의 디바>에 쓰인 전라도 사투리 역시 투박하지만 시골 정서를 가득 품은 서목하(박은빈)라는 캐릭터의 도시와는 다른 정감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이처럼 사투리를 써야만 하는 지역 기반의 드라마들이 많아지면서 이를 구사해야 하는 배우들의 자세도 달라졌다. 그저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라 드라마의 정서를 대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들은 사투리를 익히는데 공을 들인다. 박은빈은 그래서 캐스팅 이후 사투리 선생님과 함께 하며 말을 익혔다고 했고, 임시완은 부산 출신이지만 정서까지 담아내는 사투리를 준비해와 감독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모래에도 꽃이 핀다>의 주연배우인 장동윤은 대구 출신이고 상대역인 이주명 역시 부산 출신이라 아예 드라마와 맞춤인 경우도 적지 않다. 아예 해당 지역 출신 배우를 캐스팅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 사투리가 이렇게 드라마에 많아지는 건, 역으로 보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 청춘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들이고, 이들 드라마에는 도시의 경쟁적인 삶에서 밀려나 지역으로 내려온 청춘들이 적지 않다. 소외되고 상처받은 청춘들에게 지역은 이제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때론 소진된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곳으로 그려지곤 한다. 물론 실제 현실에도 도시를 떠나 지역으로 향하는 청년들이 생겨나곤 있지만 그게 하나의 흐름이라고 보긴 어렵다. 따라서 드라마가 그리는 건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판타지로서의 지역이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간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다양한 지역들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거기에 서울 중심의 표준어를 벗어나 지역 정감을 살리는 사투리가 전면에 배치되는 건 문화 다양성 차원에서만 봐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그만큼 많이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고, 그것이 도시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반복하면서 드라마 자체의 다양성도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역으로 가는 드라마들의 등장은 더 다채로운 이야기와 소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한 국가 안에서는 도시와 지역 간의 문제지만, 글로벌 콘텐츠 시장 안에서는 미국 할리우드 중심의 콘텐츠들과 변방으로 여겨진 아시아권이나 유럽, 남미의 콘텐츠들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글로벌 OTT가 콘텐츠 소비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떠오르면서, 콘텐츠 시장 역시 영어권 중심만으로는 그 다양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K콘텐츠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담은 콘텐츠들이 생산되어 시장 안에 들어서게 됐다. 애플이 1천억원을 들여 제작한 <파친코> 같은 작품은 단적인 사례다. 재일한인들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애플이 투자한 드라마지만, 한국인의 문화와 더불어 경상도, 제주도 사투리는 물론이고 당대의 재일한인 특유의 어투까지 고증을 통해 재현해내는 노력을 선보였다. 이런 노력이 결국 한국 고유의 진한 정서를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세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사투리는 이제 더 이상 변방의 언어가 아니다. 콘텐츠를 통해 그 다양한 목소리들이 되살아나고 있으니 말이다. (글:이데일리, 사진:쿠팡플레이)

<서울의 봄>이 불러온 봄날의 훈풍이 계속 불려면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이 1천만 관객을 넘겼다. 혹자들은 ‘영화의 봄’이 다시 오는 게 아니냐는 기대의 목소리를 내놓는다. 그리고 은근히 이 봄기운이 <노량:죽음의 바다>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눈치다. <명량>이 무려 1천7백만 관객을 넘겼고, <한산> 역시 7백20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노량>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여기에 <서울의 봄>이 불러온 모처럼만의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봄날의 훈풍까지 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울의 봄>이 개봉하기 전까지만 해도 극장가는 침통한 분위기였다. 엔데믹에 비대면이 풀렸지만 올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의 성적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류승완 감독의 <밀수>가 5백만 관객을 넘기며 그나마 체면을 차렸을 뿐, 하정우, 주지훈 주연의 <비공식작전>도 또 설경구 도경수 주연에 김용화 감독이 연출한 <더 문>은 재앙에 가까운 참패를 경험했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로 달을 배경으로 한 우주 소재의 SF를 시도했던 <더 문>은 그 창대한 시도와는 너무나 초라한 50만 관객이라는 성적표를 받으며 무너져 내렸다. 

 

추석 시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동원 주연의 <천박사 퇴마 연구소>가 190만 관객으로 그나마 선전했고,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이 1백만을 그리고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은 겨우 31만 관객을 동원했다. <1947 보스톤>이야 2020년 제작됐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묵혀졌다 나온 이른바 ‘창고영화’라 그 시의성 차이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송강호,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 등 호화캐스팅을 했고 평단의 반응도 좋았던 <거미집>의 흥행 참패는 아쉬운 지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극장가는 ‘겨울이 왔다’고 말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그건 코로나19를 겪으며 비대면 상황이 지속되면서 OTT가 대안적인 영화 소비 플랫폼으로 떠오르는 환경 변화가 만들어낸 위기였다. 그러다 갑자기 엔데믹으로 극장가가 열리게 되면서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영화들이 픽픽 쓰러져 나간 것이었다.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관객들은 영화에 묻기 시작했다. 그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영화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이전 호황기 시절의 영화는 멀티플렉스와 공조하며 천만영화를 심지어 만들어냈다. 적당한 블록버스터의 재미를 적당한 타이밍(여름방학 시즌이나 추석 대목 같은)에 멀티플렉스를 통한 스크린수 융단폭격을 하면 충분히 천만영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관객들이 극장에 가는 것이 중요한 여가로 자리잡혔을 시절의 이야기다. 하지만 비대면 시절을 겪으며 관객들은 알게 되었다. 집에서 OTT에 가입해 영화 한 편 정도의 비용으로 한달 구독료를 내면 한달 내내 다양한 영화들과 드라마들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이런 분위기니 개봉 전부터 ‘잘 빠졌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서울의 봄> 역시 흥행을 자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애초 목표는 천만이 아닌(누가 감히 천만을 운운할 수 있는 시절인가!) 4백만을 목표로 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걸 성공으로 세워뒀다는 것이다. 4백만도 어렵다는 업계 이야기들은 영화의 홍보 마케팅에 전력투구를 하게 만들었다. 영화 시작 몇 달 전부터 <서울의 봄>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고, 그래서 심지어 이미 개봉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이미 영화의 홍보가 충분히 이뤄진 상태에서 기자시사회가 열렸다. 호평이 쏟아졌다.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영화가 개봉됐고, 기다렸다는 듯이 극장에 몰려간 관객들은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영화는 4백만을 넘기더니 신드롬처럼 성적에 속도가 붙었다.  

 

<서울의 봄>이 성공한 건 먼저 당연하게도 영화가 좋았기 때문이다. 12.12 군사쿠데타라는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가져왔지만, 그 날 벌어진 사건들을 여러 인물들의 끝없는 선택과 갈등의 상황으로 그려냈다. 그래서 굉장한 액션 신은 많지 않았지만,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을 순삭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선택이 훗날 신군부를 등장시키고 그래서 80년 광주의 비극과 그 후로 꽤 오래 지속되는 암울한 시대를 야기했다는 메시지에 당대를 살았던 기성세대들은 물론이고 현재의 젊은 세대들까지 공감했다. 역사가 결국 여러 사람의 선택들의 총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걸 그 하루를 담은 사건을 통해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탄탄한 완성도를 가진 데다, 코로나 이후 달라진 영화 소비 방식 속에서도 굳이 극장에 가야할 이유를 주는 몰입감과 긴박감, 여기에 공격적인 홍보마케팅이 힘을 실어 준 ‘누구나 꼭 봐야할 것 같은’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서울의 봄>은 ‘영화의 봄’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등극했다. 

 

물론 <서울의 봄>이 영화계에 만들어낸 기대감은 좋은 일이고 또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금의 달라진 영화 소비 방식에 걸맞는 작품이었고, 그걸 효과적으로 알리는 노력들을 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이 영화가 천만관객을 돌파할 것인가를 두고 섣부른 기대들을 여기저기 내놓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시 천만관객의 시대로 회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닐게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천만이 아닌 중소규모지만 완성도 높은 작품을 지향하는 가성비 있는 기획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처럼, 콘텐츠의 새로운 시대는 거기에 맞는 새로운 소재와 형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변화된 환경을 깊이있게 들여다보고 과거의 관성들을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봄이 올 것만 같았던 기대가 냉혹한 겨울로 돌아설 수 있으니 말이다. 장기 군부독재가 사라지고 봄이 도래할 것 같은 기대를 가졌지만 신군부라는 더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게 됐던 것처럼. (사진:영화'서울의 봄', 이 글은 이데일리 칼럼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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